가자! 집 나간 고양이 찾으러!
"부탁할 게 있어서 왔다!"
"금...금손아?"
미호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물의 정점에 이른 현무의 앞에 금손은 아기나 다름없었다.
손짓 한 번에 존재가 지워질 수도 있는 힘의 격차.
"허허허... 무엇이냐?`
하지만 현무가 화는커녕 인자하게 금손을 바라보았다. 마치 노인이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따스한 눈빛.
"미호에게 이 냉해를 멈출 수 있다고 들었다."
"그 말이 맞다. 사신 중 둘이 힘을 합친다면 멈출 수 있단다."
"정말이냐? 그럼..."
"하지만. 우리가 그럴 의무는 없지. 이 또한 자연의 이치이니."
현무의 단호한 말에 금손은 기죽지 않고 오히려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현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탁이야. 내 소중한 사람이 위험해. 들어주면 뭐든 할게."
"어허! 영물 간의 말은 여러 번 생각하고 그 무게를 조심해야 한다."
현무가 금손을 꾸짖자 대기에 있던 수분이 순간 진동하면서 숲에 있는 모든 새들이 놀라 일제히 위로 날아올랐다.
`역시 물의 지배자...`
미호가 순간 감탄하며 금손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그런데 자신보다 어린 금손이 오히려 의연하게 현무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알고 있어. 진심이야."
"허허허..."
현무는 몇천 년을 살아온 자신의 앞에서 당돌하게 눈을 마주치는 금손을 보며 젊은이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패기를 느꼈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작은 시험이자 심술이었을 뿐. 하지만 이것으로 족하지 않다. 가장 확실하게 확인하는 방법을 현무는 가지고 있었다.
"아이야. 너의 기억을 보여주겠니."
"기억?"
"현무님은 기억도 다룰 수 있어. 보통 물만을 다룬다고 알려져서 영물들도 잘 몰라."
"물론이야. 얼마든지 봐."
"이리 오너라."
금손이 현무의 앞에 섰다. 자신이 키울 수 있는 만큼 제일 크게 키운 몸이지만 현무 머리의 반도 오지 못하는 크기.
현무가 잠깐 사이에 금손의 기억을 읽어내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흥미롭구나."
"정말? 그럼 도와줄 거야?"
"대신 조건이 있다. 왕의 이름으로 우리가 머물 땅을 주고 우리를 귀찮게 하지 않아야 한다. 네가 책임질 수 있겠느냐?"
"물론이지!"
좋아하는 금손을 보며 손자의 재롱을 보는 할아버지처럼 현무의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갔다.
사실 저런 조건 따위 아무 상관 없었다. 그저 이 아이를 가엾게 여겨 도와줄 핑계를 찾았을 뿐.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너무 오래 걸리니. 내 친우인 백호도 네가 설득해야 한다."
"할 수 있어! 저번에 들은 말이 있었는데? 천리길도...그."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옆에서 미호가 대신 말해주자 금손이 고맙다고 미호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럼 이리로 불러 주마."
현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센 바람이 불더니 이내 하나의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현무보다는 좀 작지만 하얀 몸체에 검은 줄무늬를 가진 백호가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무여. 무슨 일인가?"
"내 기억을 전해주지."
현무가 지금껏 있었던 일을 모두 전해주자 백호의 고개가 금손을 향해 끼이익 돌아갔다.
처음부터 호감이 느껴졌던 현무와는 전혀 다르게 철없는 애송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금손을 내려다본다.
"에잉...아직 어려서 그래! 백 년만 지나면 다 부질없이 사라질 인간들이다. 잊어버려!"
백호의 노성에 바람이 호응하며 회오리친다. 금손은 재빨리 미호를 자신의 품에 안고는 발톱을 땅에 깊숙이 박아가며 간신히 버텼다.
"킁..그래도 요즘 것들과 달리 기본은 돼 있구먼."
백호는 금손이 미호를 지키는 모습을 보면서 콧소리를 내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현무의 옆에 배를 깔고 누웠다.
"친우여, 고작 이런 일로 나를 불렀나?"
"허허...귀엽지 않은가? 자네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어차피 여기서 수십 년을 보내야 하는 데 편하게 지내면 좋지 않겠나?"
"에잉! 내가 자네 생각을 모를 줄 알고?"
백호가 혀를 찼다. 다른 사방신은 너무 물러서 문제다.
"도와...줘라..."
금손이 눈조차 뜨기 힘든 맹풍에도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떨어지는 백호의 말.
"돌아가라."
백호의 의지에 따라 바람은 매몰차게 금손과 미호를 휘감아 저 멀리 날려 보냈다.
"이제 오지 않을 거야."
전력으로 뛰어도 하루 정도는 걸릴 곳으로 보냈다.
"글쎄...과연 그럴까? 자네야말로 요즘 젊은이들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닌가?"
?
백호의 말에 현무가 자신의 친우를 보며 씨익 웃었다.
?
현무의 예상대로 반나절이 채 지나지도 않아 금손은 백호에게 다시 도착했다.
얼마나 빨리 뛰었는지 숨을 헐떡이며 몸 곳곳에 나뭇가지가 엉켜 있었다.
"그래봤자 소용없다."
백호의 발짓 한 번에 다시 왔던 곳으로 허무하게 되돌아가버린다.
하지만 어김없이 다시 돌아온 금손. 심지어는 그새 지름길을 찾았는지 더 일찍 도착했다.
그렇게 몇 달을 반복하자 질려버린 백호가 이번에는 심술궂은 시험을 내기 시작했다.
"온몸이 황금으로 이루어진 잉어를 찾아와라. 그럼, 생각은 해보지."
그렇게 1년.
"흥! 그 정도로 힘들다고 티를 내? 나 때는 말이야..."
2년.
"노력이 부족하다! 조금 더 빨리하지 못해?"
3년.
"킁! 그래도 요즘 것들과 다르게 싹수는 조금 푸르구나!"
4년.
"음···. 나름 열심히 하는 것 같기도 하구나."
5년.
"...제법이구나."
이제 백호가 금손을 바라보는 눈빛은 처음과 달랐다.
"이제 심술 그만 부리고 해주세나."
"크흠! 내가 언제 심술을 부렸다고 그러나? 자네도 말이 참.."
백호가 친구의 말에 무안한지 헛기침을 했다.
"백호님께서는 심술이 아니라 가르침을 주신 거죠. 처음과 달리 늠름해진 저 이의 모습 좀 보세요."
금손이 나가 있는 동안 미호도 가만있지 않고 은근히 백호의 옆에 머물며 말동무를 해주며 그새 친분을 쌓았다.
"도와주면 은혜는 꼭 갚겠다."
5년간 시련을 거치면서 금손의 몸은 완전히 자랐고 오랜 시간 산과 들을 뛰어다니느라 근육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알겠다! 알겠어! 내가 졌다."
미호와 현무의 합공에 백호가 꼬리를 옆으로 탁탁 치며 5년의 시험에 금손이 통과했음을 알렸다.
"정말요? 꺄아아아"
미호가 막상 들어준다니 얼떨떨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금손을 놔두고 자기가 더 기뻐하며 백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감사해요. 백호님! 역시 바람이 주인 다우세요!"
"뭘...별 것도 아닌데..."
`혹시나 말을 바꾸기 전에 이렇게 못 박아 놔야 돼.`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는 얼굴과 달리 속마음은 과연 여우다운 미호였다.
"이것으로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제 세계에 닥친 추위는 사라질 것이다."
현무도 아예 거대한 몸을 움직이며 앞으로 나서며 재빨리 선포했다.
"고맙다."
"에잉! 저 반말은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구먼. 잘 가라, 어린놈."
금손이 절을 하자 백호는 투덜거리면서도 미호와 금손을 부드럽게 바람으로 감싸 왕궁 바로 앞으로 보내주었다.
"어...어?"
"백호님의 능력이야. 말은 그렇게 하셔도, 네가 정말 마음에 들었나 본데? 어서 들어가."
마침 딱 어둑한 밤이다. 금손은 익숙한 건물들을 지나쳐 숙종이 머무르는 건물에 도착했다.
`여전히 늦게까지 상소문을 읽고 있나? 몸은 좀 괜찮아졌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숙종의 처소에 들어선 금손.
`이게 무슨 냄새지?`
그런데 처음 금손을 반긴 건 쓰디쓴 약초의 냄새였다.
항상 푸근했던 방 안의 분위기는 왜인지 모르게 음산하고 살짝 소름이 돋았다.
"주상?"
"그 목소리는...금손이냐?"
쇠 긁는 소리와 함께 숙종이 기침을 하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너무 늦게 왔다. 내 잘못이다."
"아니다. 일은 잘되었느냐?"
금손이 바로 앞에 와 있음에도 숙종은 헛손질을 몇 번 한 후에야 금손을 안을 수 있었다.
숙종의 총명했던 눈에는 흰 안개가 끼었고 배는 볼록 튀어나왔으며, 얼굴에는 곳곳에 검버섯이 피어나 있었다.
오랜만에 금손의 따듯한 체온과 부드러운 털을 느낀 숙종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많이 컸구나. 고생했는지 근육도 붙었고."
"주상. 조금만 더 버텨라. 곧 따뜻해진다."
"쿨럭! 참 큰일을 해냈구나. 물론이다. 내 이 추위가 가신다면 책임지고 약속을 지키마. 이리 오너라. 오랜만에 같이 자자꾸나."
하지만 운명이 야속하게도 숙종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숙종은 금손이 돌아온 후 단 하루를 넘기고 58세의 나이, 총 재위 기간 46년의 나이로 승하하고 만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전 세계에 찾아왔던 소빙하기(小氷河期)도 1720년 사라졌다는 기록이 남았다.
* * *
"...여기까지예요. 그 후는 숙종의 죽음 때문에 금...아니 삼색이 따라 죽으려는 걸 현무님의 도움을 받아 기억을 지웠어요."
"음..."
카렌이 얘기를 다 듣고는 턱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뒷이야기가 있군.`
죽지 않은 삼색이 어떻게 역사에 기록되었으며 털 색은 왜 황금색에서 삼색으로 바뀌었을까.
지금까지의 얘기도 만약 드라마로 나왔으면 새드엔딩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겠지.
하지만 그보다 더, 어찌 보면 비극이라 불릴 과정은 미호가 말하지 않았을 거란 확신이 든다.
자신만이 간직한 아픔. 삼색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다.
?
`삼색 녀석...평생 갚아야겠는걸? 그러고 보니 녀석도 싫어하지는 않았으니까.`
정말 싫었다면 평소에 그렇게 미호에 대해 얘기를 많이 하진 않았겠지. 게다가 어제 미호와 헤어지기 전 삼색의 태도는...살짝 쑥스러움이 숨겨져 있었다.
카렌이 음료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미호를 다시 봤다.
`이건 어쩔 수 없군.`?
감히 미호를 찬다? 하긴 삼색 성격에 그러지도 못할 테지만...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버님?"
미호가 어느새 카렌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역시나 몇백 년을 산 덕에 자신의 표정을 숨기는 것에 능하다.
"일단 찾으러 가야지."
얘기를 듣다 보니까 규모가 너무 크다. 일단 녀석이 대책이 있나 물어는 봐야겠다. 그리고 살짝 심술이 나기도 했다.
"평소에나 이렇게 잘해보지. 괘씸해서 안 되겠다."
카렌이 세계를 구하는 일을 지겨워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녀석이다. 그것 때문에 말없이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꼴이 왠지 보기 싫다.
카렌이 몸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얘기를 듣느라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풀었다.
"제게 찾을 방법이 있어요"
카렌의 뒤를 따라 일어선 미호의 품에서 여우구슬이 뿅 하고 튀어나온다.
`능력도 좋네.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카렌은 생전 처음 발음해 보는 호칭에 익숙지 않은 혀를 잠시 풀고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가자 며느리. 집 나간 고양이 찾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