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하러 내가 왔다!
"그렇지!"
왕처럼 항상 정적이었던 금손의 일정에 중요한 변화가 생겨났다.
지금 저기서 박수를 치고 있는 미호와 함께 하는 달밤의 수련이다.
"눈을 감고 가장 원하는 걸 떠올려."
금손이 시킨 대로 눈을 질끈 감고 집중하자 미호가 옆에서 기특한 표정을 지으며 속삭였다.
"그렇지! 영물의 능력은 진심으로 원할 때 생기고 강해져. 왕을 지키고 싶어? 그럼 더 강하게 생각하고 갈구해!"
"끄으응..."
`처음에는 고통이 심할 거야.`
미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금손을 계속 지켜보았다.
금손이 원하는 능력은 일단 무력. 가장 얻기 쉬운 방법은 체급을 늘리는 거다. 하지만 몸집이 인위적으로 커지는데 부작용이 없을 리가 없다.
으드드득
?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금손의 눈에 흰자가 번뜩인다.
고통 때문에 입가에서는 거품이 살짝 일고 당장이라도 까무러칠 듯하다. 하지만 미호는 금손의 상태를 자세히 살피며 멈추지 않았다.
`오늘은 괜찮겠어.`
영물의 육체 능력이라면 아직은 버틸 수 있다.
처음에는 덩치 큰 개 정도가 한계였지만, 점점 커지더니 멧돼지를 넘어서 호랑이의 3배는 족히 되는 크기로 변할 수 있게 되었다.
"성공...했나?"
"그래! 잘했어. 네 몸을 직접 봐."
?
미호가 폴짝폴짝 뛰며 금손의 머리 위로 껑충 뛰어 오르고는 장하다는 듯 금손의 머리에 자기 뺨을 비볐다.
"이게 내 몸..."
지친 얼굴로 자기 몸을 내려다보자마자 금손은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작아지면서 맨바닥 위에 그대로 뻗었다.
"처음이라 그래.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야."
미호가 삐쭉 나와 있는 금손의 혀를 자기 발로 살짝 만지고는 옆에 나란히 누웠다.
"다 네 덕분이다. 고맙다."
"물고기를 잡아 준 보답이야. 그런데 평소에도 거슬렸는데···. 너 몇 살이야?"
"갑자기 그건 왜···? 먹을 만큼 먹었다!"
"아무리 먹어도 나보단 어리잖아. 왜 반말이야? 인간 세상에서 살고 있으면 인간의 법도를 따라야지. 누이라고 불러."
미호가 어서 해보라는 듯 꼬리로 부드럽게 금손의 등을 감쌌다.
"싫다."
"왜?"
"그냥 너나 미호라고 부르겠다. 그거 뭔가 싫다."
"그런 게..."
"그리고 이거 받아라."
금손이 자신의 털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보라색 바탕 중앙에 마치 붓으로 쓸고 지나간 듯한 흰색 무늬가 있는 보라색 제비꽃.
"어머?"
예상치 못한 선물에 미호가 감탄성을 터뜨렸다. 금손이 다가와 꽃을 살포시 미호의 머리 위에 달아 주었다.
"예쁘다! 고마워. 그런데 너, 보라색 제비꽃이 무슨 의미인 줄은 알아?"
미호가 자신의 모습을 연못에 비춰보고는 금손에게 말했다.
"응? 그런 것도 있냐? 그냥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준 거다. 하얀 털이랑 잘 어울려서 예쁘다."
금손의 말에 미호의 꼬리가 순간 크게 펄럭였다.
"한창 연하 주제에...나 간다."
앞부분은 들리지 않게 중얼거린 미호가 훌쩍 담장 위로 뛰어올랐다.
"응? 벌써 가? 내일 또 봐!"
"몰라. 그러든지."
새침하게 말을 툭 던지고 사라진 미호의 뒤로 금손도 살짝 볼을 붉히며 도망치듯 주상의 거처로 향했다.
시간은 화살같이 또 3년이 흘러 이제 금손은 완벽하게 자기 몸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발톱은 튼튼하고 날카로워졌으며 이제는 몸이 커질 때도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너는 왜 인간들이랑 어울려?"
"미호? 언제 왔냐?"
정원을 어슬렁거리던 금손은 어느새 연못 반대쪽에서 붕어를 입에 물고 있는 여우를 보며 오늘도 반갑게 인사했다.
처음에는 기척 없이 나타나서 놀랐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너 보러 온 거 아니거든? 여기 물고기가 맛있어."
미호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물고기 잘 잡는다?"
"으..응? 하다 보니 늘은 거지! 네가 오늘 늦게 와서 어쩔 수 없이 잡았거든?"
처음에는 괜히 연약한 척을 했던 미호가 괜히 무안해져 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금손이 멋쩍게 웃었다.
"응? 화났냐? 잘 잡으면 좋은 거 아닌가? 내가 있을 때는 꼭 잡아준다."
"그래야지!"
미호는 괜히 거칠게 물고기를 씹어 먹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누누이 말하지만 인간 조심해. 여기서만 살았던 너는 모르겠지만 바깥에서는 옛날과 달리 슬슬 영물들을 배척하고 있어."
"여기."
금손이 방금 잡아 던져 준 물고기를 미호가 낚아채고 한입에 삼켰다.
기분이 좋은지 미호의 꼬리들이 바람에 휘청이는 갈대처럼 살랑인다.
"얘기는 고맙지만 주상이 엄마를 구해주고 나를 키워준 은혜가 사라지진 않는다. 나쁜 인간도 있고 좋은 인간도 있는 거겠지."
금손이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재빨리 날카로운 발톱을 길게 늘여 유유히 헤엄치고 있던 붕어를 잡아챘다.
"너...갈수록 말 잘한다? 처음에는 에베베 거리던 녀석이."
"그래? 네 덕분이지. 맨날 여기 와서 놀아줬잖아. 넌 어여쁘고 마음도 곱다.
`어머, 어머.` 이제는 미호의 꼬리가 선풍기처럼 펄럭인다.
"너 꼬리..."
"이노오옴!"
금손이 그 모습을 보고 뭐라 말하려던 찰나 저 멀리서 발소리와 함께 김내관이 씩씩거리며 달려왔다.
"너 피해...이미 갔구나."
금손이 고개를 돌려보니 미호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감히 연못에 있는 잉어를 먹으면 어떡하느냐? 내 이번에야말로 주상께 너를 엄히 혼내시게 주청 드릴 것이다."
"..냐옹?"
"나한테는 안 통한다. 이놈아!"
`내가 다 안 먹었는데···.`
하지만 어떡하겠나. 같이 먹던 공범은 앙상한 물고기 뼈만 남긴 채 사라졌고 말은 할 수가 없는데.
`너. 주인은 몰라도 다른 인간한테는 말하면 절대 안 된다.`
미호가 해준 충고였다. 처음에는 미호가 좀 심하게 말했다 싶었지만, 금손도 궁정의 암투를 보다 보니 맞는 말이었다.
"가자!"
김내관이 금손을 품에 안고 발을 쿵쿵거리며 주상에게 가서 연못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고했다.
"허허, 사냥을 잘하는구나. 나가서도 굶어 죽지 않겠어."
"전하?"
"고양이가 물고기를 잡는 것이 뭐가 그리 잘못된 일이냐?"
"....."
"오늘은 모든 대신이 모이는 조참(朝參)이로구나 어서 가자꾸나."
"예. 전하."
숙종은 금손과 함께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신료를 접견하고 상소문을 추려낼 때도 금손은 옆에서 낮잠을 잤고, 마지막으로 대비에게 인사를 드리자 마침내 숙종의 긴 하루가 끝났다.
하지만 침소에 들어서도 숙종은 여전히 전국에서 올라 온 장계와 상소문을 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압"
왕의 이부자리에서 누워 있던 금손이 입을 쩌억 벌리며 하품을 했다.
"너도 졸린가 보구나. 먼저 자거라."
`확실히 주인의 안색이 많이 안 좋아졌어.`
숙종의 상태는 누가 봐도 병자였다. 거뭇거뭇한 잔영들이 눈 밑으로 그늘졌고 피부는 푸석했으며 흰머리가 확연히 늘어났다.
금손이 이불에서 나와 숙종의 다리를 밟고 책사에 올라가 숙종이 읽고 있는 것들을 보았다.
[추워진 냉해로 인해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 참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배고픔에 굶주리다 못 해 같은 인간을 먹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서로의 자식은 차마 먹지 못해 이웃의 아이를 삶아 먹고 있다고 하옵니다.]
[이제는 산천초목에 풀뿌리와 나무껍질조차 귀하옵니다.]
과연 숙종이 골머리를 앓을만한 내용들이었다.
"끔찍하지 않으냐? 다 짐의 부덕함에 하늘이 노한 것이다."
숙종이 금손의 털을 쓰다듬으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냉해가 들이닥친 지 벌써 21년째다.
처음에는 금방 1, 2년 그러다 말 줄 알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온 나라가 피폐해져 간다.
[네 주인의 수명은 빠르게 줄어가고 있어.]
순간 금손의 머리속에 미호가 해준 말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데, 임금의 건강이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질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일부 신하들은 청나라에게 구휼미를 청한 걸 수치스럽게 생각하는구나."
숙종이 금손에게 한탄하듯 상소들을 펼쳤다.
[오랑캐놈들에게 노미(虜米)를 요청하니 이런 치욕이 없사옵니다. 상국인 명나라를 볼 면목이 없는바, 당장 전하의 눈을 가리고 나라에 치욕을 안겨 준 최석정을 파직하소서.]
금손은 근 몇 년 사이에 팍 늙어버린 숙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러다간 주인이 죽고 말겠어.`
지금이 자신이 주상을 지킬 때라고 확신이 선다. 금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평소와 같은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아닌 또박또박한 인간의 말.
"내가 해결해줄 수 있다."
"음?"
숙종은 갑자기 금손에게서 들리는 목소리에 잠깐 멍해져 있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가 말한 것이냐?"
"맞다."
"허허...네가 보통 고양이는 아닌 것 같긴 했다만..."
"왜 놀라지 않냐?"
미호가 다른 인간에게 말을 하면 까무러치거나 심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었는데?
"평소에도 내 말을 모두 알아들었잖느냐. 무엇보다 네가 잘 때 잠꼬대로 몇 가지 단어를 말하더구나. 고기. 생선. 이렇게 말이다."
"......"
`모른척 했던거구나.`
말을 하는 고양이라...아마 신하들이 당장 죽여야 한다고 난리를 쳤을 거다. 그래서 숙종은 애써 못 들은 척 넘어갔다.
"그거 내가 해결해 보겠다."
"응? 네가 말이냐? 하늘이..."
"그거 주인이 잘못한 거 아니다. 내게 방법이 있다."
"그래 주겠느냐. 참으로 기특하구나. 만약 그렇다면 원하는 건 모든 들어주겠다."
다음날. 미호를 만난 금손은 지난 밤 했던 이야기와 부탁을 전했다.
"저번에 했던 그 얘기? 물론 그분들에게 소개는 해줄 수 있어. 마침 백호와 현무님은 이 땅에서 쉬고 있으니까. 그런데 과연 요청을 들어주실까?"
"내가 어떻게든 설득한다. 만나게만 해줘."
"좋아!
"
미호는 금손과 같이 여행을 다니며 온종일 붙어 다닐 생각에 냉큼 수락했다.
"가자!"
금손은 잠깐 주상이 있는 곳을 보고는 힘차게 궁을 나섰다.
"백호와 현무가 지금 이 땅에 있는 게 행운이야."
"그래? 원래는 어딨는데?"
"한곳에 머물지 않아. 오래 있으면 귀찮은 일에 휘말려서, 몇십 년씩 한 나라에 번갈아 가며 머물거든."
"다행이다. 그런데 정말 현무와 백호가 이 현상을 멈출 수 있을까?"
궁 밖은 아예 다른 세상이었다. 항상 정갈하고 단정한 복장이었던 인간들과 달리 한양에서 멀어질수록 보이는 광경은 처참했다.
`주상에게 올라가는 보고는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글로써 표현되지 않는 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어야 할 논과 밭은 말라비틀어졌으며 나뭇가지들은 앙상했다.
인간들의 눈동자에는 한 줄기 희망도 없었으며 오로지 죽을 날만 기다리는 듯했다.
"빨리 찾자."
"그래."
미호는 기존에 알던 영물들에게 물어물어 산속 깊은 곳에 은둔해 있던 현무와 백호를 찾아갔다.
"어린아이가 왔구나."
처음에는 거대한 바위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바위에서 초록색 발과 손이, 마지막으로는 둥그런 머리가 튀어나왔다.
크기도 그렇지만 머리에 밝게 빛나는 거대한 푸른색 뿔이 인상적이다. 과연 현무다운 생김새와 존재감.
그 앞에 금손이 당당히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부탁할 게 있어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