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1/140)

  이건 내가 나설 일이 아닌데?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저녁에 보자."

  엘리가 카렌에게 발랄하게 인사를 한 후 한길이 열어 준 문을 통해 대통령이나 탈 듯한 기다란 방탄 리무진에 탑승했다.

  만약을 대비해 똑같은 차량이 앞뒤로 한 대씩 위치하고 최소 10대의 차량이 근접 경호를, 나머지 예비 병력은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게 대기한다.

  [성녀님 탑승. 모든 인원 출발 준비.]

  [확인.]

  성전사들이 무전으로 전하자 오늘 방문할 공항으로 향하는 주요 포인트에서 대기하는 인원들이 경계 태세를 갖췄다.

  성자가 교황의 간계에 허무하게 당한 이후로 교단은 성녀의 경호를 옛날 일국의 대통령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호위가 따라붙지 않는 곳은 카렌의 근처밖에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심판관님이 못 막으면 자신들이 어떻게 막나?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고."

  한길을 필두로 성전사들이 일제히 카렌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떠나갔다.

  "꾸잉, 주인! 그럼 우리도 가자."

  엘리가 출근하기 무섭게 삼색이 카렌의 앞에서 방방 뛰었다.

  "알았다. 알았어. 출발하자."

  카렌이 삼색의 재촉 아래 차를 끌고 강남에 가서 예약해 둔 주차장에 차를 대었다.

  마침 주차장의 위치도 오늘 계약서를 작성할 회사의 맞은편이라 딱 좋았다.

  "저기다. 저거 봐라!"

  삼색이 회사 건물 외벽을 보고 감탄하며 가리켰다.

  비스트의 대표 로고인 하얀 털의 백호와 용머리와 거북이의 등껍질을 가지고 있는 현무가 외벽 전체에 그려져 있었다.

  "멋있긴 하네. 거의 예술작품인데?"

  카렌도 금방이라도 생동감 있게 튀어나올 것 같은 벽화를 보며 감탄했다.

  과연 강남의 제일 유명한 건물 중 하나가 될 만하다.

  "주인 이거 잡아라."

  삼색이 계약서를 챙기고 내릴 준비를 하는 카렌에게 자신의 길고 풍성한 꼬리를 불쑥 내밀었다.

  "...이건 왜?"

  먼지떨이처럼 눈앞에서 살랑이는 꼬리를 보며 카렌은 턱을 당기고, 얼굴을 뒤로 살짝 빼며 물었다.

  "이거 파란 인간들 많이 나오는 영화 보면 교감을 이렇게 한다. 이름이···. 아바 뭐였다."

  "...간다."

  역시 이 녀석이 100번 중의 99번은 말하는 영양가 없는 얘기다.

  카렌은 삼색의 꼬리를 손으로 찰싹 쳐내며 강이사가 준비해 준 귀찌를 귓불에 갖다 대었다.

  지이잉

  ?

  굳이 귀를 뚫지 않아도 귀찌가 알아서 크기를 조절해 귓불의 귀의 크기에 맞춰 밀착된다. 게다가 기능은 더 있다.

  [아! 아! 주인! 마이크 테스트! 나 이것도 꼭 해보고 싶었다. 하나, 둘, 셋! 마이크 테스트!]

  크기는 작지만, 이 귀찌는 그야말로 과학기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삼색의 목소리가 음파를 타고 정확히 카렌의 달팽이관으로 흘러 들어왔다.

  "작게 말해도 들리니까 좀 조용히 말해라."

  [알았다. 가기 전에 이거 한 번만 해주라. 응? 이번에는 꼬리가 아니라 손으로 할게.]

  지이잉

  삼색이 차 안에서 자신의 체형에 맞게 제작된 작은 헤드셋을 머리에 낀 채, 창문을 내리고는 자신의 앞발을 내밀었다.

  "내가 이걸 왜 한다고 그랬지."

  카렌이 입술을 잠깐 깨물면서 과거의 자신을 잠깐 원망했다.

  왜 이 요물이 안쓰러워 보였을까... 홀렸던 게 아닐까?

  "에휴..."

  이미 온 걸 어쩌겠나. 하기로 했으니 제대로 해야지. 카렌이 한숨을 푹 쉬고는 삼색의 앞발로 손을 가져갔다.

  "검지 손가락을 대라."

  "이거 그 자전거 타고 하늘 날아다니는 유명한 외계인 영화에서 나온 거 아냐?"

  푸른 인간들이 나오는 영화는 몰랐지만 이건 자신도 안다. 워낙 유명해야지.

  "크으! 바로 이거다. 주인 나 방금 뭔가 찌릿찌릿했다!"

  "그거, 네 털이랑 닿아서 일어난 정전기라고 하는 거다. 이 고양이 요물아."

  "..."

  "진짜 간다. 누가 볼지도 모르니까, 창문 올리고 있어."

  차의 창문이 완벽히 닫히자 창문이 불투명하게 바뀌면서 바깥에서는 전혀 안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만약 누가 차 안에 혼자 있는 고양이를 보고 신고하면 골치 아파서 얼마 전에 추가한 새로운 기능이다.

  [주인, 안경도 껴야지. 나도 바깥 보고 싶다.]

  "아 맞다."

  카렌이 슈트 상의 주머니에 꽂혀 있던 안경을 꺼냈다. 안경에 달린 조그마한 카메라를 통해 삼색도 카렌이 보고 있는 걸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잘 보인다! 그리고 오늘 주인 진짜 멋있다! 내 방송 이미지에 딱 맞다.]

  너무 밝지 않은 남색 계열의 슈트에 살짝 쇄골 윗부분이 드러난 하얀 브이넥. 그리고 깔끔한 흰색 운동화.

  거기다 거리에 흔치 않은 은발에 카렌 특유의 차갑고도 여유로운 이미지까지 합쳐지자 모든 게 환상적으로 조화를 이뤘다.

  "이게 네 이미지라고? 맨날 소파에서 뒹굴던 녀석이 무슨 소리야. 살이나 빼고 거짓말하시지?"

  카렌이 주변이 눈치채지 못하게 입을 살짝 벌리고 말했다. 이렇게 말해도 저 녀석한테 다 들리는 데다가, 지금 길 위의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어서 이상한 행동을 하면 바로 들킨다.

  "연예인인가?"

  "피부 봐. 화장도 안 한 것 같은데, 저렇게 생길 수 있구나."

  "진짜 잘생겼네."

  모두 흘낏 흘깃 길을 걷는 카렌을 구경하고 있었다. 주위에서 느껴지는 시선과 쑥덕거림이 그저 귀찮았던 카렌은 빠르게 걸어 회사로 들어갔다.

  회사의 이름을 말하듯 로비에는 각종 동물의 그림과 동상들이 보인다.

  "비스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카...아니 삼색이다. 오늘 계약이 있어서 왔다."

  [그렇지! 주인은 오늘 하루 내가 되는 거다. 잘하고 있다!]

  `다신 안 한다.`

  카렌은 삼색의 말에 급격하게 정신적 피로가 밀려왔다. 옆에 있기만 활발한 녀석인데, 목소리가 직접 뇌로 들리니 감당이 안 된다.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엘리베이터 위에 9T라고 적힌 버튼을 누르시면 됩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엘리베이터에 타자 거울 겸 스크린에서 옛날 전래동화를 각색한 짧은 잠깐 시간 때우기 좋은 영상이 흘러나온다.

  "정말 동물을 좋아하는 회사인가 본데?"

  [강이사가 알아봤는데 동물 사업이랑 자선활동도 되게 많이 한다고 했다.]

  "사장이 그쪽에 관심이 많나 보네."

  [그런 걸 덕질이라고 한다.]

  그래, 그 덕질이라는 걸 돈 많은 회사를 가진 사장이 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그러고 보니 나도 숲 하나 만들고 싶긴 한데.`

  흔히 동화 속 배경이 되는 숲이 나오는 동영상을 보니 다시 떠올랐다.

  미치광이 박사를 잡으러 갈 때도, 엘리니아에 있을 때 느꼈던 숲의 공기가 참 맑았다. 집 근처에 있으면 좋을 텐데.

  `나도 진짜 늙어가나.`

  시대와 세계를 막론하고 나이가 들면 조용하고 공기가 맑은 걸 선호한다고 들었다.

  [띠링!]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

  "음?"

  카렌은 다른 세상으로 온 듯한 이질감에 잠시 멈춰서서 주변을 살폈다. 엘리베이터 밖의 세상은 마치 방금 자신이 원하던 숲속 같았다.

  숲 특유의 청량한 향기가 카렌을 감싸 안았고, 작은 종달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푸르른 꽃과 식물들로 가득 찬 화분들이 눈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왔어! 왔구나!"

  ?

  그런데 순수한 숲의 느낌과 어울리지 않게 카렌을 반겨주는 사장의 복장이 굉장히 자유롭다.

  일체형의 검은 드레스는 옆구리가 끈으로 매여 있어 개방감을 주었고, 갈라진 치마 사이로는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나 있었다.

  "응?"

  [뭐야? 주인, 아는 사람이야?]

  사장이 갑자기 카렌에게 달려들어 껴안자 삼색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카렌에게 물었다.

  `알 리가 있냐. 지구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벨리알로 가기 전에 만났나? 그럴 리가 없다. 그때 알았던 사람들은 최소 4, 50은 족히 넘었으니까. 이 눈앞의 사장의 외모는 아무리 봐도 30대를 넘지는 않아 보인다.

  "너무 그리웠어. 갑자기 나를 두고 그렇게 사라지면 어떡해? 너무해."

  [...주인. 그런 남자였냐? 역시 인간이란···.]

  `아니... 그런 게 아니라니까?`

  눈앞에 삼색의 경멸에 찬 얼굴이 둥둥 떠다니는 환상마저 보인다.

  사장의 첫인상은 차가운 도시 여자였다. 살짝 눈웃음치면 눈꼬리가 자연스럽게 살짝 올라가는 완벽한 고양이상 미인의 정점.

  게다가 흰 피부를 돋보이게 하는 입술에 발린 도발적인 레드 립은 찰떡같이 잘 어울려 그러한 이미지를 한층 더해준다. 하지만 지금은...

  부비적,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띄운 채 카렌의 가슴에 눈물이 살짝 고인 채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갑자기 두고 사라진 얘기랑 주인이랑 딱 들어맞는데? 대격변 때 차원 이동했잖냐.]

  카렌도 필사적으로 기억을 뒤져보고 있었다. 대부분 지구에서의 기억은 180년 동안 잊어버렸으니까.

  `확실해. 모르는 여자야.`

  대체 이 여자는 자신에게서 누굴 보고 있는 걸까. 거짓말 따위는 아니다. 악의나 부정적인 감정이 있었다면 카렌이 놓칠 리가 없었다.

  정말 순수한 반가움과 그리움. 그리고 약간의 원망이 가미된 귀여운 투정.

  "이제 갑자기 사라지지 마. 내가 너무 귀찮게 해서 그래? 그럼 가끔만 보자. 응?"

  여자의 고여있던 눈에 마침내 눈물이 넘쳐 또르르 흰 피부를 타고 날카로운 턱에 맺힌다.

  [주인이 드라마에나 나오는 쓰레기였다니···.]

  또 묵직하게 들어오는 싸늘한 삼색의 공격.

  앞에서 영화 속의 배우처럼 울고 있는 여자.

  카렌은 엘리니아에서 결전을 벌이고 빈혈 때문에 휘청였을 때보다 더 어지러웠다.

  "잠깐...저기 좀 앉지."

  카렌이 사장실 중앙에 놓여 있는 소파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아직 둔갑술이 익숙하지 않은가 봐? 누워도 돼. 내 허벅지 빌려줄까?"

  사장이 카렌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온몸을 카렌 쪽으로 기울였다.

  `잠깐...둔갑술은 뭐야?`

  그런데 뭔가 이상한 단어가 들리자 카렌이 되물었다.

  "둔갑술이라니?"

  "나는 인간보다 원래 네 모습이 더 좋아. 물론 잘생기긴 했는데...그런 애들은 너무 많이 봐서 좀 질리거든."

  사장은 뭐가 그리 얘기하고 싶은 게 많은지 옆에서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일단 카렌은 어긋난 첫 번째 단추부터 다시 꿰매기로 했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하는 일.

  "네 이름이 설화 맞지?"

  카렌이 오기 전에 살짝 훑어 본 계약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내 인간 세상 이름이야! 예쁘지? 나는 구미호니까 옛날 전설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인 설화(說話), 그 자체잖아."

  [어? 미호?]

  깜짝 놀란 삼색의 목소리와 구미호라는 이름. 혼란스러웠던 카렌의 머릿속이 맑아지며 빠르게 지금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삼색이 평소에 툭툭 던지던 말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자신을 좋다고 따라다니던 아이. 미혹하는 영물은 따로 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지금껏 친구라고 얘기하는 영물이 딱 하나밖에 없었다.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진다.

  `이거 애초에 내가 올 일이 아니었네.`

  [어...그러니까..주인? 아무래도..]

  "잠깐 실례하지."

  "응? 왜 그래? 이제 몸은 좀 괜찮아졌어?"

  카렌이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 가더니 구미호에게 안 들리게 낮은 목소리로 입을 가리고 이를 갈면서 삼색에게 말했다.

  "으드득, 너. 당장 튀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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