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60/140)

  역사와 설화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거세게 때려 봐라. 나는 돌덩이.]

  신년이 밝았다고 카렌의 일상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지금처럼 여전히 소파에 누워서 삼색과 같이 TV를 보는 일상. 오늘은 케이블임에도 최고 시청률 18%를 기록했던 저태원 클래스 보고 있었다.

  감옥에 갔다가 작은 가게부터 시작해서 성공하는 자수성가 스토리.

  "오오..."

  드라마에서는 위기에 빠졌던 순간에 딱 어울리는 OST와 함께 당당한 발걸음으로 등장하는 배우.

  [나는 홀로 빛나는 돌덩이. 부서지고 썩어버리는 섭리마저 거부하리.]

  묵직한 독백이 내레이션으로 깔린다. 마침내 배우가 주변의 시선을 받아내면서 선포한다.

  "오늘 우승하겠습니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노래와 알맞게 어우러진 마무리.

  [살아남은 나. 나는 다이아.]

  "크으으으~ 멋있다."

  삼색이 앞발로 물개박수를 치면서 카렌을 보자 주인도 심취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금이다.`

  삼색이 이 드라마를 주인이랑 보자고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주인. 주인도 다이아몬드가 되지 않겠냐?"

  "...뭔 수작이야."

  갑자기 은밀하게 속삭이는 삼색에게 카렌이 경계심이 한껏 담긴 눈빛을 보냈다.

  `이 녀석이 왜 이래?`

  사람이 갑자기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면 의심해봐야 한다. 하물며 사람도 아니라 이 요물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저번에 내가 좋은 소식 있다고 했잖아. 기억나?"

  "맞아. 연말에 그랬지. 너 혹시 피라미드 그림 그려진 곳 갔어? 그···. 뭐였더라?"

  "다단계 아니다! 누가 고양이한테 영업을...아니! 영물한테 그런 걸 하냐!"

  "하긴..."

  그것도 돈 나올 사람한테만 하는 거지. 그리고 이 녀석이 좀 맹해도 어디 가서 물어뜯으면 뜯었지, 사기당할 녀석은 아니다.

  "얘기해봐."

  별거 아닐 거라 생각했던 삼색의 얘기는 의외로 흥미롭고...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생산적이었다.

  "그러니까...나한테 너 대신 계약 미팅 자리에 나가라고?"

  삼색이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카렌의 앞에서 공손하게 앞 다리를 몸에 넣는 식빵 자세를 취하며 눈을 반짝였다.

  "주인... 한 번만 해주라. 응?"

  "네가...아니 넌 못 나가지."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인식이 바뀌었어도 사람말을 하는 고양이가 펜 들고 계약서에 사인하는 광경은 아직 이르다.

  "무슨 미팅인데? 일단 얘기나 좀 들어보자."

  카렌이 TV를 끄고는 딸기라떼를 한 모금 빨고는 느긋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이 요물 녀석이 쩔쩔매는 게 참 재밌다.

  `이럴 때 즐겨야지.`

  갈수록 능글맞게 변하는 녀석이 요즘 왠지 모르게 얄미웠다. 마침 딱 좋은 기회를 잡았다.

  "주인도 알다시피 내가 방송을 하잖냐."

  "그렇지. 그거 꽤 많이 본다고 했지."

  사람들은 뒤에서 사람이 연기하는 가상현실 캐릭터로 이 녀석을 알고 있다. 사실 그냥 고양이인데 말이다.

  "내가 방송 스트리밍 사이트 팔로워 수 탑 10안에 들었다."

  "....뭐?"

  순간 삼색이 한 말에 카렌은 먹던 음료를 뿜을 뻔하다가 재빨리 입술을 다물어 다시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음...`

  그리고는 삼색을 요리조리 뜯어 봤다. 아무리 고양이란 생물이 살쪄도 귀엽다지만 단순히 귀여움만으로 그렇게 할 수 있나?

  "왜?"

  "왜라니? 나 옛날에도 인기 많았다고 했잖아! 좋다고 따라다니는 얘도 있었다고!"

  카렌이 삼색의 헛소리는 무시하고 계속 살펴 봤지만, 도무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사로잡은 매력 포인트가 보이질 않는다.

  "내가 그쪽 세계는 잘 모르지만 쉽지는 않을 텐데?"

  "당연하지! 하루에도 수백 명, 수천 명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정글 같은 업계다."

  카렌조차 옛날부터 예체능이란 굶어 죽기 딱 좋은 지름길이라고 들었다. 게다가 그 정점에 놓인 방송은 어떻겠나.

  이번에는 카렌이 삼색을 무릎 위로 올려놓고 몸과 얼굴을 이리저리 쭈욱 잡아당겼다.

  ?

  맨날 봐서 그런가? 대체 이 녀석의 어딜 봐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주물러 보던 카렌은 끝내 찾지 못하고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그냥 고양이만 보면 좋아하는 게 아닐까? 아무 고양이나 데리고 방송해도···."

  "무슨 소리냐! 방송에 귀여운 인간들이나 동물들 캐릭터가 얼마나 많은데! 심지어 사막여우나 앵무새 같은 것도 나온다. 당연히 강아지나 고양이도 많고!"

  "세상이 말세야~ 요물이 인간도 홀리고."

  삼색이 발끈하자 카렌이 노인처럼 과장되게 한숨을 푹 쉬면서 앓는 소리와 함께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다 내 매력이다! 그리고 사람을 홀리는 영물은 따로 있다니까? 걔는 눈만 보면 할 수 있다."

  "그래, 그래. 근데 왜 나야? 딴 사람 많잖아?"

  얼굴이 알려진 채린이나 어린 엘리는 못 나가도 카페에서 일하는 직원들이나 저기서 밭일 하는 민재 녀석도 보인다.

  "주인이 제일 이미지에 맞는다."

  "내가?"

  카렌이 삼색의 대답이 궁금해서 다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영준이랑 친구는 나이가 좀 있고 민재는 너무 덩치가 크고 험악하게 생겼다. 내 도도하고 잘생긴 이미지에는 주인밖에 없다!"

  정말 오랜만에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카렌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며 삼색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이 녀석 위기 상황이 오면 다른 뭔가가 튀어나오나?`

  "아! 아!"

  카렌이 괜히 삼색의 목덜미를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살짝 당겼다. 역시나 이음새 같은 건 없다. 두툼한 살집이 잡히는 감촉이 자신이 알던 뚱냥이 녀석이 확실하다.

  "응? 저번에 얻은 소원권도 쓸게. 그렇다고 강제로 해달라는 건 아니다."

  카렌의 반응이 시원찮자 삼색의 귀와 꼬리가 축 늘어진다.

  `진짜 하고 싶나 보네.`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뭔가를 진심으로 부탁한 적은 처음이다.

  "무슨 광고인데 그래? 그리고 너 그거 10위 안에 들었으면 돈도 많이 벌겠네?"

  "응? 나 그걸로 수익 없다. 방송 중간에 광고도 안 넣어. 헌튜브도 안 올린다."

  삼색이 카렌이 묻자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이고 표정이 밝아졌다.

  "뭐? 아예 안 벌어?"

  "어차피 내가 벌어 봤자 주인 버는 돈 발끝에도 못 미칠 텐데 내가 귀찮게 왜 하냐. 주인이 그랬잖냐. 돈이 필요 없는데 왜 버냐고. 난 취미로 하는 거다."

  "...그거 맞네."

  처음으로 삼색에게 진 듯한 느낌.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다. 이 녀석의 인기 비결을 살짝 엿 본 것 같다.

  ?

  `정말 아무 욕심 없이 해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방송하는 거 살짝 들어보니까, 욕하는 시청자한테 같이 욕하던데.`

  딱히 다양한 욕은 아니었다. 그냥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인지, 인류애를 버린 욕의 방향이 특이해서 그렇지.

  "이번 광고도 돈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평소에 너무 하고 싶었던 광고다. 연합에서 유명한 헌터 장비를 파는 회사다."

  "다른 곳이랑 뭐가 다른데?

  "멋있다! 회사에서 내가 헌터 무기를 쓰고 싸우는 광고를 만들어준다!"

  참...단순하면서도 사심이 잔뜩 들어간 마음이다. 하긴 하고 싶은 거 하는 게 뭐가 나쁘냐.

  "내가 게임 속에 나오는 멋있는 투구를 쓰고 마법사처럼 손에서 불을 날리는 영상을 제작할 거다."

  삼색이 거실 중앙에서 이리저리 손을 휘두르고 두 손으로 장풍을 쏘는 자세를 취한다. 녀석의 눈은 이미 상상 속에 빠져 있는지 반쯤 몽롱해져 있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이건 해줘야겠네.`

  카렌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공기도 쐴 겸 밖으로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내가 받은 광고료도 모두 강이사한테 말해서 주인 재단에 넣어 둘게. 응?"

  "딱 한 번만 나가면 되지?"

  "맞다. 요즘은 다 온라인 계약으로 하는데 계약 조건에 회사 사장과의 만남이 포함되어 있다. 내 진짜 팬이라고 하더라. 이 몸의 인기란..."

  어깨를 으쓱이는 삼색의 꼴이 보기 싫었던 카렌이 못 이기는 척 말했다.

  "알겠어. 해줄게."

  "꾸잉! 좋다! 역시 주인이 최고다!"

  삼색이 신나서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집안을 뛰어다니는 `우다다`를 시전하자 카렌은 재빨리 소파 위로 발을 올렸다.

  저 상태의 삼색은 달리고 있는 자신조차 방향 전환을 못 해서 브레이크 망가진 트럭처럼 이리저리 부딪힌다.

  `저거 진짜 고양이 맞다니까.`

  본인은 아니라고 우기지만 고양이의 모든 습성을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최소 고양이에서 영물이 된 건 확실하다.

  "그런데 그 회사 이름이 뭐야?"

  "비스트다. 이름도 되게 멋있지 않냐? 물론 길드도 따로 있다."

  * * *

  [이설화 사장님. 말씀하신 스트리머 계약 일정 잡았습니다. 회사로 오겠다고 합니다.]

  메시지를 보고 긴 흑발에 눈처럼 하얗고 잡티 하나 없는 피부를 가지고 있는 여자의 눈꼬리가 기쁨으로 올라간다.

  [수고했어.]

  "보너스를 듬뿍 줘야겠어."

  설화의 기분은 얼마 전에 장비 납품 건을 가지고 대형길드랑 계약할 때보다 더 좋았다.

  두근, 두근

  오랜만에 심장이 거세게 뛴다. 아니, 사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설레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얼마 전에 우연히 보게 된 방송 때문이다.

  [꾸잉, 이런 귀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알고 보면 불쌍한 녀석들이야.]

  무섭기로 소문난 19금 공포게임을 능숙하게 진행해나가고 있는 삼색이라는 이름을 가진 스트리머.

  "...금손? 네가 왜 거깄어?"

  ?

  다른 시청자들은 당연히 가상 캐릭터로 알고 있지만, 설화는 얼굴을 본 순간부터 저게 캐릭터 따위가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설화가 순간 모니터 속으로 들어갈 기세로 얼굴을 갖다 대면서 뚫어지게 화면을 보았다.

  "맞아. 확실해."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금손이 맞다. 갑자기 행방불명 되어 지금껏 찾아왔던 조선 시대부터 이어진 오래된 인연이다.

  "어떡하면 좋을까."

  설화가 하얗고 가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치면서 생각에 잠겼다. 너무 반갑고 당연히 만나고 싶지만···.

  `억지로 위치를 알아내고 갑자기 찾아가면 싫어하겠지?`

  자연스러운 만남으로 유도해야 한다.

  "그렇지!"

  설화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회사의 입장에서 정식으로 요청하면 될 일이다. 마침 광고도 필요했고.

  금손도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지금껏 받지 않았던 광고를 수락하자 설화의 심장이 더 거세게 뛰었다.

  `그 동안 인간으로 변하는 둔갑술이라도 배운걸까? 우리는 뭔가로 이어져 있나 봐.`

  세간에서는 차가운 이미지로 유명한 비스트의 사장, 설화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다른 것도 불쑥 튀어 나왔다.

  "어머? 내가 많이 흥분하긴 했나 보네. 이런 실수도 하고."

  머리에는 털이 복슬복슬한 뾰족한 여우 귀 한 쌍이 뽈록 솟아 있었다.

  인간 세상에 알려진 이름은 이설화. 또 다른 이름으로는 구미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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