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9/140)

  나의 아저씨

  12월 31일. 교단에서 행사가 가장 활발할 이 시기에 연합 내의 교단 시설은 모두 일시적으로 폐쇄되었다.

  어떠한 예고도 없이 일어난 전례 없는 사건에 세상이 시끄러웠지만, 교단은 침묵했다. 하지만 외부와 달리 내부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 잡아들여라. 본단으로 이송한다."

  성녀의 지시 아래 절지아는 책임자가 되어 모든 교단 내 인물들의 숨겨둔 재산과 통화목록, 계좌까지 전부 조사하는 프로젝트 `정화`를 시작했다.

  "아냐! 나는 아냐!"

  대부분은 자포자기한 듯 얼굴을 숙이며 걸어 나왔지만 한 주교가 팔을 잡힌 채 성전사들에게 끌려가며 뭐가 그리 억울한지 절규했다.

  "그대들은 정식 재판을 받을 것이다. 죄의 경중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니 만약 죄가 가볍다면 두려워할 필요 없다."

  "나는 죄가 없어! 네놈들! 하찮은 성전사들이 감히 이럴 순 없다!"

  "허...?"

  성전사가 어이없이 주교를 바라보자 주교는 기세등등하게 이것 보라는 듯 소리쳤다.

  "증거! 증거를 가져와라! 나는 주교다! 너희 따위가 어딜 내 몸에 손을 대!"

  주교의 자신감은 이들이 절대 자신의 은닉 재산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실력이 확실한 뒷조직들을 통해 기부금을 세탁했었다.

  `흥! 성전사 따위가 찾아낼 리가 없지.`

  "증거? 너의 썩어 빠진 눈으로 이걸 봐라."

  성전사가 품에서 서류를 땅바닥에 집어 던지고는 주교의 머리를 잡아 밑으로 끌어 내렸다.

  성전사의 억센 손에 더러운 바닥에서 겨우 몇 뼘 안 되는 곳에 머리가 고정된 채 주교는 강제로 문서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어...억."

  자신이 철저하게 숨겼다고 생각했던 모든 치부가 적혀 있었다. 심지어는 신전의 이름으로 자신의 자동차에 넣었던 기름까지...모든 치부가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어...어떻게..."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주교의 입이 헤 벌어지며 침이 한 방울 턱으로 늘어졌다.

  모두 뒷세계를 집 앞마당처럼 드나드는 뿌리의 작품이다.

  게다가 옛날부터 이미 교단의 주요 인물에 대해 조사를 해왔으니 주교가 한 짓은 그들에게 어린아이 장난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찰 불러! 이렇게 맘대로 끌고 갈 순 없어! 나는 법의 심판을... "

  주교가 정신이 나간 듯 횡설수설하는 말에 같이 끌려가던 사람들조차 한심한 눈으로 바라본다.

  `저런 인간이 주교였다니...`

  성전사는 주교에게 허리를 숙여서 속삭였다.

  "연합법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고위 성직자를 체포할 수 없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주교였던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평소에 잘 써먹었잖아."

  교단이 시민들에게 압도적인 인기와 신망을 얻었기에 가능했던 유일무이한 법 조항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를 본인이 당할 줄은 몰랐겠지.

  "그쪽도 당신을 보호해주지 못해. 더 추한 꼴 부리지 말고 얌전히 따라오도록."

  할 일이 태산같이 쌓였던 성전사들은 더는 반론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주교를 질질 끌고 나갔다.

  "안..돼...나는...주교야..."

  머리는 흐트러지고 턱에 아직도 침방울이 맺혀 있는 주교가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비참하게 신전 밖으로 끌려 나갔다.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군."

  성전사들이 굴비처럼 줄줄이 끌려 나가는 사람들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누가 알았겠나."

  평소에도 구린 느낌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썩어 있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 직위가 높아질수록 악취가 진동할까···.

  이렇게 절지아의 지휘 아래 성전사들이 주가 되어 움직이는 `정화`가 진행되는 동안, 또 하나의 프로젝트 `초심`은 성녀인 엘리가 직접 주도하고 있었다.

  "저 장식도 모두 떼버리세요."

  엘리는 자신이 맨 처음 방문했던 여의도 지부에서 한길과 함께 성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직접 현장에 있었다.

  엘리의 말에 교단 소속 작업자들이 솔라리 교단의 태양을 의미하는 레드 다이아몬드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그런데 아무래도 최소한의 교단의 위엄을 살리는 장식품들은 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한 사제가 화려했던 내부가 휑해진 모습을 보며 조심스럽게 엘리에게 물었다. 자신도 과하게 화려한 교단의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건....

  `너무 휑한데?`

  사제의 속마음처럼 신전 안은 이제 막 지어질 때처럼 텅 비어 있었다.

  "차가운 장식이 있던 자리를 사람으로 채우면 따뜻해지지 않을까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엘리가 싱긋 웃으면서 하는 말에 사제가 고개를 숙였다.

  "여신님이 막 신전을 세웠던 장면을 보여주신 적이 있어요. 대격변이 일어난 직후죠."

  무려 여신님이 직접 등장하는 이야기에 모든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쫑긋였다.

  "사실 그때는 신전이라기 보다는 병원이자, 보호소이자, 학교였죠. 신전은 사람들의 쉼터가 되었어요. 제 눈에는 그 때가 가장 아름다워 보였어요."

  한길처럼 젊은 청년도 있었지만 여기 있는 대부분은 신도에서 성전사로, 사제로, 기술자로 교단에서 일해온 자들이다. 사람들은 눈을 감고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성자님! 좀 쉬었다 하시죠! 그러다 쓰러지십니다.]

  [그럴 수는 없죠! 거기 환자 이리 눕히세요.]

  참 배고팠고 힘들었지만···. 그 때처럼 보람차고 뿌듯함을 느꼈던 때는 없었다.

  "그래서 초심이군요."

  "맞아요. 같이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다시 신전이 낮은 자들을 위한 방패이자 공간이 되길 원해요."

  신전의 공간들은 보육원, 도서관, 학교 등으로 다시 활용될 예정이다. 그리고 훗날 침공을 막기 위한 기지와 방공호로 변할 것이다.

  "현명하신 성녀님께 축복을. 솔라리께 영광을."

  엘리의 말에 감격한 사제들과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고 호위를 맡은 성전사들은 속으로만 기도를 올렸다.

  "이렇게 된 김에 같이 기도할까요?"

  엘리가 사제들과 사람들 앞에 미소를 지으며 앞에 털썩 같이 주저앉았다.

  "서...성녀님? 바닥이 더럽습니다."

  급하게 물건들을 옮기고 해체작업을 하느라 바닥에는 먼지와 돌 부스러기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실제로 엘리가 앉자 가볍게 먼지가 일어났다.

  "잠깐 청소라도 해야...아니, 방석이라도."

  사람들은 안절부절못했지만, 거리에서 쓰레기통도 뒤져 본 엘리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괜찮아요. 잠깐 같이 기도하고 가요."

  엘리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작업자의 거친 손을 잡고 짧게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는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의 앞에 있는 모두에게 손을 잡으며 기도를 올렸다.

  `이건 올려야겠어.`

  교단의 홍보팀에 속해 있는 뿌리 소속 정보원 한 명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편집팀으로 찍고 있던 영상을 보냈다.

  성녀님도 홍보영상을 만드는 것에 동의해 주셨으니 괜찮을 거다. 무엇보다 이건 모두가 알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의 가슴속에 불타고 있었다.

  그렇게 교단 내부에는 오늘의 영상과 함께 뿌리에서 의도적으로 퍼뜨린 소문 하나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성녀님이 지하 감옥에 계실 때 얘기 들었어?"

  "뭔데?"

  "돌멩이와 딱딱한 빵 한 조각으로 신성력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제단을 만드셨다는 거 아니야!"

  살짝 과장되긴 했어도 교단의 급격한 변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여론을 잠재우고 성녀에 대한 존경을 단번에 끌어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 * *

  "아저씨! 저 왔어요!"

  "어서 와라."

  카렌이 카페에서 여유롭게 딸기라떼를 홀짝이다가 엘리를 반겼다.

  "신전 일은 좀 어때?"

  "재밌어요! 보람도 있고요."

  채린이 묻자 엘리가 카렌 옆에 폴짝 뛰어 앉았다.

  "우와! 사람이 되게 많네요."

  "강이사, 영준과 친구 가족까지 왔으니까."

  강이사의 제안에 따라 일 년의 마지막 날을 맞아 모두는 가족과 같이 카페에 모였다.

  "네 덕분에 모두 행복한 거야."

  채린이 카렌에게 먹던 과자를 건네며 말했다.

  "맞아요! 저도 그렇고 다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여기 없었어요."

  "나 아니었어도..."

  "꾸잉! 주인 부끄럽냐?"

  삼색이 채린의 무릎 위에서 카렌을 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잠깐 걔 좀 건네볼래?"

  "채린 날 넘겨..으가가가 배신자! 주인, 내가 잘못했다!"

  삼색의 얼굴이 카렌의 거친 손놀림에 두부처럼 찌그러졌고 채린은 삼색의 원망스러운 눈길을 슬그머니 외면하면서 괜히 창밖을 바라봤다.

  "역시 전 여기가 제일 편해요."

  엘리는 셋의 모습과 저 뒤에서 즐겁게 대화하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응? 신전에서 잘 안 해줘?? 언니가 혼내줄까?"

  채린이 소매를 걷으며 말하자 엘리가 재빨리 손을 흔들며 채린을 말렸다.

  "아니에요! 정말 잘 해주시는데, 아무래도 저를 편하게 못 대해주시니까요."

  "뭔지 알 것 같다. 나도 그런 거 많이 겪었어."

  "음..."

  카렌과 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도 질리도록 경험했던 일이다.

  "그냥 여기가 진짜 집 같아요. 언니랑 삼촌들과 아저씨는 모두 그..."

  "가족 같다고?"

  엘리가 끝말을 맺지 못하자 채린이 대신 말해주었다.

  "맞..아요."

  엘리가 말하면서 카렌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하지만 카렌은 그저 별다른 반응 없이 음료를 마시며 삼색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저씨. 저 계속 살아도 돼요?"

  "응? 뭘 말이냐?"

  "아저씨 집이요. 물론 불편하시면 전 나가도 괜찮아요. 이제는 신전도 있고...그래도..."

  엘리를 교단에서 정식으로 성녀로 인정받게 하는 것. 그것이 카렌과 여신의 약속이었다. 이제 둘 사이를 이어주는 하나의 줄은 끊어졌다.

  엘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초조하게 카렌의 대답을 기다렸다.

  "당연히 같이 살아도 된다."

  허무하리만큼 담담하게 돌아온 카렌의 대답.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학생이 나가면 저기 선생님들이 서운해 할 걸?"

  카렌이 턱으로 엘리의 뒤를 가리키자 엘리의 뒤에서 떠들썩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님! 저희 이제 평면도형 배워야 합니다!"

  "으..."

  강이사의 말에 엘리의 표정이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찌그러졌다.

  "어? 그렇게 싫으신 티 내면 숙제 늘어납니다?"

  "아..아니요! 좋아요!"

  그 옆에서는 민재와 영준의 친구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저희는 국어나 수학보다 훨씬 재밌으니까 기대하세요!"

  "... 저 상처받습니다."

  "하하하, 강이사님. 이거 한 잔 더 받으세요."

  언제 술까지 가져왔는지 한민재가 강이사의 손에 잔을 쥐여주고는 이세계 명주를 따라 주었다.

  "아하하! 우리도 한잔하자고! 엘리는 삼색이랑 음료 같이 마셔."

  "네! 전 이거 너무 맛있어요."

  엘리가 카페 안 냉장고에서 요구르트를 한 줄 꺼내와서 빨대를 꽂았다.

  "꾸잉, 난 술은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고양이가 그것까지 마시면 이상하긴 해. 먹지 마."

  카페 안은 웃음소리와 대화가 끊이지 않았고, 어느새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TV에서는 연합의 주요 도시를 비추며 60초의 타이머가 나타났다.?

  [새해까지 1분 남았습니다.]

  "자! 모두 창밖을 보세요! 저희가 준비한 게 있습니다."

  강이사가 얼큰하게 취해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쳤다.

  지이이잉

  카페의 개폐식 창문이 좌우로 스르륵 열리고 1월이 되기 직전의 싸늘한 밤공기가 모두를 맞았다.

  [5!]

  TV에서 카운트다운이 흘러나오고 강이사가 품에서 손바닥만 한 스위치를 꺼내 카렌에게 건넸다.

  "강이사. 이게 뭔데?"

  "저희가 오늘 하루 동안 준비한 선물입니다. 새해가 될 때 눌러주시면 됩니다."

  "알았어."

  [4,3,2,1!]

  카렌이 TV의 소리에 맞춰 빨간 버튼을 꾹 눌렀다.

  삐유우우웅

  그러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각양각색의 폭죽이 밤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우와아아! 너무 예뻐요!"

  엘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반짝였다.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구나.`

  전에도 본 적이 있다. 조그마한 창문 밖으로 들리는 폭죽과 웃음들. 그때는 차갑게만 들렸던 소리가 지금은 아름답게 바뀌었다.

  "고맙습니다."

  "응?"

  카렌은 갑자기 자신의 품에 안기는 엘리의 행동에 의아했지만, 그냥 등을 살포시 토닥여 주었다.

  "좋아보이네."

  채린도 자리에서 일어나 합류하며 카렌의 등에 자신의 얼굴을 살포시 대고 눈을 감았다.

  "나...나도!"

  삼색이 자신도 해보고 싶었는지 뛰어 들었지만 카렌이 재빨리 손바닥으로 막았다.

  "그 발톱으로 어딜 달려들라고!"

  "나도 좋은 일 생겨서 기뻐서 그런다!"

  "나중에 말해. 나중에. 저거나 감상해라."

  폭죽은 절정에 이르러 마침내 마지막 폭죽이 하늘에 떠올랐다.

  "민들레잖아?"

  "꽃말이 `행복`을 의미해서인지 마침 가게에서 팔더라고요."

  모두는 말없이 민들레를 보며 꽃말처럼 항상 행복하길 빌며 새해를 맞이했다.

  "마법! 이제 나는 마법사가 된다!"

  원래 이상했지만 오늘따라 더 증세가 심한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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