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성벽 위는 혈흔이 낭자했다. 성전사들에게서 흐른 피가 바닥 밑까지 뚝뚝 떨어졌고 팔이 부러지면 다리로, 다리마저 부러지면 이빨로 적들을 물어뜯고 있었다.
"크흑..."
"그 신기한 능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못 쓰는 거지?"
교황의 손가락 중 하나가 절지아를 보며 비웃었다. 아까의 능력은 분명 대단했지만, 방어막과 성벽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만든 것으로 모두 소진했다고 착각했다.
아니라면 안 쓸 이유가 없으니까.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짓자고."
처음에 성전사들의 전력은 백중지세였다. 하지만 어디서 나온 지 모를 각성자들이 합류하면서 전력이 기울어버렸다.
점점 성녀 측 성전사들은 전투 불능이 되었고 교황 측은 기세등등해졌다.
"너흰 아무것도 모른다."
절지아가 몸 곳곳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늙은 영감이 허세는..."
"머...멈춰라!"
그때 누군가 외친 고함이 들려오자 성벽 위는 순간적으로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꾸잉? 똑똑한데? 돌멩이 하나라도 튀면 알지?"
일반 성체 호랑이의 3배쯤 되는 고양이가 어느새 성벽 위로 올라와 있었다. 문제는 이 고양이의 등 뒤에 있는 관이었다.
"저기 성자님이 계신다!"
"성자님이?"
뒤에서 삼색을 허겁지겁 따라온 사람들이 외치자 성전사들은 일제히 물러났다.
각성자들은 계속 공격하려 했지만, 이윽고 들려 온 목소리에 이들도 똑같이 행동했다.
"물러나라!"
교황의 목소리다. 60대는 돼 보이는 노인이 각성자들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성벽 위로 오르고 있었다.
"그래. 물러나야지."
동시에 카렌도 여유롭게 엘리의 손을 잡고 자신이 만든 계단을 통해 성벽 위로 올라섰다. 자연스럽게 교황과 카렌을 중심으로 둘로 나뉜 대치 상황.
"이 무슨 짓이냐! 감히 더러운 이단놈들이 성자님을 인질로 잡다니!"
교황의 수염이 푸들푸들 떨리며 카렌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꾸짖었다.
"어우..목청도 좋아. 근데 목소리가 좀 나이에 비해 많이 크네? 좋은 거 많이 먹었나 봐. 그거 내려 봐."
카렌은 귀를 파며 곁에 다가온 삼색에게 관을 내려놓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사람들이 삼색의 등에서 성자가 담긴 관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자 교황측에서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움찔거렸다.
"어허!"
삼색이 사람의 팔뚝만 한 발톱을 꺼내어 성자의 머리 위에 살포시 대자 단번에 움직임은 사라졌다.
"그렇지. 잘한다."
카렌이 그 모습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이런 분야에서는 참 똑똑한 녀석이야.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
`솔라리시여...`
절지아를 포함해 카렌 측에 서 있던 모두가 카렌을 심판관으로 세운 여신에게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이거 성자에게 먹여라."
카렌이 절지아에게 주사기 하나를 건넸다.
"이건?"
"특제 각성제다. 잠깐은 눈을 뜨게 해줄 거야."
"무슨 짓이냐? 읏..."
교황측에서 발끈하며 나섰지만 이내 다시 삼색의 발톱이 이리저리 흔들리자 입을 꽉 다물었다.
"아니면 성자를 지금 죽일래? 착각하나 본데 너흰 선택지가 없어. 닥치고 있어."
`물론 반동이 좀 크긴 하지만...일단 싸움부터 끝내야지.`
절지아가 조심스럽게 성자를 관에서 일으키고는 각성제를 주입했다. 카렌이 직접 만든 약답게 효과는 확실하다. 금방 성자의 몸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여유롭네?"
"솔라리님을 섬기는 우리들이 겁날 게 뭐가 있나?"
?
그런데 교황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모습이 좀 이상했다. 카렌이 묻자 교황이 눈 하나 깜짝 않고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지?`
성자가 모든 진실을 털어놓으면 끝장나는 건 자신일 텐데. 마침내 성자가 절지아의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성자님? 괜찮으십니까?"
"으읍..읍"
"천천히 말하세요. 저희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성자의 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입을 뻐끔거렸지만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설마... 비켜 봐."
카렌이 절지아를 옆으로 밀치고는 성자의 입을 거칠게 손으로 벌렸다. 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혀가 없다. 대신 이상한 이물질이 대신 들어가 있는 게 보인다.
"미친놈이..."
카렌의 인상이 보기 드물게 혐오감으로 찌푸려졌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웬만한 추악한 짓은 모두 봐 왔다고 생각했지만, 인간의 추악함은 아득히 한계를 추월했다.
"들어라! 저 사악한 것들이 성자님에게 독약을 먹였다! 고통받는 성자님을 우리가 지켜야 한다!"
교황이 성자와 카렌을 가리키며 성전사들을 선동한다. 카렌과 엘리에게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분노가 쏟아진다.
"절지아. 엘리 데리고 내려가라. 이젠 나도 어쩔 수 없다."
카렌이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교황을 바라보았다. 신조차 혀를 내두를 인간의 악의로 계획은 다 어그러졌다.
"저...제가 치료하면..."
"안 돼. 재생하는 걸 방지하려고 혀에 뭔가를 수술해 놓았어. 내려가라. 이제 내가 맡지."
"성자님을 지켜라!"
카렌이 교황의 신호를 시작으로 자신을 향해 일제히 달려드는 모두를 향해 손을 들었다. 카렌의 뒤에서 반투명한 수십 개의 칼날이 생겨나며 주인의 명령을 기다린다.
`재생 못 하게 목을 자른다.`
일을 이 따위로 만든 저 교황놈은 제일 나중에 찢어 죽일 거다.
-찍!
"응?"
카렌이 손을 내밀기 직전 왼쪽 귀에서 들려오는 쥐 소리에 카렌의 손이 움찔거리며 멈췄다. 순간이동으로 왔는지 토리가 어느새 왼쪽 어깨에 올라타 있었다.
-찌찍!
토리가 자신의 앞발로 옆을 가리킨다.
"뭐 하는...?"
성자가 근육이 모두 빠진 손으로 관 안에 있던 단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카렌은 순간적으로 토리와 성자를 번갈아 가며 보며 생각했다.
`신수..성자...`
카렌이 뒤에 둥둥 떠 있던 칼날을 모두 해제하곤 재빨리 두 손바닥을 내밀어 두터운 몽둥이로 바꿨다.
"뭐..뭐야?"
"앞이 반투명한 벽으로 막혔습니다."
"뚫어!"
방벽으로 거칠게 공격이 쏟아졌지만 카렌은 눈하나 깜빡하지 않으면서 곁눈질로 성자를 주시했다.
`성자와 여신...뭘 보여줄거지?`
성자는 눈을 뜰 때 지독한 고통과 무력함을 느꼈다. 자신의 말라비틀어진 팔과 손가락을 보며 절망했고, 입을 열었지만, 공기 빠진 허망한 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다.
`아아아...`
교단을 세울 만큼 강인하고 현명한 사람이지만, 이 지경이 되니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다.
[미안하구나...]
그 때 귀에서 들려오는 익숙하고도 여린 목소리에 성자는 눈을 부릅떴다.
`여신이시여...`
처음 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땐 여러 차례 자신이 성자로 내정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받아들이고 여신과 같이 한땀 한땀 교단을 만들었다.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성자의 머리에 스쳐 지나간다.
신을 모신다는 개념보다는 친구처럼, 어떨 때는 어린아이를 키우듯 같이 했다. 아내와 딸을 대격변으로 모두 잃은 자신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 준 참 즐거운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뭐가 미안하시다는 걸까?`
성자는 주위를 둘러봤다. 성전사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교황, 은발의 사내, 그리고···.
"으읍.."
성자가 자신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금발의 여자아이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오는 건 공기가 새어 나가는 소리뿐.
`제가 할 마지막 일이군요. 전혀 미안하실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저의 주인이자. 친구이자...`
마지막 말은 성자가 차마 생각으로나마 옮기지 못했다. 성자는 자신의 앞에 있는 단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오랫동안 누워만 있던 비루한 몸은 자신의 명령대로 잘 움직여주지 않는다.
간신히 두 손으로 단검 손잡이를 잡고 들어 올리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도와주소서.`
성자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자 단검이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성자가 기뻐하며 단검의 날을 자기 몸 쪽을 향하게 하늘로 들어 올렸다.
"우으읍......"
뜻을 알 수 없는 말고 함께 성자가 단검으로 자기 심장을 찔렀다. 성자의 몸이 뒤로 넘어가며 몸에서 나온 피가 관 안의 보존액에 스며든다. 지금껏 성자의 몸에 닿아 강제로 성수가 되어버린 액체.
우우웅
관이 살아있는 듯 진동한다. 처음엔 작은 꿀벌처럼 작게, 그리고 점점 커지고 관이 날아오를 듯 관이 떨린다.
"서...성자님?"
각자 자신들의 적들에게 집중하느라 그제야 성자에게 이상이 생긴 걸 눈치챈 성전사들이 멍하니 관을 바라봤다.
퍼엉!
관이 폭발하며 하얀 빛이 하늘로 용솟음친다. 폭포와도 같은 신성력의 빛줄기가 하늘에서 잠시 원을 그리며 새처럼 비행하더니 한 사람에게 맹렬히 달려들었다.
대상은 절지아와 함께 성벽을 내려가고 있던 엘리.
"어?!"
엘리가 순간 놀라서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빛줄기는 날아 온 기세에 비해 너무나도 부드럽게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다.
신성력은 엘리의 몸에 머물면서 자신의 색깔을 천천히 바꿨다. 성녀만이 가질 수 있는 청량한 하늘과 같은 푸른색.
엘리의 곁에 머무른 신성력들은 장난끼 가득한 아이처럼 엘리의 몸을 둥실 하늘로 띄운다. 엘리도 빙긋 웃으며 신성력에 몸을 편안히 맡겼다.
`성자 때문에 나뉜 신성력과 관에 있던 성수의 힘이군.
카렌은 쳐놨던 장벽을 거뒀다. 모든 일은 끝났다. 순교를 택한 성자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경의를 표했다.
"성녀님이다."
모두 멍하니 하늘로 떠 오른 엘리를 바라보다 무릎을 꿇는다. 맨 처음은 절지아. 그 다음은 카렌 측 성전사부터 교황 측 성전사까지.
"우리가 무슨 짓을..."
"아아아..."
교황 측 성전사들이 얼굴을 들지 못하고 땅에 머리를 박으며 흐느꼈다.
이제 서 있는 건 카렌과 교황과 대주교들, 그리고 그들이 데려온 각성자들 뿐이었다.
이들조차 무릎은 꿇지 않았지만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미안하구나...어린 너에게 이렇게 맡기고 가서.]
몸을 감싼 신성력들이 엘리에게 성자가 남긴 마지막 의념을 전달한다.
"괜찮아요. 지금껏 너무 감사했습니다."
엘리가 잠시 눈을 감고 성자를 추모했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성벽을 가리켰다. 그러자 엘리의 몸을 머물고 있던 신성력들이 성벽 위에서 쓰러져 있던 성전사들에게 빨려들었다.
"오오...성녀시여...솔라리시여."
교황 측 성전사들도 남김없이 치료해 준 모습을 본 성전사들이 기쁨과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이리 와라."
신성력이 사라지자 엘리의 몸이 서서히 하강하고 카렌은 엘리의 발밑으로 계단을 만들어 줬다.
"감사합니다."
엘리가 카렌의 손을 꼭 잡고 옆에 섰다.
"자비는 끝났으니, 심판의 시간이다."
냉랭한 카렌의 목소리가 멍해 있던 사람들의 정신을 번뜩 깨웠다.
"나는 이단심판관이다."
?
카렌이 손을 뻗자 이단심판관의 징표에서 태양처럼 붉은빛이 뻗쳐 나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모든 성전사들은 교단의 적들을 잡아라. 너희 손으로 속죄해라. 교단의 기생충들을 잡아라."
"심판관님의 명을 받듭니다!"
"으아아..."
성전사들이 순식간에 교황 이하 모든 이들을 카렌 앞에 무릎 꿇렸고 카렌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얼굴을 벗겨라."
"아..아저씨?"
엘리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며 카렌을 바라보았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저들이 뒤집어쓴 마스크를 벗기라는 의미다. 노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젊고 활기찬 게 이상하지 않아?"
카렌이 교황의 목 뒤로 손을 집어넣고는 마스크의 이음새 부분을 훽 잡아챘다.
"세..세상에..."
60대가 족히 넘은 노인이었던 교황의 얼굴은 어디 가고 많아야 30대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나타났다.
"신이 있다고 믿는 놈들이 어떻게 이렇게 대담한 짓을 벌였을까. 자신이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지."
교황이 차고 있는 반지, 목걸이, 팔찌 모두 성자에게서 만들어 낸 성물이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공급되는 성수까지 마셨으니 어려질 수 있었다.
"너...너희만 아니었어도! 특히 너!"
교황이 악에 차서 카렌에게 소리를 버럭 지른다. 성녀도 아니고 뜬금없이 나타난 이 젊은 놈은 뭐란 말인가.
"어쩌라고. 그러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크아아악!"
카렌이 심판관의 징표가 있는 오른손을 교황의 이마에 가져다 대니 인두로 지진 듯 교황의 이마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오...진짜 되네?"
카렌이 자신의 손바닥과 이단심판관의 상징이 그대로 찍혀버린 교황의 이마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원망하려면 신에게 해. 그 쪽 부탁받고 하는 거니까. 끌고 가."
카렌은 씨익 웃으며 손짓하자 성전사들이 거칠게 교황과 떨거지들을 끌고 갔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여신님의 뜻대로 할 거예요."
엘리답게 단어를 순화하긴 했어도 죽이란 말이다. 카렌은 엘리를 한 팔로 번쩍 들어 안았다. 엘리가 카렌의 가슴에 폭 머리를 묻고는 중얼거렸다.
"성자님은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래. 대단한 사람이더라."
교단을 키운 능력만 봐도 그야말로 영웅이다. 비록 사람을 너무 믿긴 했어도 말이다.
"그리고 그분은 여신님을 굉장히 아끼셨어요."
"그래? 그건 좀 이상하게 들리긴 하네."
여신이 인간을 아끼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여신을 아껴?
"그 분이 무의식적으로 남기신 의념 중에 이런 말이 있었어요."
[당신의 저의 주인이자. 친구이자···. 딸이었습니다.]
"지금쯤 여신이랑 행복하게 있겠지. 여신이 성자에게 혼나고 있지 않을까?"
카렌과 엘리는 나란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폭풍우처럼 내리던 눈이 그치고, 맑은 하늘을 배경 삼아 밝게 세상을 비추는 태양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