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좀 이상하다
삼색의 예상은 반만 맞았다.
"설마 교황과 성자가 같은 건물에 있을 줄은 몰랐다."
하늘을 찌를 듯 거대한 첨탑이 있는 곳. 성지에 남은 병력들은 전부 한 건물에 몰려 있었다.
"엄청 크네."
-찍
삼색의 말에 토리가 동의한다는 뜻으로 울음소리를 내었다. 둘이 보고 있는 궁전은 수백 개의 창과 흰색 외벽으로 반짝인다.
밖으로 통하는 문만 해도 수십 개고 상당수의 성전사들이 빠져나갔음에도 여전히 주요 입구에는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일단 진입한다. 저기 지붕으로 할 수 있지?"
-찍찍!
토리가 삼색의 등에 훌쩍 올라타고 둘의 모습이 삼색이 말한 지붕 위에서 나타났다. 둘이 함께 온 이유기도 하다.
토리의 능력으로 사람은 못 옮기지만 삼색같이 크기가 비교적 작은 고양이 정도는 순간이동이 가능했다.
"꾸잉, 일단 지하로 가자. 보통 구린 게 있으면 지하에 있더라고."
-찍?
"영화랑 드라마에서 봤다."
-찌..찍?
"시끄러. 일단 뭐든 해봐야 할 거 아니야. 그럼 가만히 있어?"
말은 통하지 않아도 불안한 듯 자신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토리에게 삼색이 볼멘소리를 했다.
"내 등 위에 있어라."
토리가 다시 순간이동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린다.
일단 반대쪽 열린 창문으로 훌쩍 삼색이 뛰어 들어가고는 밑으로 가는 계단을 찾았다.
중간, 중간 순찰을 하는 성전사들을 피해 숨어가며 계속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1층으로 내려오긴 왔는데...
"이제 어떡하지. 드라마에서는 막 비밀 문 같은 거 딱딱 찾던데..."
일단 방이 너무 많다. 박물관처럼 친절하게 안내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겠다.
삼색이 답답한 마음에 땅을 박박 긁었다. 대리석 바닥이 두부처럼 파지며 돌가루가 휘날렸다.
-찍?
"응? 왜?"
토리가 삼색의 등 뒤에서 내려와 몸으로 뭔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응? 배고프다고?"
-찍! 찍!
토리가 발을 탁, 탁 구르며 삼색을 답답하게 바라봤다. 그리고는 짧은 발과 온몸을 이리저리 굴려 가며 설명한 끝에 마침내 삼색에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
"느껴진다고? 성자가 있는 곳이? 맞다! 너 신수였지?"
토리가 삼색이 알아듣는 게 기뻐서 제자리에서 통통 튀고는 삼색의 등 뒤에 올라 털로 가는 방향을 알려줬다.
"기분이 좀 이상한데? 뛰어넘는 곳도 없는데 그냥 네가 안내해도 되지 않냐?"
-찍!
"...뭔 소리야. 일단 가보자. 왠지 이거 영화에서 봤는데...쥐가 요리사의 모자에 들어가서 조종하는 영화였다."
등 위에서 털이 안내하는 방향으로 가자 과연 지하로 가는 문 하나가 보인다.
하지만 경비병들이 문 앞에서 지키는 데다가 비집고 들어갈 조그마한 틈 하나 보이지 않는다.
"저거...주인이 말한 결계구나."
게다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기운이 문을 감싸고 있었다. 자신이 여의도에서 주인과 같이 갈 수 없었던 이유. 신성력으로 만든 결계다.
"네가 가야겠다. 난 저기 못 들어가."
삼색이 준비해 온 여분의 워치를 토리의 몸통에 감아주었다.
"사용법 기억하지?"
-찍!
토리가 오른손을 머리에 붙이면서 양다리를 착 붙이며 삼색에게 경례했다. 그리고는 문 안으로 순간 이동했다.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결계는 신성력 자체인 신수를 감지하지 못했다. 토리는 다리를 바쁘게 움직여 자신을 여기까지 안내한 신성력 향기의 발원지를 따라 이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연구실로 보이는 문 앞에 도착했다.
끼이익
"보고하러 가자."
하얀 연구실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 토리는 재빨리 발 옆을 지나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토리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버튼이 있는 책상에 올라 실험실 유리를 통해 방금까지 연구원들이 보고 있던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찍?
강화유리 너머에는 모두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성자가 투명한 관 안에 누워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액체에 잠겨 있는 성자의 몸에는 목걸이, 반지, 단검 등 각종 물건이 따개비처럼 붙어 있었다.
성물을 만드는 과정을 듣긴 했어도 막상 직접 보니 충격적인 광경이다.
토독, 토독
토리가 분노에 차서 워치를 조작했다. 미리 세팅된 현재 장소의 좌표와 위치가 담긴 메시지를 어딘가로 보냈다.
[위치 전송 완료]
토리의 메시지가 도착한 곳은 마석을 엔진으로 쓰는 개발 중인 최신형 무소음 비행기 안이었다.
?
"위치가 들어왔다. 낙하!"
토리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항공에 대기하고 있던 뿌리의 최정예 부대원들이 곧바로 하늘로 몸을 던졌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다리와 팔을 몸 안으로 말아 공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낙하 교범과는 전혀 맞지 않는 자세.
그렇게 순식간에 궁전으로 가까워진 그들은 중간지점쯤에 도달할 무렵.
[플랩!]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팔과 다리를 쭉 폈다. 팔과 다리 사이에 막이 날다람쥐처럼 펼쳐지며 공기의 저항을 받아 팡! 소리를 낸다.
현대기술의 집합체인 윙슈트를 입은 그들은 일제히 삼색이 맨 처음 순간이동한 지붕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콰콰쾅!
동시에 성벽 밖에서는 다른 뿌리의 일원들이 기관총과 대전차포를 발사해 시선을 돌린다.
게다가 카렌이 제공해 준 카멜레온 포션을 옷에 바른 덕분에 하늘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절대 눈치채지 못 할 거다.
[분사!]
이들은 단지 윙슈트만 입고 있는 게 아니다. 손과 발에는 동그란 분사기가 달려 있는데 이 또한 마석으로 만들어져 소음은 줄이고 출력은 극대화된 테스트용 장비다.
팔과 다리로 착륙 지점으로 세심하게 이동하고서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는 모두 완벽하게 지붕에 도달했다.
부대원들은 곧바로 윙슈트와 분사기를 떼고는 삼색이 지나쳤던 경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과연 영물의 감이랄까. 삼색이 본능적으로 위험지역을 피해간 덕에 충돌은 거의 없었다.
"크...윽"
피해 갈 수 없을 땐 각성자들이 적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음과 움직임을 잠시 멈추고 특수부대원들이 제압해 기절시켰다. 수많은 훈련과 실전이 조화를 이룬 완벽한 움직임이다.
[삼색님. 도착했습니다.]
"꾸잉, 벌써?"
수면실에 들어가 침대에 편하게 누워있던 삼색이 워치로 메시지가 오자 밖으로 나왔다. 과연 카멜레온 포션을 온몸에 뿌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자들이 보였다.
"그럼 시작한다."
토리가 성자를 찾았으니 이제 자신이 일할 때다.
우드득, 우드득
삼색의 몸이 뒤틀리며 몸을 원래 크기로 되돌렸다. 뿌리가 성자를 빼돌릴 수 있게 날뛰는 것.
"두 번째다. 갈수록 스케일이 커진다."
주인이 뭐랬나. 난동이랬나?
'이런 거 말고 나도 좀 멋있는거 해보고 싶은데...'
"어..어?"
삼색이 괜히 심술이 나서 어슬렁 어슬렁 걸어 천천히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들에게 다가간다. 경비병들이 화들짝 놀라 경보를 울리며 무전을 쳤다.
"침입자! 정체는···. 고양이···? 호랑이보다 크다!"
[무슨 소리야? 너 술 먹었냐? 몬스터란 얘기지?]
"어..어...그래! 몬스터!"
몬스터일 수밖에 없는 크기다. 세상 어느 고양이가 호랑이보다 크겠나.
"어떻게 몬스터가 여기로 들어왔지?"
화르륵, 불 관련 각성자인 듯 경비병의 손에서 불꽃이 튀어나와 삼색에게 날아온다.
"느려."
삼색이 카렌의 앞에서야 게으른 고양이지만 적들이 보기에는 어떻게 느껴질까.
고양이의 유연성과 민첩성, 치타보다 빠른 속도, 몬스터를 거뜬히 능가하는 치악력, 명검에 버금가는 발톱까지 공포가 따로 없다.
삼색은 어림도 없는 공격을 가뿐히 피하고는 단숨에 앞발로 경비원들을 후려갈겨 기절시켜 버렸다.
"꾸잉, 시작해라. 관이 입구로 나오면 부르고."
삼색은 그 말을 남기고는 훌쩍 뛰어올라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부대원들은 재빨리 연구실로 진입했다.
"심판관님한테 저번에 안 덤비길 잘했어."
누군가 한 말에 모든 부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성녀님에게 감사했다.
데리고 다니는 고양이가 저럴진대 주인인 카렌은 저번에도 느꼈지만, 차원이 다른 존재다.
부대원들은 내부의 인원들을 모두 진압하고는 성자를 관째로 끌고 나왔다. 성자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몸은 근육이 모두 빠져 그야말로 뼈만 남아있었다. 간신히 생명유지장치를 단 채로 목숨만 붙어 있었다.
[삼색님 나왔습니다.]
문자를 보내자마자 삼색이 재빨리 다가와서 말했다.
"관을 빨리 내 몸에 묶어!"
슬슬 경비병력이 몰려들고 있었다. 뿌리의 나머지 인원들이 엄호할 동안 엎드린 삼색의 등 위로 성자의 관이 올라섰다.
"침입자들을 잡아라!"
순식간에 겹겹이 포위망이 완성되고 절체절명의 상황. 하지만 삼색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위에 있는 게 뭘까?"
"서..성자님?"
"사격 중지! 사격 중지! 능력도 쓰지 마라!"
모두 화들짝 놀라며 총구를 내렸다.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각성자들도 재빨리 갈무리했다.
"비켜. 아니면 성자 죽는다? 어이쿠!"
순간 든 섬뜩한 느낌에 삼색이 재빨리 옆으로 물러났다.
?탕!
방금 있던 곳이 푹 파이면서 총소리가 들린다. 저격. 인질이 잡힌 상황에서 현명한 판단이다. 다만 대상이 인간의 감각을 월등히 뛰어넘는 영물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거 등이 간지럽기도 하고 뒹굴고 싶은데..."
삼색이 살짝 몸을 기울이자 성자의 관이 금방이라도 떨어질듯 출렁인다. 그걸 보며 모두가 안색이 시퍼레졌다.
"모...모두 물러나라! 저격도 그만둬!"
혼비백산해서 길을 비켜주는 사람들의 모습에 삼색이 만족하며 자신의 앞발을 핥았다.
`왠지 악당 같긴 하지만...다 이렇게 하나, 둘씩 시작하는 거 아니겠어? 그러다 주인공도 되고!`
영화처럼 칼이나 총을 사람의 머리에 대진 못해도 이 정도면 어디 가서 인질극 좀 해봤다고 말할 수 있을 거다.
드라마를 보면서 하고 싶었던 자신의 버킷리스트에 삼색은 또 하나 선을 그었다.
"가자."
삼색은 느긋하게 자신을 보는 시선을 즐기며 성벽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적들과 당황했던 뿌리의 부대원들은 그제야 삼색의 뒤를 졸졸 따랐다.
`절대! 심판관님이건, 삼색님이건 대들지 말아야지.`
`같은 편이지만 오싹하군.`
구출 대상인 줄만 알았던 성자를 인질로 잡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정말 범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사람들이다.
[주인! 가는 중이다! 성자를 인질로 잡았다!]
삼색의 깨발랄한 문자를 받은 카렌의 입꼬리가 만족함으로 말려 올라갔다.
"할 땐 하는 녀석이야."
성자를 인질로 잡았다고? 알게 뭔가.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 성자가 나중에 알면 오히려 고마워하겠지. 그렇지 않더라도 신경도 안 쓴다.
"간식이나 더 줘야겠어."
요즘 살쪄서 좀 줄였는데 운동도 했으니 끝나고 마음껏 먹여줘야겠다.
카렌의 눈이 성벽으로 향했다. 이제 마침표를 찍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