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5/140)

  이제 판을 뒤집을 때

  "후우..."

  폐허로 된 도시 속 건물 안, 절지아는 오랜만에 숨을 돌렸다. 사방에서 자신을 찾는 사람들의 고함과 발소리가 들려 온다.

  추위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 하얀 연기를 따라 절지아가 무심코 하늘을 봤다. 건물 천장이 무너져 내린 구멍을 통해 맑은 하늘이 보인다.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데. 허! 나이를 이렇게 먹어도 아쉬운 게 많구나.`

  마지막 사명도 수행하고 싶고, 욕심을 좀 더 부려보자면 성녀님을 조금만 더 모시고 싶다. 한길 녀석도 자신의 뒤를 잇게 키우고 싶다.

  하지만 절지아의 행복한 상상은 곧 끊어지고, 주변에서 소음이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누군가 절지아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

  "목표발견! 12시 방향 건물!"

  퉁!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북 치는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절지아가 재빨리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자마자 로켓이 쏙 들어가더니, 방금까지 머물던 방이 폭발해 버렸다.

  "이 늙은이가 뭐가 그리 무섭다고 저런 것까지 가져왔나?"

  전차를 상대하기 위한 무기. 연합이 설립된 이후 권력을 잡은 자들이 철저하게 군용무기를 통제했지만, 교단은 소형 무기까진 예외다. 게다가 이런 눈보라가 휘날리는 구 러시아의 폐허 속까지 연합의 눈이 닿을 순 없다.

  "당연히 무서워해야죠. 전설이라고 듣긴 했지만 이렇게 애먹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자네들...교황님의 손가락이군."

  자신의 앞에 나타난 남자 셋을 절지아는 단번에 알아봤다. 교황이 나름 철저하게 숨겨 왔지만, 교황을 사제시절부터 봐 온 절지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로지 그만을 위한 친위대.

  "교황이 아니라 솔라리님을 믿어야 하지 않겠나."

  이미 이 모든 일이 교황의 손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절지아는 이제는 정중한 호칭 따위 붙이지 않았다.

  "사람마다 생각은 모두 다르죠. 굳이 무고한 희생을 피해 이 도시로 들어오신 것도 그렇습니다. 저라면 상상도 못 할 자비, 과연 성전사의 귀감입니다."

  의미는 칭찬을 담았지만, 남자의 입꼬리가 하늘로 솟을 듯 올라간다. 철저한 비웃음.

  `멍청한 노인네 같으니.`

  차라리 사람이 많은 곳으로 도망쳤다면 자신들도 이렇게 대놓고 하지는 못했을 거다. 하지만 이 어리석은 인간은 죄 없는 시민들이 휘말릴까 봐 이런 곳까지 들어와 버렸다.

  "그래도 잘 어울리십니다. 폐허가 된 도시라니...늙어 죽기 직전인 퇴물에게 어울리는 무덤입니다."

  이제는 가면을 벗어던진 남자의 폭언에도 절지아는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그저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갈지 생각 중이었다.

  `저 녀석들도 각성자로 치면 개개인이 최소 A급이다.`

  교황의 손가락은 총 다섯. 정확한 전력을 드러나 있지 않아도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자신의 주변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는 각성자들과 적의에 가득 찬 성전사들.

  "쉽게 당해주지는 않겠네. 기대하게."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절지아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다. 자신이 여기서 쓰러지면 그 이후는 이단심판관님이 하실 거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추하게 발버둥치더라도 어떻게든 틈을 엿볼 생각이다.

  "자네들이 직접 안 덤비나? 동시에 덤벼도 좋네."

  "저희가요? 사자는 늙어도 사자죠. 그런 도발에 넘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지휘관인 저놈들만 잡으면 이 촘촘한 그물에도 작은 틈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걸려주지 않는다.

  정상적인 몸 상태라면 생각조차 안 할 잔재주를 시도할 정도로 절지아의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아무리 몸이 단단하고 재생력이 빨라도 인간의 몸이다. 슬슬 삐걱거리며 한계가 오고 있었다.

  '늙긴 했어.'

  "쉬는 시간은 끝났습니다. 그럼 다시 시작하죠."

  투타타타. 콰콰쾅!

  대전차 무기는 물론이고 놈들이 타고 온 차량에서 기관총들이 일제히 한 사람을 향해 불을 뿜고, 원거리 각성자들은 자기 능력을 쏟아부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절지아의 뒤에 있던 건물이 폭삭 주저앉을 정도의 맹렬한 공격.

  "이번에는 죽었나?"

  "정말 지독한 인간이야."

  소리만큼 기대할 만큼의 화력이었다. 눈밭임에도 잔불이 곳곳에 붙을 정도니까. 하지만 연기가 걷히고 나타난 절지아는 팔을 교차시켜 얼굴을 막은 채 담담하게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놈도 한계다!"

  손가락 중 한 명이 절지아를 보며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확실히 절지아의 몸은 처음처럼 거뜬히 공격들을 받아내지 못했다. 곳곳에서 피가 흐르고 이제는 회복도 전처럼 빠르지 않다.

  "시작하지."

  절지아는 교황의 개가 짖는 말을 무시하고는 팔로 얼굴을 가린 채 기도문을 읊조리며 제일 거슬리는 기관총을 향해 달려 나갔다.

  "붙기 전에 쏴!"

  멧돼지처럼 돌진하는 절지아의 모습에 기관총 사수가 당황해 비명을 지르며 공격을 쏟아부었지만, 총탄은 절지아의 몸에 맞자 작은 상처들만 남긴 채 튕겨나간다.

  쿵!

  절지아가 달려가는 추진력을 이용해서 그대로 중장갑 차량에 어깨를 부딪치자 차가 옆쪽으로 뒤집히며 날아가 버린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추적자들의 공격마저 잠시 멈추고 정적이 흘렀다.

  "뭘 보고만 있어? 공격해! 저놈도 인간이야!"

  남자가 버럭 소리를 그제야 다시 맹수 사냥이 시작되었다.

  * * *

  스노모빌 수십 대와 러시아의 기후에 특화된 흰색 전술 차량이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호위대형을 갖춘 중앙에는 장갑차에 탄 카렌과 엘리가 타고 있었다.

  "절지아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고?"

  "예. 감시는 계속해 왔으니까요.

  이제는 국장이 된 팀장이 허공에 홀로그램으로 자료들을 꺼내 놓고 절지아에 대한 얘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교단의 주요인사들을 만나면서 구 한국을 시작으로 일본, 중국을 거쳐 지금 러시아까지 왔습니다."

  "빨리 이동했군. 절지아는 확실하게 우리 쪽이라고 봐도 된다."

  "그렇습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국장이 안도했다. 아무리 자신들이라도 저런 전설과 싸우고 싶지는 않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유명하고 무서워요?"

  엘리는 국장이 건네준 절지아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엄청 다정한 분인데?

  "좀 나이가 드셨긴 했어도 실력과 인품으로 굉장히 존경받으시는 분입니다."

  국장이 초장거리 카메라로 찍은 절지아의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 속의 절지아는 하얀 숨을 몰아쉬며 웃통을 벗고 몰려드는 적들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

  "대단하시네요."

  엘리는 백발을 휘날리는 절지아의 사진에 감탄했다. 자신이 옛날에 신전에서 만난 할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리고 절지아님 덕분에 저희도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뭔데?"

  "교황 쪽의 숨겨진 전력들이 드러나면서 느슨해진 경계를 뚫고 드디어 성자님이 계신 곳을 알아냈습니다."

  "그래? 어딘데?"

  "교황이 있는 교단의 성지. 구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입니다."

  "대담하군."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고 했던가. 아무리 거리가 가까울수록 관리가 쉽다지만 자신에게서 가까이 두면서 죄책감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던 걸까.

  "그런데 교단의 여론이 이상합니다. 성녀님께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말해보세요. 저는 괜찮아요."

  "교단 측에서 마녀 때문에 성자가 기도 중에 쓰러졌다고 발표하고 절지아님은 마녀의 꾐에 넘어간 주구라고 퍼뜨리고 있습니다."

  확실히 머리는 잘 돌아간다. 다른 적을 만들어 자신들의 잘못을 숨기고 분열을 일으키려는 수작이다.

  "그런데 절지아가 첫 번째면 아까 얘기하려던 나머지 하나는 뭐야?"

  "이것도 절지아님과 상관이 있습니다. 절지아님이 설득한 사람들과 지금까지 교단의 행동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이 일의 기폭제가 되어 교단의 성지에 몰려들었습니다."

  "뭐?"

  성지는 교단원이 아니라면 누구의 출입도 허용하지 않는 곳. 평소라면 날아다니는 새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하지만, 지금은 교단에서 가장 시끄러운 도시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고 도시 밖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교황 측도 위협을 느꼈는지 자신의 말을 믿는 자들과 세력을 도시 안으로 끌어모았고요."

  "절지아가 해냈군."

  비록 교단이 분열되는 걸 막을 순 없지만 절지아라는 작은 물결이 교단이라는 연못에 커다란 파문을 만들어냈다.

  "그럼 이제 끝을 보자고. 소문을 퍼뜨려. 성녀와 이단 심판관이 곧 본진으로 찾아간다고 그래. 빨리 끝내고 쉬자."

  "알겠습니다."

  [앞에 열원과 소음이 감지됩니다!]

  앞서가던 선발대에서 무전이 들려왔다. 과연 시간이 달려갈수록 목적지에서 들리는 폭음이 장갑차의 소음을 뚫고 들리기 시작했다.

  "여기 있어라."

  차가 격전지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멈췄다. 뒷문이 열리고 카렌은 여느 때처럼 뒤를 따라오려는 엘리를 말렸다.

  "저는 괜찮아요. 여신님이 익숙해지라고 1차, 2차 세계대전 환영도 많이 보여주셨어요. 다른 전쟁도 많이 봤고요."

  대체 그 여신은... 카렌은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엘리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혹시나 파편이 날아들까 봐 엘리의 주변에 실드를 쳤는데 이번에는 발밑까지 꼼꼼하게 만들었다.

  [치익...포인트 장악 완료했습니다.]

  국장이 건네준 무전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뿌리의 부대원들이 건물 요소요소를 장악해 저격수를 배치했다. 미리 와 있던 손님들은 제압해 얌전히 옆으로 눕혔다.

  쾅콰콰쾅!

  카렌은 엘리의 손을 잡고 국장의 안내를 받아 걸었다.

  "이제 한 블록만 돌아가면 절지아님이 보일 겁니다."

  "너네는 저 뒤로 가 있어. 거슬린다."

  "알겠습니다."

  이미 카렌의 힘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 부대원들은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둘이 산책을 나온 듯 천천히 걸어 코너를 돌자, 뒤쪽 경계를 서고 있던 인원들이 갑자기 어린아이와 함께 나타난 남자를 발견하고는 당황해 무기를 겨눴다.

  "어...어? 커억!"

  하지만 곧 카렌의 손짓 한 번에 벽으로 날아가 버리는 사람들. 그제야 카렌과 엘리는 절지아를 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

  절지아의 모습은 처참했다. 머리 곳곳은 그슬렸고 팔 한쪽은 너덜너덜해졌다. 세 남자의 합공을 받는 탓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이제 제발 죽어. 지긋지긋한 늙은이야."

  절지아를 상대하고 있는 손가락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충분히 힘을 뺐다고 생각해서 자신들이 직접 나섰는데 끈질기게 죽지를 않는다.

  "어?"

  그런데 절지아가 싸움 중에 갑자기 자신들의 뒤를 본다. 손가락들은 절지아가 혹시나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나 한 발자국 물러나서 경계했다.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시간을 끌어 봤자. 뒤도 우리 병력이..."

  그런데 뭔가 등이 싸늘하다. 손가락 하나가 옆으로 빠져서 뒤를 바라보니 웬 은발의 남자가 어린아이랑 같이 서 있었다.

  "당신은..."

  퍼억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머리에 구멍이 뚫렸는데 말을 할 수 있는 생물은 없었으니까. 카렌이 엘리를 고려해서 손가락만 한 작은 구멍만 뚫었다.

  "날씨도 추우니 빨리 끝내자. 얘 감기 걸린다."

  카렌이 손을 비비며 말했다. 그리고는 절지아를 보며 씨익 웃었다.

  "애들 잘 모았던데? 이제 뒤집어엎자고."

  절지아는 새하얀 눈에 반사되어 빛나는 카렌의 은발과 자신을 향해 지어 주는 미소가 참 아름답다고 느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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