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3/140)

  귀여운 트로이 목마

  퓨수우우욱

  얼마나 많이 연막탄을 뿌렸는지 순식간에 꽤 넓은 박물관 본당이 연기로 가득찼다. 그래도 섬광탄을 안 뿌려서 다행이다. 자신은 괜찮아도 어린 엘리에게는 청각과 시각에 손상을 줄 수 있으니까.

  "엘리? 거기서 가만히 있어라!"

  "네!"

  카렌은 이 녀석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애초에 살기도 없고...`

  조금이라도 공격에 적의나 살기가 들어있었으면 카렌이 단번에 눈치챘을 거다. 심지어 어린 엘리를 고려해 연막탄만 쓰기까지 했다.

  `성자가 직접 만들어서 그런가? 정도를 아는 녀석들이야.`

  뿌리 입장에서는 자신들은 침입자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한다라···.

  이놈들이 비밀조직이라면 자신 대신 싸워줄 놈들이고 엘리의 손과 발이 될 자들이다. 문제는 시야가 가려진 상태에서 적당히 어디 부러뜨릴 정도로 제압하는 게 어려웠다.

  "기다리지 뭐."

  카렌이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억지로 몰아낼 수도 있었지만, 이 녀석들이 도망갈까 봐 그냥 놔두는 중이다. 박물관의 본당에는 채광 때문에 창문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 깨져있어 바람이 숭숭 들어와 곧 자연스럽게 연기가 빠져나갈 거다.

  "응?"

  드드드드. 상황을 보고 있던 카렌은 자신의 발밑에서 느껴지는 소음과 진동에 순간적으로 몸을 띄우고는 밑에 실드를 생성해 밟고 더 위로 떠 올랐다. 그와 동시에 카렌이 방금까지 서 있던 대리석 타일이 튕겨 나오면서 군용 헬멧을 쓴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후욱, 후욱"

  능숙하게 지상으로 올라온 남자의 방독면에서 거친 숨소리와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고 목표물을 찾으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 갔지?`

  처음 위치를 확인할 때 분명 여기 있었는데? 게다가 이곳은 연기도 없어 뚜렷하게 시야가 보인다. 하지만 좌우 아무리 둘러봐도 목표는 온데간데없었다.

  [위! 위!]

  "컥!"

  귓가에서 무전이 다급하게 들려왔지만, 갑자기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남자는 채 반응하지 못하고 단말마를 남기고 의식을 잃어버렸다.

  당연히 위에서 고고하게 지켜보고 있던 카렌의 솜씨였다.

  `군인? 아냐. 정식적으로 군대는 없어.`

  지금은 연합에서 사라진 집단. 당연히 남자의 군복에는 나라나 소속을 나타내는 어떠한 표식도 없다.

  하지만 밑에서 올라올 때의 움직임. 입고 있는 전술 헬멧과 조끼, 군화까지... 남자의 행색을 봐도 직업군인이다. 그것도 특수부대. 그런데 남자가 쓰러지면서 떨군 총의 생김새가 좀 이상하다. 카렌이 총을 집어 들고 바닥으로 발사했다.

  푸슉

  총소리가 아닌 공기압 소리 나며 뾰족한 바늘이 달린 주사기가 팅 소리를 내며 바닥에 튕겼다. 마취총이다. 확실히 생포 목적이다.

  `잠깐...바닥으로 올라왔단 얘기는...

  "

  "오지 마세요!"

  다급한 엘리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카렌은 커다란 부채모양의 실드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엘리가 있는 곳으로 흔들어 바람을 몰아내고는 재빨리 엘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후욱, 타겟. 이동 중.]

  아까 기절시킨 남자와 똑같은 방독면 소리와 함께 여러 방향에서 들린다. 지금 저깟 놈들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대충 손가락을 튕겨 조금이라도 기척과 소리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반투명한 묵직한 야구공 크기의 구체를 사방으로 날려 보냈다.

  특별한 능력이 없는 한 맞지 않을 수가 없다. 수십 개를 면으로 쏘아 보냈으니 말이다. 그나마도 칼날을 날려 보내지 않은 이유는 피가 뿜어져 나오고 절단된 신체를 엘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다.

  그리고 위력도 나름 조절해서 아마 머리에만 정통으로 안 맞으면 죽지는 않을 거다. 만약 맞으면 더럽게 운이 없는 거고. 거기까지 신경 써 줄 상냥함까진 카렌에게 없었다.

  펄럭?

  마지막 부채질을 끝으로 마침내 연기들이 완벽하게 걷혔다.

  "...이 새끼들이."

  하지만 엘리가 있던 자리에는 엘리를 데리고 사라진 시커먼 구멍만이 있었다. 카렌은 자신이 방금 공격한 놈들을 찾으려 고개를 돌렸다. 최소 몇 놈은 바닥에 쓰러져 있을거다.

  "후우..."

  이것도 예상외다. 땅굴을 얼마나 파놨는지 곳곳에 엘리가 사라진 통로와 같은 구멍들이 솟아 있었다. 구멍 곳곳으로 붉은 피로 이루어진 길이 이어져 있었다. 동료들이 그 짧은 사이에 구해 간 거다. 확실히 능력은 있는 놈들이다.

  `너무 방심했어.`

  카렌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적의도 느껴지지 않는 놈들이라 쉽게 생각했다.

  "주인?"

  뿌리의 단서를 찾으러 갔다가 큰 소리가 들려 돌아온 삼색이 난장판이 되어 버린 주변을 보면서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엘리는? 무슨 일이냐?"

  "지금 찾으러 가야지."

  삼색은 덤덤하게 말하는 카렌의 모습이 더 무서웠다. 차라리 화를 내면 조금 인간적으로 보일 텐데 평소의 표정이랑 비교해도 별다를 게 없었다.

  `아니, 저게 원래 주인을 만났을 때 처음 모습이었어. 같이 지내면서 좀 사람다워졌고 엘리를 만난 뒤로 많이 좋아졌지.`

  그런데 주인을 변화시킨 중요 인물 중 하나가 지금 잡혀가 버린 거다. 거의 1년간 주인을 봐 온 삼색은 지금 주인이 얼마나 화났는지 느낄 수 있었다.

  "다 부실 거냐?"

  삼색이 대리석 타일을 톡톡 치며 말했다. 처음 주인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자신이 자고 있던 지하 몇십 미터를 혼자 힘으로 파내서 자신을 찾아낸 사람이다.

  "저 밑에 구조를 몰라. 무너지면 엘리도 위험하니 그럴 순 없지."

  카렌의 머리는 지극히 차가웠다. 오랜 경험을 통해 지나친 흥분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사실을 안다. 지금껏 숱한 위기를 운으로 넘긴 게 아니다.

  "녀석들이 생포하려 했으니 엘리가 당분간 위험할 걱정은 없을 거야. 들어가자."

  ?

  카렌이 몸에 실드를 두르고 놈들이 지나온 땅굴로 망설임 없이 내려갔다.

  "엄청 깊다."

  삼색의 말처럼 구소련시절에 인력과 재화를 얼마나 쏟았는지 콘크리트로 만든 땅굴이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인다. 게다가 뿌리가 확장했는지 콘크리트가 아닌 길도 많았다. 추적 물약을 사용해 보니 일부러 이리저리 흔적을 남겨 놓았다.

  "이렇게 된 이상 빠르게 전부 간다. 삼색, 네가 앞장서서 그냥 감 오는 대로 가. 가본 길은 기억할 수 있지?"

  "당연하지!"

  카렌은 바닥과의 마찰을 없애주는 미끌포션을 사용하고는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침입자를 막기 위해 막다른 곳에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거침없이 부숴버리고는 쉬지 않고 이동했다.

  `이럴 거면 공격을 하지 말 걸 그랬어.`

  만약 놈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엘리를 인질로 삼을 겸 안전했을 거다. 하지만 복수심에 눈이 멀어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만약 엘리가 다치거나 죽는다면?

  "교단이고 뭐고 모두 죽여야지."

  순간 앞서가던 삼색의 털이 쭈뼛해질 정도의 살기가 땅굴을 타고 흐른다. 부디 삼색은 제발 엘리가 무사하길 바랐다. 아니면 인류는 주인 손에 멸망할지도 모른다.

  * * *

  성자가 만든 비밀조직 `뿌리`. 이들은 모두 전직 특수부대원들이나 각성자로 이루어져 있는 집단이다.

  오늘 한 차량이 자신들의 도시에 들어왔을 때는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가끔 길을 잃은 여행객이나 관광객이 오기도 하니까.

  "뭐지?"

  하지만 정확히 자신들의 방공호 위에 있는 박물관으로 오자 기지에는 비상사태가 선포 되었다.

  "정말 민간인일 수도 있으니 생포한다. 만약 알고 왔다면 어디서 왔는지 정보를 알아야 해."

  뿌리는 기존에 하던 정보수집, 관리 뺴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 했다. 최고 명령권자인 성자와 국장이 모두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성자가 기도하고 있다는 교황측의 말을 믿지 않고 계속 전력으로 성자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젠장...간신히 성자님의 위치를 알아냈는데...혹시 교황측인가?"

  부대원들은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만큼 이번 작전도 무난히 성공할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녀까지는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괴물같은 은발의 남자가 문제였다.

  ?

  "젠장! 대체 그놈은 뭐야?"

  "끄으으윽."

  "아악!"

  곳곳에서 비명과 신음들이 쉬지 않고 새어 나온다. 웬만한 고통은 웃으면서 참을 수 있는 부대원들이지만 이건 맨정신으로 참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니다.

  연막 속에서 기습적으로 날아오는 정체불명의 공격에서도 본능적으로 머리는 피했다. 하지만 다른 부위의 뼈가 젓가락처럼 부러지거나 가루처럼 으스러져 버렸다.

  "커억, 커억."

  "의사! 쟤 숨 못 쉰다. 난 다리 쪽이니 괜찮아. 저놈 부터 봐줘."

  왼쪽 다리가 골절된 군인이 재수 없게 갈비뼈에 공격을 맞은 동료를 향해 눈짓했다. 자신을 치료하던 의사를 보낸 그는 비상용으로 갖고 있던 마약성 진통제를 꺼내 자기 몸에 꽂았다.

  "후우..."

  빠른 속도로 가시는 고통에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쉰 군인은 착잡한 눈으로 덜렁거리는 자신의 왼쪽 다리를 봤다.

  `당분간 작전은 더 이상 못 하겠군. 운 없으면 평생 절수도 있겠어.`

  당장 치료를 받으면 되지 않냐고? 저기 지금 숨넘어가는 놈들이 먼저다. 게다가 피부 밖으로 뼛조각이 불쑥 튀어나와 있다. 개방형 골절.

  어설프게 건드리다가는 감염 위험도 있고, 뼛조각이 신경이나 근육을 건드려서 스스로 응급처치도 못 한다.

  "저..."

  암울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상큼한 목소리가 군인의 귀에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자신들이 데려온 금발의 소녀가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었다.

  "넌 움직이지 말고 내 곁에만 있어라. 물론 우리가 먼저 습격하긴 했지만 여기 놈들이 동료는 좀 끔찍하게 아껴서 말이야. 이성을 잃은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자신도 이 꼴이 되긴 했어도 눈앞의 소녀를 보니 지금은 하늘나라로 간 여동생 생각이 났다. 그 아이도 금발이었지.

  "저도 알아요."

  군인이 말하기도 전에 엘리는 이미 자기 몸에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적의를 느끼고 있었다. 곳곳에서 살기 어린 눈빛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엘리가 괜히 이 군인에게 다가온 게 아니다. 엘리가 복면이 얼굴에 씌워진 채 여기 끌려 왔을 때 여느 사람과 똑같이 당황했었다. 다행히 복면은 벗겨주었지만, 갑자기 박물관에서 어딘지도 모르는 땅굴에 끌려왔으니 말이다.

  `호랑이굴에 끌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댔어.`

  카렌이 읽어 준 동화책이 주는 교훈을 머리에 되새긴다. 그리고는 주변을 자세히 살폈다.

  한 군인의 옆에 붙어있는 의사, 부상이 더 심각한 다른 사람도 있는데 왜 저 사람한테 의사가 가 있을까. 답은 하나밖에 없다.

  "높은 사람이시죠?"

  "여기 책임자긴 하지만 높은 사람은 아니야. 그냥 팀장이지."

  뿌리의 제일 높은 직위인 국장은 지금 성자의 행방을 찾으려 외부에서 활동하다 연락이 끊겨 버렸다. 성자와 국장 모두 실종되어 버린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수동적으로 활동하면서 자리만 지키는 것뿐.

  "이거 치료해줄 테니까. 저를 좀 도와주세요. 말만 전해주시면 돼요."

  "뭐?"

  팀장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엘리는 피투성이인 왼쪽 다리에 손을 얹고는 눈을 감았다.

  "뭐하는..."

  어차피 다리도 골절되어 움직이지도 못하지만 이런 여자아이에게 위협을 느끼지도 않은 팀장은 당황해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엘리의 손이 금방 피에 젖어 든다. 어린 나이에 징그럽고 거부감이 있을 법도 하지만 엘리는 망설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없어. 아저씨가 곧 오실 거야.`

  엘리의 조그만 손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와 상처로 스며들었다.

  "어...어?"

  진통제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상쾌한 기운이 순식간에 남자의 다리를 휘감았고 조각난 뼈는 다시 자신의 제자리를 찾아갔다. 출혈은 멈췄고 늘어지고 끊어진 혈관들은 팽팽해지고 다시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피부마저 흉터 없이 깨끗이 아물었다.

  상식에 벗어난 그야말로 기적. 신성력이란 인간의 이해를 벗어 난 신의 힘이다.

  "성자님의 능력...아니 대체..."

  군인은 순간적으로 지금 한참 교단 내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마녀로 몰린 소녀. 갑작스러운 경기도 지역관의 파문. 그리고 그 지역관이 나타났다고 말하고 다니는..

  `서...성녀? 진짜였어?`

  여파가 클 거라 예상해서 소리 내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미 엘리를 주시하고 있는 많은 시선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뿌리라는 조직은 모두 성자에게 구원과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물론 솔라리도 기본적으로 믿지만, 인간적으로 성자를 존경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소녀가 성자님과 똑같은 기적을 벌인 것이다.

  "제가 치료하기 쉽게 사람들을 모아주세요. 부족하지만 솔라리님이 성녀로 임명하셨어요. 하실 수 있죠?"

  처음으로 엘리가 자기 입으로 성녀라고 소개한 순간, 팀장은 눈앞의 소녀를 보면서 자신을 치료해 준 능력이 아닌 지금까지의 성녀의 행동에서 소름이 돋았다.

  `이 아이는..아니 이분은 대체?`

  누구라도 갑자기 납치당해 낯선 곳으로 끌려 오면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게다가 자신들이 내뿜는 부정적인 감정들 속에서 책임자인 자신을 정확하게 찾아왔다.

  "빨리하세요. 더 이상 늦으면 위험해요."

  `게다가 자신을 납치한 사람들의 생명을 걱정하기까지...`

  팀장은 속으로 깊이 감동했다. 하지만 팀장의 생각과는 달리 엘리는 사람들이 다쳐서 죽는 것보다 카렌에게 죽는 걸 걱정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나 때문에 그러면 안 돼.`

  ?

  엘리는 다급했다. 눈앞의 부대원들은 자기 동료가 다쳤으니 복수심에 앞 뒤 가리지 않고 카렌에게 달려들 거다. 그러면 정말 끝장이다.

  물론 솔라리 교단의 소속인 이 사람들을 위해서도 있지만 카렌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장 컸다. 엘리는 카렌이 자신 때문에 쓸데없는 손에 피를 묻히는 게 싫었다.

  "예는 명을 수행한 다음에 갖추겠습니다."

  팀장이 벌떡 일어섰다. 거칠게 다리를 썼음에도 조금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

  "주목! 성녀님이 치료를 해주실 거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내가 보장한다."

  팀장이 한 말에 엘리가 치료하는 걸 보지 못했던 자들이 웅성거렸다.

  "저게 무슨 말이야? 성녀라니?"

  "팀장 다리 다치지 않았어? 어떻게 저렇게 멀쩡해졌지?"

  엘리는 팀장의 호위 아래 환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하나, 둘씩 환자들이 일어날 때마다 모두가 엘리를 보는 눈빛이 순한 양처럼 바뀌기 시작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