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은 죽지 않는다
"경기도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좋은 곳이야."
"저도 놀랐습니다. 그래도 익숙해져 보니 도시와는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절지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커다란 밭에는 갖가지 고유한 색깔을 자랑하는 약초들이 줄지어 열을 이뤄 아름답게 햇살을 머금었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땀방울을 흘리는 청년이 밭일을 하고 있었다.
"요즘 보기 힘든 젊은이구먼."
자신도 이제는 확실히 나이가 있는지 저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청년을 보니 흐뭇해진다.
"이쪽으로 오시죠."
"허? 이런 곳에 카페가 있구나."
적지 않게 살아온 절지아의 눈에도 이곳은 참 신기한 것이 많았다. 갑자기 반파된 도시에서 매끈한 포장도로에다가 밭까지 있다. 거기다가 노란 민들레가 예쁘게 그려진 카페가 화룡점정이다.
딸랑!
"어서 오세요!"
오영준이 카페에서 반갑게 둘을 맞아 주었다.
"형님 저 왔습니다. 여기 이분은 저를 어렸을 때부터 돌봐 준 할아버지세요."
절지아가 여느 할아버지와 같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오영준에게 악수를 건넸다.
"이 녀석이 폐를 끼치지 않았을까 걱정입니다."
"한길이가 워낙 잘해서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음료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뭘 드릴까요?"
절지아가 뒤쪽 상단에 있는 메뉴판을 살펴보는데 신기한 메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영양 과일 주스? 저게 뭡니까?"
딸기, 오렌지, 키위 등 과일주스는 카페 어디를 가나 있지만, 앞에 영양은 왜 붙었을까.
"꿀과 맨드레이크를 곁들인 주스입니다. 그렇게 많이 달지 않고 웬만한 영양제보다 훨씬 좋습니다."
"이 늙은이에게 딱 맞겠습니다. 그럼 저는 영양 오렌지 과일 주스로 하겠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맨드레이크라니... 그 정도로 효과가 좋다는 말이겠지.`
식물인간을 일으켜 세울 정도로 성분이 건강하고 착하다는 의미로 절지아는 받아들였다.
"그래. 엘리는 언제 오느냐?"
"할아버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며 저 멀리서 금발을 가진 여자애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그 뒤에는 은발 머리의 남자가 이어서 들어왔다.
"아이쿠! 몰라보게 컸구나! 옷도 정말 잘 어울리고 말이야."
절지아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엘리를 반겼다. 처음 만났을 때는 꼬질꼬질한 아이였지만, 이제는 길을 가다 누구나 한 번씩 돌아볼 귀여운 소녀가 되어 있었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나도 그랬단다. 그런데 엘리야. 할아버지에게 딱 하나만 보여주겠니?"
"네? 뭔데요?"
"놀라지 말거라. 내가 상처를 조그맣게 낼 테니 치료를 해주렴."
깔끔하면서도 정확하게 성녀를 판명하는 방법이다. 자신이 아무리 엘리를 예뻐한다고 해도 확인할 건 해야 한다.
"알겠어요."
"그럼 시작하자."
"그래. 녹화도 좀 하자."
스윽, 엘리가 동의하고 한길이 영상을 찍기 시작하자 절지아가 손날을 세워 빠르게 자신의 왼쪽 팔을 얇게 그었다. 정확히 피부만 갈라졌고 상처에서 피가 방울방울 맺혔다.
엘리가 재빠르게 상처 부위에 자기 손을 갖다 대고는 눈을 살포시 감았다. 그리고 파란빛으로 물드는 엘리의 손.
비록 얕은 상처였지만 순식간에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
절지아가 너무나 상쾌한 느낌에 탄성을 질렀다. 예전에 한 번 성자님을 모실 때 치료받았던 느낌이랑 똑같다. 틀림없다.
?
"성녀님을 뵙습니다."
절지아가 곧바로 자신의 한쪽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엘리에게 숙이며 예를 표했다.
"할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엘리가 당황하며 절지아를 일으키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껏 눈이 있어도 성녀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무례가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잡혀가시게 놔두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성녀를 편하게 만들어주는 게 당신이 할 일 아닌가?"
엘리의 뒤에 서 있던 은발의 남자가 한 말에 절지아의 머리가 주먹에 한 방 맞은 듯 멍해졌다.
`아아...이 늙은이가 또 어리석었구나.`
격식보다 우선인 게 마음인 것을.
"알겠습니다."
"맞아요. 아저씨의 말처럼 편하게 대해주시는 게 저한테 오히려 좋아요."
"저분이 카렌님이십니까? 이 늙은이의 시야를 넓혀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오..`
나이가 60은 족히 넘어 보이는 사람이 자신에게 정중히 감사를 전하자 카렌은 눈에 이채가 서렸다.
지위도 높고 무력도 꽤 있고, 나이도 있으면 아집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이 전혀 없다.
"전화로 말씀드린 이단 심판관님입니다."
"오오오...정말 죄송하지만 카렌님께도 확인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해."
이단 심판관은 카렌도 듣기만 했지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이렇게 본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확인 방법도 궁금했다.
"손바닥에 이단심판관을 상징하는 문양이 있을 텐데, 그 손으로 제 손을 잡아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절지아가 내민 손을 카렌이 망설임 없이 잡았다. 그런데 단순한 악수일 뿐인데 절지아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나왔다.
"아아아...신이시여."
절지아가 맞잡은 손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청량감에 무릎을 꿇고는 신을 부르짖었다.
"뭔데 그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이단 심판관의 문양에 닿으면 솔라리님이 인정한 자는 기분 좋은 상쾌함을, 반대의 경우에는 낙인이 찍히며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그래? 그거 편하네."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단 심판관의 문양은 극히 까다롭게 대상을 판명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절지아는 자신의 평생 신앙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감격했다.
"죽지는 말고. 미리 말하는데 나는 그냥 성녀의 보호자이자 조력자일 뿐이야. 임시직이라 이 일만 끝나면 내려 놓을 거야."
카렌이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심판관님."
이단 심판관은 성녀와 마찬가지로 신이 직접 선택한 독립된 일인 기관이다. 교황 이하 누구든 직위를 해제할 수 있고 말 그대로 심판을 내릴 수 있다. 자신이 뭐라고 거역하겠는가. 다 뜻이 있으시겠지.
"그런 예의는 지겨우니 앞으로 하지 말자고. 그런데 우리가 나타났다고 해도 이제 와서 교단 쪽에서 들을 것 같아?"
`젊어 보이시는데 지겨우시다니?`
절지아는 의아하긴 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궁금증을 풀 때가 아니다. 카렌의 다음 질문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 우리가 감성에 젖을 나이는 아니잖아?"
앞으로 자신이 할 불경할 말들에 대해 절지아는 속으로 신에게 용서를 빌었다.
"듣지 않을 겁니다. 영상을 보여준다 해도 조작이라고 몰아가면 끝입니다."
"역시 저번에 본대로 개판이군."
"죄송합니다. 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그것도 있긴 한데···. 애초에 너무 경직되어 있어."
어찌 보면 군대보다 더 위아래가 확실한 조직이다. 그 때문에 절지아가 젊은 성전사들의 말에 더욱 신선함과 충격을 느꼈기도 했고.
"그런데 엘리 말이야. 신성력이 성녀치고는 좀 약하지 않아?"
절지아도 이상하게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왕년에 본 성자는 단번에 수십을 그 자리에서 치료했으니까.
"아직 나이가 어리셔서 그런 게 아닙니까?"
"신성력이 근육도 아니고 그런 건 아니야. 성자가 살아 있어서 신성력이 나뉘어서 그래."
"성자님이요? 경축할 만한 일입니다."
절지아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성자에, 성녀에, 이단심판관까지...솔라리님이 여기까지 안배를 해놓으셨나 싶었다.
"너무 좋아하지 마. 차라리 죽은 게 더 좋았을 수도 있어. 우리에게도, 그에게도."
"그렇...습니까."
절지아의 목소리에 슬픔이 담겼다. 성자를 호위하던 시절에 얼마나 자부심을 느꼈는가. 절지아는 과거에 직접 성자의 능력을 눈앞에서 본 일인이었다.
"임무를 주지."
"제 목숨을 다해 받들겠습니다."
"애들 좀 잘 모아봐. 뒤집어엎게."
"애들...이요?"
경건한 마음으로 듣고 있던 절지아가 뒷골목에서 쓸 법한 카렌의 말투에 눈을 놀라서 되물었다.
"내게는 신이 직접 준 명분도, 권한도 있어. 그래도 살릴 놈들은 살려야지. 내가 다 죽이길 원해?"
무엇보다 제일 큰 이유는 나중에 쳐들어오는 놈들 막으려면 인재는 많을수록 좋다.
순간 카렌이 눈을 번뜩이자 절지아의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래, 신이 평범한 인간에게 이단 심판관의 자리를 주지는 않으셨을 거다.
"그리고 당신도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어? 성물이 힘을 잃었고, 교단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는 위치 아닌가?"
카렌이 한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절지아의 가슴에 꽂혔다. 지금껏 끝없이 고민했던 화두를 남의 입에서 들으니 더욱 고통스럽지만 명확하게 정리되었다.
"제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마음이 후련해진다. 인정하면 평생 쌓아 온 스스로가 사라질 것 같아서 무의식적으로 피했던 거다. 눈을 가렸던 안개가 걷히며 상쾌한 느낌이 든다.
"저는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기회를 주시면 마지막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늙은 성전사의 진심을 보며 카렌은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죽어도 좋다는 말은 진심이다. 하지만 이자는 도망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바로 잡으려 하고 있었다.
"썩은 부분을 도려낼 기회를 주지. 내가 말하는 게 마음에 안 들면 신이 준 기회라고 생각해. 진짜 마지막 기회야."
"꼭! 해내겠습니다."
"그래. 혹시 말 안 듣는 녀석 있으면 눈에 띄지 않게 여기로 데려오고. 잘 알아듣게 말해줄 테니까."
뭘 말해준다는 걸까. 절지아가 예상하기에 평화적인 방법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지아는 그 수단을 반드시 최후의 최후에만 쓰겠다고 결심하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달렸어. 잘해봐. 나는 그동안 엘리 교육이나 시키고 있을 테니."
"그럼 지금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
절지아가 나가고 뒤에 있는 소파에서 삼색의 머리가 쏙 튀어 올랐다. 지금까지 엿듣고 있었냐.
"나 저 인간 마음에 든다."
"처음 봤잖아."
"요즘 보는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랑 닮았다. 충분히 마니아층이 있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래? 어떤 면에서?"
보통 젊고 잘생기고 예쁜 사람이 인기가 많지 않나?
"노년미에서 오는 능숙함으로 뭐든 해결하는 거다. 게다가 저 인간은 백발에다가 몸도 좋으니 완벽하다."
"...세상이 많이 변하긴 했어. 드라마나 보러 가자. 이번에는 뭐야?"
카렌이 삼색을 안으며 카페를 나가서 집으로 향했다.
"옛날 일상물 드라마다. 응답...무슨 시리즈였다. 1994,1997,1998이 있다."
"엘리랑 보기 좋겠네. 근데 드라마가 교육에 좋을까?"
"저번에 얘기 해봤는데 여신이 엘리에게 환영으로 실제 역사를 보여줬다고 한다. 근데 거기 전쟁이나 아침드라마 뺨치는 역사도 있었다."
"대체 그 여신은 뭘 했던 거야?"
엘리가 저렇게 바르게 큰 게 기적이다. 카렌은 한숨을 푹 쉬고 삼색을 안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엘리가 여신과 다시 대화하기 전에 빨리 제대로 된 교육을 해야겠어.`
나쁜 친구 옆에 있으면 물드는 법이다. 카렌의 손바닥에 있는 심판관의 징표가 항의하듯 깜빡였지만, 오히려 카렌은 하늘을 흘낏 째려봤다.
* * *
"이 집도 오랜만에 와 봤군."
?
절지아가 차고를 나서며 집을 잠시 되돌아봤다. 맨날 후배들과 같이 신전에 있는 기숙사에서 먹고 잤으니 통 올 일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절지아의 의상은 평소랑 달랐다. 깔끔한 옷차림은 어디 가고 검은색 바탕에 가슴에 빨간 줄무늬가 그어져 있는 바이크슈트, 옆구리에는 헬멧을 끼고 있었다.
?
"너도 오랜만이구나."
부르르릉
성전사가 되기 전 젊었을 때 즐겼던 취미. 차고에서 끌고 나온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자 우렁찬 엔진소리와 함께 그동안 쌓였던 먼지가 공기 중으로 흩날렸다.
1986년 할리 데이비드슨의 초기형 헤리티지 소프테일 모델. 엔진 마력 1,340cc, 리터급 오토바이다. 물론 요즘 나온 신형 오토바이들에 비해 효율과 성능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틈틈이 관리를 해준 덕에 아직 쓸만하다.
"오랜만에 달려보자꾸나."
대중교통으로 움직이기엔 너무 느리다. 이제부터는 시간이 생명이다. 게다가 요즘 들어 대주교와 교황을 중심으로 뭔가 하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려오니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뱀 같은 자들.`
그들도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들을 봐 온 교단의 역사를 함께해 온 절지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르릉.
오토바이의 속력을 올려주는 스로틀을 당기자 젊었을 적 심장을 뛰게 만든 배기음과 진동이 전해져 온다. 마치 괴물의 울음소리 같다. 헬멧으로 주름진 얼굴을 가리자 탄탄한 몸만으로는 누가 봐도 건장한 청년으로 보였다.?
"허허...늙어서 주책이구만."
70살이 넘어서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뭔가가 가슴속에서 끓어오른다. 아니, 단순히 오토바이의 엔진음 때문이 아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 얼마 만인가. ?너와 함께하는 마지막 길이 되겠구나. 주책맞게 설레기도 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귀여운 성녀님과 세상을 당당히 오시하는 젊은 이단 심판관님을 볼 때부터 늙은 성전사의 마음은 두근거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신 솔라리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다. 자신의 과오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절지아는 잘 알고 있었다.
`교단은 죽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야 해.`
처음 설립된 가치를 잃어버렸다. 낮은 자들의 방패로 시작했던 교단은 높은 자들의 사치품이 되어 버렸다.
부아아앙!
오래된 친구와 함께 늙은 성전사는 참회의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일단 경기도 지역관부터 시작하지. 오랜만에 후배들을 보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