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노인
집으로 돌아온 엘리는 카렌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눴다.
"좀 어떠냐?"
"저는 괜찮아요. 후련한 마음도 들고요."
카렌이 엘리의 얼굴을 보니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안색이 전보다 밝아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참 강한아이야.'
어린나이에 어른도 견디기 힘든 날들을 보내 왔음에도 착하고 긍정적이다.
?
"다행이구나.
"
"다 아저씨 덕분이에요! 제가 나중에 아저씨를 꼭 지켜드릴게요."
엘리가 주먹을 불끈 쥐고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카렌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음...이런 것도 나이 들면 사라지겠지?'
저번에 백화점에서 삼색녀석이 한 말이 떠오른다. 그거 뭐였더라....
"각인효과."
"그래. 그거. 응?"
이제보니 카렌의 생각이 아니라 옆에서 어느새 귓속말을 하고 있는 삼색이었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엘리가 못 들었는지 몸을 카렌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안 지켜줘도 된다. 지금으로도 충분해."
"아저씨가 너무 강한 게 좀 문제긴 해요..."
카렌의 말에 엘리가 시무룩해졌다. 하긴 돈으로나 실력으로나 카렌을 도와줄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 드래곤 로드와 친구 하는 사람인데...
?
"아니다! 할 수 있다! 주인은 게을러서 먹이고 재워주기만 해주면···."
"이 녀석이!"
"아악!"
까불다가 단숨에 잡혀서 카렌의 품에 안긴 삼색의 머리를 거칠게 부비적 거렸다. 털이 헝클어지자 삼색이 질색하며 자신의 앞발로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슬슬 교단 쪽도 얘기해야 할 것 같아. 일단 사람을 한 명 만나보자. 그 다음은 비밀조직에 대해 알려줄게."
"네. 저도 좋아요."
엘리는 처음으로 자신이 성녀라는 사실이 좋았다. 자신의 힘으론 부족하니 교단과 함께하면 아저씨를 더 편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충분히 맛있는 걸 많이 먹여드리고 좋은 곳에서 주무시게 할 수 있을 거다.
한 사람을 위해 교단의 힘을 움직인다는, 누가 들으면 황당한 생각이지만, 엘리는 스스로의 생각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길이 자신이 잘 아는 지역관이 있다더군. 이름이 절지아라던가?"
예상치 못한 반가운 이름에 엘리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할아버지!"
* * *
?
"지역관 절지아. 그대는 더 할 말이 있는가?"
대주교의 엄한 목소리가 유리 벽 뒤에서 들려 왔다. 심문관의 곁에는 성전사가 아닌 처음 보는 자들이 호위를 서고 있었다.
"대주교님."
"뭐...뭔가?"
살짝 피곤이 가미된 절지아의 목소리가 들려 오자 대주교의 몸이 순간 움찔거렸다. 자신의 앞에 있는 강화유리는 총알도 너끈히 막지만, 대주교는 눈앞의 이 노인이 그깟 총보다 훨씬 위험한 인물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말해줄 수 없다. 그대도 여길 나가서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이다."
엘리에 대한 정보는 원래도 극비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공식적으로 더더욱 밝힐 수 없게 되었다. 여의도 지부에서 사라져버렸고, 가둬 둔 장소 또한 알려지면 손가락질받을 곳이었기에 제대로 된 조사도 못 했다.
`어떻게 이리되었는가.`
절지아는 대주교 옆에 있는 자들을 매서운 눈길로 훑었다. 교단의 사람을 지키는 자들이 언제부터 성전사를 상징하는 하얀 외투를 입지 않았을까.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 바깥은 여전히 성전사들이 지키지만, 주요 인사들을 지키는 일을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각성자들이 맡고 있었다.
"그럼 지역관 절지아에게 선고를..."
"무엇이 그리 겁나십니까? 우리에게 솔라리님 말고 두려워해야 할 무언가가 있습니까?"
`세속의 죽음조차 솔라리님 곁으로 돌아가니 무서울 게 무엇인가.`
성전사 훈련소부터 시작해서 휴게실, 숙소까지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글귀다.
"그대는 함부로 말을 지껄이지 말라!"
대주교가 절지아의 말에 수치심으로 얼굴이 빨개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겠습니다."
"지역관 절지아는 마녀에 협조함으로 죄가 중대하다. 하지만 지금껏 교단에 행한 공훈을 헤아려..."
절지아가 지친 눈으로 심문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파문이다."
평생의 업을 비극적으로 끝내게 된 절지아가 눈을 감았다. 사실 대주교가 직접 왔을 때부터 대략적으로 추측이 가능했다.
'이렇게 끝날 것을...오히려 마음이 편하구나.'
"절지아. 처분을 달게 받아들입니다. 다만 한 가지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말하라."
"그 아이를 마녀로 판명하는 일은 누가 했습니까?"
"말해줄 수 없다."
절지아는 대주교의 말을 듣고 눈을 감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대로 된 변호의 기회조차 그 아이에게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바늘로 찌른 듯 따끔거린다.
"지금부로 그대는 성전사가 아니다. 지체없이 신전을 나가라."
대주교의 말대로 절지아는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옷걸이에 검은색의 와이셔츠와 바지, 하얀 외투를 걸었다.
"이제는 입지 못 하겠구나."
차라리 죽음이 나을 정도로 파면은 종교인들에게 비할바 없는 수치다. 게다가 절지아같은 높은 직위에 있던 성전사에게는 그 의미가 더 컸다.
절지아는 마지막으로 자신처럼 오래된 사물함을 쓰다듬고는 밖으로 나왔다.
"지역관님! 이제 나오셨습니까.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 성전사도 아니니 그렇게 부르지 말게."
"설마...파문입니까?"
기다리고 있던 성전사들이 일제히 경악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제대로 조사도 안 하고 그게 뭡니까?"
"그냥 자기들 눈에 거슬리던 절지아님을 쫓아낸 겁니다."
"이대로라면 서울 지부도 외부에서 온 놈들 손에 들어갑니다. 한 번 같이 얘기해 보시지요. 저희도 힘을 합치겠습니다."
"어허! 성전사들은 팔과 다리일세. 머리가 정하면 따르는 법이지."
주변의 성전사들은 절지아의 지엄한 말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참 존경하는 분이지만 이럴 때 보면 너무 고지식하시다.
"그 머리가 새로운 팔다리를 구하고 있잖습니까."
"사제들이 우리를 믿지 않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게다가 한길 녀석을 이단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저희가 그 녀석을 꼬마 시절부터 봐 왔습니다."
"한길을?"
절지아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파문당할때조차 덤덤했지만, 갑작스럽게 들린 한길의 소식에 절지아의 가슴이 철컹하고 무겁게 내려앉았다.
"성물을 훔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금 연합 교단에서 이단으로 선포 했습니다."
"한길이 그 녀석이..."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쉽게 이단으로 선포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절지아는 자신이 지금까지 본 한길을 믿었다.
성전사로써 한길은 신입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졸졸 자신들을 따라다녔다. 자신들과 같이 기도했으며, 맨날 한길이 달고 사는 말이 있었다.
[저는 꼭 할아버지처럼 될 거예요!]
한길이 솔라리님께 인정받아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자신들이 얼마나 기뻐했나.
"그 녀석이 이단일 리 없습니다. 절지아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건...내가 좀 더 알아보겠네. 조금 더 지켜보세나. 곧 성자님의 기도가 끝나시지 않나."
"그것도 이상합니다. 성자님이 기도하러 들어가신 지도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절지아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성자님이 나와서 해결해 주시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그날은 기약이 없다.
절지아는 자신도 답답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후배들을 타일렀다.
"마지막으로 기다려 보세. 성자님만 나오시면 되니까."
인간이 세운 가장 높은 직위가 교황이지만 신이 직접 세운 성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문제는 성자가 공백이거나 지금처럼 기도에 들어가면 교황이 성전사들의 통솔권을 갖는다.
"일단 기다려 보게. 다 솔라리님이 뜻이 있지 않겠나"
"요즘 솔라리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선배님은 뭔가를 아십니까?"
"... 나도 잘 모르겠네."
성전사들이 절지아의 목소리에서 회의감이 배어나오자 눈이 동그라졌다. 파문 때문일까, 아니면 아끼던 후배가 하루 아침에 이단이 되어 버려서 그럴까. 항상 커 보였던 선배가 처음으로 제 나이에 맞게 보였다.
"난 그럼 이만 가지. 저들이 자네들과 나랑 오래 얘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걸세."
절지아는 성전사들을 돌려보내고는 발길이 가는 대로 걸었다.
`젊은 친구들이 역시 가만히 있지를 않아.`
탓하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젊은이들이 화를 내는 건 자신들 같은 늙은이들의 잘못이다.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기는커녕 애초에 길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그 때 뭔가 했어야 하나...`
자신이 너무 수동적으로 행동했을까. 성물이 빛을 잃었을 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외부인들이 서서히 교단을 좀 먹어갈 때도 강하게 항의하지 않았다.
`내가 잘못된 것인가···.`
성전사가 된 이후로 흔들리지 않았던 절지아의 신념에 균열이 생긴다. 솔라리를 향한 의심이 아니다. 교단이라는 조직에 대한 회의였다. 또한 성전사는 오로지 복종해야 한다는 평생의 다짐이 과연 옳을까...라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어찌해야 하나..."
절지아의 마음을 대변하듯 날씨조차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우중충하다.
평생을 성전사로서 살아왔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과연 무엇이 신의 뜻일까.
띠링.띠링
"솔라리 신이시여..."
?
한창 절지아가 걸으며 속으로 기도하며 걷고 있자 마치 응답하듯 주머니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어디보자.."
모두가 워치를 쓰는 지금 핸드폰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것마저도 스마트폰이 아닌 반으로 접히는 폴더폰.
그래도 신성력 덕분에 노안은 오지 않아 돋보기나 글자를 키울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다.
"솔라리시여, 감사합니다. "
절지아가 맨날 책이나 핸드폰을 볼 때마다 하는 건강에 대한 감사를 중얼거리며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절지아입니다."
[할아버지?]
이제는 남자가 되어 버린 아이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 오자 절지아는 속으로 다시 기도를 올렸다.
"한길이구나. 잘 지내느냐? 밥은 잘 먹고?"
한길이 교단으로부터 이단이라고 선포되었지만 절지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어렸을 때부터 지켜봐 온 할아버지로서 한길을 대했다.
[예. 할아버지는 좀 어떠세요?]
"나는 괜찮다. 잘 사는 걸 들으니 됐다. 앞으로도 건강하게 지내거라."
여기서 한길의 얘기를 더 들어버리면, 파문당하긴 했어도 교단에 죄를 짓고 한길에게는 독이 된다. 하지만 이어진 한길의 말이 통화를 끊으려는 절지아를 막았다.
[성녀님이 저희와 함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성녀님이라니? 네가 그 의미를 모르진 않을 텐데?"
일반인도 아니고 신입이지만 성전사였던 한길이 그 의미를 모를리 없다.
[금발머리의 귀여운 여자아이를 아실 겁니다. 성녀님이 할아버지를 아시더라고요.]
"알지. 그럼 알지."
절지아의 목소리가 안도감으로 떨려왔다. 살아있었구나.
"그런데 엘리가 성녀님이라고?"
[네. 물론 교단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만···.]
"후...내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자신은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무엇보다 성자와 성녀가 동시에 나타날 수 없다는 상식이 있기에 쉬이 믿기는 어렵다.
[일단 한 번 만나보시죠. 저도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뵙고 싶습니다.]
"그러자꾸나."
절지아는 이 상황을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자신은 성전사도 아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신만 위험하다.
[그리고 한 분 더 계십니다.]
"또 무엇이냐? 이미 이 늙은이의 심장은 위험하다. 이놈아."
[그럼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하실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이건 다르게 보면 성녀님의 출현보다 더 큰 사안일 수도 있습니다.]
이 녀석이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럴까. 절지아는 숨을 고르며 곧 들려 올 한길의 말을 기다렸다.
[이단 심판관님이 저희랑 계십니다. 할아버지를 만나보고 싶으시답니다.]
"끄읍...이...이단심판관?"
과연 한길의 장담한 대로 연식이 오래된 절지아의 심장이 살짝 멈출 정도로 여파는 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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