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세상의 미래다
"지하에 있는 소녀가 사라지고 성물도 분실했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대주교가 측근에게 소리를 버럭 지르며 책상을 쾅 쳤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다른 지부도 아닌 철통같은 경비를 자랑하고 있는 여의도 지부를?
"갑자기 삼색 곰이 나타나서 대부분의 경비병력이 제압을 위해 달려 갔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대주교의 반응을 예상한 듯 측근은 자신의 워치를 조작해 준비해 놓은 영상을 틀었다.
[크아아앙!]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자리에 올라와서 갖가지 것들을 다 본 대주교도 저런 곰은 처음 봤으니까. 게다가 얼마나 재빠르고 힘이 좋은지 성전사들이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곰이 좀 특이하긴 하지만, 여의도는 그 노인네가 있잖아. 절지아."
성전사들의 전설. 눈에 가시처럼 성가신 인간이긴 하지만 실력 하나는 누구나 인정한다.
"'그' 소녀와 어울렸다는 혐의로 심문실에 있었다고 합니다."
"젠장"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그 노인이 없는 여의도 지부는 50% 이상의 전력이 빠진 거나 다름 없으니.
"일단 모든 정보를 지우고 있습니다만 저희가 할 수 있는게 많지 않습니다."
소녀에 대한 사실은 극비다. 만약 정말 성녀라고 밝혀진다면 교단 자체가 뒤집어지고 교황까지 위험해진다. 마녀인지 성녀인지 검사 따위를 할 생각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성자와 성녀가 동시에 공존할 순 없으니 기도중이라고 알려졌던 성자를 보여달라고 아우성칠테고, 그럼 모든게 끝장이다.
"소녀에 대한 추적은 비밀리에 하고 관련된 일 전부 덮어. 여의도 지부 주교도 책임을 물어 치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추적에 대한 속도와 정확성이 너무 떨어집니다."
"방법이 없다. 대신 다시 나타나도 소용없게 다른 쪽으로 손을 좀 써야겠어. 교황님께 연락해서 긴급 대주교 회의를 소집해. 그리고 신입 성전사 한 명이 사라졌다고?"
"네. 소란에 갑자기 사라진 후 어떤 행적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주교의 머리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성물...신입 성전사...
"그 신입성전사가 성물을 들고 도망쳤다고 공표해라. 최대한 크게 이슈를 만들어. 모든 일을 덮어버릴 정도로 자극적으로 말이야. 이단으로 몰아도 좋다."
대주교의 표정이 음습해졌다. 성자를 '그렇게' 만든 뒤로 이제 자신들에게 물러날 곳은 없었다.
?
* * *
"이건 어때? 이건?"
벌써 수십 벌의 옷이 채린과 엘리의 옆에 쌓여 있었다.
정작 채린 자신의 옷장에는 비슷한 스타일의 운동복만 한가득하지만, 엘리는 어떤 옷을 입혀도 찰떡같이 잘 어울리니 멈출 수가 없었다.
짝짝짝?
지금도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신부를 기다리는 신랑처럼 모두는 엘리가 새 옷을 입고 나올 때마다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같이 오길 잘했어.`
채린이 아니었다면 아마 대충 몇 개 입어보고 사 가지 않았을까.
"이런 옷은 처음 입어봐요."
엘리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낯선 듯 계속 뒤로 돌아봤다.
"난 이게 제일 예뻐. 둘 생각은 어때?"
채린이 카렌과 강이사에게 물었다.
"예쁘네."
"진짜 예쁘십니다."
워낙 본판이 귀여우니 옷이 엘리를 입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나이 때 입어서 가장 잘 어울리는 옷들도 있으니까. 많이 입어봐야지."
"그럼 내가 사진 찍어준다!
"
사진찍기에 특화된 방송용 워치를 가진 삼색이 번쩍, 번쩍 플래시까지 터뜨리며 좌·우로 움직이며 엘리의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살짝 턱을 당기고, 오른쪽 발은 살짝 앞으로!"
"이...이렇게요?"
"그렇지!"
삼색이 마치 전문 사진사처럼 박력 있게 지시를 내리자 엘리가 얼떨결에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모두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엘리님이 10살이라니...믿기지가 않네요. "
같은 나이의 딸을 키워 본 경험이 있는 강이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어..."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채린이 뭔가 말하려는 듯 움찔거리자 카렌이 물었다.
"뭔데?"
"아냐. 그건 내가 말할 게 아니라 엘리가 말해야지. 어? 저 옷도 예쁘다."
채린이 굉장히 어색하게 말을 돌리고는 또 다른 옷을 들고 엘리에게 다가갔다.
"뭔가 있습니다."
"그래."
카렌이나 강이사나 눈치하고는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채린을 수상하다는 듯 바라봤지만 억지로 캐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 이유가 있을테니까.
채린과 엘리가 함께 탈의실에 들어가고 카렌과 강이사는 탈의실 앞 소파에 앉아 다시 얌전히 대기하기 시작했다. 둘 다 딱히 쇼핑을 즐기는 취향은 아니지만 엘리가 나올 때마다 새로우니 질리지가 않는다.
"주인! 이거 어떠냐?"
그 짧은 시간을 못 참고 토리와 사라졌던 삼색이 목에 빨간 리본을 달고 나타났다. 자기 스스로 맬 순 없으니 토리가 등 뒤에서 매 준 게 분명했다.
"살찐게 좀 가려지긴 하네."
리본이 삼새의 얼굴만하다. 그런데 ?자기 손으로 리본을 달고 오는 고양이도 그렇고, 아무리 신수라지만 쥐가 리본 매는 법은 어떻게 안 거야?'
"우아아아! 삼색님! 너무 잘 어울리세요!"
탈의실에서 나오던 엘리가 삼색을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에헴! 봐라 주인!"
삼색이 단번에 우쭐해져서는 한 발, 한 발, 거만함이 담긴 발걸음으로 슈퍼모델이 런웨이를 하듯 내디뎠다.
"그거 네 털 묻어서 무조건 사야 하니 간식값에서 뺀다."
"꾸잉? 그건 아니다!"
"뭐가 아니야. 먹을 건 필수품이라 마음껏 사줬지만, 그건 사치품이잖아. 너 옷도 안 입는데 무슨 리본이야."
"..."
삼색이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카렌을 봤지만 카렌은 옆에서 느껴지는 삼색의 시선은 무시하고 일부러 엘리만 봤다.
"내 눈에는 그게 제일 잘 어울려."
연분홍색 드레스에 포인트로 목 부분에 노란색 넥카라가 들어간 옷은 엘리의 금발과 하얀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
"그래요?"
카렌의 말에 엘리가 다른 사람들이 한 칭찬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기뻐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내 눈에도 이게 제일 예뻤는데...`
참 별것도 아닌데 아저씨와 마음이 맞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럼 이제 가자. 벌써 아침이야."
백화점 안에는 의도적으로 창문과 시계가 거의 없기에 쇼핑을 정신없이 하다 보니 어느새 4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어떤 걸 포장해드릴까요?"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와서 물었다. 카렌이 뭐라 말하려던 찰나 엘리가 재빨리 입어 본 옷 중에 하나를 가져왔다.
"저는 이거요."
엘리가 고른 옷은 지금껏 고른 옷 중에 가장 가격이 싼 옷이었다. 어쩐지 계속 옷을 입을 때마다 옷에 달린 가격표를 확인하더니만.
"저는 이거 하나면 돼요. 이게 제일 예뻐요!"
엘리가 자신이 고른 옷을 품에 꼭 안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숙한 아이라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산전수전 다 겪어 온 사람들과 영물이다. 속아 넘어갈 리가 없다.
"지금껏 입어 옷들 전부와 잘 나가는 제품들 전부 사지."
카렌은 손가락으로 쌓인 옷들과 아동복 매장 전체를 훑었다.
"돈은 회장님 지시로 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안으로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응? 회장이?"
"예. 원하시는 모든 걸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고맙다고 전해 줘."
카렌도 돈은 신경 쓰지도 않을 정도로 많았지만, 이런 호의는 그냥 받는 게 서로 마음이 편하다.
"예. 회장님께서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직원들이 와서 바쁘게 옷들을 포장하러 사라졌다. 엘리는 갑자기 벌어진 일에 멍하니 있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는 카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전 정말 괜찮아요! 네?"
당황한 엘리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카렌의 옷자락을 잡고 말했다. 이미 아저씨가 구해주신 일도, 자신의 억지를 받아 준 것만으로 정말 고마웠다.
"엘리야. 카렌이 안 사줬으면 내가 사주려고 했어. 우리 돈 많단다?"
채린이 엘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도...이건 너무 비싸요! 두 분도 나중을 위해 저축하셔야죠. 맞아요! 노후 준비랬어요."
"응?"
S급 헌터와 세계최고의 연금술사에게 노후라...
채린은 혹시나 엘리가 상처받을까 봐 뒤로 돌아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고 카렌은 엘리를 기특하게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의 행동에 엘리가 영문 몰라 채린과 카렌을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왜 그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네가 잘 커주는게 우리 저축이다."
카렌이 채린 자신의 뒤를 이어 엘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아이는 사회의 저축이자 미래이기도 하고 실제로 이 아이는 인류를 지키는 성녀가 될 테니까.
"그러니까 어른이 주면 얌전히 `고맙습니다` 하고 받으면 된다. "
머리로부터 시작된 손의 따듯한 감촉은 엘리의 심장까지 전해지며 엘리의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엘리는 습관적으로 입술을 꽉 깨물어 참았다.
"고맙습니다."
"그래. 그럼 이제 가자. 아! 그리고 이거 받아라."
카렌이 건네준 은빛 팔찌는 엘리의 손목에 맞춘 듯 딱 맞았다.
"네가 커질수록 자동으로 크기는 늘어날 거야."
"감사합니다! 저 이런 거 처음 받아 봐요."
"그래. 그거 웬만하면 벗지 말고. 좋은 거란다."
"죽더라도 벗지 않을게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왠지 엘리가 말투나 카렌을 보는 맹목적인 눈빛이 점점 강이사를 닮아가는 것 같다.
"가자. 한길은 아직 안 끝났어?"
"그쪽도 거의 다 끝났습니다. 지금 내려가시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럼 내려가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중에 엘리가 옆에 달린 거울에 비친 자신과 입고 있는 옷을 계속 보았다.
`마음에 쏙 들었어.`
`귀여우시군.`
엘리 스스로는 나름 티 안 나게 본다고 했지만, 그 모습을 본 모두는 엘리가 민망할까 봐 일부러 모른 척해주었다.
"여기인가?"
남성복 매장 층으로 내려오자 깔끔한 정장들과 한 편에는 요즘 유행하는 아웃도어 상품들이 주르륵 진열되어 있었다.
"저쪽입니다."
층 자체가 워낙 넓은 탓에 일행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한길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움찔
그런데 계속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던 엘리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옷을 입고 진열되어 있는 마네킹들을 슬슬 피하고 있었다.
백화점을 들어올 때와 똑같이 카렌의 옷자락을 꼬옥 붙잡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면서도 애써 걷고는 있었는데 끝내 한 매장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엘리야?"
"어디 아프십니까?"
모두는 엘리의 갑작스러운 상태에 당황해 엘리를 향해 몰려들었다. 그리고는 이유를 찾으려 앞을 보고는 모두 안색이 굳어졌다.
엘리가 멈춰 선 곳은 벨트만 전문적으로 파는 매장 앞이었다.
"뱀이다! 뱀!"
싸늘한 정적은 삼색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깨졌다. 갑자기 삼색이 매장으로 돌진하더니 날카로운 손톱으로 순식간에 눈앞에 보이는 벨트들을 모조리 찢어내고 있었다.
-찍!
토리도 조그마한 앞니로 아그작 아그작 돕는데 얼마나 이빨이 단단한지 두부처럼 벨트들이 푹푹 갈려 나갔다.
"삼색님?"
눈 앞에서 벨트의 잔해물들이 뱀의 허물처럼 날아다니자 엘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삼색은 마침내 모두 해체해버리고는 몸이 붙은 가죽 조각들을 몸을 털어 떨어 뜨리고는 엘리의 앞으로 다가왔다.
"뱀은 내가 모두 쫓아냈다! 이리 와라."
쫓아내기보다는 모두 없애버렸다는 표현이 더 가까웠지만, 엘리는 풋 하고 웃으며 삼색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길을 걸었다.
"이게 무섭냐?"
삼색이 앞발로 벨트의 잔해를 뻥 차버리며 엘리의 발 바로 앞에서 호위하듯 슬금슬금 걸었다.
"아뇨. 이제 안 무서워요. 고맙습니다."
`저 녀석 아까 리본은 모른 척해줘야겠어.`
이럴 때는 참 영물 같은 녀석이다.
"저것들은 모두 우리가 계산하지. 그리고 강이사."
"엘리님의 과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지 하나 놓치지 않겠습니다."
"채린아. 오늘 저녁에 내가 엘리와 얘기를 할 거야. 그러니 아까 말하려던 거 말해줘. 뭐야?"
원래는 천천히 들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방금 엘리의 반응을 보고는 마음이 바뀌었다.
"그게..."
채린이 삼색과 토리와 놀고 있는 엘리를 살짝 보고는 카렌에게 귓속말을 했다.
"등에 오래된 상처와 멍이 너무 많아. 교묘하게 안 보이는 부분만 악질적으로 말이야."
카렌의 시선이 삼색과 같이 해맑은 얼굴로 놀고 있는 엘리에게 향했다.
"어?"
순간적으로 카렌에게서 폭사된 기운 때문에 주위에 서 있던 직원들은 갑자기 한기가 몰려오며 솜털이 오싹해졌다.
"후우..."
카렌이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기를 누르려 숨을 길게 내뱉으며 머리부터 뒷목까지 부드럽게 손으로 쓸었다. 기운은 순식간에 갈무리되었다.
예민한 삼색이 카렌의 잠깐 뒤를 돌아 봤지만, 엘리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어서 다행히 못 느낀 것 같다.
"어떻게 해줄까..."
카렌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