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4/140)

  동화를 뛰어 넘는 현실은 항상 존재한다

  "오셨습니까."

  "어서와."

  카렌이 집에 도착하자 강이사와 채린이 둘을 맞았다. 강이사는 계획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고, 채린은 오는 길에 카렌이 잠깐 도와달라고 전화로 불렀다.

  "이 아이가 성녀야?"

  "만나서 반갑습니다. 성녀님."

  둘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사였다. 채린은 신기하게 엘리를 바라보며 코를 씰룩였고, 강이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서..성녀...그냥 편하게 대해 주세요."

  성녀라는 부담스러운 호칭에 엘리가 얼굴을 붉히며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감옥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이제 와서 들어보니 민망하다.

  "그럴 수는..."

  "그래! 그럼 일단 씻자! 이러려고 나 부른 거지. 카렌?"

  "맞아."

  아까부터 사냥개처럼 코를 킁킁거리던 채린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엘리를 짐처럼 어깨에 얹고는 2층에 있는 샤워실로 바로 직행했다.

  "어..어?"

  "성녀님?"

  한길이 성녀가 갑자기 납치당하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지만, 카렌이 한 말에 얌전해졌다.

  "그럼 네가 엘리 씻길 거냐? 같이 들어가게? 그리고 네가 덤벼봤자 어차피 못 이겨."

  "네?"

  한길은 카렌의 말을 듣고는 걸어가는 이채린을 다시 봤다. 물론 일반인보다는 훨씬 탄탄해 보이는 몸이지만, 그래도 자신은 성전사···.

  "쟤 이채린이야. 못 들어봤어?"

  "...그 S급 헌터 말입니까?"

  자신이 성전사 훈련소에 있을 때 폐쇄된 환경 탓에 외부 소식이 거의 모두 차단되었다. 하지만 얼마나 화제였는지 한 길드를 혼자서 부숴버렸다는 헌터의 이야기는 흘러 들어왔다. 그런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저는 먼지나 다름 없네요.."

  오늘 한길의 자존감은 그야말로 바닥을 찍었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성녀에, 이단심판관에, 연합에 얼마 없는 S급 헌터까지. 게다가 아무리 신수님이라고는 하지만 조그마한 쥐도 못 잡았다.

  `크흑....`

  신병이란 다 이런 시련을 겪을까. 한길의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쓸데 없는 생각하지 말고. 가서 우리도 좀 쉬자. 너도 저기서 씻고 와."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가면서 서로 인사도 할 겸 카페 분들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부탁해 강이사."

  카렌이 카페 옆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자 강이사가 한길을 안내해줬다. 그 모습을 보면서 카렌이 기지개를 쭉 펴고는 차 유리를 두드렸다.

  똑, 똑

  하지만 차 안의 고양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똑, 똑

  여전히 꼬리를 몸으로 말고는 몸을 뱀처럼 말고 있었다.

  "아직도 삐져있냐?"

  "꾸잉! 주인은 모른다! 혓바닥에서 아직도 모래 맛이 난다!"

  삼색은 그제야 고개를 홱 들고는 서럽게 말했다. 눈을 글썽이는 것이 저건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다.

  "나도···. 아니다. 나중에 맛있는 거 하나 사줄게. 소원권 하나 주마."

  카렌은 순간 자신도 같은 포션을 먹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더 삐질 것 같아 슬슬 달래기 시작했다.

  "...소원권 세 개."

  "어허! 두 개."

  "좋다!"

  삼색은 기다렸다는 듯 폴짝 창문으로 뛰어내리고는 만족한 듯 자신의 앞발을 혀로 그루밍했다. 하지만 혀에서 느껴지는 쓴맛에 캑캑 거렸다.

  "우욱. 털에서도 모래 맛이 난다."

  이 녀석 심심하면 그루밍하던데 그건 좀 고역이겠다. 카렌은 처음으로 삼색이 좀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서 뭐라 위로하려던 찰나... 쭈그려 앉은 녀석의 통통한 뱃살이 눈에 보이자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은 괜찮다. 이 기회에 다이어트나 하자. 어차피 너 이슬이랑 옹달샘만 먹고 살 수 있다며. 이 기회에 영물이란 걸 증명해 봐."

  "꾸잉! 나쁘다 주인!"

  카렌은 삼색의 절규를 냉정하게 무시하고는 살찐 고양이를 대충 집어 들어 안고는 집 안으로 향했다.

  들어오자마자 푹신한 소파에 널브러진 카렌과 삼색은 잠깐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결국 일이 생겼네.`

  머리가 살짝 복잡했다. 오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길 바랐지만 신을 만나고 성녀를 만나고 과거의 자신까지 보고 왔다.

  [너의 선택만이 정답이다]

  가기 전 드라마에서 들었던 대사가 떠오른다. 이미 선택은 했다. 남은 건 최선을 다할 뿐이다. 다만 여신의 방식이 아닌 자신의 방식대로 할 거다.

  "카렌!"

  위에서 다 씻었는지 채린 특유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같이 씻었는지 촉촉한 머리를 말리며 2층에서 내려오는 채린의 뒤로 엘리가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왔다.

  "엘리 너무 귀엽지 않아? 난 오늘 급하게 온 거라 이만 가볼게!"

  "그래. 고마웠어."

  "엘리야! 또 놀러올게! 만나서 반가웠어."

  채린은 급하게 떠나갔지만, 남기고 간 말대로 엘리는 길 가다가 누구나 한 번쯤은 돌아볼 작은 동물 같은 귀여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엘리의 건강한 버전인 여신을 직접 보고 온 카렌의 눈에는 영 성이 차지 않았다.

  `너무 말랐군.`

  "죽 좀 먹고 가서 자야겠다."

  다행히 카렌이 한가득 쌓아 놓은 즉석 죽이 있었다. 대충 전자레인지에 놓고 돌아가는 동안 엘리를 소파에 앉히고는 카렌이 말했다.

  "오다가 카페 옆에 있는 건물 봤지?"

  "네."

  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방도 많고 보모...아니 한길도 있으니 괜찮을 거야. 성전사니 당연히 잘해줄 거고. 물론 나도 자주 찾아갈 거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혹시...."

  엘리가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놓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괜찮아. 편하게 말해 봐."

  "아저씨랑 여기서 같이 지내도 될까요?"

  "어?"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저는 데려와 주신 것만으로 정말 고마워요. 정말 죄송합니다."

  카렌이 뭐라 하기도 전에 엘리가 스스로 말을 쏟아내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불안증세?`

  카렌은 엘리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구출된 이후 긴장이 풀리고 목욕으로 인해 몸이 노곤해진 탓일까. 원래 강했던 아이지만 간신히 버티던 한계를 넘어 버렸다.

  `이러면 안 돼. 투정 부리면 안 돼.`

  엘리는 감히 자신을 구해준 사람들에게 미움받을 말을 해버렸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구출해 준 카렌과 떨어진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이제 옛날처럼 험한 말과 체벌이 쏟아질 거란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물론이다. 마침 위에 방이 남으니 잘됐어. 그렇지. 삼색?"

  하지만 돌아 온 건 아무렇지도 않게 무덤덤하게 말하는 카렌 특유의 묵직한 목소리었다.

  ??

  "맞다! 그리고 어디 아픈 것 같은데. 내가 이거 해줄게. 호~"

  삼색이 엘리에게 다가가 배에다 자신의 앞발을 대자 초록색 빛이 발에서 나와 엘리에게 스며들었다.

  `따뜻해.`

  빛의 색깔뿐만 아니라 겨울철에 뜨거운 코코아를 마신 것 같다. 삼색이 전해 준 빛은 몸 전체를 돌아다니며 따뜻한 기운을 퍼뜨렸다.

  "...맞다. 너 약하지만 치유 능력도 있었지."

  카렌이 손가락을 탁 튕기며 지금껏 까먹었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나 영물이다!"

  삼색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뽐낸다.

  "고맙...습니다..흑"

  "어? 왜...왜 우냐? 주인?"

  삼색이 갑자기 엘리가 눈물을 흘리자 당황하며 옆에 있던 주인을 바라봤다. 그런데 카렌은 별말 없이 일어서더니 주방으로 갔다.

  전자레인지에서 따뜻하게 데워진 즉석 죽의 포장을 뜯어서 그릇에 담았다. 그 위에 참기름 살짝과 참깨가루를 뿌리고는 엘리의 앞에 놓았다.

  "밥 먹자. 그리고 푹 자러 가자."

  "훌쩍, 네. 아저씨."

  엘리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앞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죽과 말없이 자신의 옆을 지켜 주는 아저씨는 엘리에게 최고의 위로가 되어 주었다.

  * * *

  `아저씨...

  "

  엘리가 살짝 눈을 뜨자 의자에 앉아 있는 카렌의 모습이 보였다. 거의 눈을 뜰 때마다 어슴푸레 방을 밝히는 수면등을 의지해서 아저씨는 침대 옆에서 종이책을 읽고 있었다. 그 옆에는 삼색이 코를 작게 고롱고롱 골며 자고 있었다.

  [성공적인 아이 교육법 (베스트셀러!)]

  또 책이 바뀌었다. 저번에는 `아기 발달 백과사전`을 읽고 있어서 자신은 아기가 아니라고 했더니 저 책을 읽고 계신다.

  "일어났구나."

  엘리는 정말 눈만 뜨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카렌이 말했다.

  "네."

  "아직 조금 더 자야 해. 16시간씩 자도 된다."

  "...그건 12개월까지의 영아 아닌가요? 저는 10살이에요."

  "그래서다. 너는 너무 작아. 많이 자야 큰다고 이 책에 써 있다."

  처음 엘리가 10살이라고 들었을 때 웬만한 일에 놀라지 않는 카렌조차 적지않게 놀랐다. 요즘 초등학생도 옛날에 비해 키가 엄청 크다. 하지만 엘리는 그때와 비교해봐도 유치원생 수준의 키였다.

  ?

  엘리가 이불을 살짝 발로 치우고는 자기 다리 끝을 보았다. 짧긴 짧다. 빨리 크고 싶어하는 게 애들의 심리니만큼 엘리의 표정이 살짝 시무룩해졌다.

  `그 언니만큼 언제 크지...`

  채린 언니를 만났을 때 엘리는 깜짝 놀랐었다. 얼굴에 흉터가 있긴 했어도 오히려 매력으로 느껴질 정도의 미모에, 같이 목욕하다가 본 운동으로 탄탄하게 다져진 몸은 감탄을 자아냈다.

  "당연히 키는 클 거다. 먹고 자면 쑥쑥 큰다."

  카렌이 엘리의 표정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엘리의 상태는 거의 뼈만 보일 정도였다. 비밀리에 병원에 가서 진찰해 본 결과 단순하지만 슬픈 진단이 나왔다.

  `영양실조.`

  그래도 카렌과 삼색의 도움을 받아 이주일 동안 밥 먹고 자고, 약 먹고 자기만 한 엘리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다.

  `교단 정상화고 뭐고 일단 아이부터 건강하게 만든 다음에 해야지.`

  신이 카렌의 머릿속에 주입해 준 정보에 따르면 아직 지구가 위험에 빠지기 전까지 시간은 많다. 그리고 만약 시간이 적더라도 카렌의 행동은 똑같았을 거다.

  `희생과 슬픔이라면 지긋지긋하다.`

  일단 자신이 이 아이를 보호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대충이라는 선택지는 카렌의 머릿속에 없었다. 어차피 여신이랑 이제 대화도 안 되니 차라리 잘 됐다. 그 여신은 카렌이 보기에 성녀에게는 몰라도 아이로서의 엘리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존재다.

  `하긴 태어난 지 30년이면 신으로서는 신생아나 다름없으니...`

  손바닥에 새겨진 붉은 이단심판관의 표식이 항의하듯 살짝 반짝였지만 카렌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 아저씨 덕분이에요."

  "또 호~해줄까?"

  카렌과 엘리의 대화에 잠에서 깬 삼색이 카렌의 무릎 위로 올라오면서 말했다.

  "삼색님에게도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게. 나는 이 녀석이 처음으로 영물처럼 보였어."

  "나 영물 맞다. 주인! 봐봐. 호~"

  삼색이 카렌의 무릎에서 뛰쳐나가 엘리의 배에 자신의 앞발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초록색 빛이 발에서 나와 엘리에게 스며들었다.

  "그 `호~`는 꼭 해야 돼?"

  "당연하지. 이건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내 치료 능력은 옛날 한국 사람들의 관습과 전통에서 나온 거다. 엄마들이 아플 때 입으로 불어주고 배를 쓰다듬는 게 다 의미가 있고..."

  "꼰대."

  카렌이 삼색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한마디 툭 던지자 삼색이 잠시 멍했다가 곧바로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카렌을 보며 따졌다.

  "??? 전통과 꼰대는 다르다! 원래 영물은..."

  "너한테 배운 단어야. 그 단어 되게 기분 나쁘거든? 어때?"

  ".....나도 안 쓸 테니까 쓰지 마라."

  카렌과 삼색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엘리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볼 때마다 참 즐거운 커플이다.

  "그래도 잠은 더 자야지."

  카렌이 삼색과 평화협정을 맺고는 엘리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엘리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는 카렌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아직 남아있어.`

  아델라의 웃음이랑 똑같다. 카렌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애써 생각을 지웠다. 그리고는 혹시나 엘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화제를 돌렸다.

  "잠 안 오면 동화책 읽어줄까? 책에 따르면 동화책을 읽어주면 정서발달에 좋다고 하더라."

  "저는 아저씨가 해주는 모험담이 더 좋아요! 약초상부터 드워프 마을, 드래곤 로드 만나신 얘기도 너무 재밌어요."

  "나도 좋다! 주인 얘기 재밌다."

  ?

  엘리의 정신연령에 비해 책이 조금 유치할까 봐 카렌이 자신의 얘기를 한 번 해줬는데 의외로 반응이 열광적이었다. 엘리는 카렌의 얘기를 곧이곧대로 다 믿었다.

  여신이 보증한 이단심판관이다. 게다가 이야기 너무 꼼꼼해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

  `근데 내 이야기가 정서발달에 좋을까?`

  카렌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엘리의 별처럼 반짝거리는 눈을 보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냥 평범한 아이도 아니니까.

  "저번에 드워프 왕이랑 친구 했다는 얘기까지 하셨어요. 그 왕과 아저씨가 맥주 대결을 하셨잖아요."

  "알았다. 알았어. 그날에 드워프 왕국 전체가 축제..."

  카렌의 얘기가 시작되고 엘리와 삼색은 나란히 침대에 앉아 얌전히 카렌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정말 이야기에 푹 빠진 삼색과 달리 엘리는 한 가지 목적이 더 있었다.

  `아저씨가 나를 왜 그렇게 볼까?`

  카렌은 재빨리 숨겼지만 예민했던 엘리는 카렌의 눈이 떨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가끔 아저씨가 자신을 볼 때 왠지 눈이 슬퍼 보였다.

  `내가 아저씨에게 도움이 될 순 없을까?`

  원인은 과거에 있을 거란 생각에 엘리는 더 집중해가며 들었다. 물론 아저씨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엄청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드워프 왕의 조카 녀석이 나타나서..."

  연금술사가 주연으로 등장한 동화보다 더 동화 같은 이야기는 성녀와 영물을 관객으로 두고 밤늦도록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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