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곰은 마늘이 아니라 포션을 먹는다
"꾸잉..."
삼색은 자신의 앞발에 들린 포션을 보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색이라도 좀 예쁘게 만들어주지.
`대체 나 없으면 주인은 어떡하려고 그러냐. 휴...내가 참아야지.`
잠시 영물로서의 자부심과 주인에 대한 귀여운 비판을 마친 삼색은 포션의 뚜껑을 열었다. 퐁, 청량한 소리와 반대로 삼색은 인상을 잔뜩 쓰면서 입을 크게 `앙` 벌리고는 재빨리 병 안의 액체를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으에엑!"
혀에 닿자마자 끔찍한 맛이 미뢰를 타고 뇌의 전두엽까지 순식간에 타고 올라갔다. 비가 오고 오래 방치된 고인 웅덩이의 비릿한 맛과 오래된 동물의 시체 썩는 향이 동시에 느껴졌다.
게다가 물처럼 목으로 깔끔하게 넘어가지 않고 슬라임처럼 끈적한 점성으로 혀와 잇몸 곳곳에 남아 끈적하게 삼색을 괴롭혔다. 진짜 주인이 장담했던 180년생 최악의 맛이 과장이 아니었다.
"물! 물!"
삼색이 운전석 옆 홀더에 꽂혀 있던 물로 황급히 입을 가글했다. 순간적으로 물과 함께 그대로 뱉어버리고 싶었지만, 혹시 약효가 나타나지 않을까 봐 꾹 삼키고 다시 마셨다.
`이걸 그냥 먹었다고?`
이 독약을 인상 한 번 찌푸린 걸로 넘어가다니...역시 자기 주인이 될 만한 사람이다. 이상한 부분에서 삼색의 카렌에 대한 존경심이 상승했다.
우득, 우득
그런데 카렌과 다르게 자기 몸에서 들리는 뼈 소리에 삼색이 당황하며 재빨리 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주인은 얼굴하고 머리카락 색만 조금 바뀌던데?
"어..어?"
생각해 보니 주인과 달리 자신은 이 조그마한 몸이 본체가 아니었다. 자신이 움직이기 편하게 작게 만든 것 뿐. 이 약은 본체에 적용되나 보다.
잠깐 당황했었지만 아프지도 않았고 삼색은 얌전히 몸의 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렇게 곧 소형차만 한 원래 크기로 돌아왔지만, 겉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건...곰이잖아?"
차의 유리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삼색이 자기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보름달 같은 얼굴에 동그란 단추 같은 귀 두 개가 볼록 솟아 있었다. 넙데데한 코에 두꺼운 앞발. 그런데 딱 하나가 일반적인 곰과 달랐다. 그게 좀 겉보기에 티가 많이 나는 부위라는 게 문제다.
"세상에 털 색깔이 삼색인 곰이 어딨냐. 포션 잘못 만들었다 주인."
얼굴의 코를 기점으로 털 색깔이 검정, 갈색, 흰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세계 최고의 연금술사도 영물에게는 시험해 본 적이 없어 나타난 부작용이었다. 외형은 바뀌었는데 설마 털색깔이 안 바뀔 줄이야.
[삼색. 뭐 해?]
주인도 상황이 급한지 재촉하는 문자가 삼색의 손목에서 들려 온다. 그래도 주인이 워치줄이 늘어나게 만들어줘서 털에 워치가 묻히긴 했어도 몸에 붙어 있는 게 다행이다.
"꾸잉, 나도 모르겠다. 30분인데 뭐 별일 있겠어. 워치. 알람 설정 30분으로 해 줘라."
이 비대해진 손으로 조작은 할 수 없으니 음성으로 기능을 활성화했다.
[알람이 설정되었습니다. 29:59]
그렇게 반쯤 자포자기한 삼색은 카렌이 말한 `난동`을 부리러 신전으로 달려들었다.
`아직도 맛이 남아있어. 짜증나.` 갑자기 서울 시내를 미친 듯이 달려가는 자동차만 한 곰을 보느라 벙찐 사람들을 지나고 마침내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하얀 건물이 보인다.
?
"꾸잉...아니 지금은 곰이다."
이왕 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지. 삼색은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배에 바람을 집어넣었다. 크게 배가 부풀어 오르고
"크아아아아앙!"
삼색이 크게 울부짖었다. 웅대한 울음소리와 함께 삼색은 자신의 거대한 몸집으로 날렵한 움직임으로 카렌의 주문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수행하기 시작했다.
*
[콰아아앙]
?
"음...잘하고 있군."
밖에서 들리는 어색한 곰의 포효와 뭔가 부서지는 굉음에 카렌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투덜거려도 할 때는 잘하는 녀석이다. 지금껏 먹이고 재워 준 보람이 있다.
카렌의 말을 증명하듯 한길의 손목에서 성전사 비상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한길이 신단에서 선포한 메시지를 소리 내 읽었다.
"특이한 곰 출현. 현재 신전 근처에서 난동 중! 색깔이 노랑, 검정, 흰색 곰임. 희귀개체고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 인명피해가 나지 않는 선에서 생포요망...이라는데요?"
"털색은 안 바뀌었나? 영물한테는 그런 부작용이 있네?"
색다르긴 했지만 크게 상관있겠나 싶다. 어차피 나중에 돌아왔을 때 고양이랑 곰을 털 색깔 때문에 연관 짓는 사람은 없을 거다. 분명 곰은 특이했지만 삼색 고양이는 당장 길만 나가 봐도 흔하게 보이니까.
"이제 슬슬 나가지."
카렌이 앞장서고 엘리를 업은 한길이 그 뒤를 따라갔다.
엘리의 시선이 앞에서 걷고 있는 반짝이는 카렌의 은빛 머리에 눈이 절로 갔다.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의 복도에서도 존재감을 환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쁘다."
분명 자신을 안고 있는 한길처럼 덩치가 크지 않은데도 카렌의 등이 커 보였다.
`저 아저씨라면 괜찮을까?`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아 왔던, 할 수 없었던 엘리는 카렌을 보며 왠지 모르게 편안함과 듬직함이 느껴졌다. 여신님이 직접 보내 준 사람이라서 자신이 그렇게 느껴서 그럴까? 아니면 카렌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 덕분일까.
????
-찍!
"응?"
그렇게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던 셋, 모두에게 익숙한 소리가 발밑에서 들려왔다.
"이 녀석이! 또 왔어?"
한길은 질색하며 발을 휘적거렸다. 어찌보면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오게 만든 원흉이 바로 이 흰쥐다. 이 녀석이 성물을 끌고 가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덕분에 성녀님을 만났으니 좋은 일인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한 한길은 저 얄미운 쥐의 표정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다시 발로 내쫓으려고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녀석은 비웃기라도 하듯 폴짝 뛰더니 한길의 몸을 타고 올라와 엘리의 몸 위로 올라갔다.
"죄송합니다! 아이고, 이걸 어떡하지?"
감히 성녀의 몸 위로 쥐가 올라오다니... 한길이 어쩔 줄 몰라했다. 그렇다고 손으로 쥐를 쫓자니 성녀를 놓치고 어디다 잠시 내려 놓을 곳도 없었다.
"괜찮아요. 이 아이는 솔라리님이 보낸 신수에요. 마지막으로 말해 주셨어요. 이름은 토리라고 제가 정했어요."
"역시 그랬군."
카렌은 엘리의 품 안에 있는 흰 쥐를 봤다. 저게 일반적인 쥐라면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쥐였을 거다.
"시..신수?"
한길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자기가 잡으려고 했던 얄미운 쥐가 신수? 그럼 자신은 무례하게 신수를 손으로 잡고 발로 쫓아내려 했다고?
"
-찍! -찍!
쥐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는 거만한 눈초리로 한길을 보았다. 마치 자신에게 어서 용서를 빌라는 태도.
"그러면 안 돼. 나를 구해주신 분이잖아. 그리고 토리야, 너도 잘못했어."
-찌익...
엘리가 부드럽게 자신의 털을 쓰다듬으며 하는 부드러운 꾸중에 토리는 풀 죽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살짝 뛰어 한길에게 가까이 오더니 한길의 가슴에 몸을 부볐다.
"지금껏 한 일은 미안하다고 하네요."
"괜찮습니다. 저도 잘못했는걸요. 신수님의 사과도 받다니 오늘 참 여러 경험을 하네요."
-찍!
"어어?"
?
팟. 자신의 눈 앞에 있던 토리가 울음소리를 내며 사라져 버리자 한길의 눈이 동그라졌다.
"다음에 또 놀러온다는데요? 순간이동 능력이 있어 제가 있는 곳은 어디든 올 수 있대요."
"허허허, 순간이동...그럴 수 있죠."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쥐 구멍도 없었던 지하감옥으로 통하는 문에서 왜 흔적이 끊겨있었는지 말이다.?
반쯤 해탈해 버린 한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늘 이후로는 웬만한 일에 잘 놀라지도 않을 거다. 근 몇 시간 동안 `놀람`의 역치가 상승하다 못해 폭발해버렸다.
[콰콰쾅]
삑.삑!
그렇게 지하 감옥의 훈훈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바깥에서 깨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나면서 한길의 손목에서 비상 경고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
[신전 외벽 기둥이 파손! 최소한의 경비인력만 남기고 모든 성전사는 집합하라! 곰치고 너무 민첩함. 인명피해는 없음.]
"...삼색 녀석. 진짜 화가 많이 났나 보네."
카렌이 한길에게 온 메시지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과연 메시지가 말해 주듯 갑자기 나타난 괴수 때문에 대피하는 사람들과 달려가는 성전사들로 시끌벅적하다.
마침 카렌 일행도 타이밍 좋게 아까 내려온 지하계단 바로 밑까지 도달했다.
"내가 가보지."
카렌이 문밖을 살폈다. 대피할 사람은 했고 성전사들은 다 나갔는지 문밖의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렌이 뒤를 향해 오라고 손짓하자 그 신호를 알아들은 한길이 올라와 마침내 지하 감옥에서 모두 빠져나왔다.
빛이 거의 없는 지하에서 나와 밝아진 세상에 놀란 엘리가 눈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입술을 질끈 감았다.
`참아야 돼.`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분들이다. 이 정도로 약한 척을 할 수는 없다. 안구가 스스로를 보호하려 뿜어내는 눈물에 엘리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어?"
그런데 갑자기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눈이 편해지자 엘리가 뭔지 보려 눈물을 닦으러 손가락을 눈 쪽으로 가져갔다. 손가락에 뭔가 툭 하고 걸린다.
"안경?"
카렌이 반투명한 실드를 조형해 만든 물건이다. 단순한 모양의 칼날이나 무기를 만들 때와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기예에 가깝다. 반투명한 실드를 얇게 수십 장을 겹쳐 알을 만든 덕분에 흐릿하게나마 앞을 볼 수 있을 거다.
"앞으로 아프면 아프다고 해라. 그것까지 그 아이와 닮았나."
"...감사합니다."
엘리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지만 일단 인사를 했다. 엘리가 흐릿하게 앞서가는 카렌을 보며 안경다리를 살짝 만졌다. 매끈한 기분 좋은 감촉이 손가락에 전해졌다.
"이리 오세요. 여기서부터 안내하겠습니다. 성전사들이 외부로 나가는 통로가 따로 있습니다. 지금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우리 조력자를 날뛰게 해볼까?"
"저기서 더요?"
한길이 기겁하며 카렌을 말리려 했지만 이미 카렌은 문자를 보내 버렸다.
[좀 더 날뛴 다음에 바로 튀어. 앞으로 3일 동안 못 먹는 음식들의 한을 담아서!]
"우아아아아! 내 음식의 원수!"
"저게 대체 무슨 소리야? 곰이 이상한 말을 한다! 잡아!"
역시 녀석의 음식에 대한 집착을 건드린 효과는 확실했다. 더욱더 신나게 날뛰는 삼색의 소리를 음악 삼아 카렌과 일행은 무사히 신전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 * *
카렌 일행이 무사히 신전을 빠져나간 순간 삼색은 카렌에게서 온 문자를 받았다.
[빠져나갔다. 이제 차로 돌아와.]
"꾸잉!"
삼색이 문자를 보고는 땅을 강하게 앞발로 땅을 박박 긁었다.
"쿨럭, 쿨럭."
먼지가 순식간에 일어나며 삼색과 대치하고 있던 성전사들이 기침을 하면서 시야까지 차단 되었다.
"남은 시간은?"
[4분 23초 남았습니다.]
마침 시간도 딱 맞는다. 삼색은 땅을 박차고 주택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꺄아아아! 이 쪽으로 곰이 돌진한다!"
대피하란 지시에도 멀리서 카메라로 찍고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삼색은 훌쩍 그들을 뛰어넘어 주택가로 진입했다. 그렇게 몇 구획을 순식간에 지나치고 마침내 삼색이 찾던 으슥한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삼색은 콧바람을 불며 재빨리 들어갔고 그 뒤를 바로 성전사들이 쫓으며 달려왔다.
"쫓아라! 저기 저 골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곰을 뒤를 쫓아 골목으로 들어갔지만 마주친 건 몇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높은 벽이었다. 성기사들이 골목 안으로 들어가 샅샅이 수색해 봤지만, 흔히 있는 담배꽁초와 자잘한 쓰레기들밖에 없었다.
"완전 막다른 곳이야."
"분명 여기로 들어 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육중한 덩치의 곰이 이 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설령 뛰어넘었다 해도 그 덩치로 뛰어넘으면 최소 벽에 발톱 자국이라도 있거나 벽 너머에서 착지하는 소리가 들렸어야 했다.
"응? 이건 고양이잖아?"
성전사 한 명이 뒷골목에 흔히 있는 박스형 쓰레기통 위에 앉아 있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귀엽네...안녕?"
"지금 고양이 신경 쓸 때야? 정신 차려."
"근데 이 고양이 그 곰이랑 무늬가 똑같은데?"
"삼색털 가진 고양이 처음 봐? 그럼 그 거대한 곰이 이 귀여운 고양이로 변하기라도 했을라고?"
"야옹...?"
고양이가 살짝 움츠러들면서 뭔가 찔리는 게 있는 듯 앞발을 혀로 핥으며 울음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어떤 성전사도 그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원래 고양이란 생물은 인간의 예측을 벗어나니까.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주변이나 빨리 뒤지자고."
"그래."
성전사들이 다른 곳을 수색하러 사라지자 고양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꾸잉...내 영물 팔자야. 나중에 주인에게 꼭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해야겠다."
고양이는 꿍시렁 대며 성기사가 절대 넘을 수 없다고 말했던 막다른 벽을 훌쩍 넘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