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력자 출동!
성녀와 성자는 솔라리 교단에서 신이 내려 준 아무도 모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통칭 색의 눈.
?
사람들이 쌓아 온 `업보`를 색깔로 보게 해준다. 신이 직접 말해주진 않았지만, 성자와 성녀는 그 누구에게도 이 눈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다.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를 보이는 일을 부담스럽고 껄끄러워할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당장 보이는 색으로 사람을 평가하기에는 자기 행동에 따라 색깔이 계속 바뀐다. 또 굳이 신경 쓰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으니 평소에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찾아온 은발의 남자는 `평범함`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세상에, 이 사람은 대체 뭐지?`
보지 않으려고 해도 보이는 경악할만한 `업보`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업보를...`
업보의 색깔은 단 두 가지 색으로 명확하다. 선행을 쌓으면 흰색 악을 쌓으면 검은색. 하지만 오히려 한 가지 색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보통은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회색.`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흔한 색이다. 자신을 찾아온 남자도 이 색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엘리를 놀라게 한 이유는 크기였다.
업보는 단전에 위치하며 보통 사람은 손가락 하나 크기 정도 된다. 세계의 역사에 한 획을 긋거나 노벨상을 받은 사람쯤 되면 주먹만 해진다. 그것만도 대단하다.
`항아리?`
상체 가슴 밑, 하체로는 무릎 위까지 오는 지금까지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크기의 업이다.
`인간이...아닌가?``
문득 엘리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머리를 살짝 흔들어 털어내었다. 인간이 아니면 무슨 상관인가. 아무렴 여신님이 직접 보내 준 이다. 다른 사람은 모두 믿지 않아도 자신만은 믿어야 한다.
"큰 거?"
엘리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왠지 모르게 자신을 향한 싸늘한 남자의 눈빛이 보인다. 그 냉기에 엘리의 어깨가 움츠러들며 변명하듯 말했다.
"솔라리님이 말해 주셨어요."
"전부터 생각했지만 너네 신은 참 특이하구나."
누구나 어려워하는 신을 마치 동네 친구 부르듯이 말하는 남자는 자칫 오만해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엘리는 왠지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투라고 느껴졌다. 엘리의 눈으로 본 눈 앞의 남자는 그 태도조차 어울리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뭐라 말할까 생각하던 엘리의 머릿속에 신이 말해준 말이 떠올랐다.
"저거 만져보시래요."
"그래."
남자는 의문 따위는 갖지 않았다. 그저 냉기를 폴폴 풍기며 자신을 지나쳐 제단에 손을 댔다. 그리고 석상처럼 멈춰 섰다.
왜 자신에게 그럴까.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엘리는 어디서도 남자를 만난 기억이 없었다.
"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옆에서 한길이 조심스럽게 엘리에게 물었다. 분명 성자와 성녀는 동시대에 분명히 존재할 수 없다고 알고 있지만 저기 신성력을 내뿜고 있는 제단을 보니 또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간다. 그리고 오재민 형제는 왜 갑자기 저기서 굳어 버렸을까.
`미치겠네.`
한길같이 신출내기 성전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다. 그냥 오늘 하루를 없애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자신의 앞에 낀 흐린 먹구름에 살짝 울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 누구와도 오늘의 자신에게 뭐라 할 순 없을 거다.
"신이랑 대화하고 계신 거예요. 금방 돌아오세요."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흑`
이 아이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침착할까? 아니...아이가 아닌 성녀님인가?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길의 복잡한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카렌의 감은 눈이 번쩍 떠졌다.
"얼마나 지났어?"
"네? 방금 만졌다 바로 떼셨는데요?"
"그래?"
"저...괜찮으세요?"
엘리는 최대한 카렌의 기분을 더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통성명이 오가고 `카렌`이라는 이름을 알았어도, 여전히 엘리는 여전히 자신을 향한 쏘아지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감정들이 복잡했지만, 적의는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익숙하게 경험해 본 자신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럼..카렌 오빠라고 부르면 될까요?"
신전 앞에서 사람들을 지켜보니 이 말을 들은 어떤 사람의 표정이 갑자기 확 좋아지는 걸 봤다. 하지만 아까보다 더욱 맹렬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카렌으로부터 분출되자 엘리의 얼굴에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렀다. 자신의 말이 뭔가 용의 약점인 역린을 건드린 느낌 마저 든다.
하지만 카렌이라는 남자는 눈을 감았다 뜨자마자 방을 꽉 채우고 있던 모든 감정이 일시간에 수그러들었다.
`대단하다...`
대체 어떤 사람이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 그리고는 자신과 눈을 맞추더니 확실히 아까보다 비교적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구나. 네 잘못이 아니다. 내 개인의 과거에서 비롯된 문제니, 너는 조금도 잘못이 없다."
살아오면서 미움받는 건 익숙하지만 이렇게 얘기해주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렌이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건지 입꼬리가 살짝 어색하게 올라가 있었다.
"아..."
엘리의 입에서 처음 겪어 보는 일에 작은 탄성이 터졌다. 뭔가 가슴이 간질간질 해졌다.
"호칭은 아저씨가 좋겠구나."
"네! 카렌 아저씨!"
엘리가 힘차게 대답하자 카렌은 피식 웃으며 한길을 가르켰다.
"너는 보모다."
"예?"
갑자기 저게 무슨 소리인가. 한길의 의식이 갑작스러운 카렌의 폭탄선언에 멍해졌다.
"너네 솔라리 여신이 그렇게 정했다. 불만 있으면 기도해서 따지던가."
사실 그냥 카렌이 자기 멋대로 정했다. 이 녀석 여기다 버리고 가면 최소가 파면이다. 맹한 녀석이긴 하지만 착한 녀석이고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했으니 구제는 해줘야 하지 않겠나.
"제발 설명 좀 해주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솔라리님이 말씀하셨다니요?"
한길이 반쯤 애원하듯 말했다. 뇌가 오늘 하루 벌어진 일들 때문에 죽겠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이걸 봐라."
카렌이 오른 손바닥을 내밀자 빨간 태양에 검 두 개가 가로지른 문양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저거 설마...
한길이 어렸을 때부터 훈련소 때까지 달달 외웠던 성법책에 나오는 문양 중 하나. 처음 볼 때부터 이름부터 가장 멋있다고 생각했던 그 직책. 지금껏 교단이 설립된 지 30년 동안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그 이름.
"이단심판관이?"
교단에는 심문관이라는 직책이 존재한다. 하지만 `심판`과 `이단`이라는 단어를 감히 쓰지 못한다. 중세부터 이어진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힌 뿌리 깊은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하고, 성법책에 친히 그 단어들이 들어가 있는 이단심판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단심판관은 인간의 힘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성자, 성녀와 같이 신이 직접 정한다. 아예 독립기관이면서 말단 사제, 성전사부터 교황까지 모두 심문, 처벌할 수 있다. 너무 권한이 크지 않냐고? 신이 정하는데 교단 안에서 그걸 누가 감히 따지나.
"어...어떻게? 하지만..."
속임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짧은 사이에 저걸 매직으로 그리기라도 했나. 게다가 저 카렌이 눈을 뜬 후에 제단에서 나와 방을 가득 메우고 있던 신성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분명 연관이 있으리라.
`저건 진짜다.`
모든 상황이 딱딱 맞게 떨어진다. 그렇다면 이 소녀는 진짜 성녀님이고 오재민이었던 남자는 카렌이 되고 또 이단심판관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안 할거야?"
한길이 머리가 당장이라도 터질 듯 복잡해지고 거기다 카렌이 또 슬그머니 한길에게 다가와 속삭이니 한길은 반쯤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쁜 마음으로...해야죠."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다 이 악마같은...아니 이제는 이단심판관님이니 속으로 욕도 못 한다. 불경죄가 되어 버리니까.
"그래도 좋지? 나도 이거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니까? 성녀의 보모라니 얼마나 좋아. 나중에 잘 보이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다??"
분명 믿고 있는 신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은 어떤 말보다 더한 극찬이 맞지만... 한길은 왠지 저 말을 카렌이라는 사람이 하니 찜찜했다.
`후우...당신의 종을 끊임없이 사랑하시고...`
한길은 카렌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을 지우느라 속으로 끊임없이 기도문과 성법책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무려 이단심판관님을 향해 불경한 생각으로 가득 차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면 여기를 나가야 하는데..."
한길은 다시 스스로의 상념에 잠겨있는 동안 엘리를 보는 카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카렌의 미세한 표정변화를 본 엘리가 또 움츠러든다. 참 남의 기분에 예민한 아이다. 타고난 게 아니다. 능력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본능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거다.
카렌은 엘리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살짝 엿봤다. 벨리알에 떨어졌을 당시 살아남기 위해 처음에는 이 아이처럼 눈치가 생겼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카렌처럼 상대방의 적의와 살기를 기가 막히게 감지하게 된다. 빈말이라도 이런 어린아이가 갖기에는 너무 이른 능력이다.
벨리알에서 모두에게 사랑받고 자라 티 한 점 없던 아델라랑 너무 대비되는 모습이다.
"고생을 많이 했구나. 몸이 너무 말랐어."
카렌의 표정이 구겨진 이유는 앞으로 탈출해야 하는데 저 상태로는 도무지 달릴 수가 없어서다. 몇 분 안에 단번에 살찌우고 근육을 붙이는 포션 따위는 없다. 각성제는 있지만 그건 부작용이 너무 크다.
"아..."
무심히 던지는 카렌의 말에 엘리의 마음에 잔물결이 일어났다. 신전 앞의 성전사 할아버지 이후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스함이었다.
"이럴 때 보모가 필요한거지. 안아라."
카렌은 한길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구해줬으니 밥값은 해야지.
"성녀님 제가 안아도 될까요?"
한길이 쭈뼛하게 엘리를 보며 허락을 구했다.
"그럼요."
엘리는 조금이라도 한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한길을 향해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럼 안습니다."
한길이 엘리의 다리와 등을 잡고 훌쩍 들었다. 그런데 한길의 눈에 갑자기 눈물을 고였다.
"왜..왜 그러세요? 너무 무겁나요?"
엘리가 한길의 갑작스럽게 울먹임에 당황해서 묻자 한길은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부인하며 말했다.
"너무 가볍습니다. 훌쩍."
곰만한 덩치에 눈물이 참 많은 녀석이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살짝 심통 났던 카렌은 단번에 한길의 눈물이 쏙 들어갈 말을 귀에 속삭였다.
"이제 탈영해야지."
"타...타...타...탈영? 탈영?!"
이 녀석은 아까부터 느꼈지만 놀리는 타격감이 굉장히 뛰어나다. 펄쩍 뛰는 한길을 보며 카렌의 눈이 사악하게 반달을 그렸다.
"그래. 탈.영."
듣기만 해도 당장에 어두운 감옥에 처박힐 것만 같은 마법의 단어. 그 말을 재차 듣자 한길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하지만... 두 분은 성녀와 이단심판관인데 그냥 정체를 밝히면 되지 않을까요?"
"...엘리야. 너 보모 잘 데리고 다녀야겠다."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아직 신병이시라면서요?"
"여기 아직 어린애도 안다. 성전사라는 녀석이..."
이상하게 카렌이 한심하게 쳐다보는 눈빛과 말보다 엘리가 토닥거리며 따뜻하게 하는 위로가 한길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크흑...`
한길이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분명 솔라리교단 성전사라고 하면 어디 가서나 대우받는 직업인데 성녀와 이단심판관이 앞에서는 너무 작아진다.
"그걸 믿어 주겠냐? 마녀로 몰려 지금까지 갇혀 있던 얘가 네가 지금 안고 있는 성녀다."
"저는 믿습니다!"
한길이 힘차게 말했지만 카렌은 아까보다 더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야 직접 봤으니 믿지. 다른 놈들은 볼 기회도 안 주고 우리에게 달려들걸? 게다가 그쪽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 성자도 아직 살아있는데 성녀가 나타났잖아."
"맞습니다... 저는 왜 이렇게 멍청할까요?"
"그럴 수도 있죠! 모든 사람은 배우면서 발전하는 거라고 들었어요.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한길님! 지금은 그래도 나중에는 멋진 성전사가 되실 거예요. 저도 아직 배울 게 많으니 같이 배워봐요!"
"감..사..합니다."
무려 성녀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정성스럽게 해주는 말이지만 정작 한길의 가슴은 더 시리게 아파왔다.
"너...일부러... 아니다."
"네?"
카렌이 한 말은 약과로 보일 정도로 엘리가 한길을 말로 때렸다. 혹시 일부러 이러나 카렌이 살펴봤지만 순진무구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엘리의 표정에 카렌은 결론을 내렸다.
`역시 애들이 제일 무서워.`
고의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말들로 두드려 패니 차라리 주먹이 덜 아플 거다. 게다가 엘리가 구사하는 단어들은 묘하게 어른스러워서 너무 찰졌다.
"그런데 어떻게 나가죠? 사제들을 호위하고 있는 인원들은 어차피 안 움직일 테지만 성전사들의 경비는 철저합니다."
잔뜩 풀죽은 목소리로 한길이 말했다. 기분은 그래도 내부인인 자신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알고 있는 정보를 풀어놨다.
"다 죽일 수도 없고..."
카렌이 중얼거리는 말에 엘리가 움찔거렸다. 그 모습에 카렌은 다시 한번 그냥 몰래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성전사들은 침공이 일어났을 때 싸우고 세력도 불려야 하니 쓸 데가 많지. 무엇보다 아직 어린애 앞에서 그럴 수는 없고.`
생각을 마친 카렌이 워치를 조작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가 누구랑 같이...아니 어떤 영물이랑 같이 왔다."
띠링!
그 영물에게 문자를 보낸 지 1분도 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아아아악! 결국에 사고 쳤다! 주인 나쁘다!]
문자 안에는 글씨임에도 삼색의 절규가 귀에 생생히 전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