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좀 씻자
뚜벅, 뚜벅
값비싼 대리석을 걷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낯선 복도. 하지만 곧 기억이 떠오르며 익숙함이 찾아왔다.
`여신이 일 처리는 확실하게 했어.`
이 복도. 벽에 박힌 촛대들. 벽에 난 흠집까지 모두 카렌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곳 이었다.
몸을 움직이려 해봤지만 어디까지나 여신이 만들어준 기억 속의 자신이다. 그저 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여기만 지나치면...`
꺾어지는 복도에서 오른쪽으로 몸을 틀자 하나의 문이 닫힌 채 카렌을 기다렸다. 자신이 있는 곳은 성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저 문을 열면 테라스로 나갈 수 있었다.
끼이익.
양옆으로 펼쳐지며 열리는 문을 밀자 자신의 왕국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평소라면 시장이 떠들썩하게 열려야 할 곳이, 여행자들이 지나가며 그들에게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모습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거리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까악, 까악, 까악
사람 대신 까마귀들이 거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온 세상의 까마귀들이 이렇게 날아온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자신들의 먹이가 넘쳐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
카렌은 앞에 보이는 광경에 입을 꽉 다물었다. 사람들은 모두 차가운 시체가 되어 있었다. 아니, 차라리 죽었다면 좋았으리라. 살아남은 사람들은 왕이 사는 성을 향해, 자신을 향해, 무릎 꿇고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죽어가면서도 애원하고 있었다.
[폐하. 살려주세요. 너무 아파요.]
[제발...저희를 구해주세요.]
차라리 비난하면 좋을 것을, 모든 게 당신의 탓이라고, 이 무능한 왕을 비난하면 좋을 것을···.
기억 속의 카렌은 돌아서서 테라스를 닫고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머리 위에 쓰고 있는 왕관을 내팽개쳐버렸다. 그리고는 괴로움에 자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허리춤까지 오는 긴 은발의 머리가 엉키며 산발이 되어 볼품없게 변했다.
`내가 저랬었나...`
여신에게 자신의 과거를 보여달라고 한 부탁. 카렌이 왕이었던 마지막 날이다. 세계 최고의 연금술사인 카렌이 세운 만큼 대륙의 온갖 연금술사들이 모여들고 작지만 그래도 나름 평화로웠던 왕국이었다.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돌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카렌은 방과 연결된 연구실로 들어가 미친 듯이 이것저것 실험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모은 약초들이 쌓였고 옆에는 전염병에 걸린 자신의 기사들이 침상에 누워 있었다. 카렌의 광인과도 같은 모습을 본 기사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폐하..."
"말하지 마라. 더 상태가 악화된다. 내가 너희들을 꼭 살릴 것이다. 내가 누구냐."
"압니다...저희가 페하를 지켜야 하는데 반대가 되어 버려서 송구합니다."
이 고지식한 놈들은 자기 몸이 죽어가는데도 이딴 소리밖에 못 한다.
"이걸 먹어 보거라."
카렌이 기사에게 완성한 포션을 건네주었다. 기사가 고통으로 떨리는 손으로도 두 손으로 공손하게 카렌이 건네는 병을 받아들었다.
"그 따위 예를 차릴 필요 없다! 명이다! 빨리 먹어!"
다급해지고 감정이 격해지니 카렌의 입에서 옛날 말투가 무심코 튀어나온다.
꿀꺽, 꿀꺽.
기사가 포션을 삼키고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카렌이 기다리던 그 어떤 호전 효과도 나타나지 않았다. 온몸에 나타난 수포도, 충혈된 눈도, 피를 토하는 기침도 멈추지 않았다.
"쿨럭!"
지금도 기사가 뱉은 기침에 잔뜩 빨간 피가 묻어 나온다.
"폐하...저는 괜찮습니다. 어떤 기사가 자신의 군주가 이렇게 해주는 호사를 누리겠습니까. 폐하라도 건강하셔서 다행..."
카렌이 만들어주는 포션이 생의 마지막 목적이었는 듯 기사는 끝내 고개를 떨궜다. 카렌은 애써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약초를 배합하기 시작했다.
"기다려. 제발..."
하지만 카렌의 노력에도 포션들은 전혀 효과가 없었고 기사들은 죽어갔다.
"이 불경한 새끼들. 항상 나에게 군주답게 행동하라 하지 않았더냐. 그런 평민들이나 쓰는 말을 하지 말라고 잔소리나 해대고. 그런데 예는 너희가 제일 없구나."
카렌의 입에서 품위있는 말투와 편한 말투가 섞여 나왔다. 하지만 지적할 만한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 버린다.
이 놈들은 자신들끼리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고통이 극심할 게 분명한데 너무나도 조용하게 눈을 감는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자신이 부담스럽지 않게 배려한다. 그렇게 이제는 기침조차 들리지 않는다.
"...."
정적이 흐르고 카렌은 실험대에 머리를 박고 눈물을 떨궜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끼이익
누군가가 실험실 문을 열고 카렌을 불렀다.
"폐하..."
"재상..."
젊은 나이에도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중년의 사내가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곤 힘겹게 카렌을 불렀다.
"누워있으라 했잖아!"
카렌이 눈물을 급하게 훔치고는 재상을 향해 호통쳤다.
"폐하...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아델라가 폐하를 보고 싶어합니다."
"아델라가? 그럼 같이 가지. 내가..."
"저는 괜찮습니다. 마지막은 이 친구들이랑 보내고 싶군요."
"마지막이라니. 무슨 소리냐."
"누구도 폐하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건 전염병입니다. 인간이 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서 가보십시오. 더 늦으면 아델라가 화낼 겁니다."
"...알겠다."
카렌이 문을 열고 나가자 뒤에서 재상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어왔다.
"알렉스 이친구야. 나는 재상도 되고 자네도 꿈에 그리던 기사도 됐으니 우리 그래도 잘 살지 않았나?"
용병부터 시작해서 같이 일궈낸 왕국이다. 저들이 10대, 20대에 만나서 모두 친구였고 동료였다. 자신들끼리 언제 공부를 하고 중년이 되어 버리더니 오글거리는 말투로 자신의 말투 하나하나 지적하고 교정하던 무엄한 놈들이다.
카렌은 다시 솟아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렇게 도착한 귀여운 인형들과 장식들이 매달려 있는 방. 카렌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한 여자아이가 누워있었다.
"오빠?"
금발에 하얀 피부에 갈색 눈동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애교도 많아 성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의 사랑을 받는 귀염둥이다.
"그래. 내가 왔다."
"헤...이제 오빠라고 불러도 아무도 뭐라 안 한다."
평소라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기사들이 한마디 했겠지. 아델라는 뭐가 그리 좋은지 카렌을 향해 웃어 주었다.
"뭐라 그러는 것들은 내가 따끔하게 혼내주지."
"진짜?"
"내가 왕이다. 이 녀석아."
"너무 좋아!"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좋아하는 아델라는 곧 느껴지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이 전염병의 증상 중에 하나다. 어떤 전조도 없이 갑자기 온몸이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
"나...난 괜...찮아."
성인 남성도 견디기 힘든 고통을 어린아이가 받는 걸 보니 카렌의 가슴도 찢어졌다. 카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빨리 치료제를 개발해야...
"가지마."
하지만 자신을 붙잡는 아델라의 목소리에 카렌의 발이 멈춰 섰다.
"같이 있어 줘."
"그래."
카렌은 다시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아델라의 손을 잡았다. 이 아이와 단둘이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본연의 말투로 돌아간다. 참 남을 편안하게 해주는 타고난 재능이 있는 아이다.
"옮아. 전염병이라며?"
아델라가 황급히 손을 빼려 했지만 카렌은 꼭 부여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차라리 옮았으면 좋겠다."
"그런 말 나빠! 우리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역시 카렌 오빠는 다르다고 말이야."
아델라가 꾸짖었지만 카렌은 진심이었다. 재상의 말에도 죄책감은 카렌을 좀 먹고 들어갔다. 이 전염병은 자신이 자만해서, 너무 행복하게 살아서 받은 저주 같았다.
"알았다. 그런 말 하지 않으마."
"착하다. 우리 오빠."
카렌이 아델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이 습관도 이 아이를 통해 생겼지. 뭔가 귀엽다고 생각되면 자연스럽게 머리에 손이 간다.
"손...좋아."
아델라는 그렇게 자신의 머리 위의 기분 좋은 촉감과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눈을 감았다.
"..."
카렌은 한참을 그렇게 계속 있었다.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잠시 그렇게 앉아 있었다.
터벅, 터벅.
카렌은 복도로 나왔다. 아무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델라를 마지막으로 성안에 이제 더 이상 살아있는 신하는 없었다.
거리로 나왔다. 아까만 해도 조금이나마 살아있던 자신의 백성도 이제 없었다.
"나는 왕이 아니다."
왕은 신하와 백성이 만드는 것이다. 카렌은 자신의 나라를 떠났다. 그저 정처 없이 멍하니 걸었다.
그렇게 신이 보여준 카렌의 과거 기억은 끝났다. 잠깐 세상이 깜깜해지더니 어느새 제단을 만지고 있는 자신의 손이 보였다.
"저...오재민 형제님?"
뒤에서 한길의 소리가 들려온다. 여기서부터 현실이다.
비밀조직의 위치, 이단심판관 등. 여신이 말했던 대로 정보가 쉴 새 없이 카렌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키워드 중심으로 잠깐 머릿속에서 정리를 마친 카렌이 눈을 뜨자마자 몸을 뒤로 돌리며 말했다.
"얼마나 지났어?"
"네? 방금 만졌다 바로 떼셨는데요?"
"그래?"
신과의 대화이니만큼 현실의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았나 보다.
"저...괜찮으세요?"
생김새도 그렇고 아델라와 목소리도 똑같다. 카렌은 순간 덜컹거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소녀를 마주 봤다. 순간 아델라의 얼굴이 겹쳤지만, 갈색 눈동자가 아닌 금색 눈동자가 그래도 카렌을 일깨운다.
아까 자신이 차가운 태도로 대했음에도 소녀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음을 카렌은 느껴졌다. 착한 아이다.
"괜찮다. 여신과 대화는 끝났고 거래를 했다. 여기서 널 데리고 나갈 거다."
하지만 카렌,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딱딱한 말투. 160년의 경험도, 느닷없이 찾아온 과거의 아픈 기억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네! 저는 엘리라고 해요. 제가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카렌이라고 해라."
"어? 오재민 형제님..."
"조금 있다 얘기해 줄게. 지금은 닥치...아니 잠깐만 조용히 있어라."
갑자기 달라진 카렌의 분위기에 한길은 입을 다물었다. 단순히 그것 뿐만 아니라 실제로 카렌에게서 슬금슬금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앞의 소녀는 카렌이 의도적으로 피해 갔는지 한길의 몸에서만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럼..카렌 오빠라고 부르면 될까요?"
자기 딴에는 나름 친근하게 부르며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던 엘리지만 카렌의 표정이 더욱 굳어버렸다.
"저기...제가 무슨 실수라도..."
안절부절못하며 엘리가 뭐라도 말하려고 했지만 카렌은 애써 표정을 폈다.
괜히 마음속 깊이 묻어 놨던 과거를 본 게 아니다.
`이 아이는 상관없다.`
자신이 직접 마주보기 위해서, 이 아이를 오롯이 '엘리'라는 아이로 대하기 위해서다.
'아델라는 죽었다.'
마음속으로 세뇌하듯 계속 되뇌자 눈 앞의 엘리의 얼굴에서 아델라가 조금씩 사라졌다. 그리고 엘리의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미안하구나. 네 잘못이 아니다. 내 개인의 과거에서 비롯된 문제니, 너는 조금도 잘못이 없다."
"아..."
"호칭은...아저씨가 좋겠구나."
"네!"
"여기서 나가자."
그래도 아직 카렌은 엘리가 살짝 어색했지만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었다. 그리고 여신과 아델라를 보고 오니 당장 이 아이를 좀 씻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