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40/140)

  인간이 항상 모든 일의 근원이다

  "세상에···. 저게?"

  옆에서 한길의 말은 무시하고는 카렌은 생각에 잠겼다. 하얀 쥐가 신이 성녀를 구하기 위해 보낸 필연은 확실하다. 그럼 이 신병은 우연일까? 저 소녀가 내 기억 속의 누군가와 닮은 건?

  `굉장히 짜증 나는군.`

  한길의 재롱(?)으로 좀 나아졌던 기분이 소녀를 보고 다시 저기압으로 돌아섰다. 지구로 돌아온 뒤로 진심으로 이렇게 기분이 나쁘고 짜증 났던 적이 없다.

  대한 그룹에서 쳐들어왔을 때도, 미치광이 박사가 뜬금없이 도발해 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이 녀석을 보자.`

  "자, 그럼 어떻게 할 거냐."

  ?

  카렌은 단번에 자신이 열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한길을 시험했다. 어차피 이 문에 열쇠 따위도 없었다. 그냥 바깥에서만 열 수 있게 두꺼운 걸쇠만 걸려 있었으니까.

  덜컹!

  한길은 망설임 없이 걸쇠를 옆으로 당기며 잠근 문을 열어젖혔다.

  "그거 맘대로 열어도 돼? 그래도 교단에서 가둬 둔 거 아니냐?"

  카렌의 말에 한길은 지금껏 흔들리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올곧은 눈으로 말했다.

  "교단의 그 어떤 법과 책에도 저런 어린아이를 저런 꼴로 놔두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아이가 이단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 실제로 마녀가 변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확인되기 전까지 최소한의 대접은 해주는 게 맞다.

  "그리고 마녀가 저런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는 제단을 어떻게 만듭니까."

  "넌 합격이다."

  신이 뭘 하던 방금 한길의 행동은 자신의 선택이다. 신은 밥은 차려줄 수 있지만, 숟가락으로 떠먹는 건 인간의 몫이다.

  `역시 때가 덜 탔어.`

  카렌은 한길이 열어 둔 문으로 들어가 성녀를 마주했다.

  `정말 그 아이와 닮았어. 하지만 이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눈동자의 색이 아니었으면 자신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다. 카렌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애틋한 감정과 신을 향한 적개심을 애써 억눌렀다.

  "...큰 거 왔다."

  성녀가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큰 거?"

  카렌이 살짝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온종일 싸우는 게 낫지, 감정을 제어하는 일이 몇 배는 더 힘들었다. ?하지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대하는 카렌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솔라리님이 말해 주셨어요."

  "전부터 생각했지만 너희 신은 참 특이하구나."

  일단 신을 만나서 한마디 해야겠다. 성녀가 카렌의 마음을 읽은 듯 신성력을 내뿜고 있는 제단을 가르켰다.

  "저거 만져보시래요."

  "그래."

  카렌은 성큼성큼 성녀를 지나쳐 제단에 손을 뻗었다. 물론 제대로 된 성제단과 성물은 아니라 조금 부족하긴 해도 이 정도면 잠깐 물어볼 정도는 충분할 거다.

  `그래 이 느낌이지.`

  게이트의 더러운 기운과는 전혀 다른 박하사탕을 입에 문 듯 청량감이 카렌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순백의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엉덩이에 깔린 푹신한 쿠션의 감촉이 느껴지며 누군가가 인사를 건네왔다.

  "어서 와!"

  "...성녀?"

  "땡! 너희가 말하는 신이야! 겉모습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로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겉모습은 방금 지하 감옥에서 본 성녀라는 여자아이었다. 하지만 누더기 같은 옷이 아닌 깨끗한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다만 성녀와는 다르게 자신을 향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여신의 환대에도 카렌은 싸늘한 목소리로 신에게 물었다.

  "그 아이의 생김새를 일부러 아델라랑 닮게 만들었습니까?"

  카렌의 쏘아붙이는 말에 주눅이 들법도 하지만 여신은 여전한 미소를 유지하며 물음에 대답했다.

  "그건 우연이야. 나도 너에 대한 정보를 저쪽 신들에게 받아보고 깜짝 놀랐어."

  "우연..."

  "진짜야. 신은 거짓말 못 해."

  "그건 모르죠."

  "진짜라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능력 없어! 인간의 생각만큼 난 전능하지 않아."

  "후우..."

  카렌은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런데 자신의 눈에 들어온 손가락이 좀...많이 작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시야도 좀 낮아져 있었다.

  "이 공간은 터놓고 얘기하기 편하게 어렸을 때의 모습으로 돌려줘. 몸과 정신도 말이야. 물론 아기 때는 빼고. 그럼 대화를 못 하잖아?"

  "그렇군요."

  작아진 손으로 추측해보니 초등학교 3학년 쯤으로 돌아간 것 같다. 무엇보다 실감나는 건 포션의 부작용으로 머리색이 은발로 변하기 전의 검은색이다.

  딱!

  "이것 좀 마시고 기분 풀어. 나도 그럴 줄 몰랐어. 응?"

  과연 신은 신인지 여신이 손가락을 튕기자 카렌의 손에 평소 즐겨 마시던 딸기라뗴가 들려 있었다. 빨대로 한 모금 마셔보니 민들레 카페의 맛과 완전히 똑같다. 과연 신이다.

  "정말 만나서 반가워. 지구는 좀 어때?"

  여신은 카렌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은 참 귀엽다.

  "고생만 하다 와서 좋습니다. 그런데..."

  "물어보고 싶은 거 있었지? 대답해줄게."

  "그럼 저야 고맙죠."

  "그럼 대답해주기 쉽게 한 가지 질문을 먼저 할게. 게이트는 다른 행성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야. 파편이 뭘까?"

  "떨어져 나간 부스러기죠."

  "정답이야! 마나를 생산하는 본체와 떨어져 나왔으니 시간이 지나면 파편은 자연적으로 소멸해. 그래서 본능적으로 마나를 갈취하려 하지."

  S급 각성자조차 파편 입장에서는 티끌이나 다름없어 존재조차 모른다. 하지만 카렌의 마나는 워낙 많고 특출났기 때문에 그 소동이 벌어진 거다. 아무리 파편이라 해도 약하게나마 신격이 남아 있고 자신의 영역 안이라 힘이 대단했다.

  "하지만 지구로 돌아오니 마나가 돌아오던데요."

  "내가 파편이랑 싸워서 널 통로에서 보호해줬어! 잠시 힘을 맡아 둔 거야. 아니면 파편에 힘을 뺏겼을걸? 잘했지?"

  "그건 잘하셨네요."

  그런데 신이 원래 저렇게 발랄한가? 이전까지 만난 신은 근엄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저러니 나름 어울려서 괴리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내가 도와줬으니 부탁 하나만 하자. 응?"

  "...뭐죠?"

  카렌은 왠지 모를 불길함에 자신도 모르게 살짝 날이 선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 성녀가 한 말이 생각났다.

  '큰 거 온다.'

  "인류가 멸종할 거야. 도와줘."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았다. 커도 너무 큰 게 와버렸다.

  "싫습니다. 그 정도로 빚진 건 아닙니다."

  카렌이 단번에 쌀쌀맞게 거절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그런 일은 질색이다. 자신이 왜 지구로 왔나. 그런 걸 안 하려고 온 거다.

  "한 번 해주라. 응? 대신 다른 것도 알려줄게! 응?"

  "안 듣고 안 합니다."

  "칫! 알았어. 그냥 알려줄게. 이건 너에 관한 문제야."

  "그럼 감사히 듣죠."

  공짜는 거절하는 거 아니다. 그 정도로 마음이 약해질 자신도 아니고. 게다가 무려 신이 해주는 말이니 들어서 나쁠 건 전혀 없다.

  "그럼 문제! 사람이 이세계에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뀐 여신이 동그란 안경을 걸치고는 어린이 정장을 입고 퀴즈쇼 진행자로 옷을 바꿨다.

  "생고생? 짜증? 귀찮음?"

  카렌은 자신이 아무 준비도 없이 처음 지구에서 벨리알로 떨어졌을 때 느낀 고충들을 토해내듯 쏟아 내었다.

  "땡! 너 판타지 소설 안 읽니? 요즘 만화 같은 건?"

  "TV랑 드라마만 봅니다. 그거 보기에도 바빠서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답은 새로운 능력이 생깁니다!"

  주위에서 폭죽이 파파팍 터지며 여신이 오른발을 축으로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정말···. 활기찬 여신이다. 정말 아이 같다.

  "그...이고깽 그런거요? 이세계 고등학생이 깽판 치는 거?"

  판타지 소설을 전혀 보지 않던 카렌이 유일하게 아는 단어다. 옛날 옆집 중학생이 그런류의 소설을 감명김게 읽었는지, 자신이 능력이 생겼다고 3층에서 뛰어내려 다리가 부러졌었다.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 중 하나이다.

  "너도 참! 그게 언제 유행이야. 너도 능력 하나 있었잖아?"

  "능력? 불사? 처음에 아무짝에도 도움 안 된 그거요?"

  카렌이 버럭 짜증을 냈다. 벨리알에서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취소한다. 진짜 운이 더럽게 없었구나.

  "히잉...왜 나한테 그래..."

  "...미안합니다."

  카렌이 자신의 짜증에 여신이 쭈그러들자 사과했다. 하긴 이 여신이 잘못 아니 ...잠깐...

  "내가 너 안 보냈다? 오해하지마."

  여신은 카렌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읽고는 손을 강하게 내저으며 부정했다.

  "어쨌든 다른 세계로 넘어가면 그 세계의 법칙이 흔들리면서 대상에게 무작위로 변화가 일어나. 그리고 너는 운이 안 좋은 게 아니야."

  "좋은 능력만 주는 게 아니란 얘기군요."

  "역시 머리가 좋아. 그래, 겉모습이 흉측하게 변할 수도 있고···. 갑자기 슬라임이 될 수도 있어. 아니면 온몸이 썩어들어가거나."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는 상상을 하니 카렌이 순간 오싹해졌다.

  "그러면...이제 지구로 넘어왔으니..."

  "맞아. 너 이제 더 이상 불사 아니야. 원래 지구 출신이잖아. 다시 평범해졌어. 아니, 너 정도면 불사가 더 평범하려나?"

  "...그렇군요."

  남들이 꿈에도 바라는 능력이었지만 카렌은 오히려 후련했다. 자신의 멈췄던 시계가 이제 흘러간다. 오히려 다시 생을 되찾은 느낌이다.

  "그럼 이제 불사도 아닌데 막 열심히 살고 싶지 않아? 멸종하기 전에 한 번만 도와주면..."

  "싫습니다."

  역시 꿍꿍이가 있었구만. 생에 대한 미련을 부추겨서 꼬드기려고 했던 거다. 다시 냉정하게 거절하자 여신이 살짝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카렌은 아무리 여신이 불쌍한 표정을 지어도 넘어가지 않았다. 요즘 한창 연기와 투정이 늘어난 삼색과 얼굴이 겹쳐 보인다.

  "너 방금 되게 불경한 생각한 것 같은데..."

  "기분 탓입니다. 계속하시죠. 그리고 어떤 얘기를 하든 전 안 넘어갑니다."

  "그럼 멸종하는 이유라도 들어주라. 응?"

  "특별히 들어드리죠."

  마치 선심 쓰듯 말하는 카렌의 말에 여신이 신나서 대화를 이어갔다. 누가 인간이고 누가 신인지 모르겠다.

  "아까 게이트가 파편이라고 했잖아. 기억나?"

  "물론이죠. 그럼...잠깐만..."

  지구에 게이트라는 파편이 생긴 거라면.

  "역시! 척 하면 척이라니까? 본체가 곧 오겠지? 걔들은 지금도 지구를 찾고 있어. 저건 전조 같은 거야."

  "...일 안 하십니까? 지구의 신이잖아요! 뭐 좀 해봐요."

  카렌의 목소리에 피곤함이 섞여 나왔다. 자신이 어떻게 여기로 왔는데...다시 벨리알로 도망갈 수도 없다. 올 때는 온 대륙의 지원과 마법사들의 지원을 받아서 왔다. 게다가 가도 또 대적자가 나타나서 어차피 똑같다.

  "나는 지구의 신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나는 인간의 신이야. 나는 인류가 멸종한다고 했지, 지구가 멸망한다고 안 했어. 지구는 신을 믿을 정도로 지성을 가진 종족이 인간밖에 없거든."

  "그렇긴 하네요."

  지금껏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지구에는 그런 종족이...문득 카렌의 머리에 고양이 한 마리가 스쳐지나갔다.

  "영물은요? 웬만한 인간보다 똑똑하던데?"

  "걔들은 수가 너무 적잖아. 신을 만들만한 세력도 있어야 돼."

  하긴 안 그래도 적었던 영물들은 요즘 들어 더 줄어들었다고 했었다.

  "어쨌든, 그래서 대격변 이후로 모습을 드러내신 겁니까? 성자를 통해서요?"

  "드러냈다기 보다는 인간의 위기가 닥치자 인류의 의지가 자연스럽게 날 만들었어. 너네는 힘들 때 신을 찾잖아? 오 마이 갓! 이렇게 말이야. 이것도 다 의미가 있어."

  여신이 과장되게 두 손을 하늘로 들고는 인간을 흉내 내면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태어난 난 교단으로 구심점을 만들려고 했지. 너희 역사를 훑어보니까 종교가 어려울 때 가장 한곳에 모으기 쉽다더라. 그리고 나는 실제로 존재하기도 하고."

  "그거 중세 때 아닙니까? 그리고 여신님이 세운 종교, 이미 개판 났습니다."

  카렌이 지금껏 보고 온 교단의 모습에 살짝 자조적으로 말하자 갑자기 여신이 소리를 빽 질렀다.

  "너희가 말을 안 듣잖아!"

  카렌이 어이없어서 여신을 보자 여신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신이 울어?`

  겉모습은 물론 아이지만 그래도 신 아닌가? 카렌의 상식이 와장창 깨져나가며 당황해서 엉엉 우는 여신을 달래려고 애썼다.

  "뚝! 아니, 이게 아니라..."

  "놔둬. 괜찮아. 이러다 그칠 거야."

  그때 갑자기 신의 뒤에서 성인 여성이 나타나며 신을 감싸 안았다. 카렌은 한눈에 이 여인의 정체를 알아봤다.

  "당신도 신이군요. 그럼 신이 두 명입니까?"

  머리도 금발에, 조금 변하긴 했지만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거의 똑같다. 엘리가 어른이 되면 딱 저렇게 될 것 같았다.

  "아니. 난 분신이고 이 아이가 본체야. 상처받다 못해 신격을 나눈 거지."

  "상처요? 신도 상처를 받습니까?"

  "우린 인류의 신이니까. 인간이 만들어냈으니 성향도 똑같아. 상처받고 사랑하지. 증오하고 편애하기도 하고."

  여신이 어른 여신의 품 안에서 간신히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는 서럽게 소리쳤다.

  "너희가 나빠!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성자는 가두고! 경고는 무시했어! 그리고 성녀도 무리해서 보냈는데 마녀 취급하고!"

  "젠장..."

  어디를 가나 인간이 문제네. 카렌은 여신의 분노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자신도 그중 하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여신의 처지가 안타깝다고 넘어가면 안 된다. 그래도 눈물은 그치게 해야 할 것 같아서 대충 아무 위로나 건넸다.

  "그럼 지금부터 제대로 준비하면 되죠."

  "그래? 그럼 도와줄 거야? 네가 도와주면 막을 수 있을 거야. 넌 최고니까!"

  언제 투정을 부렸냐는 듯 분신의 품에서 벗어나 카렌을 향해 쪼르르 달려온 여신이 카렌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말했지만 싫.습.니.다."

  "치사하다!"

  "뭐가 치사합니까? 인간들 모아서 막으면 되겠네요."

  "너희가 성자 가둬버렸잖아! 걔가 내 눈이랑 귀란 말이야! 너 정도로 강하지 않으면 인간들은 직접 못 봐!"

  ?

  결국 해결책이 안 나오자 서로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카렌의 감정이 이렇게 쉽게 격해지지 않지만, 아까 여신의 말대로 이 방은 정신까지 어려지게 만들고 있었다. 그나마 카렌이라 이 정도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폭발했을 거다.

  "그게 제 책임입니까? 그리고 신이 아니라 무슨 스토커야?"

  "신이 그 정도도 못 하냐? 그리고 넌 책임 없어? 너는 인간 아니야? 벨리알에서 오래 있더니 벨리알 오크가 됐어? 그쪽 오크 신한테 소개해줄 테니 갈래?"

  "유치하게 그게 뭡니까? 내가 지구로 넘어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동안 뭘 하셨습니까?"

  여신과 160살 넘게 먹은 인간이 유치하게 말싸움 하는 모습을 어디서 보겠나. 여신의 분신은 의자를 만들어내고는 편안하게 앉아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 관람을 시작했다.

  "많이 했거든? 인터넷에 인류 멸종한다고 댓글도 달고 그랬거든?"

  여신의 마지막 말에 카렌의 머릿속에 삼색과 TV를 보면서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요즘 들어 인류가 멸망할 거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부쩍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이것도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라고 봐야 할까요?]

  [주인! 주인 동족들이 멸망한다고 한다!]

  [너는 그럴 때만 인간이랑 영물이랑 편 가르지? 내가 죽는 게 좋냐?]

  ?

  "그러니까 안 믿지!"

  카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조차 정신 나간 소리라고 받아들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나.

  "차라리 교단에서 그 말을 하지!"

  "성자가 처음에 그렇게 나오기에는 너무 사이비 같다고 그랬어.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 나중에 말해도 된다고."

  카렌은 여신이 했던 말 중에 가장 논리적이고 똑똑한 말이라고 느꼈다. 자신이 보기에는 솔라리교단을 여기까지 키운 일등 공신은 무조건 성자다. 저 인터넷 댓글은 여신의 작품이고.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거든? 경매장이랑 헌튜브도 내가 만들었어!"

  "경매장이랑 헌튜브를 여신님이 만들었다고요?"

  그건 좀 놀랍다. 어쩐지 지금껏 단 한 번도 사이트가 해킹 당한 적도 없고 아무도 관리자를 본 적도 없더라니.

  "서로 물건도 사고 팔고, 정보도 공유하면서 협력해서 강해지라고 만들었어. 근데 맨날 이상한 영상이나 올라와! 그거 관리하는 비밀조직도 성자랑 같이 교단도 모르게 겨우 만들었다고!"

  "그럼 그 비밀조직 보고 하라고 그러던가."

  카렌이 뚱하게 말하자 여신은 얼굴이 붉어지며 발로 땅을 콩콩 밟으며 소리쳤다.

  "비밀조직은 성자 말만 들어! 갇혔다고 이 바보야! 걔 없이 안 돼!"

  "멍청아? 아니, 그 대화를 내가 막았습니까? 저는 계속 벨리알에 가서 뼈 빠지게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게 신의 뜻인 거지! 그렇게 강해져서 왔으니 지구 좀 한 번 구해라!"

  "그렇게 전능하지 않다며? 벨리알에서 그거 싫어서 도망 왔거든? 지구에 쉬러 왔는데 왜 내가 휴가 때 업무를 해? 신이 무슨 악덕 사장이야? 월급도 안 주면서?"

  "이게 이제 은근슬쩍 반말하네? 나는 뭐 월급 받냐? 반말은 눈 감아 줄 테니, 한 번 구해주라! 응?"

  "아, 몰라요!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네 번 됩니다. 그리고 걔네`들` 이라며? 아까 거짓말 못 한다며? "

  `오...허를 찔렀네.`

  -아그작

  이제는 뒤에서 카라멜/치즈 반반 팝콘까지 창조해서 먹고 있던 여신이 콜라까지 홀짝거리며 카렌의 공격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그냥 말을 안 한 거야! 그리고 인류 안 지키면 너 쉴 곳도 사라지거든? 인간 다 죽고 어디서 쉴래?"

  "그거 막으려다 죽으면 쉬지도 못하거든요? 160년 넘게 살았으니 조금이라도 더 쉬다가 물약 하나 먹고 편하게 죽는 게 낫지."

  "진심 아닌 거 다 알아. 너 주변 사람들 좋아하잖아! 걔들은 아직 창창한데 어떡할거야?"

  `이번에는 이쪽 반격이군.`

  "...아니 신이 무슨 협박을 해? 신 맞아?"

  말문이 막혔던 카렌이 여신을 경멸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여신도 만만치 않은 상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그 신을 만든 게 너희 인간이거든?"

  씨익, 씨익.

  카렌과 여신은 한참을 서로를 향해 소리 지르며 대화를 하는 탓에 서로 숨이 차서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둘은 서로를 쏘아보며 호흡을 골랐다.

  `아냐. 이렇게 가면 끝도 없어.`

  번뜩 이성이 돌아온 카렌이 목소리와 정신을 잠시 가다듬고는 말했다.

  "후우...신이시여, 협상합시다."

  "흥! 뭔데?"

  "교단만 있으면 되죠?"

  "일단 교단만 정상화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러면 딱! 그 성자만 구해주겠습니다. 제가 쳐들어가서 다 쓸어버리고 신의 뜻이라고 말하면 더 귀찮게 안 할거죠? 구한 다음에 성자에게 말만 확실하게 해줘요."

  겉으로 봐서 좀 진정한 줄 알았더니 카렌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전혀 아니었다. 그냥 입으로 내뱉는 허세가 아니다. 실제로 이 기분 그대로 당장 솔라리 교단의 본진으로 쳐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좀 힘들어..."

  "대체..."

  "그런 게 아니야. 성자는 죽은 거나 다름없어."

  "네? 아까 갇혀 있다면서요? 그냥 구출하면..."

  "말은 그렇게 했는데, 정말 목숨만 붙어있어. 교황 나쁜 놈이 뭘 했는지 쓰러지고 지금은 이상한 관에 넣어 놨어."

  "...인간 새끼들이란."

  카렌의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삼색이 평소에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옮았나 보다.

  "나 인간의 신인데..."

  "방금까지 같이 욕해놓고서는 지금 와서 아닌 척 하지 마십쇼. 그럼 이제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성녀를 보냈잖아. 얘기하긴 길고 여기서 나가면 정보는 다 머릿속에 들어갈 거야. 그리고 난 이제 더 이상 활동 못 해."

  "성녀가 있잖습니까?"

  "성녀와도 더 이상 얘기 못 해. 이미 말은 해놨어. 침공하는 놈들한테서 지구를 숨기는 것도 바빠. 성자가 있는데 새로 성녀를 지정한 것도, 너랑 지금 대화하고 있는 것도 엄청 무리한 거야. 쿨럭"

  여신이 기침을 과장되게 했지만 단번에 연기임을 알아챈 카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불쌍한 척 하지 마세요. 그럼 교단에 성녀를 정식으로 인정받으면 되네요? 그럼 성녀가 알아서 앞장서서 막을테고."

  "다 죽이면 안 된다? 그럼 의미 없어! 교단이 세력도 불리고 사람도 있어야 막지."

  여신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 여신이 누굴 살인귀로 아나...'

  카렌은 어이없어하며 여신을 보며 말했다.

  "웬만해선 안 죽여요. 그럼 교단을 정상화하기 전까지 성녀와 계속 다닐 수밖에 없을테고..."

  "그렇지."

  "그럼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죠."

  "나 힘 별로 없는데...나중에 들어주면 안 될까?"

  "별 거 아닙니다. 그리고 그 쪽한테도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래? 뭔데?"

  카렌의 부탁의 내용을 들은 여신은 흔쾌히 승낙했다. 오히려 걱정스럽게 카렌을 바라봤다.

  "그 정도면 해줄 수 있어. 여기서 나갈 때 보여줄게. 근데 정말 괜찮겠어? 고통스러운 기억 아니야?"

  "성녀와 같이 다니려면 필요합니다. 정면돌파가 깔끔해요."

  "알았어. 그리고 나중에도 한 번 도와줄게. 지금 갈래?"

  "그러죠."

  여신은 손가락을 튕기자 카렌이 있던 공간이 으그러지며 순식간에 카렌을 빨아들였다. 이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순백의 방에서 여신은 카렌이 사라진 곳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넌 참 강하구나."

  그리고는 지금쯤 과거 속의 자신이 되어 있을 카렌에게 잠시 눈을 감고 위로와 축복을 빌어주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