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의 하루는 언제나 흐림
"솔라리님이시여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미천한 종은 감히 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나이다."
한길이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성물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이제는 빛이 나지 않는 성물처럼 그 어떤 징표도 한길에게 내려오지 않았다.
"아아아..."
반쯤 죽은 얼굴로 성물을 소중히 껴안고 절망하는 한길을 카렌은 흥미롭게 보았다. 신이 정해진 길을 따라 걷는 느낌이 들어서 나빴던 기분이 앞에서 벌어지는 연극을 보니 흥미로 물들었다.
`잠깐만 더 놀려볼까?`
지구로 와서 그런지 까마득한 기억, 군대에서 현역이던 시절이 떠오른다. 육군 만기 제대. 지구에서의 다른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이 기억은 몸에 새겨졌는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기분은 풀렸지만, 살짝 심술이 난 카렌이 슬그머니 한길의 곁에 다가와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떡하게?"
"말해야죠. 진실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그냥 카렌을 어떻게든 설득하고 모른 척해도 될 텐데 보고를 올릴 생각을 한다니 역시 성전사다. 아니, 이 녀석이 좀 특이한 거겠지. 다른 성전사는 몰라도 이 녀석이 할아버지라 부르는 지역관이 몰랐을까?
카렌은 무릎을 꿇고 있는 한길의 옆에 같이 쭈그려 앉아 한길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호오...과연 그게 해답일까?"
평소와는 전혀 다른 카렌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봤으면 깜짝 놀랐을 거다. 하지만 이미 카렌은 신병 앞의 병장모드로 변해 버렸다.
"당연하죠!"
"어떻게? 교단의 성물이 힘을 잃었다고? 그럼 누구 잘못인데? 솔라리 여신님의 잘못일까?"
"솔라리님이 무슨 잘못이 있으시겠습니까! 당연히 저희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게...어?"
역시나 이 녀석들은 성자나 성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성물이 힘을 잃는 걸 모른다. 하긴 이 교단의 역사가 30년밖에 안 됐는데 어떻게 알겠나. 벨리알에서야 교단들의 역사가 몇백 년을 족히 넘으니 자연스럽게 알려져 있는 사실이고.
호기롭게 이어가던 한길의 말이 점점 흐려지며 끝을 맺지 못했다. 뭔가 깨달은 표정.
"과연 성전사야!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 아주 좋아! 그런데 저 위쪽은?"
"...."
"누가 책임자일까?"
카렌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떠오른 인물에 한길은 고개를 숙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상상하면 안 된다. 상상하면...`
하지만 한길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카렌의 속삭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단 여기 지부를 관리하는 주교부터, 그다음이 어디야. 서울지부 전체 관리자는 대주교지? 그다음은?"
차례차례 조직도를 타고 올라가는 카렌의 말에 이제 한길의 몸은 마치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조직의 일원이 되면 싫어도 몸과 머리에 새겨지는 게 직위와 조직도다. 자연스럽게 한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카렌은 손가락을 하늘로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그 잘나신 교황이네?"
"하지만..."
"한번 말해볼까? `교황님께서 믿음이 부족하셔서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실 거죠?` 라고 말하면 교황이 `아! 그렇군요. 저희가 회개하겠습니다.` 라고 할까? "
"아아아..."
그럴 리가 없다. 애초에 자신 같은 말단 성전사의 보고가 올라가기나 할까?
??
한길은 경험이 부족하고 신병이라 시야가 좁을 뿐 머리가 나쁜 건 아니다. 악마 같은 교관들과 함께한 성전사 훈련소에서조차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던 한길의 마음이 풍랑 속의 배처럼 요동친다.
명치를 묵직하게 치는 카렌의 공격에 마침내 한길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 들며 몸은 납작 엎드려졌다. 조심스럽게 성물을 자신의 앞에 두고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한길은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솔라리시여, 불쌍한 종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다만 견딜 수 있는 시련만 주시..."
찍찍
"응?"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렌은 갑자기 나타난 예상치 못한 생물의 등장에 살짝 뒤로 물러났다.
`쥐? 여기 쥐가 있다고?`
심지어 그 관리하기 힘든 흰색 외벽을 그렇게 깨끗하게 관리하는 이 건물에? 물론 어디에나 있는 게 쥐라지만 저런 흰색 쥐는 금세 눈에 띄었을 거다.
`햄스터랑 들쥐를 섞어 놨네. 게다가 털도 하얀색이야.`
춥고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을 제외하곤 동물들은 하얀 털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 녀석은 바닥을 기어 다님에도 털에 얼룩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찍!
"어?"
카렌은 쥐를 관찰하고 있었고 한길은 한창 기도를 하느라 자신의 바로 옆에 쥐가 오는 동안 알아채지 못했다. 한길이 갑자기 들리는 쥐 소리에 고개를 들자 하얀 털 사이로 자신을 보는 동그란 검은 눈 한 쌍과 눈이 마주쳤다.
"...쥐?"
꾸벅, 쥐는 한길을 보며 마치 인사하듯 앞발을 살짝 흔들더니 컵, 아니 성물을 물고는 냅다 달아나기 시작했다.
?
"으아아! 안 돼!"
과연 성전사. 한길은 그 짧은 순간에 온 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쥐는 신성력까지 급하게 끌어올린 성전사의 손길을 피해 놀라운 속도로 사라져 버렸다.
"와...무슨 쥐가 저렇게 빨라?"
모든 일이 몇 초도 되지 않아 벌어졌다. 카렌조차 감탄할만한 쥐의 속도. 게다가 자신의 몸집만 한 컵을 물고가느라 앞도 잘 보이지 않을 텐데 말이다.
"솔라리님이시여..."
안 그래도 피폐해져 있던 한길의 눈은 반쯤 죽어 버렸다. 성물의 힘이 사라진 것도 모자라,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아아...파국, 아니 파문이다..."
한길의 좀비와도 같은 모습은 보는 카렌도 살짝 미안해질 정도로 불쌍했다. 사실 카렌은 조금 놀리다 그냥 이 투어를 끝낼 작정이었다. 모든 성물이 힘을 잃었다면 자신은 신을 만날 방법도 없고 굳이 그 사실을 귀찮게 폭로할 마음도 없었다.
"그...힘내라."
절망에 빠져 있는 한길, 자신의 옆에서 오재민 형제가 위로를 해왔지만 이미 절망에 빠진 한길의 귀에는 놀리는 걸로 들렸다.
이 형제님은 자신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악마 같다. 아까 주교님의 앞에는 멀쩡하던 사람이 왜 이렇게 얄미워졌을까.
`딱 한 대만 때리고 싶다.`
지금까지 한길이 종교인으로서 쌓은 모든 수양을 잠깐 잊어버릴 정도로 저 능글맞은 얼굴이 밉다. 지금의 얼굴도 자신을 놀리기 위한 가식 같다.
"전 끝났습니다."
이제 심문관한테 끌려가서 파문당하는 건 기본이고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눈앞이 깜깜하다. 성물이 힘을 잃어 일개 식당 컵으로 전락했어도 그걸 어떻게 증명할 길이 없었다.
`이 녀석은 아예 피할 생각도 없네.`
우직하다 못해 남들이 보기에는 멍청하다고 볼 정도의 책임감이다. 카렌의 입만 막으면 될 텐데 그런 선택지는 아예 없어 보인다. 놀린 게 살짝 미안하기도 했고 신병이 마음에 든 카렌은 살짝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방법이 있으면 어떡할래?"
"방법이요? 오재민 형제님은 성배를 찾을 해결책을 갖고 계십니까?"
한길의 안색이 빛처럼 환해졌다. 형제님이 갑자기 악마에서 천사로 바뀌어 보인다.
`한 번만 더 놀리면 안 되겠지?`
순간 카렌의 머릿속에서 사악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선은 지켜야지.
?
"이걸 봐."
카렌이 목걸이 아공간에서 하나의 포션을 꺼냈다. 그리고는 한 방울을 쥐가 지나간 경로로 떨어뜨렸다.
"어..어?"
"추적자 물약이야. 한 시간 내의 흔적을 보여주지. 몬스터처리 업체일을 하다 보면 신기한 물건이 많이 들어 와. 그중의 하나야."
카렌은 이런 포션이 실제로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냥 대충 둘러댔다. 어차피 지금 한길의 상태로는 이상함도 못 느낄 거다. 자신의 앞에 딱 하나의 구명줄이 내려와 있는데 그게 어디서 왔는지 중요한가, 어차피 안 잡으면 죽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가보자고."
"형제님과 같이요?"
"그럼 나 혼자 두게? 주교가 나랑 같이 있으라고 너 보낸 거 아냐?"
"아! 그렇죠... 맞습니다."
참 어리바리하면서도 한길의 때 묻지 않은 모습에 카렌은 속으로 굉장히 즐거웠지만, 한길이 상처받을까 봐 얼굴에 드러내진 않았다.
"앞장서. 뒤에서 따라가지."
"네!"
단순히 이 신병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아까 쥐를 볼 때부터 머리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과연 그 쥐도 우연인가?`
솔라리 교단의 대표색은 두 가지다. 태양을 의미하는 빨강.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흰색. 그중 하나인 하얀색 쥐가 하필 이 방에 나타나, 음식도 아닌 들고 가기 힘든 성물을 물고간다?
"이 말 알아? 신이 하는 일은 우연적이면서도 필연적이지."
"처음 들어 보네요."
"어떤 사제가 내게 해 준 말이야. 그런데 만약 신이 한 필연이라면... 직접 뭘 할 정도라면 너희 교단이 굉장히 뭐가 마음에 안 드나 봐."
"...그럴 만도 합니다."
"응? 무슨 일인데? 외부에서 보기에는 멀쩡하던데?"
"제가 존경하는 지역관님도 잡혀가시고, 성전사들은 이미 사제계열의 하부조직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원래 그렇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래? 성전사들이 들고 일어나면 되잖아?"
"그렇게 못 합니다. 현재 교황님만 여신님의 목소리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한길은 포션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가면서도 성실히 대답은 잘해준다. 근데 이 녀석 이거 외부인에게 말해도 되는 건가? 추적에 집중하고 있어서 거기까지 생각 못 하나 보다.
?
카렌은 한길의 말을 듣고는 손뼉을 탁 쳤다. 카렌의 머릿속에서 그림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정말 그렇게 말했어? 교황이?"
"네. 사제님이 기도하시러 들어가시자 교황님이 자연스럽게 대리자를 맡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재밌네."
`성자는 뭔가 문제가 생겼고 사제 위 라인들은 죄다 썩었네. 그리고 사기 쳤고, 내가 알기론 신의 목소리는 성자와 성녀밖에 못 듣는데 말이야.`
그래도 이걸 입으로 대놓고 말하면 안 그래도 의기소침한 눈앞의 신병이 더 쪼그라들 것 같아 카렌은 말을 아꼈다. 딱 봐도 교단의 상황은 총체적 난국이다.
"성자는 뭐한대?"
카렌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알고 있나 물었다.
"성자님은 외부 활동 안 하신 지 꽤 됐습니다. 듣기로는 장기 기도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거 참신하네."
말도 안 되는 개소리에 카렌이 실소를 터뜨렸다. 기도는 응답받기 위해 하는 거 아닌가? 신의 목소리가 직접 들리는 성자가 장기 기도를?
"왜 그러십니까?"
"아냐. 너희 교단도 정말 재밌는 곳이다 싶어서."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둘은 어떤 문 앞에 멈춰 섰다. 쥐가 대체 어떻게 들어간 건지 흔적이 문 바로 앞에서 끊겨 있었다.
"여기는 어디야?"
"저도 잘 모릅니다. 예전에 폐쇄된 지하 물품 보관소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폐쇄는 무슨..`
문의 잠금장치에는 먼지 한 톨 없다. 최근까지도 누가 들어갔다 나온 거다.
"열쇠 있어?"
"아뇨. 관리부에 물어..."
철컥
"그걸 여시면 어떡합니까? 아니 근데 대체 어떻게 여셨습니까?"
원리는 간단하다. 그냥 실드를 열쇠 모양으로 만들어서 집어넣고 빠르게 잠금장치의 홈 모양에 맞을 때까지 형태를 변환시키면 언젠간 열린다.
"다 방법이 있지. 자! 성물 찾으러 가야지?"
"하지만 이렇게 무단으로..."
찍!
한길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저 계단 밑에서 얄미운 소리와 함께 흰색 쥐가 성물을 입에 문 채 나타났다.
찍?
그리고는 어서 와서 잡아보라는 듯 성물을 땅에 내려놓고는 도발적인 울음소리를 내었다.
"오? 저기 성물 있네? 안 잡아? 저거 안 돌려놓으면 파문인데?"
"파...파문! 너 이리 안 와!"
쥐의 얄미운 모습과 옆에서 살그머니 추임새를 넣어주며 살짝 등을 미는 카렌의 손길에 한길은 눈이 뒤집힌 채로 계단을 굴러가듯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전사만 아니면 데려가고 싶네. 참 좋은 인재야."
카렌은 사악하게 웃으며 느긋하게 한길을 뒤를 따라 내려갔다.
"제발! 이리 와! 응? 제발 와주세요!"
쥐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한길이 뛰어다니지만 얄밉게도 간발의 차로 쥐는 계속 빠져나갔다.
"저거 아무리 봐도 그냥 쥐 아니라니까."
어떤 쥐가 아무리 신입 성전사라지만 신성력까지 쓰는데 저렇게 농락하나.
찍! 찍!
하지만 어떤 길도 끝은 있는 법. 쥐는 마침내 막다른 복도 끝에 몰렸다.
"이 녀석!"
한길은 그래도 성전사로서의 최소한의 이성은 남았는지 흰자가 번뜩이면서도 쥐를 마지막에는 살포시 움켜잡았다.
찍!
"잡았다! 요놈!"
한길은 조심스럽게 쥐의 입에서 성배를 뺏었다.
"크흑! 솔라리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길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옆에서 이곳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기...누구세요?"
"흐억? 귀...귀신?"
"너는 성직자란 놈이 귀신을 무서워하면 어떡하냐."
카렌은 두꺼운 철문 앞에 서서 조그마한 창문으로 보이는 소녀를 마주 봤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이 귀신이라도 본 듯 크게 확장되었다.
하지만 카렌의 충격은 소녀보다 더 컸다. 카렌의 모든 생각은 머리에 벼락이 맞은 듯 순간적으로 멈춰버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기억 속에 깊이 묻어 둔 한 이름을 꺼냈다.
"아델라?"
"...아델라요?"
"아니...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그 아이는 이제 없다. 게다가 지구에서? 말도 안 된다. 카렌은 다시 자세히 아이의 얼굴을 뜯어 봤다. 금발에 씻지 않아 가려졌지만, 이목구비가 확실히 비슷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눈 색깔이 다르다. 이 아이는 자신의 머리카락 색과 같은 희귀한 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왜 자신을 보며 놀랐던 걸까. 자신처럼 아이의 놀란 표정도 사라져 있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감정수습이 빨라.`
그렇다면 얘기는 편해진다.
"시간이 별로 없다. 성녀가 너지?"
한길을 놀리면서 잔뜩 담겨있던 장난끼는 사라지고 카렌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딱딱해졌다. 오랜 기억이 떠오른 탓일까, 머리가 지끈거린다. 몸에서 오는 것이 아닌 마음에서 오는 두통이다.
"소녀가 왜 여기 있습니까? 여긴 창고인데요?"
뒤에서 한길이 어벙하게 물었다. 그래도 카렌이 소녀에게 부른 성녀란 호칭은 못 들어서 다행이다. 그걸 들었으면 지금도 반쯤 혼이 나가 있는데 더 정신 못 차릴 거다.
"여기가 아직 창고처럼 보여? 감옥이잖아. 그것도 지하 감옥."
"네?"
"여기 오는 길에 문이 이거 하나였는 줄 알아? 수십 개는 더 있어. 뒤를 돌아봐라."
과연 카렌의 말대로 한길이 뒤를 돌아보니 똑같이 두꺼운 철문들이 음산하게 줄지어 있었다.
"여의도 교단에 지하 감옥이라니? 분명 심문하는 곳은 따로..."
이 성녀라는 아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카렌의 가슴에서 자꾸 뭔가가 치밀어 오른다. 그렇다고 옆에서 혼란스러워 하고있는 한길에게 뭔가를 설명해 줄 시간도 없다. 워치를 보니 이제 변신 지속 시간이 1시간도 안 남았다.
-휘적. 카렌이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는 한길의 앞에 손을 흔들어 시선을 끌고는 자신의 앞으로 불렀다.
'직접 보여주는 게 제일 좋지.'
"이리 와 봐. 성녀, 너는 얼굴 좀 잠시 치워보고."
카렌이 한길의 얼굴을 성녀가 갇힌 창문에 갖다 대었다.
"서...성녀?"
이제야 성녀라는 호칭을 들은 한길은 이제 눈에 초점마저 희미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들어오는 정보량과 정신적 충격에 기절하기 직전의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네가 소중하게 손에 쥐고 있는 그 컵보다 저게 훨씬 더 신성해 보이지 않냐?"
하지만 꺼져가던 한길의 의식은 좁은 창으로 보는 방 안의 무언가에 머리채가 잡혀 급하게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세상에···. 저게?"
성녀라는 소녀가 돌멩이를 쌓아 만든 볼품없는 제단에서는 자신이 지금껏 본 적 없는 순수하고도 맑은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