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8/140)

  신성모독이다

  웅장한 건물과 달리 엘리가 끌려 간 곳은 낡고 부서지고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딘지 모를 지하 감옥이었다. 습기가 찬 벽은 쩍쩍 갈라져 돌 부스러기가 흘러 내렸고 바퀴벌레와 정체 모를 벌레들이 뽈뽈 기어 다닌다.

  -덜컥.

  두터운 강철문에 작은 창이 열렸다. 간신히 팔 하나 들어갈 만한 그 구멍에서 흰색 눈동자가 번뜩이며 엘리에게 물었다.

  "다시 한 번 묻지. 너는 누구냐?"

  여기 끌려오고 나서 계속 같은 목소리다. 자신을 여기 가둔 주교의 목소리와도 달랐다. 다만 목소리의 주인은 확실히 주교보다 많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저는 마녀가 아니라니까요."

  여러 질문을 들었지만 나이에 비해 영리한 엘리는 그 모든 질문의 목적을 단번에 알아 차렸다.

  자신의 입으로 마녀라는 확답을 받는 것.

  "쯧! 어리지만 역시 마녀구나. 독한 것. 인정하면 편해진다. 제대로 된 음식을 주지."

  목소리는 혀를 차며 말했다. 배고픔이란 어른도 참기 힘든 것일진데 어찌 말리비틀어진 아이의 고집이 이리 셀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어린 소녀의 이런 강단은 어디서 오는 걸까.

  "정말 솔라리님이 말해주셨어요."

  "어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정녕 굶어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꼬르륵

  엘리의 배가 천둥이 친 것처럼 울었다. 하루에 한 끼, 그것도 딱딱한 빵 한 덩어리와 물 조금만 준 덕분에 탈수와 배고픔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다.

  "저는 마녀가 아니에요..."

  들어간 음식이 거의 없어 배에서 느껴지는 쓰라린 복통에 고통스러웠지만 엘리는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쯧! 그럼 버텨 보아라! 여긴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장소다. 너를 구해줄 자는 아무도 없다."

  쾅!

  심문하던 이는 철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고 이제 엘리는 어슴푸레한 빛을 내는 촛불과 함께 독방에 홀로 남겨졌다.

  목소리의 말 처럼 여긴 아무도 없었다. 엘리 자신의 목소리만 벽에 부딪혀 메아리처럼 다시 돌아왔고 가끔 들리는 소리는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 밖에 없다.

  '이 정도는 괜찮아.'

  하지만 엘리는 울지도 절망하지도 않았다.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껏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 과거 생각을 떠올리니 등이 욱씬거린다.

  "저는 마녀가 아닌데 자꾸 마녀래요."

  명백하게 아무도 없는 지하에서 엘리는 누구와 대화하듯 말을 꺼냈다. 그리고는 싸구려 플라스틱 쟁반에 나온 빵을 반으로 나눴다. 또 갈라진 벽에서 떨어져 나온 돌덩이들로 작게 탑을 쌓았다. 마지막으로 돌덩이 몇 개로 만든 탑 바로 옆에 빵 반 덩어리와 촛불을 놓았다.

  "제단이에요. 그런데 솔라리님은 빵도 드시나요? 네? 지금껏 본 가장 훌륭한 제단이라고요?"

  만든 자신이 보기에도 정말 볼품없는 모양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 한 칭찬에 엘리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

  찍, 찍

  그때 흰 쥐 한 마리가 제단에 올라서더니 두 발로 서서 엘리를 바라봤다.

  "안녕? 넌 좀 특이하게 생겼구나."

  자신말고 유일하게 존재감을 내뿜는 이 지하감옥의 또 다른 주인이다. 그런데 생김새가 일반 쥐와는 확연히 달랐다. 털이 흰색인 건 둘째치고 처음 보는 종류의 쥐였다.

  `햄스터? 아닌데...

  "

  흰색 도화지에 검은색 점을 세 개 콕 찝어 놓은 듯한 이목구비다. 귀는 동그랗고 코는 새끼 강아지의 코처럼 분홍색으로 촉촉하고 꼬리는 머리와 똑같이 공처럼 동그랗다.

  애초에 저걸 쥐라 불러야 할지도 의문이다.

  찍

  엘리의 신기한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쥐는 빵과 엘리를 번갈아 가며 바라 보았다. 마치 허락을 구하는 듯 예의바른 모습이다.

  "먹어도 돼. 나는 내 것 있어."

  찍, 찍!

  엘리의 허락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쥐는 빵을 물고는 왔던 쥐구멍으로 사라졌다.

  안 그래도 배고픈 와중에 자기 빵 반이 사라졌지만 엘리는 그저 쥐가 사라진 구멍을 잠시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저도 저렇게 나갈 수 있을까요?"

  엘리가 살짝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강하게 마음을 먹어도 나이가 어린 소녀다. 불현듯 찾아오는 불안감과 절망이 자신을 힘들게 했다.

  "네? 뭔가 큰 게 오고 있다고요?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알았어요, 그냥 기다릴게요."

  ?

  * * *

  "우와! 진짜 이런 건물 처음 본다. 흰색이 지금 내리고 있는 눈이랑 잘 어울린다."

  고층 빌딩처럼 높지는 않지만, 그리스의 유명한 신전들같이 웅장하다. 여의도의 명물 중 한 곳인 솔라리 신전 건너편 주차장에 카렌은 차를 세웠다.

  "여기 집값 엄청 비싸지 않나?"

  일단 여의도 지부가 서울 내부에 위치한 건 둘째치고 신전이 세워져 있는 부지가 압도적이다. ??지금은 용도가 좀 바뀌긴 했어도 국회 의사당보다 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돈이 많은가 보다."

  "그렇겠지."

  전 연합에서 가장 세력이 큰 종교집단이니 따로 영리 활동을 하지 않아도 충분할 거다. 게다가 영화나 책에서만 나오는 기적이 아닌 눈에 보이는 기적이니 어떻겠나.

  "넌 여기 있어라."

  "꾸잉? 나는 괜찮다!"

  삼색은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카렌에게 시위하듯 일어서서 앞발을 흔들었다.

  "저기! 우주선 가방도 있다!"

  이제는 뒤 자석에 항상 가지고 다니는 가방을 향해 삼색이 훌쩍 뛰어오르며 톡톡 치며 말했다.

  "여긴 뭐가 있을지 모른다. 신성력 쪽은 나도 잘 몰라."

  저기 성전사들은 그렇다 치고 결계나 이런 종류가 삼색을 감지하면 골치 아파진다.

  "그래도..."

  "마물은 걸릴 수도 있어."

  "나, 마물 아니다! 영물이다!"

  삼색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카렌은 삼색의 배를 콕 찔렀다. 다행히 더 찌진 않았지만, 여전히 불룩한 뱃살이다.

  "이 탐욕스러운 항아리나 좀 빼고 얘기해라. 신성한 영물님. 너 어제도 새벽에 냉장고 뒤지더라?"

  어두운 주방에 냉장고 불빛에 비친 그림자 괴물이 기다란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고 있으니 처음에는 귀신인 줄 알았다.

  "무슨 영물이 그렇게 식탐이 많아?"

  "꾸잉..."

  이번에는 삼색이 별말 없이 쭈그러들었다. 맨날 옹달샘이나 먹고, 자극적이지 않은 풀잎이나 먹다가 세상에 나오니 모든 가공된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무슨 일 있으면 문자 보낼 거니까 바깥에서 시선만 끌어봐."

  "주인? 여기 안전한 곳 아니냐?"

  사람도 많고 서울 중심부인데? 게다가 경비도 삼엄했다.

  "신전은 나도 잘 모르는 것들이 많아. 그리고 이거 먹고 날뛰어야 한다."

  카렌이 목걸이 아공간을 열어 두 병의 포션을 꺼냈다.

  "맛없어 보인다."

  삼색의 말이 이해되는 그냥 흙색 포션이다. 그것도 비 온 직후 뿌연 흙탕물 색. 딱 봐도 예상되는 맛에 단번에 삼색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이거 모습을 바꿔주니까 꼭 먹고 난동부려."

  "진짜? 그럼 그동안 이거 왜 안 먹었냐?"

  "최대 2시간 밖에 못 바꿔.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아마 우리 요물 고양이가 제일 싫어할 걸?."

  "뭐...뭔데?"

  삼색이 지레 겁먹고는 꼬리를 몸쪽으로 말아 집어넣었다.

  "160년 동안 먹어 본 모든 것 중에 제일 맛 없어. 그리고 3일 동안 미각을 잃어. 씹고 마시는 모든 음식이 이 색깔처럼 흙 맛이 날 거다."

  "꾸이이잉! 절대 안 먹을 거다!"

  "하하하, 네가 싫어할 줄 알았다. 이건 30분짜리다. 신호 주면 마시고 나와."

  카렌은 웃음을 터뜨리고는 한 병은 삼색에게 나머지 한 병은 자신이 뚜껑을 따서 마셨다.

  "으윽, 진짜 적응 안 되는 맛이야."

  맛에 대해 딱히 욕심과 편견이 없는 카렌조차 절로 투정이 나왔다. 진짜 모래를 잘게 갈아서 마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끔찍한 맛의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카렌이 얼굴을 꾸기고는 차 문을 열었다.

  탁, 차를 닫는 카렌의 얼굴은 전혀 달라져 있었다. 체형은 똑같지만, 머리의 색은 연합에서 가장 흔한 검은색으로 변했고, 얼굴은 얄쌍한 전과는 달리 광대뼈가 좀 더 솟고 턱은 각진 30대의 서양 미남 쪽으로 바뀌었다.

  삼색이 차에 홀로 남긴 했지만, 어차피 차 시동도 삼색의 워치에 연동해 걸 수 있으니 덥거나 하면 자기가 알아서 에어컨을 켜거나 돌아다니겠지.

  기이이잉

  "주인!"

  카렌이 길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차의 창문이 스르륵 내려지며 삼색의 머리가 쏙 튀어나왔다.

  "왜? 잘 풀리면 금방 올 거야. 끝나고 맛있는 거나 사서 가자."

  그런데 삼색의 표정이 굉장히 진지하고 심각했다. 엘리니아 게이트 안에서 몬스터가 몰려오는 위급한 상황에서 카렌이랑 떨어지기 직전의 표정이랑 똑같다.

  "절대! 거기서 사고 치지 마라. 나 저거 진짜 먹기 싫다."

  "...진짜 돼지냐. 노력할게."

  카렌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뭐 별일 있겠나. 그래도 서울 안인데. 손목의 워치를 켜서 2시간 알람을 설정하고, 강이사가 만들어 준 자신의 신상을 읽으며 신전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름 오재민. 나이 34세. 직업. 몬스터 부산물 처리사업 사장."

  밑에는 강이사의 성격을 보여주듯 상세정보가 쭉 적혀 있었다.

  "요즘 시장에 한참 뜨는 부산물 처리사업에서 갑자기 뜬 사장 컨셉. 부양할 가족도 없고 갑자기 돈이 많아지니, 공허감이 찾아와 종교에 눈을 돌린다라..."

  뭐 이런 것까지 써놨어? 역시 우리 강이사가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하다.

  읽는 동안 신전의 입구에 도착했다. 차가운 눈이 자신의 머리 위에 쌓이고 있음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지키고 있는 성전사들을 보는 카렌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성전사들은 나쁘지 않은데?`

  하나를 보며 열을 안다. 벨리알에서 신전 세력과 전쟁의 시작은 말단 경비병으로부터 시작됐으니까. 무슨 신전 안에서 구경하는데 기부금 명목으로 돈을 뜯으려고 하더라.

  신전 안으로 들어가니 다른 목적으로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기도하러 온 사람. 관광하러 온 사람. 그리고...자신처럼 기부하러 온 사람.

  "주교 좀 만나러 왔다."

  지나가던 사제를 카렌이 불렀다.

  ?

  `뭐야 이 사람은?`

  다른 곳도 아닌 감히 신전 안에서의 무례한 언사에 사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주교님은 함부로 만나실 수 있는 분이..."

  "여기."

  카렌이 품에서 강이사가 준비해 준 명함을 사제에게 건네주자 사제의 언짢은 기색이 180도로 달라졌다.

  "아! 오시기로 한 형제님이셨군요. 주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제가 정중하게 안내를 시작했다. 관람객에게 허락된 외부 본당을 지나 내부 본당을 진입하자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화려함이 카렌을 감쌌다.

  "대단하군."

  옛날 성당을 보면 유리를 조각조각 붙여서 그림을 만들면 빛이 들어와 색다른 분위기를 준다.

  "다 솔라리님의 은혜십니다. 유리 대신 천연 수정을 깎았고 군데군데 보석으로 솔라리 여신님의 아름다움을 더 빛냈습니다."

  루비, 사파이어, 심지어 다이아몬드도 눈에 안 들어온다. 교단의 상징인 태양으로 커다란 레드다이몬드가 박혀 있으니 말 다 했지. 저거 1캐럿, 즉 200mg당 족히 10억은 넘는다.

  "신이 이걸 좋아하신다고?"

  "자신과 신의 종들이 사는 집이 아름답다면 좋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비꼬는 의미로 말했지만 사제는 오히려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말이 안 통하니 이길 자신이 없다.'

  카렌 자신도 본인 스스로가 그다지 좋은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건 좀...많이 결이 다르다.

  "...주교 방이나 가지."

  똑, 똑, 똑

  "주교님. 오재민 형제님께서 오셨습니다."

  "오오오! 들어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후덕한 인상의 주교가 몸소 문을 열어 주며 카렌을 마중 나왔다. 그 바로 등 뒤에는 남자 둘이 호위를 서고 있었다. 헌데 방금 신전을 출입하면서 본 성전사 특유의 하얀 외투를 입고 있지 않았다.

  "반갑군."

  주교는 방문자의 무례한 언동에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기부해 놓은 억대 금액을 보니 웃음만 절로 나온다.

  ?

  '대주교님께 드릴 것이 늘겠어.'

  곧 새로운 대주교를 뽑는 투표가 이뤄진다. 이미 한 발짝 더 다가간 느낌이다. 대놓고 진상하진 못하겠지만, 신전 이름으로 대주교님 앞으로 조그마한 사택 하나 드리면 된다.

  "저 사람들은?"

  카렌이 주교의 뒤에 있는 남자 둘을 보며 말했다.

  "아! 저를 믿음직하게 지켜주시는 분들입니다. 제가 믿고 있는 자들이니 대화가 새어나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얀 외투를 입은 성전사가 아닌 다른 자들이 주교의 호위를 선다라...이제는 예측조차 못 하겠다. 그냥 카렌은 여기 온 목적이나 신경 쓰기로 했다.

  "얘기는 됐고, 그냥 구경이나 하고 싶군."

  "물론이죠. 제가 직접 안내해드리죠."

  "혼자서."

  "흠...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불가능하진 않군.'

  주교가 말꼬리를 흐리는 걸 보니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 당연히 하나밖에 없지.

  "같은 금액을 또 기부하지."

  "그렇게 하시죠! 대신 성전사 한 명만 형제님의 안전을 위해 멀찍이 붙여 드리겠습니다. 이건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 손이라고 해도 혼자 신전 안을 돌아다니게 놔둘 수는 없다. 구색은 맞추고 명분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딸랑, 딸랑

  주교가 자신의 옆에 늘어진 줄을 당기자 방울 소리가 나면서 성전사가 뛰어 들어왔다.

  "성전사 한.길! 왔습니다!"

  "일단 규칙상 한 명 붙여 드리지만 귀찮게 하지 않을 겁니다."

  과연...카렌은 성전사를 보자마자 주교의 배려를 알아 차렸다. 긴장한 얼굴, 과도하게 큰 소리, 각진 태도. 누가 봐도 신병이다. 고참처럼 깐깐하고 능글맞지 않을 거란 얘기겠지.

  그런데 아무리 저 성전사가 자신의 하급자이지만 저렇게 대놓고 얘기한다고? 여기 생각보다 더 개판이구나.

  `뭐...내 알 바 아니지.`

  카렌은 주교를 향해 마주 웃어주면서 대답했다.

  "아주 좋아. 그럼 한길이라고 했나? 가보지."

  "천천히 둘러보시길. 한길 성전사. 우리 형제님 잘 모시게."

  "네! 알겠습니다!"

  `우리 형제님이라...거참.`

  여기 솔라리라는 신은 참 관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나? 나라면 뒷목 잡고 쓰러질 텐데 말이야.

  신입 성전사답게 한길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카렌은 내부 관광을 시작했다.

  "성물이 전시된 곳으로 가지."

  이리저리 주위를 살피는 척을 하다 주교의 방이 좀 멀어지자 카렌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시간이 아깝다. 방금 흘낏 워치를 보니 벌써 남은 변신시간이 1시간 30분 밖에 안 남았다.

  "성물 말씀이십니까?"

  카렌은 부동자세로 딱딱하게 저 멀리서 대답하는 한길을 바라보며 손짓했다.

  "이리로 와라. 멀어서 잘 안 들린다."

  "하지만 주교님께서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내가 그렇게 부탁한 거야. 이제 마음이 바뀌었으니 이리 와."

  "네!"

  후다닥 한길이 카렌의 곁으로 다가오자 카렌이 지금까지의 무뚝뚝한 목소리와는 다른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힘들지?"

  "아...아닙니다!"

  "아닌게 아닌거 같은데?...딱 보니까 솔라리님에 대한 신앙 하나로 들어 왔는데 주교의 호위는커녕 시종이나 된 것 같고, 막 그렇지 않아?"

  "절대 아닙니다!"

  한길은 강하게 부정했지만,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카렌이 혀를 입술로 살짝 핥았다.

  '역시 신병은 어디를 가나 다 똑같군. 신선하고 재밌긴한데, 더 놀리면 울 것 같으니 그만하자.'

  "성물한테나 가자고. 안내해."

  "예! 이쪽입니다!"

  그렇게 성물을 향해 가기 시작했지만 한참을 걸어도 도착하지 않자 카렌이 살짝 짜증이 나서 물었다.

  "이거 왜 이렇게 멀어? 성물이라며?"

  "거의 다 왔습니다. 어...여긴가?"

  한길이 진땀을 흘리며 당황한 표정으로 앞에 보이는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주교의 방과 다르게 기름칠도 안 한 녹슨 경첩이 열리는 소리가 신경을 자극한다.

  "저거..."

  과연 안내는 제대로 했는지 방에 들어가자 박물관의 전시품처럼 경계줄이 쳐저 있는 중앙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그런데, 저거...

  "식당 스테리인스 컵이잖아."

  잘못 봤나 싶어서 눈을 몇 번 비비고 봐도 흔히 식당에 가면 네모난 컵 소독기 안에 탑처럼 쌓여 있는 물 따라 먹는 스테인리스 컵이다.

  "아무리 그래도 불경하십니다! 성자님이 목마르실 때 마셨다는 성배..."

  "네 눈으로 좀 봐라. 저게 어떻게 보이는데?"

  "....컵이네요."

  한길도 성물을 보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자기 눈에도 그냥 스테인리스 컵이다.

  `내가 볼 때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 곳 같은데...`

  신전에서 직접적으로 말은 못 해도 암묵적으로 출입이 금지된 곳일 거다. 아마 조금이라도 경력 많은 관계자와 왔으면 못 들어가게 했겠지. 게다가 우연히 본다 해도 외부인이 이런 낡은 창고를 누가 들어오겠나.

  카렌의 생각에 저 컵은 솔라리 교단의 치부다.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없앨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바깥에 내보일 수도 없는 계륵 같은 물건.

  '성자에게 무슨 일이 있는게 확실하다.'

  성물은 성자나 성녀밖에 못 만든다. 사실 그것도 만든다는 개념보다는 그냥 성자의 몸에 자주 닿거나 의미있게 생각하는 물건이 성물이 된다. 하지만 주인인 성자에게 이상이 생기니 힘을 잃어버린거다.

  `이 녀석이 아무것도 몰라서 온 거네.`

  아마 이 녀석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융통성 있게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물건으로 안내했겠지. 어차피 일반인이 신성력을 잘 알지도 못할테고. 과연 돈을 쏟아 부은 보람이 있다.

  "너 저 컵에 대한 거 어디서 들었냐? 직접 들은 적은 없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도 할아버지...아니 지역관님이 얼핏 얘기하는 것만 들었습니다."

  "너...아니다."

  어쩐지 오는 길이 좀 오래 걸린다 했더니 이 녀석 처음 와 봐서 길 잃었었구나. 신병답게 차마 모른다고 할 수 없어서 억지로 찾다 보니 얻어 걸린거다. 그리고 나름 높은 사람으로 추측되는 지역관이란 사람과의 친분으로 알게 된 정보까지...우연에 우연이 겹쳤다.

  '과연...우연이라...'

  카렌은 신에 대한 신앙심은 정말 눈꼽만큼도 없지만 딱 하나 지나가던 사제가 하던 말은 기억에 남았다.

  [신이 하시는 일은 우연적이면서도 필연적입니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카렌조차 신이 가지고 있는 힘은 인정한다. 그 신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우연일까? 아니면 정말 인간의 불확실으로 생겨난 우연일까?

  카렌의 입꼬리가 살찍 비틀린다. 장기말이 된 느낌이어서 기분이 좋지는 않다. 하지만 일단 지금으로써는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한 가지. 눈 앞에 있는 저 성물이라 불리는 물건은 그냥 컵이다.

  "저기서 신성력 느껴지냐?"

  카렌이 혼란스러워하는 한길에게 물었다.

  "멀리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모르겠는게 아니라 모르고 싶은거다. 한길의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렸다.

  "그럼 제대로 봐야지."

  "어..어? 다가가시면 안 됩니다!"

  한길이 채 말리기도 전에 카렌은 경계 줄이 쳐져있는 성물로 다가갔다. 애초에 보안을 이 따위로 해 놓은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형제님! 만지시면 안 됩니다!"

  "이거 받아라. 깨진다? 아니...스테인리스라 안 깨지나?"

  카렌은 한길의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물을 손으로 잡고는 거침없이 한길을 향해 던졌다.

  "으아아아악! 성물이! 성물이!"

  한길이 몸을 날려 성물이 땅에 뒹굴기 전에 간신히 낚아채고는 성전사로서의 평정심을 잃고 카렌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성물을 함부로 건드시다니요!"

  "그게 아직도 성물 같아? 네 눈으로 똑바로 봐라."

  "...."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 한길, 자신의 손 안으로 들어왔다. 사실 처음 볼 때부터 스스로도 눈치채고 있었다. 게다가 선배에게 들은 바로는 일반인은 몰라도 자신같은 성전사가 성물을 잡으면 조금이라도 반응한다고 들었다.

  "옛날에는 성물이었겠지 이제 그냥 컵 맞다니까? 식당에서 물 안 마셔봤냐?"

  "신이시여...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카렌의 굉장히 신성모독적인 발언과 함께 한길은 자신의 신앙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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