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선택만이 정답이다
"무슨 일이냐."
건물을 석상처럼 올곧은 자세로 지키고 있던 성전사들이 소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나 같이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들의 덩치에 소녀는 마치 산이 자신의 앞에 나타난 느낌이 들었다.
"저···. 안녕하세요?"
소녀는 긴장감에 꿀꺽 침을 삼키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반갑구나, 소녀여. 무슨 일로 왔느냐?"
나이가 들어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린 늙은 성전사가 소녀의 말을 받았다.
"여기가 솔라리 교단 맞죠?"
"맞다. 난 솔라리 교단의 성전사다."
"무..무서운 사람이세요?"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하자 늙은 성전사는 무릎을 꿇어 소녀와 눈을 맞추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상황에 따라 다르단다. 하지만 솔라리님의 딸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지."
소녀는 성전사의 미소에 겁먹었던 마음이 조금 사그라지면서 용기 있게 말을 꺼냈다.
"그게···. 가장 높은 사람을 만나고 싶으시대요."
"응? 가장 높은 사람?"
소녀가 누가 시킨 듯 말했지만 성전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문장은 아직 어른이 보기에 어색할 때가 많았으니까.
"네, 가장 높은 사람이요."
"그건 할 수 없겠는데."
성전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소녀가 실망해서 조그마한 주먹을 꽉 쥐었다.
"네? 하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우리 교단에서 가장 높은 분은 당연히 솔라리님이시니까."
"그럼..."
"주교님을 불러주마. 내가 부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분이시니."
"고맙습니다!"
소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성전사가 주교를 불러오라고 뒤로 손짓했다.
"지역관님, 정말 주교님을 부를까요? 지금 중요한 회의를 하신다고.."
지역관은 서울지부를 책임지고 있는 높은 직위였다. 당연히 외부경비를 설 필요가 없었지만, 이 늙은 성기사는 지역관으로써 업무를 처리할 때 빼고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다.
`신께서 보시기에는 어차피 똑같으니.`
늙은 성전사의 신념이었다. 엄하지만 후배 성전사들에게 존경받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허! 가르침을 잊었느냐? 어린아이는 우리보다 솔라리님과 가까이 있는 존재다. 깊은 뜻이 있을 수도 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성전사가 지역관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신전 안으로 주교를 부르러 달려갔다. 물론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이 아이에게 끌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절지아라고 한다. 넌 이름이 무엇이냐?"
"저는 엘리라고 해요. 그런데 할아버지 이름이 특이해요."
"그렇지. 이 할아버지는 옛날 몽골 출신이다. 엘리라...머리색과 잘 어울리는 예쁜 이름이구나."
절지아의 눈에 엘리의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귀여운 아이인데...`
낡은 옷에 얼굴에는 땟국이 줄줄 흘렀지만 그래도 절지아의 연륜이 찬 눈을 가릴수는 없었다. 아이의 올망졸망한 눈과 사이사이에 보이는 하얀 피부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지역관님? 무슨 일입니까?"
성전사의 외투와 똑같은 흰색 사제복을 입은 사제가 다가왔다.
?
"믿음이 신실하신 신도님들과 상담 중이었습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여기 이 소녀가 주교님을 보고 싶다는군요."
"이 소녀...가요?"
주교의 눈이 소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파악을 마쳤다.
`거지새끼잖아?`
방금 만나고 있던 자산가와 기부 계약이 체결되기 직전이었다. 성전사가 부르지만 않았다면 사인만 하면 끝날 상황이었는데 고작 이것 때문에?
"주교님이다."
"왜 밖으로 나오셨지?"
주교가 신전 밖으로 나오자 주변에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여들었다. 사람들에게 솔라리 교단의 주교란 항상 존경받는 직책이었다.
"어린 소녀야. 무슨 일이냐?"
그래도 지역관과 사람들의 앞이다. 표정을 관리한 주교가 소녀에게 물었다. 입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매는 여전히 차가웠다.
"진짜요? 알겠어요. 그렇게 전할게요."
소녀가 또 혼잣말을 하더니 고개를 올려 주교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회개하시래요."
"뭐?"
"이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신전도 모두 부숴버리고요. 아니면 혼난대요."
예상치 못한 소녀의 말에 성전사와 주교는 놀라 눈이 동그라졌고 주위 시민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저 꼬맹이가 뭐래?"
"거지가 드디어 미쳤나?"
시민들의 비웃음에 소녀의 눈이 촉촉해졌지만 그래도 당차게도 울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진짜예요! 지금도 말씀하세요."
"크하하하!"
"...이것 때문에 나오라고 하신 겁니까?"
주교는 차가운 얼굴로 지역관을 바라보았다. 지역관의 경력이 오래됐으니 존중은 하지만 엄연히 계급은 자신이 위.
"그래도 이 아이는 뭔가 느낌이 달랐습니다."
지역관은 자신도 왜 그런지 몰랐지만 뭔가 이 아이에게서 오랜 동료처럼 친숙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래서 다소 무리하게 주교를 불러왔고.
주교는 지역관의 말에 다시 한번 소녀를 살폈지만 어떤 느낌도 받지 못했다.
"당장 쫓아내세요. 다시는 이런 일로 저를 부르지 말고."
주교가 주변에 들리지 않게 담당관의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인자한 미소로 손을 흔들어주고 신전 안으로 다시 사라졌다.
?
`쯧, 저 늙은이는 언제 은퇴하나?`
주교에게는 서울 성전사들의 구심점인 저 꽉 막힌 지역관은 볼 때마다 눈엣가시 같았다.
"...알겠습니다."
"역시 주교님이야. 저 자비로운 모습 좀 봐."
"그런데 저 거지 년이 감히 우리 주교님을 모욕 한 거야?
"따라오너라."
지역관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소녀를 손수 자기 망토로 가리고는 눈에 띄지 않는 골목길로 들어갔다.
"미안하구나. 혹시 갈 데가 없으면 우리 교단이 운영하는 보육원이나 좋은 부부들이 너를 돌봐줄 거란다."
"아뇨! 전 괜찮아요."
부부라는 단어를 듣자 엘리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얼굴에 어렴풋이 떠오른 감정은 공포였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만 가볼게요. 할아버지!"
엘리는 쪼르르 달려 골목길 안으로 사라졌고 지역관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려왔다.
"대체 이 느낌은 뭘까."
뭔가 소녀에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는데, 도무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절지아의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진 줄 알았던 엘리는 그 이후 매일 신전 앞을 찾아왔다.
"할아버지."
"또 왔느냐."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안 오면 계속 말씀하시는걸요."
절지아는 이제는 익숙하게 계단에 앉은 엘리의 옆에 같이 쭈그려 앉았다. 엘리는 전과 달리 절지아가 준 따뜻한 옷을 입고 있었다.
"대체 누가 말한다는 거냐?"
절지아가 계속 지켜봐도 엘리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체 이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는 걸까?
"솔라리 여신님이요. 할아버지를 좋아하세요."
"응? 으하하하, 그거 정말 듣기 좋구나."
엘리의 말에 절지아가 크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성전사들이 수군거렸다.
"저 무뚝뚝한 절지아님이 저렇게 웃어?"
"어제 성전사 한 명이 청소 제대로 안 했다고 엄하게 혼났는데 말이야."
"저 엘리라는 아이 대단하네."
하지만 정작 엘리는 절지아의 웃음에 볼을 부풀렸다.
"진짜예요. 그 주교라는 아저씨는 싫어하고요."
"어허, 그런 말은 하면 안 된단다. 주교님은 나보다 훨씬 더 솔라리님의 곁에 계신 분이야."
다소 불경스러운 말에 절지아가 표정을 엄하게 지어 보였다. 하지만 엘리는 전혀 기죽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대체 그걸 누가 정했냐고 하시는데요?"
"그거야..."
엘리의 질문에 절지아의 말이 막혔다.
`누가 정했었지?`
주교, 대주교, 총대주교, 교황 순으로 올라가니...인사권을 당연히 그쪽이 모두 가지고 있었다.
"성자님이 기도 중이라 교황님이 정하셨단다."
"...교황님은 나쁜 사람이라 그랬어요."
"어허! 아무리 어려도 신전 앞에서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다."
만약 엘리가 어리지만 않았어도 굉장히 문제가 될 수 있는 발언이다. 솔라리 교단은 건물에서도 보다시피 연합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종교였다.
"어디 가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알았지?"
절지아는 부드럽게 엘리를 타일렀다. 나이가 들어서 이런 부분에서 유연해진 덕도 있다. 사실 엘리의 말에 자신도 예전부터 느끼는 바도 있었고 말이다.
"진짠데···."
"어허! 아직도!"
"그럼 특별히 할아버지께만 보여드릴게요. 원래는 보여주지 말라고 한 건데. 솔라리님도 할아버지를 좋아하니 괜찮을 거예요."
"응? 뭔데 그러느냐?"
화르르륵
엘리의 손 위에서 하얀 불꽃이 환하게 피어났다.
"서...성화?"
절지아는 눈이 커지며 화들짝 놀랐다.
`아냐...푸른색이다. 성자님의 신성력인 하얀색이 아니야. 대체 뭐지?`
확인은 나중에 해야 한다. 혹시 다른 사람이 이걸 보기라도 한다면 큰일 난다.
"엘리야 알겠으니 일단 그것 좀···.
"이단이다!"
뒤에서 들리는 고함에 절지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필 이 타이밍에 주교가 나오다니...
게다가 주교는 옆에 재력가로 보이는 사람과 같이 있었다. 또 기부자겠지. 거액의 기부금을 받고 직접 안내해주고 있었을 거다.
"주교님, 섣부른 판단보다는 일단 충분한 확인을 거친 다음에..."
"지역관! 감히 저년을 옹호하는가! 확실히 이단이 맞다!"
"그래도..."
"그대도 알지 않은가! 우리의 신성력은 흰색이다! 게다가 성자와 성녀는 동시대에 존재할 수 없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치에 맞는 말이다. 게다가 성녀라면 저런 비루한 꼴일리가 없을터.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사악한 것들이 보낸 마녀다. 당장 잡아라!"
하지만 주교의 명에도 성전사들은 자신들의 직속 상관이자 선배인 절지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이...이것들이!"
감히 주교인 자신의 명을 복종하지 않는 괘씸한 것들을 향해 주교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며 다시 소리쳤다.
"너희들이 해라!"
주교의 뒤에서 호위하고 있던 자들이 엘리를 거칠게 끌고 사라졌다.
그들을 보는 성전사들의 눈이 사납게 빛났지만, 주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성전사들을 노려보았다.
"감히 마녀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너희에게도 처벌이 있을 것이다."
"주교님..."
절지아가 조심스럽게 뭔가 말하려 했지만, 주교의 말에 재차 입이 닫혀 버렸다.
"그러고 보니...지역관도 저 마녀랑 친하게 지내던데, 혹시 마녀에게 물든 것이 아니오?"
"아닙니다! 어찌 소신이..."
"흥! 조만간 심문관이 검사해 보면 알겠지. 얌전히 대기하고 계시오. 너희들은 여기서 있었던 모두의 입을 막아라."
"예!"
주교의 뒤에 있던 자들이 바쁘게 움직일 동안 주교는 싸늘한 눈으로 엘리가 사라진 신전 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닐 거야...그럴 리가 없지."
?
* * *
[지금 집을 나가면 지금보다 못한 삶을 살게 돼. 다시는 엄마를 못 보게 될 거고.]
카렌과 삼색은 소파에서 저번에 봤던 드라마를 이어 보고 있었다. 도깨비의 미래를 보는 능력으로 남자 주인공은 자신이 보호하는 아이에게 자신이 엿본 미래를 말해준다.
[그리고 수학 문제 17번 문제 답은 2가 아니라 4야. 그거 하나 틀리길래.]
"주인, 저 시크한 말투 되게 멋있지 않냐?"
"주인공이 잘생겨서 그래."
"그건 맞다."
그렇게 드라마 속의 시간이 흐르고 그 아이는 나이가 들어 저승으로 가기 전에 잠깐 남주를 만난다.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노인이 되어 버린 소년은 전혀 늙지 않은 남주를 보고 말했다.
[오랜만이야. 17번 문제 답 알려줬는데 틀렸더라?]
[전 아무리 풀어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못 적었어요. 제가 못 푸는 문제였거든요.]
[아냐, 넌 아주 잘 풀었다. 너의 삶은 너의 선택만이 정답이다.]
"크으으으!"
"오..."
이번엔 카렌도 삼색과 같이 감탄했다.
[그대의 삶은 그대 스스로 바꾼 것이다.]
"주인! 그러면 우리가 내일 신전에 찾아가는 것도 선택이니까, 뭔가 바뀔까?"
"글쎄...신을 직접 만나 본 적이 있긴 한데... 짧아서 잘 모르겠다."
"나는 저 말을 들으니 내일이 기대된다!"
"그러냐."
삼색의 기대를 깨지 않기 위해 말하진 않았지만 카렌은 제발 내일 별일이 없기를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