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5/140)

  노란 민들레는 꽃을 피운다

  "이제 보내 줍시다."

  초등학생 정도 되는 여자아이의 곁에서 부모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5년이 넘었어. 무엇보다 이제 우리가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는 거 알잖아."

  "하지만.."

  남편의 말에 아내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자기도 알고 있잖아. 이러다 자기도 쓰러져."

  새 옷을 사는 건 딸이 누웠던 그때부터 꿈도 못 꿨다.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대리기사를 뛰며 하루에 6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아이도 소중하지만, 부인도 소중하다.

  말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한마디, 한마디가 칼에 찔린 듯 욱신거렸지만, 누군가는 꺼내야 할 이야기다.

  "..."

  아내도 식당에서 일하며 고운 손이 모두 부르트면서 굳은살이 곳곳에 박혀 버렸다. 하지만 더 슬픈 건 깨어나지 못하는 딸의 꿈이었다.

  "알았어요..."

  "의사한테는 내가 말할게."

  똑, 똑

  두 부부가 서로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릴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노크와 함께 들려왔다.

  "여기 신민지님 병실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런데 누구시죠?"

  깔끔한 정장을 입은 40대쯤 돼 보이는 남자가 딸의 담당 의사와 함께 병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노란 민들레 재단 대표이사 강일이라고 합니다. 그냥 강이사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과연 재단의 이름답게 강이사의 가슴에는 조그마한 노란 민들레꽃 배지가 달려 있었다.

  "신민지님의 보호자이신 신재혁, 이한슬님 맞으시죠?"

  강이사가 워치에서 홀로그램으로 자신들의 얼굴과 경력, 신상 정보가 쭈욱 떠오르자 둘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어..어떻게? 저희는 아무것도 한 것 없어요!"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 드릴 의도는 없었습니다. 두 분 확실하시네요."

  부부가 겁을 먹자 강이사가 손을 내저으며 둘을 진정시켰다.

  "두 분을 도와드리기 위해 온 겁니다."

  "도와요? 하지만 저희는 드릴 게 없어요."

  강이사는 둘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둘의 정보를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주실 건 없습니다. 혹시 틀린 것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그럼 질문 몇 개만 드리겠습니다."

  "아..네."

  "먼저 남편분부터 하죠. 이름 신재혁 님 맞으시죠? 나이 32살. 현재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대리기사 일을 하고 계시네요?"

  "마...맞습니다."

  "아버님께서 경찰이셨죠? 대격변 때 사람들을 돕다가 돌아가셔서 유공자로 지정되셨군요."

  "오래전 일입니다."

  "그런데도 자발적으로 경찰 복무를 갔다 오셨네요? 유공자의 자녀는 면제인데요. 이유가 뭐죠?"

  대격변 이후로 연합에서는 군대를 해체하고 치안을 유지하고 3년 동안 사회봉사를 하는 경찰 의무복무 시스템을 새로 만들었다.

  "그냥..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별 의미는 없습니다."

  강이사는 남편을 마주 보며 싱긋 웃으며 눈을 빛냈다.

  "그래도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복무하신 건 본인의 뜻이죠. 대단하십니다. 더 볼 필요는 없겠네요."

  둘은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도무지 무슨 일인지 감조차 잡지 못해 멍하니 강이사만 바라보고 있었다.

  "네? 그런데 이런 건 갑자기 왜.."

  "아! 설명은 여기 의사분께서 해주실 겁니다."

  강이사가 뒤로 빠지고 딸의 담당 의사가 작은 병을 들고 둘 앞에 왔다.

  "그건 뭐죠?"

  의사가 들고 있는 작은 병에는 무지갯빛 액체가 담겨 있었다.

  "맨드레이크 치료제입니다. 두 분 다 들어보셨죠?"

  "맨드레이크요?"

  딸이 식물인간 상태로 누운 뒤로 둘은 백방으로 치료할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유일한 치료제가 맨드레이크라는 사실에 얼마나 좌절했던가.

  자신들의 능력이 부족해서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슬펐다.

  "노란 민들레 재단에서 지원해드리는 겁니다."

  "하지만...저희는 돈이 없습니다. 저희에게 대체 왜 이런 귀한걸..."

  둘은 딸을 구할 치료제가 눈앞에 있음에도 안절부절못하면서 강이사를 쳐다봤다.

  "따님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착하게 열심히 사셨더군요."

  "그건 특별한 게 아니잖아요."

  강이사는 눈앞의 부부를 인자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좀 특별하네요."

  강이사가 부부의 정보를 계속 내렸다.

  "전과 없고, 주변 평판 흠잡을 데 없고, 인터넷 기록 깨끗하시고, 그 흔한 도로 속도위반 딱지 하나 없으시네요. 착하게 사는 일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살다가 보면 특별한 날이 오기도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제게도 그랬던 것처럼요. 그게 두 분에게는 오늘이라고 생각하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둘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렸다. 주룩주룩 떨어진 눈물이 병실 바닥을 적셨지만 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희 재단이 설립된 지 몇 달밖에 안 돼서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혹시 관심 있으시면 연락하세요. 복지는 최곱니다."

  강이사가 둘에게 명함과 함께 자기 가슴에 달린 것과 똑같은 노란 민들레 모양의 배지를 건네주었다.

  "이건 저희 재단의 상징입니다. 가끔 이걸 보시면서 설립자분을 위해 행운을 빌어주시면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아니...귀찮아 하시려나?`

  강이사는 카렌의 성격을 떠올리고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평생 간직하겠습니다. 그분을 위해서 매일 기도할게요."

  "그럼 전 이만 가보죠. 빨리 따님분 얼굴 보셔야죠."

  "저..강이사님. 저희가 가진 게 이것밖에 없지만 이거라도.."

  남편의 지갑에서 꼬깃꼬깃 접은 지폐들이 나오자 강이사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돈 나올 곳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도 굉장히 많이요."

  둘을 뒤로하고 강이사가 병원을 나서자 준비된 차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다가와 강이사를 태웠다.

  "이사님, 다음 장소로 갈까요?"

  "그래요."

  강이사가 탄 차가 출발하자 검은색 경호 차량들이 앞뒤로 붙었다. 경호원들의 양복 가슴에는 강이사와 같이 모두 민들레 배지가 달려 있었다.

  다음으로 도착한 병원은 방금 부부가 있었던 조금은 허름한 병원과 전혀 다른 VIP 병원이었다.

  "이사님. 여기는 저희도..."

  "아니에요. 병원에서 소란을 피우면 안 되죠. 환자분들이 놀라십니다."

  경호원들이 같이 들어가려 했지만 강이사가 말렸다.

  "안녕하십니까."

  깔끔하고 아주 큰 1인실 병실에 강이사가 도착하자 다수의 사람이 강이사를 반겨주었다.

  "당신이야? 맨드레이크 치료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람이?"

  20대는 됐을까. 한 남자가 노인의 침대 옆에서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강이사를 노려보았다.

  `그래, 차라리 이런 게 익숙하지`

  벌레를 보는 듯한 깔보는 눈빛, 이 숨 막히는 분위기. 자신이 맨날 싸우던 전쟁터다.

  "맞습니다. 노란 민들레 재단의 강이사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줄 필요 따위는 없다. 어차피 신경 쓰지도, 기억도 하지 않을 거다.

  "어디서 불쑥 나타난 놈들이 우리랑 거래하려 해? 내 재산의 50%? 미쳤어? 그 약 검증은 됐고?"

  "검증은 이미 됐습니다. 여기 병원장께 언질 못 받으셨습니까?"

  사실 의학, 과학적으로 분석은 못 했지만 분명 약에 대한 효과는 확실하다. 많은 의사가 깨어난 환자들을 보고 놀라 자빠졌으니까.

  반쯤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사람이 일어났는데 그게 검증 아니면 뭔가.

  "그...그래도 50%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어차피 할아버지께서 깨어나셔서 물려주실 재산에 비하면 적지 않습니까."

  "흥! 그렇긴 하지. 이놈의 영감탱이가 유언도 못 남기고 갑자기 쓰려져서 말이야."

  "호오...평소에 할아버님께 잘하셨나 보군요?"

  "그렇지! 내가 평소에 얼마나 잘했는데? 내 말이면 모든 할 걸. ?유산만 아니라면 이깟 늙은이 굳이 살릴 필요가 없지."

  아무리 그래도 누워 있는 자기 할아버지 옆에서 저런 말을 하는 손자의 모습에 강이사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50%는 너무 많아. 내가 누군 줄 알아? 치료제 얌전히 넘겨. 그러면 곱게 보내 주지."

  "그럼 60%로 하죠."

  "뭐?"

  "싫으십니까? 그럼 70%는 어떻습니까?"

  "...지금 감히 나랑 장난치자는 거야?"

  "80%"

  "미친 새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90%"

  "저 새끼 잡아!"

  "100%! 역시 화끈하시네요!"

  열받은 남자의 말에 병실 안에 있던 경호원들이 강이사의 주변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잠깐!"

  갑작스러운 고함에 경호원들이 흠칫 멈추며 자신들의 고용주를 바라보았다.

  "이 멍청이들이 뭐해? 빨리 안 잡아?"

  그 모습을 보자 더 열받은 남자가 경호원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재촉했다.

  "성질도 급하셔라, 이것 좀 보시죠."

  경호원을 데리고 오지 않은 이유는 자신에게는 더 무서운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강이사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응? 강이사님? 왜 그래요?]

  강이사의 워치에서 한 여성의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저희 재단 이사장님이십니다."

  "어? 어? 절단의 마녀?"

  경호원 중 누군가가 여자를 알아보고 경악하며 자신도 모르게 별칭을 불렀다.

  [...뒤질래? 방금 누가 말했냐? 어떤 새끼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당황해서 평소에 이채린이 그 별명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경호원이 곧바로 엎드렸다.

  [너 얼굴 봤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에요?]

  "여기 저희 재단을 협박하시는 분들이 있어서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경호원들은 바람같이 병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고 이제 병실에는 강이사와 남자만 남았다.

  "으어..."

  홀로그램이지만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이채린? S급 헌터이자, 무사시길드를 단신으로 쳐부순 괴물?`

  원래 이채린의 인지도가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채린이 휩쓸고 간 무사시길드 내부의 영상과 사진이 공개됨으로 인해 남자의 공포심이 극에 달했다.

  게다가 끔찍한 무사시길드의 만행에 치를 떨고 있던 시민들의 지지까지 합치니 은퇴했음에도 이채린의 주가는 최고였다.

  "사..살려줘."

  [응? 돈줄을 왜 죽여. 협조나 잘해라. 아니면 내가 찾아간다.]

  "감사합니다. 이채린님."

  [고생하시네요. 다음에 같이 술이나 먹어요.]

  "물론입니다. 또 뵙죠."

  남자의 표정과 달리 화기애애하게 통화를 마친 강이사가 남자를 보며 말했다. 분명 강이사의 표정은 지극히 사무적이고 자신에게 어떠한 적의도 없었지만 남자가 느끼기에 사신처럼 섬뜩했다.

  "자...고객님. 그러면 여기다 싸인 하실까요? 그래도 고객님 체면도 있으니 기부금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도 운이 좋으신 편입니다. 더 무서운 분도 계시거든요."

  강이사가 품에서 계약서와 펜을 꺼냈다. 애초에 50%짜리는 애초에 가져오지도 않았다. 기부자에 대한 철저한 사전 조사는 필수니까.

  `그래, 어차피 유산 받으면 이까짓 돈 새 발의 피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굴린 남자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강이사가 내민 계약서에 싸인을 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강이사가 나가자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잘 된 거다. 곧 유산이 들어...

  "으헉! 왜 또 왔어?"

  "아! 죄송합니다. 잠깐 놓고 간 게 있어서요. 펜은 주셔야죠."

  "아···. 펜?"

  그러고 보니 계약서에 싸인한 펜이 여전히 자신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까짓 펜이 뭐라고...역시 벌레들은...`

  남자는 펜을 던지듯 강부장에게 줘버렸다.

  "어이쿠!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펜에 다른 기능도 있는 거 아십니까?"

  "뭐?"

  강부장이 펜의 끝부분을 몇 번 돌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늙은이에게 평소에 내가 얼마나 잘했는데? 내 말이면 모든 할걸? 유산만 아니라면 이깟 늙은이 굳이 살릴 필요가 없지.]

  아까 말한 자신의 말이 그대로 들려오자 남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너...너!"

  "이건 할아버님께서 깨어나시면 드리는 저희 재단의 특별선물이 될 겁니다. 아주 좋은 손자를 두셨어요. 그렇죠?"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뒤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절규를 들으며 강이사는 경쾌하게 차에 탔다.

  "이사님. 끝나셨습니까?"

  "그래요. 그 건은 아직도 못 알아냈습니까?"

  "최대한 알아냈습니다."

  옆의 수행원이 보내 준 자료를 보던 강이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솔라리 교단에 대한 자료가 이렇게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일단 이걸로 내일 보고드려야겠네요.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카렌은 별말 하지 않겠지만 강이사, 스스로의 마음에는 차지 않았다. 언제나 카렌님을 위해 최고의 결과를 가져다드려야 하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카렌님과 삼색님은 뭘 하고 계시려나? 날씨도 슬슬 추워지는데.`

  "주인 TV에서 말했다! 2주 뒤에 눈 온다! 눈!"

  "너는 그 눈을 몇백 번을 봤는데도 안 질리냐?"

  "주인과 보내는 첫눈이다!"

  카렌은 소파 위에서 방방 뛰는 삼색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상한 데서 감성적인 녀석이라니까.`

  이 녀석이랑 함께 한지 한 계절만 더 있으면 벌써 1년을 채우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생물이다.

  "됐고. 다음 드라마는 뭐야?"

  "이번엔 최신 드라마다! 설화를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다. 이름이 허깨비라던가?"

  "그거 재밌겠네."

  "헌튜브에 올라 온 명대사도 되게 멋있다."

  "그래? 뭔데?"

  삼색이 뒷발로 사람처럼 서서 소파 등받이 위에 올라가더니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연기했다.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 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배우가 문제 같은데."

  대사 자체는 분명 흥미로웠다. 다만 그걸 통통한 고양이가 하니 몰입이 될 리가 없다. 카렌이 뭐라 하던 삼색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엔 아련한 표정으로 다른 대사를 읊었다.

  "첫눈으로 너에게 올게. 신께 빌어볼게."

  "드라마나 틀어라."

  "나 어땠냐? 배우 하면 잘할 것 같냐??"

  "옛날 만화에서 악당 팔걸이에서 골골대며 앉아 있는 역할은 잘하겠네."

  "꾸잉? 너무한다!"

  "너 연기가 더 너무했어."

  그렇게 여전히 투닥거리는 둘은 첫눈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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