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4/140)

  꽃씨를 심자

  무사시 길드를 박살 낸 지 두 달이 지났다. 카렌은 집으로,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만 일상에 한 가지 재밌는 구경이 추가되었다.

  ?

  "으아아아악!"

  밖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비명. 그 소리를 듣자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던 카렌과 삼색은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시작했군."

  "주인, 가자."

  삼색과 카렌은 익숙하게 밖으로 나가 새로 만든 평상위로 자리 잡았다. 뜨거운 여름의 열기는 거의 사라지고 이제는 서늘한 가을의 바람이 몸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간다.

  "으차"

  ?

  카렌은 햇볕을 막기 위한 넓은 파라솔 밑에서 푹신한 베개를 베고는 밭쪽을 향해 옆으로 누웠다.

  "주인! 여깄다."

  삼색은 눈치 빠르게 카페에서 가져온 딸기라떼 한 잔을 내밀고는 자신도 캐러멜 라떼를 가져와 빨대로 쪽쪽 마시기 시작했다.

  "민재야? 기절했니?"

  비명의 주인공은 한민재였다. 맨드레이크 앞에서 거품을 물고 기절한 한민재를 오영준이 깨우고 있었다.

  두 달이라는 시간은 사교성 좋은 한민재가 오영준을 형님으로 삼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디 보자..."

  오영준이 한민재의 뺨을 찰싹하고 쳤다. 꽤 세게 쳤는지 찰진 소리가 들려왔지만 한민재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확실하네. 그럼 붓는다."

  영준이 옆에 연결된 호스의 꼭지를 열어 민재에게 냉수를 뿜었다. 지하수의 얼음장 같은 물이 몸을 적신 순간 민재는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푸아아앗! 형님. 깼습니다!"

  물을 듬뿍 뒤집어쓴 한민재는 손사래를 치며 다시 일어나더니 곧 쭈그려 앉아 손을 맨드레이크에 대었다.

  "카렌님이 어떻게 했더라...그냥 쑥 뽑으시던데."

  맨드레이크를 카렌이 했던 것처럼 수면 상태로 뽑는 연습을 하는 거다. 하지만 몇 달간의 연습에도 민재는 자신의 실력이 늘었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서...성공...?"

  [꾸우우우우]

  "으아아악!

  "

  ?

  시험처럼 점수가 매겨지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기절해 버리는데 알 수가 있나.

  이미 저 멀리 도망쳐 있는 영준은 다시 와서 다시 민재를 깨우기 시작했다.

  "꾸잉, 주인 오늘도 내기 할 거냐?"

  "흠..."

  그 모습을 보며 어느새 캐러멜과 치즈가 반반 섞인 팝콘을 집어 먹으며 카렌과 삼색은 잡담을 나눈다.

  "아니. 오늘은 왠지 성공할 것 같은데?"

  저 녀석 처음에는 엄두도 못 내더니 방금 맨드레이크가 좀 늦게 반응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미세한 차이를 눈치 못 챘지만 말이다.

  "두 달간 저것 하나만 했는데 빠른 거냐? 주인은 얼마나 걸렸어?"

  "나? 어디 보자...난 그냥 됐는데?"

  맨드레이크가 기절시킨다는 얘기는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냥 마나를 이리저리 움직이니 잠들던데?

  "...주인, 재수 없다."

  "쟤 정도면 빠른 게 아닐까? 사실 내가 가르쳐준 게 하나도 없거든."

  가르치는 것도 재능이다. 하지만 민재에게는 불행하게도 카렌은 저 상황에 공감을 전혀 못 했다.

  "그럼 저 한민재라는 인간도 최악의 선생님을 만난 것 치곤 잘하고 있네."

  이건 카렌도 인정했다. 마나에 대해서는 가르쳐 주려고 해도 뭘 어떻게 설명해 줄 방법이 없다.

  민재에게 맨드레이크를 뽑는 걸 좀 보여주긴 했는데, 당연히 도움은 하나도 안 됐겠지.

  "한다, 한다. 천천히. 마나를 느끼고 맨드레이크를 느낀다."

  물을 듬뿍 뒤집어쓰면서 다시 일어난 민재가 맨드레이크에 손을 대고는 심호흡을 했다. 정신을 집중하고 마나를 천천히 맨드레이크에 흘린다.

  "지금!"

  쑤욱, 맨드레이크가 수줍게 땅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민재는 곧 울려 퍼질 맨드레이크의 비명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응?"

  하지만 민재는 멀쩡했고 실눈을 뜨고 보니 맨드레이크는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해...해냈다!!"

  "이야! 민재야 축하한다!"

  "형님! 형님 덕분입니다! 계속 물로 깨워 주신 덕분에 제 생각보다 훨씬 빨리했습니다!"

  민재가 영준을 얼싸안고 빙빙 돌았다. 어찌 보면 뽑을 때까지 한다는 정신 나간 발상이었지만 결국 성공하면 된 거 아니겠나.

  "꾸잉, 저걸 진짜 하네."

  "다른 의미로 미친 녀석이긴 해. 연금술에 미쳐서 다행이네."

  ?

  기절이라는 게 영화나 드라마처럼 보통 그렇게 눈 비비고 일어나진 않는다.

  저렇게 갑작스럽고 인위적인 기절은 깨어나면 구토감, 어지럼증, 몸이 힘이 없고 전신에 피로감이 몰려온다. 그걸 두 달 동안 계속한 거다.

  저렇게도 좋을까. 민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쁨에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있었다.

  "근데 그거 효과는 더 좋지?"

  지금껏 민재가 뽑다 실패한 맨드레이크들은 모두 다른 약초들을 위한 거름으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지금 민재가 들고 있는 맨드레이크를 보며 눈을 빛내고 있는 영준과 다른 사람들이 먹었다.

  "근데 주인, 요즘 저 남자들 안색이 굉장히 밝아진 것 같지 않냐? 막 부인한테도 전화가 자주 오던데? 되게 사이좋아 보인다."

  "...고양이는 몰라도 된다."

  카렌이 삼색의 물음에 진땀을 빼고 있는 사이 민재가 평상을 향해 자신이 뽑은 맨드레이크를 흔들며 소리쳤다.

  "카렌님! 저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할까요?"

  "수고했다. 알아서 해."

  "오...주인. 저거 안 먹냐?"

  "너 인마 나를 뭐로 보고, 나는 많이 안 먹는다니까?"

  "꾸잉...근데 주인 왜 가끔 밤마다 밭으로 나가냐?"

  "...밭이 잘 있나 보는 거지. 저렇게 넓은데 야생동물이라도 들어오면 어떡하냐."

  "흐음..."

  삼색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카렌을 바라보았지만 증거가 없어서 넘겼다.

  "꾸잉, 그러고 보니 밭이 커지긴 했다."

  원래 삼색이 잠들어 있던 황량한 공터는 점점 밭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민재와 두 카페직원의 합작이었다.

  영준과 친구가 어차피 운동도 할 겸 달리기 대신 쟁기를 든 게 시발점이었다. 땀만 흘리면 되지 않는가?

  ?

  "그럼 오늘도 밭일을 해볼까?"

  "형님들! 그럼 오늘 맨드레이크도 뽑은 김에 더 화이팅하죠! 여기 제가 막걸리도 사 왔습니다."

  "역시 동생이 뭘 좀 알아. 그 혹시..."

  "당연히 여기 파전이랑 달랑무도 만들어 왔습니다. 조금 있다 같이 드시죠."

  "크으으으!"

  둘이 민재에게 엄지를 치켜세우고는 힘차게 밭일을 시작했다.

  "...근데 저 인간들 좀 많이 심는 거 아니냐?"

  맨드레이크 한 뿌리에서 시작한 텃밭 수준의 영역이 점점 넓어지더니 이제는 넓은 공터 반이 재배지가 되어 버렸다.

  "하다 보니 저렇게 된 거라던데?"

  영준과 친구가 운동도 하면서 도와줄 겸 땅에서 돌도 골라내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땅이 좀 남았다.

  "그럼 다른 약초도 심어볼까요? 저 어차피 실험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나둘 갖가지 약초들이 심어지기 시작해서 여기까지 와 버렸다. 그렇게 셋이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이 카렌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카렌!"

  "저도 왔습니다. 카렌님."

  저 멀리서 마스크와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채린과 언제나 깔끔한 정장을 입고 다니는 강이사였다.

  "어? 누님! 오셨어요? 강이사님도 오셨네요?"

  "중간에 이채린님이랑 우연히 만났습니다."

  "카렌이 너무 보고 싶었는데 자주 못 왔어. 망할 기자 녀석들 진짜..?아직도 날 쫓아다니더라고."

  그 기자회견 이후로 기자들이 채린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오늘도 간신히 따돌리고 오는 길이다. ??S급 헌터가 전력을 다해야 할 정도니 ?기자들도 대단하긴 하다.

  "머리 염색했네?"

  채린의 상징 중 하나였던 적발의 머리가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게 내 원래 머리색이야. 사람들이 날 머리카락 색으로 알아 보더라고."

  "그렇긴 하겠다."

  "이제 피를 뒤집어쓸 일도 별로 없을 거고. 좋지 뭐. 거기! 이거 와서 먹어요."

  밭일을 하던 셋이 다가오자 채린이 가져온 짐을 풀었다.

  "여기 재형이가 쓴 편지. 나중에 읽어봐. 여기 술!"

  "저희 막걸리 있습니다. 누님."

  "막걸리? 밭일에는 이세계 술이지! 숙취도 거의 없어."

  채린이 한 병당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술들을 평상 위에 늘어놓았다.

  "크으...역시 누님이십니다."

  "근데 원래 이런 고급 술에 이런 안주 먹어?"

  "맛있으면 됐지. 그리고 파전과 달랑무가 어때서? 아니면 맨드레이크도 같이 씹어. 이거 돈 주고도 못 구한다."

  ?

  우리는 평상 위에 앉아서 막걸리 담는 넓적한 그릇에 술을 따라 마시면서 안주로 파전과 아삭한 달랑 무를 씹어먹었다.

  주변에 건물도 거의 없어 확 트인 전경이 절로 술맛을 더 돋군다. 입에서 씹히는 아삭한 무의 소리가 청량하다.

  "동생은? 편지도 쓸 정도면 많이 좋아졌네?"

  "맞아. 재활 중이라 정현이가 옆에 붙어있어. 회복되면 둘 다 꼭 보답하고 싶대. 그런데 다른 쪽으로 문의가 많이 들어 오더라."

  "응? 무슨 문의?"

  "재형이랑 그 리사 동생 있잖아? 걔도 우리가 치료해줘서 식물인간 상태였다 깨어났잖아. 혹시 나한테 뭔가 있냐고 하더라고."

  식물인간 상태였다 일어나면 전세계에서 화제가 된다. 그런데 짧은 기간 동안 두 환자가 동시에 일어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물론 그런 거 없다고 했어. 그런데 환자 가족들한테 연락이 오더라고. 물론 모른다고 했어. 카렌이 제일 중요하니까."

  차라리 기업에서 돈을 목적으로 접근하면 채린이 욕을 퍼부으며 쫓아냈지만 눈물을 글썽이며 가족들이 물어보면 차마 매정하게는 쫓지 못했다. 자신도 그 느낌을 잘 아니까.

  ?

  "....그건 좀 안타깝네요."

  민재가 채린의 말을 듣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의 눈 앞에 널려있는 게 맨드레이크인데 말이다. 심지어는 지금도 달랑무랑 같이 안주로 먹고 있다.

  "혹시 카렌님..."

  "안 돼. 귀찮기도 하고, 파리도 꼬일 거다."

  카렌이 민재의 다음 말을 예상하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도 충분히 자신은 만족했다. 여기서 귀찮아지는 건 사절이다.

  "그럼 재단을 만드시는 건 어떻습니까? 사단법인은 카렌님의 이름이 필요하니 재단을 만들어서 익명으로 하는 겁니다."

  "응?"

  민재가 시무룩하게 있자 옆에서 강이사가 말을 꺼냈다.

  "형편에 따라 돈을 받을 겁니다. 환자들 중에는 돈이 많은 사람도 있으니, 카렌님이 돈 쓰실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흐음..."

  "제가 연습겸 맨드레이크 캐면 됩니다.

  "

  "저희도 돕겠습니다. 농사일이 땀 빼기 딱 좋습니다."

  "이름은 내가 빌려줄게. 은퇴 했지만 아직 이채린이라는 이름은 먹힐 거야."

  모두가 이렇게 얘기하자 카렌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자신이 귀찮은 게 있나? 아니다. 뭐...그렇다면 상관없지. 자기들이 하고 싶다는데.

  ?

  "그렇게 해. 무리는 하지 말고. 특히 너, 한민재. 무리해서 하다가 걸리면 밭 모두 불태워버린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물론이죠."

  한민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지금껏 본 카렌이라면 진짜 망설임 없이 불태울 거다.

  카렌의 허락에 강이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실 강이사에게 들어오는 돈은 전혀 없고, 안 그래도 바쁜 회사일에 더 바빠지기만 한다. 그래도 카렌의 이름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게 기뻤다.

  "원래 재단은 목적에 맞게 움직여야 하고 이익을 내려면 허락을 맡아야 하지만...요즘 그런 거 없습니다."

  길드가 자기들 입맛에 맞게 재단에 관한 법을 바꾸어 버렸다. 등급에 따른 전투요원 제한이 있어 은근슬쩍 각성자들을 은퇴 처리하고 재단에 넣기도 하니까.

  게다가 '사회공헌' 이라는 이름으로 뭐...여러가지 한다.

  "서류는 모두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재단 이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카렌이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침 어제 새로 단 카페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간판 달았네?"

  "네. 저희 가족이 한참을 생각하다 어제 겨우 정했습니다."

  오영준의 최근 가장 큰 고민이었다. 용한 작명사에게 가보기도 했지만 뭔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들었고 결국 더 고민하다가 늦어졌다.

  "그럼 저걸로 해. 저거 좋네."

  카페 간판의 이름 옆에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그려져 있었다.

  "좋네요. 노란 민들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