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140)

  약속

  "언니 왔어?"

  채린이 병실로 들어가자 정현이 동생, 재형의 손을 잡고 있었다. 두 자매는 말없이 서로를 잠깐 껴안았다.

  "이게? 그거야?"

  채린이 꺼낸 맨드레이크를 보는 정현의 눈빛이 떨렸다. 몇 년간 기다려온 치료제가 눈앞에 있으니 현실감이 없었다.

  "맞아. 어서 재형이에게 먹이자."

  채린이 자신의 동생에게 다가가는 동안 조용한 병실에 그녀의 발걸음 소리만 울렸다.

  '내 발소리 소리가 이렇게 컸나? 아니, 긴장했구나.'

  힘겨운 전투에서도 채린은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지는 않았다. 지나친 흥분은 오히려 싸움에 독이니까.

  채린은 오랜만에 동생의 모습을 자세하게 관찰했다. 의식적으로 그동안 보지 않으려 했던 부분들이 보인다.

  먼저 복부에는 생명을 유지하는 영양관이 꽂혀있다. 그리고 가장 마음이 아픈 점은 동생의 앙상한 몸이다.

  비록 영양관이 목숨은 유지해 주지만 항상 누워있는 탓에 나름대로 운동을 좋아해서 건장했던 동생의 근육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만약... 안 되면 어떡해?"

  채린의 뒤에서 정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항상 자신 앞에서는 장난기 가득하고, 남들 앞에서는 냉철했던 정현의 모습이 아니었다.

  "될 거야."

  채린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정현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자신과 다르게 카렌이라는 사람을 딱 한 번 본 게 전부니 그럴 수 있다.

  "나는 카렌을 믿어. 만약 그 사람을 못 믿겠으면 너는 나를 믿어."

  만약 자신들에게 사기를 치던, 뭘 하던, 게이트 안에서 그렇게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

  뽕, 채린이 포션의 마개를 따고는 동생의 입으로 조금씩 흘렸다. 포션이 금세 텅 비고 둘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들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재형아?"

  하지만 동생에게선 어떠한 대답도 없었다. 두 자매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한참을 동생을 관찰했지만 동생은 손가락 끝 하나도 움직이질 않았다.

  "언니..."

  "아냐, 시간이 문제일 거야. 카렌이 언제 깨어난다고 얘기하진 않았어."

  "맞아. 그럴 거야."

  두 자매가 애써 서로를 위로하고 있을 때 작은 목소리가 둘의 귀로 들려왔다.

  "으..음"

  "재형아?"

  두 자매는 재형의 입에 자신들의 귀를 대었다. 이것도 저번처럼 단순히 신음소리일일까? 제발...

  "누...나?"

  "재형아! 흑"

  채린과 정현은 이 호칭을 수없이 듣기를 원했다. 옛날에는 몰랐던 동생의 '누나'라는 소중한 호칭, 비록 오랫동안 말라 있던 동생의 성대에서 나온 목소리지만 그래도 두 자매는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둘은 동생을 껴안으며 오랫동안 지켜왔던 약속을 원 없이 지켰다.

  동생이 깨어나면 기뻐서 울겠다는 약속을.

  ?

  *

  *

  *

  [요즘 들어 인류가 멸망할 거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부쩍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이것도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라고 봐야 할까요?]

  "주인! 주인 동족들이 멸망한다고 한다!"

  "너는 그럴 때만 인간이랑 영물이랑 편 가르지? 내가 죽는게 좋냐?"

  카페에 TV를 설치한 것 까진 참 좋은데 별로 영양가 있는 얘기는 안 나오는 것 같다. ?카렌은 TV에 신경을 끄고는 다시 음료의 맛을 느끼는 데 집중했다. ?

  "오랜만에 좋아"

  "게이트는 좀 어떠셨습니까?"

  영준이 카렌이 주문한 또 다른 딸기라떼를 가져왔다.

  벌써 석 잔째다. 맨날 먹을 땐 몰랐는데, 이게 게이트 들어가니까 그렇게 끌리더라고. 역시 사람은 가지고 있을 땐 모른다니까.

  "오랜만에 재밌었어. 하지만 당분간 안 들어갈 거야.

  "

  굳이 내 힘을 쓸 수 없는 곳으로 기어들어갈 필요는 없지. 지구에 와서 쳐음 겪는 위기였지만, 또 겪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경험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기...한민재씨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카페 창문 밖을 보니 공터에서 쭈그려 앉아있는 한민재가 보였다.

  "하루종일 저기 있습니다. 제가 아직 날씨가 더워서 좀 들어오라고 해도 요지부동입니다."

  처음에야 저렇게 조금 하다 그만할 줄 알았지만, 한민재는 저기서 하나만 계속 관찰하고 있었다. 맨드레이크.

  심은 맨드레이크 옆에 한 쌍이 새로 자랄 동안 뭐에 홀린 듯 한민재는 여전하다. 자라고 있는 매 순간을 카메라처럼 본인의 눈으로 찍고 있었다.

  "꾸잉, 저 인간도 이상하다."

  옆에서 메이플라떼를 빨대로 빨아 먹고 있던 삼색이 한민재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여기서 제일 이상하거든?"

  카렌의 말에 두 점원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꾸잉?"

  삼색은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저 녀석을 훤히 꿰뚫고 있는 카렌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연기하지 말고 가서 저 녀석이나 불러와."

  "알았다"

  삼색이 민재를 데려올 동안 카렌은 두 인간을 보면서 말했다.

  "저 요물 고양이가 이제 진짜 연기도 하니까, 조심하도록 해."

  "하지만 귀여우신걸요."

  "그게 제일 문제라는 거야. 차라리 좀 징그러워야 했는데."

  달랑, 문에 달린 방울 소리가 울리며 햇빛에 온몸이 달아오른 한민재가 들어왔다.

  "선배님! 저 맨드레이크 보셨습니까? 잎이 어찌나 그렇게 아름다운지..."

  "너는 집에 안 가냐?"

  이 녀석은 온종일 땡볕에 서 있었는데 지치지도 않나. 나는 녀석의 길어지는 말을 중간에 끊었다.

  "저...선배님. 맨드레이크 제가 키우면 안 되겠습니까? 어차피 집도 없습니다."

  "응? 필요하긴 한데..."

  카렌이 직접 키우긴 귀찮고, 대신 키워주면 좋긴 하다. 저거 가끔 몸이 찌뿌둥할 때 먹으면 정말 좋다.

  음식에다 잘게 썰어도 좋고, 인삼처럼 삼계탕에 넣어도 좋다. 그냥 만능 식재료다.

  "주인, 철 좀 들어라."

  "야! 저거 그쪽 효과만 아니라 진짜 몸에 좋다니까?"

  정력이라는 단어가 요즘 좀 다른 의미로 변질되긴 했지만 그냥 몸이 건강해지는 거다.

  "저기...그쪽이 어딥니까?"

  오영준이 삼색과 카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몰라서 물었다.

  "정력에 좋다. 아니, 이게 뭐 부끄러운 게 아니라니까? 엄청 효과 좋은 영양제랑 똑같은 거야."

  카렌은 여전히 한심하게 바라보는 삼색을 향해 말했다. 그런데 뭔가 시선이 느껴져서 옆을 돌아보자 두 명의 가장이 보였다.

  "카렌님!"

  영준과 친구였다. 둘은 전에 없는 뜨거운 시선으로 카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희도 같이 키우겠습니다!"

  "어?"

  "맨드레이크라는 식물을 열심히 키워서 카렌님의 건강에 꼭 도움이 되겠습니다!"

  "꾸잉...수상한데."

  삼색이 기본적으로 무뚝뚝한 영준의 성격에 어울리게 갑자기 흥분하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런데...그거 좀 많이 자랍니까?"

  영준이 한민재에게 속삭였다.

  "예. 카렌님의 특제 비료만 있으면 3일마다 한뿌리씩 늘어납니다."

  "크으으!"

  "쯧쯧"

  주먹을 불끈 쥐는 둘을 보며 삼색이 또다시 혀를 찼다.

  "알았다! 민재 네가 알아서 키워. 일단 여기 두 사람이랑 같이 살고, 저기 빈 곳에 연구소랑 집 지어줄게."

  "감사합니다!"

  "다 맨드레이크 때문에 그러는 거지? 인간들이란 다 똑같아.

  "

  "삼색님은 모르시겠지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밤에 눈치가 좀 보입니다."

  영준이 슬쩍 허리를 숙이고는 삼색의 귀에 속삭였다.

  "무슨 눈치?"

  "그게..."

  "아 됐고! 저기서 이채린 나오네. 저거나 보자. 소리 좀 높여 봐."

  영준이 삼색에게 조심스럽게 뭔가 얘기하려는 찰나, 카렌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저 요물이 저런 것까지 알게 되면 진짜 답 안 나온다.'

  다행히 타이밍 좋게도 최근에 카페에 설치한 TV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와줬다.

  "꾸잉, 맞아. 오늘 채린이 기자회견 연다고 했다."

  "그래? 딱 좋네."

  TV에서는 이채린이 단상 앞에서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었다.

  주눅이 들 법도 한데 워낙 익숙한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날카롭게 좌중을 훑어본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기자회견 시작하겠습니다. 장내의 모든 분은 착석해주십시오.]

  옆에서 진행을 맡은 정현을의 말을 시작으로 채린의 기자회견이 시작되었다.

  [제 성격 아실 테니, 긴말 안 하겠습니다. 오늘부로 저 헌터 이채린은 은퇴합니다.]

  "뭐?"

  나이가 이제 20대 중후반, 어쩌면 전성기인 S급 헌터의 발언에 우리도 놀랐는데 기자들은 어떻겠나.

  찰칵, 찰칵, 찰칵. 처음과는 비교도 안 되는 카메라 불빛들이 이채린을 비췄고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이채린 헌터! 갑자기 은퇴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혹시 동생이 식물인간 상태였다가 기적적으로 깨어났는데 그 때문입니까?]

  수많은 질문 중에 핵심이 되는 질문을 골라 이채린이 답변을 했다.

  [동생이 깨어난 건 맞습니다. 은퇴는 그냥 하고 싶어서 합니다. 쉬고 싶어서요. 애초에 적성에 안 맞았습니다.]

  [.....]

  순간 기자회견장이 정적에 휩싸였다. 적성에 안 맞는데 S급까지 올라갔다고? 그럼 열심히 했으면 SSS급 헌터도 됐나?

  [아 그리고 또 있습니다. 정현아?]

  [모두 서류를 읽어 보시고 대화 나누죠.]

  기자 모두에게 미리 준비한 서류를 나눠 줬다. 친절하게 보도용으로 쓰기 쉽게 디지털로 개인워치로도 동시에 전송했다.

  "이건..."

  기자 모두가 잠깐 서류의 내용을 읽더니 침음성을 흘렸다. 일부만 봤는데도 모두 말문을 잃어버렸다.

  [여기. 이 서류에 뭐가 적혀 있는지 지금 화면 너머로 보시는 분들은 모를 겁니다.]

  이채린이 기자들에게 나눠준 것과 똑같은 서류를 카메라를 향해 흔들었다.

  [대충 읽어보죠. 협박, 성매매 알선, 폭행, 약취, 유인, 절도, 인질강도, 인신매매, 살인 등 셀 수도 없는 범죄들.]

  기자들은 연신 키보드를 두드렸다. 모든 기자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건 대박 특종이다.'

  [이게 모두 무사시 길드가 저질렀다는 증거입니다.]

  타타타타타타, 채린의 말 한마디에 기자들의 손가락이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자들도 다음 채린의 말에는 순간 손가락이 멈췄다.

  [이 개새끼들아. 너넨 다 뒤졌어. 지금까지 내 동생을 협상 도구로 썼지? 이제 명분도 있으니, 그 잘난 네 인맥도 이젠 못 쓸 거야. 한번 개새끼답게 개겨봐라.]

  기자회견장에서 쌍욕을 퍼붓는 채린을 기자들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친구들이 이미 무사시 길드 본부 포위했다. 딱 하루 줄게. 길드장 포함, 여기 내가 지금 들고 있는 명부에 적힌 인간들은 다 죽인다. 그 외에는 엘리니아 밖으로 꺼져.]

  얘기가 끝나자마자 채린은 기자회견장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오우..."

  TV를 보던 우리는 모두 감탄했다.

  "꾸잉, 멋있다."

  [띠링]

  카렌의 워치에서 알림이 울렸다. 채린에게서 온 문자다.

  [카렌! 가자!]

  방금 봤던 기자회견과는 정반대의 발랄한 문자를 보고 카렌은 피식 웃었다.

  "그래, 가야지. 약속도 있고."

  내 손으로 죽이겠다고 한 약속은 지켜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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