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140)

  전투

  처음은 리사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붕, 붕. 오른손으로는 단검을 돌리며 달려들면서 왼손 허벅지에 찬 비수들을 던져 내었다.

  손가락에 끼울 만큼 얇은 비수 세 개가 달려든다. 채, 채, 챙. 카렌의 손에 만들어진 보호막에 비수가 힘없이 튕겨 나갔지만 리사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역시 대단하네."

  애초에 멀리서 쏜 저격도 피해내는데, ?저런 비수 따위로 뭘 하려는 건 욕심이다.

  이번엔 내 차례, 팔에 마나를 집중시켜 달려오는 리사를 향해 손에 든 포션을 던졌다.

  쨍그랑!

  순식간에 날아간 포션이지만, 리사가 옆으로 피하면서 병이 바닥에 깨졌다.

  "막을 거라 생각한 거야, 자기?"

  "멍청하지 않아서 아깝네."

  "자기, 나쁜 남자랑 입이 험한 남자는 달라. 그건 매력 없어."

  이제 서로의 거리는 얼마 남지 않았다.

  주르륵

  나는 초록빛 포션을 다시 오른발에 부었다. 이게 마지막 슬라임 포션이다. 여기서 끝을 봐야한다.

  다 쓴 포션병 역시 달려오는 리사의 얼굴로 던졌지만, 역시나 간단한 고갯짓으로 피해버린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살짝 끈 것만 해도 충분하다.

  탓, 마력을 왼발에 집중시켜 폭발적으로 박차고 나간다. 지금껏 다른 몬스터들을 상대하면서도 보여주지 않았던 속도.

  "어머?"

  카렌은 아까 페어리들을 죽였던 기다란 창을 빠르게 만들어내고는 리사를 향해 내질렀다.

  카렌이 다가가는 속도와 리사의 속도가 합쳐져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고, 당장에 창이 리사의 가슴을 뚫을 듯 자신의 날카로운 날을 들이밀었다.

  텅, 리사가 살짝 오른쪽으로 몸을 틀며 왼손에 있는 단검을 역수로 잡고는 창의 옆면을 때리며 궤도를 바꾼다.

  기기기긱?

  그리고는 한 발자국 전진하며 리사의 단검이 창대를 타며 자연스럽게 카렌의 목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엇"

  하지만 창을 순식간에 없애자 리사의 중심이 살짝 흐트러진다. 리사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며 당황했지만 금세 발을 굴러 중심을 잡는다.

  기습이 실패했으니 이제 슬라임 포션은 의미가 없다. 카렌은 오른발의 실드를 해제하고는 날카로운 손도끼를 만들어내 리사의 목을 세로로 찍어 갔다.

  "호오?"

  하지만 리사는 카렌의 감탄과 함께 허리가 뒤로 휘어지며 손으로 땅을 짚으며 덤블링을 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자기... 뭔가 좀 이상한데?"

  "그래?"

  리사, 자신의 특성은 두개다. 일정 범위 내의 생명체를 감지할 수 있는 특성이 하나, 두번째는 신체강화다.

  "자기...정체가 뭐야?"

  보통 신체강화계열이라 하면 민첩이나 힘 한쪽이 더 강하기 마련이다. 이정은 힘이고, 리사 자신은 민첩 쪽이다. 가끔 상식에서 벗어난 둘 다 가진 괴물들은 이채린 같은 S급이 되고.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뭔가 이질감이 든다. 처음엔 움직임 자체가 느려서 힘 쪽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민첩계열 처럼 빨라진다.

  "양파 같은 남자네. D급은 당연히 아니고..설마 저번에 본 마나 감응력으로 신체 일부를 강화하는 거야?"

  리사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게 가능해? 하지만 아깝네. 마나만 좀 많았으면 엄청 났을 텐데. "

  "그래도 널 죽이는 건 문제없다."

  "하지만 자기는 적은 마나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서서히 우리 양파같은 남자를 벗겨 보자고."

  말이 끝나자 마자 리사는 다시 달려들었다. 리사가 '감지'라는 어찌보면 전투에 비주류 특기를 가지고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이유.

  능력에 안주하지 않고 노력한 육체단련과 검술이다.

  "큭"

  몇십번의 공방이 오고 가자 내 어깨에 핏줄기가 베어 나온다.

  "살짝 벗겨졌어. 우리 자기는 테크닉은 꽝이네?"

  자신의 단검에 맺힌 핏줄기를 리사가 손가락으로 쓸었다.

  젠장, 알아차렸다. 하긴 저 정도 되는 실력자가 못 알아차릴 리가 없지.

  '무기에 재능이 없다.'

  내가 그다지 기술이 필요없는 무기들만 쓰는 이유. 그것밖에 못 써서다.

  '남은 마력도 별로 없군.'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고 싸우기 직전 50% 마나 포션도 먹었지만, 이 여자와의 공방에서 가랑비, 아니 소나기처럼 빠져나갔다.

  "그럼...힘은 어떨까?"

  리사가 다시 공격을 가해온다.

  쉐에에엑, 그런데 바람 소리가 전과 다르게 심상치 않다.

  "쌍수?"

  이번에는 공격이 왼쪽과 오른쪽 동시에 날아온다. 쌍수가 보기엔 좋아도 거의 안 쓰이는 이유가 있다. 정말 달인이 쓰지 않으면 안 쓰는 것보다 못하다.

  물론 이 여자는 예외다. 과연 자신감 있게 꺼내든 만큼 아까보다 훨씬 막기가 어렵다.

  '마력도 얼마 없고.'

  나는 이 여자처럼 양쪽에 무기를 들 그런 재주는 없다. 주먹을 쥐어 왼손에는 조그마한 방패, 오른손에는 몽둥이에 날카로운 쐐기가 특징인 철편을 만들었다.

  "자기, 지구력은 마음에 드네."

  왼쪽은 방어만 하니 아까보단 견딜만 하다. 그렇게 또 몇십합이 흐르고 나는 슬슬 마력이 바닥나는 걸 느끼고 있었다. 무기는 하나 정도면 몰라도 방패까지 드니 얼마 남지 않은 마나에 치명타다.

  "이제 어디를 벗겨볼까?"

  점점 더 버거워진다. 내 곳곳에 자잘한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수동적으로 방패를 든 왼쪽 허벅지는 이제 걸레짝이 되고 있었다.

  "후우..."

  "참을성은 최곤데? 아프지 않아?"

  잠깐 뒤로 물러난 리사가 엄지손가락을 내게 치켜세운다. 리사의 말대로 왼쪽 허벅지는 불에 게속 지지고 있는 것처럼 화끈하다.

  "고통은 익숙해서."

  "어머, 난 그런 쪽은 취향 없는데."

  그래도 아직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게 중요하다. 그럼 기회가 온다.

  "우리 자기의 일그러진 얼굴도 매력적이긴 한데...그래도 편하게 죽여줄까? 대신 내 품 안에서 죽게 해줄게."

  "사양한다. 말했듯이 넌 내 취향이 아니야."

  "그럼 자기 취향은 이채린이야? 몰래 자기를 많이 보던데?"

  "뭐?"

  "물론 티나게 보진 않았지. 하지만 둔한 이정녀석은 몰라도, 내 여자의 감은 이미 알아버렸는걸?"

  "쓸데없는 소리."

  나는 리사의 말을 무시하며 포션벨트로 손을 가져갔다.

  "어딜!"

  리사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카렌에게 쇄도했다.

  '저건 위험해.'

  지금껏 리사가 본 카렌이라는 남자는 접근전은 좀 떨어져도 포션은 예측이 전혀 안 된다. 효과만 봐서는 직업이 연금술사가 아니라 마법사라고 봐도 될 정도다.

  날카로운 단검들이 먹잇감을 찾아 달려들었다. 리사는 당연히 포션을 사용하는 걸 멈추고 카렌이 방어를 선택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

  푸욱

  리사의 예상은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다. 포션은 사용 못 했지만 방어도 못했다. 아니, 안 했다.

  단검은 내 배와 가슴에 부드럽게 박혀 들어갔다. 배는 몰라도 가슴 쪽은 만약 마지막에 내가 몸을 틀지 않았다면 심장에 박혔을 거다.

  "크윽"

  분명 공격한 건 리사인데 신음도 본인에게서 흘러나왔다. 리사의 허벅지에는 반투명한 단검이 깊숙이 박혀있었다.

  "커억"

  카렌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내린다.

  "왜 그랬지?"

  자신의 상처를 상의를 찢어 지혈하면서 리사가 물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판단이다. 지금까지 본 카렌이라는 자의 냉철한 행동이랑은 거리가 너무 멀었다.

  "쿨럭, 첫번째 포션은 빗나가지 않았다."

  "뭐?"

  부우우우우우웅

  멀리서 익숙하고, 끔찍한 소리가 들려온다. 페어리 특유의 비행소리. 리사의 탐지 거리 바깥인데도 들리는 소리를 보아하니 엄청난 숫자다.

  아까 나무 뒤에서 리사의 시선이 닿지 않을 때 페어리들의 분비샘에서 나온 액체를 병에 담았다.

  군집생물인 페어리들을 불러 모으는 페로몬. 아까처럼 낙오된 무리가 아닌 본대.

  "하...같이 죽자는 거야?"

  저 숫자를 상대로 아무리 리사여도 이 다리로는 도망 못 간다. 당연히 자신보다 더한 중상을 입은 이 남자도 마찬가지고.

  "아니, 너만 죽지."

  땡그랑, 카렌은 몸에 박힌 단검들을 뽑아 바닥으로 던졌다.

  "더 빨리 죽을걸?"

  리사의 말대로 뽑힌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뽑아져 나왔다. 하지만 카렌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영혼아공간에 넣었다.

  카렌의 손에 들린건 고급스러운 병에 영롱한 하늘빛의 포션.

  "어떤 포션이라도 그 상처는 치료 못..."

  카렌이 상처에 뚜껑을 따서 하늘빛 액체를 상처에 뿌리고 남은 건 마시자 리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그건? 대체 어떤 포션이..."

  "그냥 포션이 아니라 엘릭서다."

  순식간에 멀쩡해진 카렌의 몸에 허탈한 리사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자기...그건 반칙이잖아."

  "연금술사가 포션 쓰는게 무슨 반칙이야. 더 할거냐?"

  "하...완벽하게 졌네."

  리사가 양손을 들어 보이며 항복을 알렸다. 자신이 애써 공격해도 저 지독하게 효율적인 남자는 싸워주지도 않을 거다. 그냥 튀겠지.

  '아까 포션을 먹을 때 마지막 기회였네.'

  어차피 같이 죽을 거란 생각에 방심했다. 잘하면 뺏을 수 있었는데 말이다.

  "남길 말은? 들어주지."

  "배후는 안 물어봐?"

  "들어주지."

  "...자기 진짜 매력적이야. 진심이야."

  어떻게 된 게 이 여자는 죽기 직전의 상황인데도 태도가 한결같다.

  "넌 내 취향 아니라니까."

  "나 진짜 상처받는다? 그건 됐고. 시킨 놈은 무사시 길드장이야."

  "무사시 길드?"

  "자기를 죽이고, 이채린이 동생을 치료 못하게 방해한 거지. 그쪽은 S급헌터의 영입이 간절하거든."

  "너무 순순히 알려주는군."

  "하! 어차피 내가 죽으면, 그 놈들이 내 동생을 살려줄 것 같아? 의리? 나와 그놈 사이에 그딴 건 없어."

  모든 걸 포기한 리사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동생이 인질인가?"

  "인질이지. 내 동생도 식물인간이거든."

  "알았다. 그럼 이만 가지."

  "자기, 길드장 죽일 거지?"

  "죽여야지."

  "그럼. 내가 도움을 좀 줄게. 이곳에 내가 보험으로 모아 둔 무사시 길드의 비리들이야."

  리사는 자신의 옷을 찢어 피로 한 곳의 장소와 비밀번호를 적어 주었다.

  "왜?"

  "원하는 건 없어. 자기 성격에 날 살려줄 것 같지도 않고...길드장 놈이 싫기도 하고, 무엇보다 마지막에 잘생긴 얼굴을 보여준 보답이랄까?"

  리사는 말을 마치고는 비수를 꺼내 자신의 목으로 가져다 댔다.

  "잘...가."

  페어리들에게 산채로 뜯겨 죽느니 편하게 가는 길을 택한 리사의 눈이 감기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후우..."

  이제 갈 시간이다.

  "윽..."

  갑자기 드는 현기증에 몸이 휘청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엘릭서는 외상은 완벽하게 치료해주지만 이미 빠져나간 피를 돌려주진 않는다.

  "젠장..."

  나는 가까운 나무에 몸을 기댔다. 포션벨트를 확인했지만 이미 남아있는 포션은 없다. 페어리들의 날개짓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님"

  ".....님?"

  그런데 날개짓소리 중간 중간에 뭔가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배님?"

  "뭐야?"

  "선배님?"

  앞에 있던 수풀이 흔들리더니 말 많은 놈의 얼굴이 보인다. 내 휘청이는 모습을 보더니 놈이 자신의 널찍한 등을 내민다.

  가만히만 있으면 안전할 녀석이 위험을 무릅쓰고 왜 여기까지 왔을까. 페어리까지 살벌하게 바로 뒤에 있는데 말이다.

  ?

  "왜...아니 됐다. 빨리 저쪽으로 달려."

  "저쪽은...어제 지나온 샛길 쪽인데요?"

  "맞아. 빨리."

  이제는 뒤에서 페어리가 육안으로 보일 정도의 거리다. 과연 맨날 짐을 날라서 그런지 녀석은 나를 업은 채로도 재빠르게 우리가 왔던 중심부의 입구에 도착했다.

  "이 앞은 늪지대입니다. 가면 불리해요."

  지금도 따라잡히기 직전인데, 공중에서 나는 페어리를 상대로 질퍽한 땅으로 들어간다? 죽으러 가는 길이나 다름 없었다.

  "알아. 가야 산다."

  "...선배님을 믿겠습니다."

  한민재가 망설임 없이 샛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점점 땅이 물렁해지더니 이윽고 발이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민재는 말 많은 평소랑 다르게 조용히 전진했다.

  "저건...선배!"

  샛길을 완전히 빠져나오자 어제 우리가 싸웠던 커즈아이의 시체들이 보였다.

  "어떻게 시체가 아직까지 남아있죠? 아! 그 포션..."

  "빨리 지나가기나 해라."

  전에 뿌려둔 포션은 이 녀석에 아까 줬던 포션과 똑같다. 체취를 지우는 쉐도우 포션.

  원래는 자연이라면 어디나 있는 시체청소부들이 커즈아이의 시체들을 먹어치웠겠지만, 그 포션 덕분에 하루 정도는 시체들이 거의 손상 없이 멀쩡했다.

  부우우웅

  페어리들이 우리가 시체들을 지나쳐 바로 앞 나무에 몸을 숨기자마자 커즈아이들의 시체에 달려들었다.

  페어리들의 습성답게 우리보다 덩치가 큰 맛있는 먹이들이 눈앞에 있는데 굳이 우리를 쫓을 필요가 없다.

  "선배님, 너무 멋있습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저에게 쉐도우 포션을 주신 그 자비로움과 그 능력에다가...."

  "잘했어, 닥쳐."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여전히 이 녀석은 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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