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
"주인...이건 좀..."
삼색이 사방에서 몰려든 기척을 느끼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크르르릉"
?
그야말로 몬스터와 육식동물들 모두가 몰려들어 있었다.
"넌 저쪽으로 가. 나는 한민재랑 간다. 나중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무슨 소리야? 주인 마력이 얼마 안 된다며? 주인을 지켜야지."
삼색이 본래 모습을 돌아가서 태운다면, 빠르게 달려 도망칠 수 있었다. 삼색은 주인의 여유가 거기서 나오는 줄 알았다.
"범인을 알았어. 감지헌터가 없잖아. 리사 보여? 그 여자가 불침번이었어."
범인은 확실해졌다. 저기 버려진 페로몬이 담겨있던 병과 함께 사라진 여자.
S급 헌터도 수백이 넘는 A급 이상 몬스터들을 사람들을 지키면서 한꺼번에 상대할 순 없다.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도 말벌 떼를 이길 순 없는 것처럼.
"너, 그래도 인간보단 감각 좋을 거 아니야. 그거 이용해서 안전한 곳으로 쟤네 보네. 난 손님 만나러 가야지."
"꾸잉, 정말 괜찮냐? 다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어?"
"그년을 잡아야지. 만약에 날 노리는데 채린이랑 커다란 고양이랑 같이 있으면 절대 안 나타날 거다."
"하지만..."
"페로몬이 몇 개 더 남은 지도 모르고, 돌아가는 길에 기습이라도 하면 귀찮아. 끝을 내야지."
"..."
삼색이 계속 뚱한 표정으로 있자 카렌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력량이 줄어 좋은 점도 있었다.
'이 녀석 표정이 재밌어.'
물론 얘기하면 녀석이 삐질 게 뻔하니 속으로만 생각하며 말했다.
"너, 주인 못 믿어?"
"주인. 다시는 이러지 마라. 기분이 굉장히 나쁘면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응? 너 영물 되기 전에 기억 잃어버렸다며? 그 기억인가?"
삼색이 처음으로 주인이 위험하다고 느끼자 온몸의 털이 곤두서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뭐지? 이 느낌은?'
"우리 삼색이, 내 걱정도 해주는 거야?"
하지만 삼색의 생각은 자신의 볼을 잡아 늘어트리는 주인의 손길에 멈췄다.
"주인!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다! 그리고 살아오겠다고 약속해라. 응?"
삼색의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에 카렌도 장난을 멈추고는 삼색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삼색, 넌 뭐지?"
"지금 그게..."
"대답해 봐."
"묘두사, 조선으로부터 온 영물."
"그런 녀석의 주인을 걱정하는 거야?"
카렌이 삼색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씨익 웃었다.
"...알았다. 조금 이따 보자. 절대 죽지 마라!"
삼색은 훌쩍 뛰어서 채린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상황을 모두 전달했다.
"하지만..."
"주인이 끝나고 다 말해 줄 거다. 주인을 믿고 날 따라와라. 내 비밀도 하나 보여주지."
삼색의 덩치가 갑자기 커지자 채린과 이정이 모두 깜짝 놀랐다.
"저 양반들은 같이 안 갑니까? 그리고 리사는 어디 갔어? 으아아아! 뭐야 이건? 그 고양이?"
이정은 대체 무슨 상황인지 감도 잡지 못했다.. 갑자기 몰려든 몬스터들은 뭐고, 자신을 따라오라는 이 호랑이보다 더 큰 고양이는 뭘까?
"인간. 내가 지금 기분이 몹시 안 좋다. 죽기 싫으면 닥치고 조용히 따라와라."
삼색이 평소와 전혀 다른 딱딱한 말투와 목소리로 이정에게 말했다.
?
"마...말을...어어?"
"빨리 안 오면 목덜미를 물고 갈 거야. 아니면 주인 가는 길 조금이라도 쉽게 저 몬스터들 사이에 던져 버린다."
삼색이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을 눈앞에 들이밀자 이정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단순한 위혐만으로 잔뼈가 굵은 이정을 이렇게 순하게 만들 수는 없다.
'이 지독한 살기는 뭐야?'
수없이 많은 몬스터들을 사냥해 본 A급 헌터도 눈앞의 삼색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순간 압도당했다.
'얼굴은 귀엽게 생겼는데...'
"....삼색, 빨리 가자. 우리가 가야 카렌도 편하게 가지."
"알았다."
채린과 이정은 삼색의 안내에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래도 몬스터에 포위당해 뚫고 가긴 해야 했지만 채린의 거침없는 주먹에 길이 열렸다.
"리사라 그랬나? 그년이랑 뒤에 있는 게 누구든, 나가면 죽여 버릴 거야."
자신의 동생을 구하는 일을 방해하고 감히 ?카렌을 위험해 빠뜨리다니.
퍼어억
채린의 분노에 찬 주먹이 날아갈 때마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이 조각조각 분해되고 있었다.
"저...선배님? 저는요?"
그렇게 채린 일행이 빠져나가고 이제 우리가 움직일 차례였다. 지금껏 카렌의 뒤에서 정신이 나가 있던 한민재가 그제야 말을 꺼냈다.
"아, 너도 있었지."
"선배님?"
"농담이야. 넌 어차피 C급이라 쟤네 속도 못 따라가. 이거 받아라."
카렌은 품 안에서 보랏빛의 포션을 꺼내서 한민재에게 줬다.
"체취를 없애주는 쉐도우 포션이다. 눈에만 안 띄면 되니 얌전히 나무 위에서 위장포 덮고 숨어있어."
"선배님은 안 쓰십니까? 차라리 C급인 제가 나가서 주의를 끌 테니 선배님이..."
"그게 마지막이야. 그리고 나랑 있으면 손님이 찾아와서 더 위험해진다. 얌전히 있어. "
한민재는 이제 확실히 경계대상에서 제외했다. 애초에 도망칠 기색도 없고, 내가 지금 안 도와줬으면 분명 죽었다.
"?해독제 포션이랑 C급 마나 50% 포션 있지?"
"네, 네! 혹시 몰라서 가져온 거 있습니다. 여기 다 드리겠습니다."
"한 개씩만 있으면 돼. 그리고 마나포션은 어차피 한 병밖에 못 마시잖아. 그럼 간다."
"선배..."
녀석이 재차 카렌을 잡으려고 했지만, 카렌은 말려볼 새도 없이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이것도 오랜만이네."
오른손을 뻗어 천천히 실드를 전개한다. 반투명한 막이 서서히 손바닥을 중심으로 뻗어 나가 전개된다.
마나가 많지 않아 몸을 매개체로 전개해서 마나 소모량을 줄이기 위한 최선이다.
딸깍
카렌이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이 고루 섞여 있는 포션의 마개를 따고 실드에 붓자 실드가 주위의 색에 맞게 변한다.
통칭 '카멜레온 포션' 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밝은 곳에서 보면 많이 일렁여서 ?낮에 못 쓴다.
"하지만 지금 같은 밤은 다르지,"
카렌은 채린 일행이 사라진 반대편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저쪽은 중심부로, 카렌은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크르르릉
그렇게 한참을 잘 가다가 여기서 이 포션의 단점 하나가 더 드러난다. 모습은 감출 수 있지만 후각은 어쩌지 못한다. ?늑대 놈들이 카렌의 앞을 가로막았다.
몬스터라는 이름에 비해 늑대라고 하면 자칫 약해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일반 늑대들에 비해 똑똑하고 덩치가 배로 크다.
게이트에서 몬스터들과 살 수 있다는 얘기는 그만큼 강하다는 의미다.
"오랜만이야."
탓
카렌이 발밑에서 돌멩이를 하나 집어들자마자 ?늑대 한 놈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어 날카로운 송곳니로 카렌의 목을 노린다.
"어딜."
쩍 벌린 입 사이로 칼날처럼 날카로운 송곳니들이 매섭게 다가오지만, 카렌은 오히려 자신의 앞을 막아주는 실드를 모두 해제하곤 마력을 다리로 돌려 반응속도를 높였다.
보통 신체 강화형 헌터들은 마나를 온몸에 고루 퍼뜨린다. 거기서 마나가 남으면 무기나 신체 한 부분을 더 강화하면 대단하다고 평가받는다.
헌터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카렌처럼 마나 감응력이 좋지 않아 이렇게 빠른 전환을 못 하기 때문이다. 굳이 위험하게 할 필요가 없기도 했고.
헙
카렌이 살짝 몸을 틀어 놈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는 늑대의 입이 다물어지는 바로 그 순간. 다리의 마나를 손으로 보낸다.
순식간에 반투명한 뾰족한 가시들이 솟아난 돌멩이를 놈의 입에 쳐넣으면서 턱을 살짝 때렸다.
"오랜만에 스릴있고 좋아."
밤은 길고 마나를 쓸 곳은 많았으니 최대한 아껴야 한다.
컥, 컥, 컥
늑대가 뱉으려고 헛구역질을 하지만 이미 턱을 친 순간 식도로 넘어갔다. 놈이 자신의 배 안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땅을 뒹굴었다.
"어쩔래? 계속할래?"
카렌은 무방비한 놈을 당장 죽일 수 있지만 일부러 살려뒀다. 뒤에 늑대 세 마리가 발버둥을 치는 자신의 동료를 보며 눈빛이 흔들린다.
"꺼져. 다 죽고 싶지 않으면."
게이트 늑대가 머리가 좋단 얘기는 계산도 많아진다는 얘기다. 놈들은 자신들의 피해를 감수하고 날 죽이는 일이 손해라고 생각했는지 몸을 돌려 사라졌다.
깨깨깽
여전히 비명을 지르면서 날뛰는 놈을 뒤로하고 카렌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저렇게 놈이 다른 것들의 시선을 끌어주니 움직이기 더 쉬울 거다.
부우우우웅
그렇게 좀 더 달리다 보니. 익숙한 소리, 첫날에 들었던 페어리들의 비행이다. 몬스터 페로몬은 육상, 공중 가리지 않고 모두를 평등하게 불러왔다.
"역시 왔군."
퐁
카렌은 해독 포션을 따서 일부는 먹고 나머지는 머리를 제외한 피부에 뿌렸다. 그리고는 동그란 헬멧을 만들어 머리 주변에 씌웠다.
사르르르르
모든 준비를 끝내자마자 반짝이는 가루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별처럼 어두운 밤하늘에 떨어지는 아름다움에 속으면 안 된다.
페어리들의 날개에서 떨어지는 가루들은 치명적이다. 피부에 닿으면 마비, 점막이나 호흡기에 침투하면 환각을 유발한다.
후두두둑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작은 동물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반짝이는 가루가 묻어있는 동물들의 몸이 경련한다.
부우우웅
일부 페어리들이 무리에서 이탈해 사냥감을 가져가기 위해 다가오자 카렌은 아까처럼 카멜레온 포션을 사용해서 모습을 감췄다.
쿡
페어리들이 꼬리에 숨겨둔 침을 사용해 먹잇감들의 숨통을 끊었다. 요정같이 아름다운 외견 속에 숨겨진 치명적인 가시였다.
"후우..."
카렌이 숨을 조심스럽게 내쉬었다. 주위에 널린 동물들을 잡느라 놈들은 카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좋아 이제 기다린 다음에 한 놈만 잡...'
휘이이이익, 퉁
하지만 카렌의 바램은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의해 무참하게 깨져버렸다.
화살 끝에 바람구멍이 뚫린 통을 매달아 소리를 낸 화살, 효시가 날아와 카렌의 실드를 때렸다. 페어리들의 시선이 단번에 카렌에게 집중되었다.
부우우웅
분명 자신들의 주위에 줍기 쉬운 먹잇감들이 널려 있지만 카렌이 눈에 한 번 띄자 페어리들은 다른 것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름은 요정인데 지능은 곤충이야."
페어리들은 주위에 자신들이 무력화시킬 것들이 있어도 좀 더 큰 먹잇감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공격한다.
위협을 줄이기 위함인지, 아니면 도망치기 전에 잡아 놓으려는지는 아직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도 수가 적어서 다행이네."
카렌은 이번에는 오른발에 신발을 감싸는 실드를 발에 씌웠다. 주르르륵, 그리고는 초록빛의 슬라임 포션의 마개를 따고는 부었다.
부우우웅
페어리들의 날개가 요동치며 거친 날갯짓과 함께 달려든다.
"이것도 오랜만이야."
왼쪽 신발의 밑창에는 축구화처럼 돌기를 만들어 낸다.
타탓
왼발을 차고는 오른발을 바닥에 대자 몸이 미끄러지며 질주한다.
오른발에 뿌린 슬라임 포션은 미끌꽃이라고 불리는 식물을 베이스로 만든 포션이다. 온몸이 미끌거리는 슬라임의 이름에서 따온 포션답게 닿는 부분의 마찰을 거의 없애버린다.
"...저게 뭐야?"
멀리서 기척을 숨기고 지켜보던 리사가 어안이 벙벙해지며 중얼거렸다.
"연금술사라며?"
이미 태워버린 서류지만 놈에 대한 정보는 이미 암기가 되어 있었다. 몇 번이나 보면서 외워서 분명 자신의 기억이 틀리진 않았다.
정보에는 D급 각성자에다 분명 연금술사였는데?
"무슨 연금술사가 저래?"
울창한 숲속에서는 오히려 날개가 방해다. 카렌은 스케이트를 타듯 나무 사이사이를 누비면서 페어리들을 각개격파하기 시작했다.
기다란 나뭇가지를 창대로 삼아 끝에 날카로운 날을 만들어 페어리들의 몸을 찌르고는, 순식간에 다시 움직인다. 몸이 작아서 중요 장기가 몰려있는 놈들이라 조그마한 구멍이라도 치명적이다.
"그렇게 놔둘 순 없지."
끼이이익, 리사가 활의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정확한 타이밍을 노린다.
'가장 취약할 때.'
요리조리 피하다가 페어리들을 공격할 바로 그 순간.
'지금.'
쉐에에엑, 페어리를 찌르고는 카렌이 창을 회수하는 순간 리사가 쏘아낸 화살이 정확하게 카렌에게 날아간다.
"헙"
하지만 카렌은 리사의 말처럼 연금술사, 아니 심지어 웬만한 헌터와도 달랐다. 기합과 함께 입술을 꽉 다물고는 왼발로 땅을 박차며 뛰어서 화살을 피했다.
살기를 감지하는 능력이나, 순간적으로 피한 판단이나, 저걸 누가 연금술사로 보겠나.
"걸렸다."
하지만 리사는 이미 화살을 쏘아낼 때부터 다음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시위를 놓았다.
가장 취약한 공중에 뜬 순간이니만큼 이번에는 치명상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곧 이어진 카렌의 행동에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리사의 고운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길드장 새끼, 정보 조사를 어떻게 한 거야?"
퍼억
화살이 놈의 몸에 박혀 난 소리가 아니다. 카렌이 왼발을 갑자기 옆으로 뻗었다. 그러자 발에서 얇은 두께의 반투명한 가시가 쑤욱 솟아나더니 옆의 나무를 쳐서 간발의 차로 화살을 피했다.
"후우...이번엔 좀 위험했어, 이크"
화살이 또 날아오자 카렌은 재빨리 옆에 있던 나무로 숨었다.
"리사! 이젠 나오지 그래? 어차피 이곳에서는 화살로 날 못 잡는다."
잠깐 침묵이 흐르더니 곧 리사가 반대쪽 나무에서 사뿐히 땅으로 내려앉았다.
"대단하네. 역시 A급 헌터야."
단순히 기업이나 길드에서 안전한 게이트만 골라서 사냥한 가짜가 아닌 진짜 A급.
"자기는 잘생겨서 좋았는데, 아쉬워."
리사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진심이었다. 서류에 있는 카렌의 사진을 볼 때부터 얼굴이 자신의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하, 언제 봤다고?"
"내가 얼굴에 좀 많이 꽂히는 스타일이라."
"그건 고마운데. 넌 내 취향이 아니야. 누가 시켰는지는 알아?"
"그럼! 날 이기면 알려줄게. 어차피 지면 숨기는 의미도 없고."
마지막 말은 리사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자기도 이제 나와. 근처에 몬스터도 없고 활은 어차피 안 통하는 거 알아. 같이 화끈하게 뒹굴자고."
카렌이 마나 포션을 마시고는 감췄던 모습을 드러내면서 리사와 똑바로 마주 봤다.
리사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꺼내 손에 쥐었다. 카렌은 코트를 벗고는 포션을 벨트에서 꺼내 들었다.
"포션?"
"난 연금술사니까."
"풋, 정말 매력적인데...아쉬워, 자기."
"난 별로."
"어머, 난 그렇게 튕기는 남자도 좋아."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