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
'뭐가 문제지?'
내가 벨리알에서 지구로 넘어온 게이트랑 종류가 다른 걸까? 내가 게이트를 만든 것도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드래곤도 무리였는데..."
예전에 갓 성체가 된 멋 모르는 드래곤이랑 싸울 때, 놈이 겁 모르고 시비를 걸면서 내 마나를 동결시키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두들겨 맞았지.'
그리고 친구먹은 고룡들한테 일러줘서 걔네한테도 추가로 또 맞았다.
갓 성체가 되었는데 몇백년 외출금지령을 받고 온 몸에 멍이 든 채 다시 얌전히 둥지에 쳐 박힌 불쌍한 드래곤.
?
"그렇다면 그걸 뛰어넘는 무엇인데..."
'이럴 땐 그 녀석이 그립단 말이지.'
지구로 오기 전 마지막까지 실컷 놀리고 온 대마법사 녀석, 그 친구라면 답을 알 수도 있을 텐데.
지금은 곁에 없으니 스스로 생각하고 해결해야 한다.
'아! 맞아. 신! 그 느낌...왠지 익숙했어.'
벨리알에서 왜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놈들이 계속 나오냐고 신을 찾아갔을 때, 정신을 차려보니 하얀 공간 안에 들어가 있었다. 물론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그때는 지금과 같이 힘은 사라졌지만 이렇게 더럽게 뺏어간 느낌은 들지 않고 오히려 상쾌했으니까.
"주인?"
삼색이 불렀지만 카렌은 그때의 기억을 되짚어 보기 바빴다. 방금 게이트를 지나올 때처럼 힘이 사라진 듯한 느낌, 무력함.
"선배?"
생각하는 중에도 카렌의 발걸음은 삼색과 한민재랑 같이 전투조를 따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심각한 표정으로 걷자 삼색과 한민재가 그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게이트가 처음이라 그러셨죠? 걱정 하나도 안 하셔도 됩니다! 앞에 S급헌터 이채린님도 있고..."
옆에서 한민재가 뭐라 계속 말을 걸었지만 카렌은 계속 생각하기 바빴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달라지는 건 없다.
'내 힘은 마력이기도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저 분들도 모두 A급 헌터시니, 저희가 있는 곳까지 몬스터가 올 걱정은 없습니다. 만약 그래도 제가 목숨을 걸고 지켜드리겠습니다!"
이 녀석은 게이트 안에서나 밖에서나 말이 참 많다.
"별거 아니야. 그냥 끝나고 신이나 좀 만나야겠어."
"...신이요? 저 위에 있는 그 신?"
한민재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래, 그 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면 답을 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지."
벨리알처럼 한발 늦게 아는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내가 해결은 안 하더라도 알고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주인, 뭔가 이상하다."
"뭐가?"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코를 킁킁거리던 삼색이 저쪽 선두에 가고 있는 채린과 일행을 수상한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익숙한 향기가 미세하게 난다."
"향기?"
"정말 약한 매력적인 향기가 저들에게서 풍긴다. 마치...캣닙과 맛있는 음식향이 동시에 풍겨오는 느낌?"
이 녀석이 기억이 안 난다고는 하지만 내 생각에는 무조건 진짜 고양이에서 영물이 된 게 맞다.
"게이트에 생뚱맞게 캣닙을 들고 오진 않을 테고, 몬스터 페로몬 쪽인가?"
몬스터 페로몬은 이름 그대로 몬스터 각자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 냄새를 풍겨 몬스터를 끌어 모으는 포션의 일종이다. 벨리알에서는 특정 상황 빼고는 사용이 엄격하게 통제된다.
'마력 포션 수준은 쓰레기더니, 저런 건 또 기가 막히게 만들어 냈네.'
"그런데 영물한테도 효과가 있구나."
"내가 평소에 후각을 꺼 놓는데, 게이트 와서 혹시 몰라 켜봤더니 뭔가 이상했다."
하긴 평소에 너무 좋아도 힘들 테니... 근데 그게 온/오프가 되는 건가?
'모르겠다. 이 녀석 특이한 거야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카렌은 이제 삼색에 대한 분석을 반쯤 포기했다. 160년 넘게 지금껏 보아 온 모든 생물 중에 다른 의미로 가장 특이했으니 말 다 했다.
"냄새가 누구한테 풍기는지 알 수 있겠어?"
"정확히는 모르겠다. 셋이 같이 다니면서 서로 향기가 몸에 미묘하게 배어 버렸다."
"그럼 감지 헌터를 믿을 수는 없는데... 냄새로 네가 몬스터 오는 거 멀리서 감지할 수 있지?"
"아! 그거 안 된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 후각 엄청 좋잖아."
"맞다."
"근데 왜 못 맡아. 저거 밀봉되기 전 잔향만 남아 있는거야. 후각에 특화된 몬스터도 그거 전혀 못 맡는다?"
"꾸잉, 저건 먹는 냄새라 가능하다. 음식이 아닌 건 잘 못 맡는다."
영물로서의 진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된 것 같은데... 고양이가 아니라 돼지에서 영물이 된 게 아닐까.
'그건 그렇고, 그럼...누굴까.'
일단 용의 선상에서 채린은 확실히 제외했다. 자신의 동생을 살리는 일인데 저딴 걸 들고 올 리가 없다.
남은 용의자는 둘, 아니 옆에서 지금 떠들고 있는 녀석까지 셋?
'일단 이 녀석은 반만 믿자. 시킬일도 있고.'
몰랐으면 몰라도 신경쓰고 있는 이상, 아무리 마력량이 떨어졌다 해도 C급은 위협이 전혀 안 된다.
"그럼, 곧 몬스터가 몰려오는 겁니까? 지금이라도 말할까요?"
"아니, 이녀석이 희미하게 맡을 정도면 몬스터는 아예 못 맡겠지. 그리고 지금 잡아도 의미 없어."
몬스터 페로몬을 전략적으로 쓰려고 했다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실제로 비상용으로 들고 왔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냥 넘길 수는 없지.'
그리고 어차피 내 마력량이 B등급 이하로 내려가 버린 이상 준비는 해야 했다.
?
"너, 연금술 배우고 싶냐?"
카렌이 한민재를 보며 말했다. 자신을 꿰뚫는 듯한 카렌의 시선에 한민재가 순간 움찔했다.
"네?"
갑작스러운 카렌의 말에 한민재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원하던 일이긴 하지만...이렇게 갑자기?
"...물론이죠!"
조금 대답이 늦긴 했지만, 목소리는 합격이다. 앞 파티에서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돌아볼 정도니까.
"게이트 한정 특별 교육 시간이다. 삼색, 너도 나와."
"꾸잉!"
가방에 들어 있던 삼색도 앞의 유리 덮개를 앞발로 밀고는 훌쩍 뛰어내렸다.
'아공간은 어떠려나.'
목걸이 아공간을 열려고 손을 뻗었지만 아예 열리지도 않는다.
'역시...
"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지구로 넘어올 때는 아예 물품들이 죄다 사라져 버렸으니.
'그렇다면 영혼 아공간은?'
찌지직
손을 뻗자 공간이 찢어지며 카렌의 팔이 쑤욱 들어갔다.
'이건 되네.'
안에서 잡히는 감촉들로 보아 영혼 아공간은 멀쩡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영혼 아공간은 수납공간이 적고 귀중 물품만 넣을 수 있어서 지금 쓸만한 물품이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조달해야지. 한민재, 기본적인 연금술 도구랑 채취 도구 가지고 있지?"
"그럼요."
보통 게이트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가는 짐꾼들은 개인 물품들을 챙기기는 불가능하지만, 한민재는 신체강화형 C급 각성자인 덕분에 여유가 있었다.
"수업을 시작한다. 둘 다 내가 말하는 것들 캐와."
"물론이죠!"
한민재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만 펄쩍 뛰며 기뻐했다. 실제로 뛰면 카렌이 질색하며 혹시나 마음이 바뀔 것 같았다.?
'짐꾼 하길 정말 잘했어! 내게 이런 행운이 찾아 오다니!'
"정말 할 수 있겠어?"
카렌이 한민재가 짊어지고 있는 짐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걸 지고 허리나 숙일 수 있으려나?
"선배님.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이까짓 짐들 하나도 안 무겁습니다."
한민재가 어깨를 과하게 들썩이며 자신은 정말 괜찮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나는 평생 후회할 거야.'
협회에서 제명당하고 거지꼴로 오랫동안 떠돌았다. 그러면서도 근근이 약초들을 캐고 실험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눈앞에 카렌이라는 존재가 나타났다.
"좋아, 삼색, 저기 저 빨간색 약초 캐와."
선두랑 너무 떨어지면 안 된다. 또 동시에 완전히 믿을 수 없으니 자신은 캘 약초를 발견하는 일과 동시에 경계를 해야 했다.
"너는 저기 잎 세 개 달린 식물, 가운데 잎 하나만 따와. 나머지는 건드리면 안 돼. 독 뿜어져 나온다."
"선배님, 왜 가운데 잎만 땁니까?"
"저 잎만 진짜야. 나머지 두 잎은 몸을 보호하기 위한 가짜야. 효과도 없어"
모든 생물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능력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스컹크의 냄새, 장미의 가시같이, 하지만 지구와는 달리 벨리알의 식물은 진짜 죽을 수도 있으니 좀 더 스릴있지.
"짐에 물 있지? 거기다 넣어놔. 20분 있다 빼, 그래야 독성이 빠진다.
"그 다음 저기 저 나무에 달린 잎 하나. 가지 건들면 단숨에 옭아맨다."
"와! 신기하네요. 지금 바로 갑니다!"
저 녀석은 저 불편하고 무거운 짐을 메고 잘도 뛴다.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배우는 게 저렇게 좋을까.
"가져왔습니다."
"좋아. 잘 보관하고."
"예! 그런데 선배님은 이런 걸 어떻게 다 배우셨어요?"
"경험, 책"
처음에는 책은 비싸고, 글도 몰라서 다 몸으로 부딪쳤지. 그러다가 나중에 좀 괜찮아지니 책을 읽을 여유가 생겼었다.
"숨어!"
카렌과 삼색, 그리고 민재가 한창 채집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앞에서 리사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이쪽으로."
그들은 엘리니아 게이트 경험이 있는 한민재가 재빨리 안내해주는 무성한 수풀 속에 숨었다.
부우우우우웅
과연 숨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대형 비행기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까워졌다.
???
"페어리 무리입니다."
머리에 난 두 개의 더듬이, 나비처럼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두 쌍의 날개, 사람 머리만 한 몸집을 가진 페어리들이다.
"엄.청.많.다!"
삼색의 말대로 셀 수도 없는 페어리들의 날갯짓 때문에 바로 옆 사람이 말하는 목소리가 잘 안 들릴 정도다.
삼색이 거의 카렌의 귀에 대고 소리 쳤다. 아니 근데 이 녀석은 별 의미도 없는 얘기를 왜 지금 하는 거야?
왜 감지헌터를 엘리니아에 꼭 데리고 와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만약 감지헌터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제대로 숨기 전에 발각되었을 거다.
페어리가 모두 지나간 후 모두 숨었던 곳에서 주섬주섬 몸을 털면서 나왔다.
"이렇게 된 김에 좀 쉬었다 가자."
채린의 지시에 모두 각자의 짐을 내려놓았다.
"근데 뒤에서 뭘 하는 거요?"
이정이 스트레칭을 하면서 카렌을 향해 물었다
"가는 김에 후배 교육하는 거다. 겸사겸사 약초도 좀 캐고."
"허? 그래도 되는 거요?"
이정이 채린을 돌아보자 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다른 짐꾼이나 일행이 그랬다면 긴장감이 없다고 욕을 엄청나게 먹었겠지만 채린은 카렌을 믿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럴 리가 없어.'
"카렌님은 얼굴만큼 마음씨도 너무 예쁘다. 선배가 후배를 생각하는 마음이 멋있네."
리사가 카렌을 향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
"뭐...이채린님이 그러시다면 나도 괜찮다만, 그래도 방해는 되지 마시오."
"에이, 너무 까탈스러우시다."
여전히 마음에 안 든 이정이 괜히 툴툴거리며 한마디를 남겼다.
'처음부터 저 녀석은 적대적이긴 했어.'
하지만 이유는 들어줄 만하다. 게이트에 고양이랑 같이 들어가는 사람을 지금껏 본 적이 없었을테니까.
물론 그걸 감안해도 좀 이상할만치 까탈스러웠지만...저 놈의 생각 따위 알게뭔가.
만났을 때부터 까다로운 이정,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듯한 리사, 아직 누가 페로몬을 갖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모은 것들 가져와 봐."
아무리 더 생각해도 답은 안 나올 거다. 일단 그 생각은 접어두고 할 일을 하자.
카렌의 지시에 삼색과 민재가 지금껏 모은 약초들을 내놓았다. 약초가 수북하게 카렌의 앞에 쌓였다.
"여기 기구들 있습니다."
한민재가 자신의 짐에서 길쭉한 빈 포션병들과 물병, 절구, 공이, 날카로운 칼을 내려놓았다.
"아까 캔 빨간 약초랑 이 잎을 섞으면 이렇게 된다. 비율은 1:5"
물을 살짝 절구에 넣고 약초들을 넣고 절구에 마나를 씌워 거의 액체가 될 때까지 찧는다.
"세상에...D급 이라면서요? 그런데 마나를 불어 넣어요?"
리사의 말처럼 일행 모두가 카렌의 절구를 보면서 놀랐다. 물론 절구에 씌운 마나는 정말 얇았지만, 저것도 엄청난 재능이다.
"마나 감응력은 정말 높지만 최대 마나량이 적은 경우인가 본데."
이정이 A급 헌터다운 날카로운 분석력을 뽐냈다.
물체에 마나를 불어 넣는 일은 당연히 갖고 있는 마나가 많을수록 쉽다. 하지만 D급의 마나로? 이론상 가능하다고 듣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 더 놀라웠다.?
"엄청난 노력을 했나 보군."
이정이 카렌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다.
솔직히 뺀질거리는 외모 때문에 첫인상은 마음에 안 들었다. 남자라면 모름지기 듬직하고 근육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크흠! 그래도 마음에 안 들어.'
"물."
정작 카렌은 주위에서 뭘 하든 오로지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다.
빻은 약초들을 절구에 넣고 한민재가 건네주는 물을 절구의 반이 차오를 때까지 붓는다.
"칼."
마찬가지로 칼에도 마나를 넣고는 적절히 마나량을 조절해가며, 만들려는 포션 특유의 색깔이 나올 때까지 젓는다.
보기엔 쉬워 보이지만 변하는 색깔에 맞춰 젓는 세기, 깊이를 조절해야 하는 섬세한 작업이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빨리해야지.'
사실 마나를 절구나 칼에 굳이 마나를 넣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마나를 섬세하게 이용하면 속도가 빨라진다.
?
원래 따로 젓는 특수 막대기도 있어야 하고 절구가 아닌 특수제작한 가마솥에 해야 하지만, 뭐 그런 게 여기 있을 리가 없고 그냥 대강 하는 거다.
"저렇게 막 해도 돼?"
채린이 집중한 카렌을 방해할 순 없었고 그나마 연금술사 후배인 한민재에게 물었다.
"저는 꿈도 못 꿉니다. 하지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뭔데?"
"막, 무협지 보면 무술의 고수가 나뭇가지로 진검을 이기지 않습니까. 그거랑 똑같습니다."
"멋있다."
채린이 다른 사람들은 안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모두가 카렌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름다워.'
모든 과정이 망설임이나 막힘없이 완벽하고 깔끔하게 이루어진다. 그렇게 순식간에 포션들이 만들어졌다.
"얼굴만큼 연금술 실력도 멋있어요. 연금술사가 이렇게 멋진 직업일 줄은 몰랐네."
"흥! 그래봤자 연금술사지."
'그래, 그렇게 생각해야지.'
카렌이 대놓고 제작을 보여 준 것도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한민재에게 들었던 것처럼 헌터들에게 연금술사의 인식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선배님에게 말이 좀 심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카렌이 일부러 가만 있는데 옆의 한민재 녀석이 발끈한다.
"야, 야. 됐어."
"하지만..."
짝!
"그럼 이제 다시 출발하자."
채린이 박수를 한 번 쳐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고는 말했다. 파티는 채린의 지시에 짐을 챙기고 다시 목적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여기서 채린은 누구의 편을 들어서도 안 된다. 사소한 분란도 커다란 문제의 시발점이 될 수 있으니까.
"흑, 그런 모욕을 받고도 보여주시는 관대함과 여유로움까지...선배님,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선배님은 신입니다."
"푸흡...주인이 관대하데. 저 인간 아무것도 모른다."
삼색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와중에도 한민재가 눈물을 훔치며 카렌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애는 또 왜 이래.'
안 그래도 카렌을 보는 한민재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는데 이제는 신을 눈앞에 둔 열성신도가 되어 버렸다.
"됐고, 저거나 캐와. 아직 멀었으니까. 시간상 포션은 많이 만들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제작하자고."
카멜레온 포션, 슬라임 포션, 쉐도우 포션. 이것들도 참 오랜만에 만들어 본다.
"꾸잉, 나 이거 어디서 들었다."
"뭘 들어?
"지나친 포션은 오히려 몸에 좋습니다."
"오, 그거 누구야. 현명한 연금술사네."
"게임이다. 단풍스토리의 약국 명대사다."
"...헛소리 하지 말고 너도 저거 캐와."
카렌은 둘을 보내고는 한 나무에 다가갔다. 아까 한민재에게 가지가 옭아맨다고 경고한 종류의 나무.
아까 만든 포션병들을 천에 감아 나무의 가지에 대자 가지들이 순식간에 포션병을 낚아챈다.
"그렇지."
이 나무는 자신의 몸에 앉는 새를 가지로 잡아서 죽인다. 다만 그 새를 미끼로도 쓰기 때문에 딱 새가 날아가지 못할 정도로만 압력을 가하지.
포션을 천으로 감싸 놓아서 외부의 충격에도 좀 버틸 거다. 그렇게 모든 포션병들을 가지에 붙이고는 끝부분을 빠르게 잘라냈다.
'이것도 숲에서 조난당했을 때 알았는데 말이야.'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죽은 가지들은 사람의 체온에 닿으면 힘을 잃는다. 그러면서 포션을 자연스럽게 놓지.
이제 대충 끈이나 그런 걸로 몸에 묶기만 하면 자연에서 온 천연 포션벨트가 완성된다. 연금술사에게 포션벨트는 검을 담는 검집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고 보니 좀 많이 여유롭긴 했어.'
연금술사라는 놈이 포션벨트를 안 가지고 다녔으니 말이다.
"와...멋집니다 선배님. 어떻게 이런 걸 즉석에서 만드십니까."
약초를 캐온 한민재가 카렌의 포션벨트를 보더니 감탄했다.
"아무 물품도, 능력도 없이 갑자기 다른 세상에 떨어지면 너도 할 수 있다. 못 하면 죽는거고."
"하하. 선배님 농담도 정말 잘하십니다. 유머감각까지 완벽하십니다."
뭐, 힘들긴 했어도 덕분에 빠르게 실력이 늘긴 했다. 물론 운도 더럽게 좋았지.
"가벼운 코트 같은 것 있어?"
"물론이죠."
숲이니 만큼 밤에는 추워지니 옷가지는 필수로 챙겨 다녀야 했다. 카렌은 한민재가 짐에서 꺼내준 코트를 걸쳤다.
"벨트가 밖으로 보이진 않지?"
"네, 완벽합니다."
"좋아. 어? 저 황금색 곤충도 가져와. 저건 진짜 중요하다."
'운이 좋네. 아무리 숲이라지만 찾기 쉽지는 않은 곤충인데. 시간을 덜었다.'
저 곤충이 어떻게 보면 이번 원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예!"
한민재가 뛰어가고 카렌은 품 안의 포션병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 몸 안의 마력량?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내 전부는 아니다.
내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연금술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