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140)

  엘리니아

  "선배님!"

  호텔 밖으로 나오자마자 초췌한 몰골의 한민재가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덩치가 큰데 옷까지 꾀죄죄하니 주변에 사람들이 알아서 피해간다.

  [꾸잉, 좀 불쌍해 보인다.]

  "전에 C급 각성자라고 했는데. 돈이 많이 없나?"

  안 그래도 부스스한 머리에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으니 여기서 며칠만 더 지나면 분명 거지꼴이 될 거다.

  "아하하, 제가 좀 사정이 있어서요. 선배님이 신경 쓸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그럼 가이드 시작합니다! 저만 따라오세요!"

  과연 자신감답게 한민재는 엘리니아 곳곳을 카렌과 삼색을 데리고 누비기 시작했다.

  "여기 시장 구석에는 골동품점이 있습니다. 또 여기는 이 시간에만 열리는 공연이 열리죠. 또..."

  [꾸잉, 가이드 잘한다.]

  삼색의 말대로 과연 현지인답게 관광객은 몰랐던 구석구석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군데를 들렸다가 잠깐 배를 채우러 골목 깊은 곳에 있는 파이집에 들렀다.

  "오...."

  파이를 한입 베어 문 카렌이 그 맛에 감탄했다.

  [주인! 그거 꼭 싸가야 한다.]

  툭, 툭

  삼색 녀석이 또 이동장을 툭툭 치며 시위 중이다. 알았다, 알았어.

  정말 맛있긴 하다. ?엘리니아에서 나오는 열매로 만든 파이의 빵은 부드러웠고 안에 들어있는 잼은 달콤하게 혀를 감쌌다.

  꿀꺽

  "응?"

  카렌이 옆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자 돌아보니, 한민재의 목이 꿀렁 거렸다. 나름 티는 안 내려고 하고 있었지만 덩치가 큰 녀석답게 움직임 하나 하나가 크다.

  "넌 안 사 먹고?"

  "저는 먹고 왔습니다."

  그 배에서 지금도 나고 있는 꼬르륵 소리 좀 어떻게 하고 거짓말을 좀 해라.

  "어제 간식 다 팔았잖아?"

  뭐 새 옷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음식을 살 정도의 돈은 충분히 될 텐데?

  "저...그 동안 쌓인 빚 갚았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곧 있으면 무료급식 있거든요."

  "여기 파이 3개 더 줘. 너 배가 시끄러워서 먹을 수가 없네. 옛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역시나 말과는 달리 굶주린 민재는 순식간에 파이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래도 C급인데, 돈이 없어?"

  C급 정도면 그래도 충분히 먹고 살만 하다고 알고 있었다. 최소 이 녀석처럼 거지 같이 살 일은 없을 텐데?

  그리고 굳이 이 녀석이 왜 A급 던전인 엘리니아에 있는 지도 잘 모르겠고.

  "여기 계속 있다 보니,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런 질 좋은 약초들을 얻을 수 있는 게이트가 엘리니아밖에 없기도 하고요."

  "다른 게이트에서 돈 벌어 오면 되잖아?"

  "아하하..그게...제가 협회에 찍혀서요."

  게이트가 생긴 이후로 새로운 협회가 생겨났다. 연금술협회.

  연합에서 지원도 해주고 처음에는 괜찮은 취지로 설립됐지만, 문제는 모두가 생소한 학문이다 보니 제대로 된 사람을 가려낼 수가 없었다.

  "협회장이 화룡점정이었죠."

  안 그래도 삐걱거리던 협회는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놈이 협회장이 되면서 더 엉망이 되어갔다.

  "어디나 있는 일이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기존에 있던 학문도 아닌 아예 새로운 분야니 잡음이 많겠지.

  "제가 협회 방침에 반발해서 좀 들이받았더니 블랙리스트에 올랐습니다...하하."

  이 녀석이 좀 새롭게 보인다. 그냥 순한 줄 알았더니 그런 구석도 있었네.

  "여기는 그나마 협회의 손길이 잘 안 닿아서 상주하고 있습니다. 가끔 짐꾼으로 들어가서 약초도 캐고 좋습니다."

  "짐꾼?"

  "네. 그냥 전투원들이 앞서서 갈 때 뒤에서 짐 들어주는 겁니다. 다만 그것도 자주 못 들어갑니다."

  짐꾼 협회에서 각성자 급수에 따라 임금을 맞춰버렸다. 물론 짐꾼들의 최저임금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지만 한민재에겐 독이 되었다.

  "짐꾼을 굳이 비싼 C급을 쓸 필요는 없죠. 가끔은 제 급수가 낮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민재에겐 자신의 등급보다 연금술이 더 중요했다. 다만 연금술 협회는 짐꾼협회와 다르게 좀 많이 썩어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연금술 협회장은 던전 안에서의 약초 채취 활동을 아예 자신들의 허가를 받은 자들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버렸다.

  들리는 말로는 독점으로 캔 약초들이 길드랑 연합 쪽으로 간다는 얘기도 있다.

  "쯧, 쓸데없는 짓을."

  어쩐지 이곳의 포션들이 다 쓰레기 같은 이유가 있었다. 대가리가 그 모양이니 제대로 될 리가 있나.

  "그리고 연금술사라는 직업이 조금 무시 받기도 합니다."

  "그럴 수가 있나? 아무리 공장들이 포션을 찍어내도 한계가 있는데?"

  "한계요? 연금술사가 만드는 포션들은 공장의 발끝도 못 따라갑니다."

  카렌은 한민재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공장이 만들 수 있는 포션의 한계는 50%밖에 안 돼."

  그러고 보니 저번에 강이사도 몰랐던 눈치던데, 제약회사의 직원이 모른다면...

  "설마 지구에선 51% 이상의 마나포션은 사람이 마나와 함께 손으로 직접 제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냐?"

  "네? 진짭니까?"

  세상에, 지구에서 이렇게 놀랐던 적이 없다.

  "사실 거창하게 말은 연금술사라고 하지만 약초꾼이나 다름 없습니다. 각성자인 점만 다르죠."

  "그랬군, 그랬어."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품들은 기계로 돌리니 어차피 연구원들이 만들었을 테고, 연금술사들은 만들어 봤자 돈도 안 되니, 만들고 연구할 시도조차 안 한 거다.

  "알아서 하겠지."

  자신이 협회를 개혁하고 뭐 그런 귀찮은 걸 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그냥 어이가 없었을 뿐이다.

  "선배님, 그래도 연금술사도 충분히 멋진 직업 맞죠?"

  나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는 한민재를 향한 내 생각이 좀 달라졌다.

  '이 놈이 특이한 거네.'

  돈도 안 되는 일을 굳이 하고, 질 걸 알면서도 협회랑 싸우고 여기까지 밀려온 놈이다.

  "나도 연금술사다."

  구구절절하게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냥 이 말이면 충분하다.

  "저는 믿었어요! 언젠가 연금술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날을 만들 겁니다."

  "근데 왜 그렇게 연금술을 좋아하는데?"

  C등급이면 다른 할 것도 많을 텐데. 돈은 말할 것도 없고.

  "재밌습니다. 뭔가를 섞어서 다른 결과물이 나오는 게 정말 신비로워요. 식물도 예쁘고, 포션도 정말 멋있습니다."

  연금술에 대해 얘기하는 한민재의 표정이 아이같이 변했다. 물론 험상궂은 얼굴이어서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도 이런 적이 있었지.'

  옛날 벨리알에 떨어진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이보게, 다쳤나?]

  한 노인이 자신의 상처를 약초와 포션으로 치료 해주고 자신을 연금술사라고 했었다.

  비록 다신 보지 못했지만, 그 만남이 지금의 카렌을 만들었다.

  "그래, 내가 뭐 특별히 해줄 건 없고, 아직 배고프지?"

  "해준 게 없다뇨! 같이 다니는 것만 해도 영광입니다. 카렌 선배님!"

  선배라...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파이 사주신 게 어딥니까."

  꼬르륵??

  우렁찬 소리가 들려온다. ?역시 조그마한 파이 세 개로는 어제부터 거의 이틀째 굶었던 20대의 위장을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엘리니아에서 가장 맛있는 식당이 어디야?"

  "전 정말 괜찮..."

  "?너 사주려는 게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그래."

  "카렌 선배님..."

  이 녀석은 열정도 좋고 그런데, 너무 눈빛이 부담스럽다. 무슨 새끼오리가 엄마 오리를 보는 것처럼.

  "눈 안 깔아?"

  "옙.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 듯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 * *

  "그 사람이야?"

  이채린이 다음날 도착해서 신기하게 한민재를 살펴봤다. 어떻게 변덕스러운 카렌의 마음에 들었지?

  "저...절단의 마녀?"

  트레이드 마크인 붉은 적발과 얼굴을 크게 가로지르는 흉터, 분명 S급 헌터 절단의 마녀 이채린이었다.

  "절단의 마녀? 너 그렇게 불려? 하하하"

  처음들어 본 별명에 카렌이 크게 웃자 이채린의 얼굴이 싸늘하게 한민재를 째려보았다. 그리고는 한민재의 어깨를 잡고는 속삭였다.

  "너...두고보자."

  "헙...죄송.."

  "닥쳐, 사과도 하지마. 입 다물어."

  처음 만나 본 S급 헌터에게 협박받은 한민재의 얼굴이 금방 죽을 듯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이 놈의 입!'

  어쩌자고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렸을까. 아니, 눈앞의 이채린이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 실제로 호랑이보다 세기도 하고.

  '어떻게 하지?'

  한민재의 머리가 눈 앞에 닥친 위기로 인해 평생 가장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채린이 카렌의 곳곳을 자세히 살펴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한민재를 대할 때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

  "응? 무슨 소리야?"

  "어떤 놈들이 시비 걸었다며. 삼색이 말해주던데?"

  채린은 원래 파티원을 구하고 준비해서 진입일에 맞춰 오기로 했지만, 연락을 받고는 하던 일도 제쳐두고는 바로 달려왔다.

  "채린! 어서 와라!"

  덜컥, 뭔가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카렌 등 뒤의 가방에서 삼색의 머리가 쏙 튀어 나왔다.

  투명한 유리가 볼록하게 밖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우주선 가방이다.

  이동장을 계속 들고 다니기에는 카렌도, 삼색도 불편해서 한민재의 추천을 받아 어제 샀다.

  "어머, 그거 너무 귀엽다. 우리 삼색이 주려고 내가 수제 간식도 가져왔어."

  가장 가까운 곳에 스파이가 한명, 아니 한 마리가 있다는 걸 깜빡했네.

  "주인! 여자친구 왔다!"

  "어머?"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호칭에 채린의 얼굴이 빨개지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야, 그거 실례야. 봐봐, 저렇게 싫어하잖아."

  '이거다. 이거야.'

  갑자기 부드러워진 채린의 분위기와 반응에 한민재의 머리에 벼락이 번쩍 치며 살길이 보였다.

  "저..."

  입을 열자마자 채린이 한민재를 홱하고 돌아보는데 얼굴이 순식간에 바뀌는 게 마치 귀신 같다.

  "저...선배님. 혹시 삼색님께 소개시켜 드릴 반려동물 전용 맛집이 있는데 같이 가도 될까요?"

  "어때, 삼색?"

  "좋다!"

  역시 이 녀석이 거절할 리가 없지.

  "그럼 제가 삼색님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두 분은 밥이라도 드시고 오세요."

  "난 괜찮..."

  ?

  "나 배고파! 여기까지 급하게 오느라 못 먹었어."

  "응? 그럼..."

  "설마 나 혼자 먹으라는 거 아니지? 가자. 그럼 잘 갔다 와!"

  한민재가 재빨리 삼색의 가방을 넘겨 받았다. 심지어는 삼색도 꾸물꾸물 몸을 움직이며 도와주고 있었다.

  "가자!"

  채린이 카렌의 팔에 팔짱을 끼고는 크게 외쳤다.

  "여기 엘리니아에서 손꼽히는 맛집이 있습니다."

  한민재가 주소를 준 쪽지를 건네받은 채린이 입모양으로 한민재에게 말을 전달했다.

  '용서해주지.'

  한민재는 사라지는 둘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응? 누가 내 얘기를 하나?"

  걸어가던 채린은 갑자기 귀가 간지러워지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또 뭘 했길래?"

  "아! 있긴 있어. 하지만 걔는 할 말 없지."

  "응?"

  채린이 씨익 웃으며 지금쯤 열 받아 하고 있을 세상에서 가장 친한 누군가를 떠올렸다.

  [아악! 이년이 이걸 나한테 다 맡기고 가? 언니가 아니라 웬수야. 그냥!]

  사실 원래 자신도 여러 일을 처리하러 지금 서울에 있어야 하지만...

  [삼색아, 무슨 일이야? 뭐? 카렌이? 알았어. 지금 갈게.]

  [언니, 어디를 가? 지금 이거 마무리...야! 야! 이 미친년이 어디가! 너 이리 안 와?]

  채린은 카렌이 위협 당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달려왔다. 그래도 우리 착한 동생은 응원해줄 거다. 자기가 처음에 떠밀었으니까.

  "그럼 오늘은 놀자. 내일은 게이트 들어가야지."

  채린은 카렌의 팔짱을 끼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한민재가 소개해준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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