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3/140)

  시작

  일단 병원을 나온 셋은 근처에 있는 채린의 집으로 향했다. 집이 근처라 금방 도착했다.

  [띠리릭]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쪽에서 채린의 동생인 정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었네? 요즘 그 남자랑 어떻게...어머! 벌써 같이 집까지 온 거야? 연락하고 오지!"

  "그런 거 아냐!"

  "걱정 마. 내일 들어 올 테니까, 아니면 좀 더 나가 있을까?"

  정현의 능청스러운 말에 채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역시나 그 정도로 멈출 동생이 아니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아니, 얌전하지는 않나? 어쨌든 우리 언니 다시 봐야겠어."

  "꾸잉?"

  "...진짜 고양이네? 어머! 귀여워. 이 아인 뭐야?"

  정현이 삼색을 보더니 꺅 소리를 질렀다. 원래도 귀여웠는데 조금 통통한 모습이 더 정현의 취향을 저격했다.

  "괜찮아."

  삼색이 카렌과 정현을 번갈아 보며 말을 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고, 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먹을 것 없냐."

  "고양이가 말을..해?"

  "그건 됐고. 여기 와서 앉아 봐."

  "뭐가 돼? 언니! 고양..."

  "재형이가 깨어났어."

  "뭐?"

  그래, 그 정도면 고양이가 말을 할 수도 있지. 병원에 누워있는 동생의 얘기가 나오자, 정현의 장난스러운 태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슨 문제가 있구나."

  S급 헌터의 비서는 결코 쉽지 않은 직업이다. 눈치로 단숨에 언니의 표정에 담긴 수심을 읽은 정현이 되물었다.

  정말 동생이 정상적으로 깨어났다면 당연히 자신에게 전화부터 했겠지.

  "그게..."

  지금껏 있었던 일을 모두 들은 정현의 시선은 이제 카렌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인사도 제대로 못 했네요. 반가워요, 저는 이정현이라고 해요."

  "나는 카렌이다."

  "초면이지만 직설적으로 좀 물어볼게요. 아무래도 동생 관련한 일이라서요."

  채린이 날카롭게 질문하는 동생과 카렌 사이에 껴서 안절부절못했다.

  '이 정도야 뭐.'

  "얼마든지."

  "D급 각성자라고 하셨죠?"

  "맞다."

  지금껏 모든 사람이 실패했는데 식물인간을 깨어나게 하는 일에 등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현은 낮은 등급을 들었지만 일단 넘겼다.

  "제 동생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어떤 방식으로 하실 거죠?"

  정현의 눈빛은 이채린의 동생이 아니라 B급 헌터이자 S급 헌터의 비서로 돌아와 있었다.

  '더이상 언니가 상처받으면 안 돼.'

  동생이 식물인간이 되고 나서 둘은 동생의 치료를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자신의 손만 닿으면 고친다는 사이비, 자신이 전설의 약을 가지고 있다는 돌팔이 등.

  하지만 제일 상처받을 때는 그런 인간들보다,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이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끝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할 때였다.

  '유감입니다.'

  '제 능력으로는 무리네요.'

  그렇게 말로 하나하나 새겨진 상처는 두 자매에게 아물지 않는 흉터로 남아 버렸다.

  "나는 연금술사다."

  "...연금술사요? 제가 아는 연금술사?"

  정현의 얼굴에 순간 실망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고민했다.

  어떻게 이 남자를 처리할까... 하필 자신의 언니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이런 인간이었다니.

  처음에 만나보라고 언니의 등을 떠민 자신에게 욕을 퍼부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면..."

  "더 이상 말은 시간 낭비군. 이걸 봐라."

  카렌의 워치에서 헌터 경매장의 경매 내역이 떠올랐다.

  "이건...50% 포션? 당신이 설마?"

  "꾸잉, 주인이 개발자다."

  지금 온 헌터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 눈앞에 있자 두 자매는 경악했다.

  지금 조선제약이 50% 포션들을 독점 판매하고 있지만, 알만한 사람은 그 기술의 시작이 어디선가 혜성같이 나타난 개인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의심해서 죄송해요."

  정현이 일어나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애초에 기분이 나쁜 적이 없었다. ?자신 같아도 처음 본 D급 각성자가 아무도 못 고친 자신의 동생을 고칠 수 있다고 나타나면 의심부터 하겠지.

  "맨드레이크가 어디서 나지?"

  "A급 게이트, 엘리니아요."

  엘리니아, 지리산에 생겨난 내부형 게이트로 우연인지 장소에 걸맞게 울창한 숲을 자랑하는 게이트다.

  숲의 중심부에 맨드레이크가 자라고 있었지만 정작 헌터들은 맨드레이크에 관심이 없었다.

  "효율이 너무 떨어져요. 무사시 길드가 독점하고 있는 데다 나타날 확률도 적고, 설령 발견한다고 해도 그걸 제대로 캐는 건..."

  "캘 줄 몰라서 그래. 내가 캐면 100%야."

  "세상에, 그거 캐는 법 알려지면 다들 맨드레이크만 캐려고 할걸요? 게다가 치료법까지 알고 계시면..."

  정현이 경악하며 말했다. 동생이 환자다 보니 그 쪽에 대한 정보는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게이트가 생겨나기 전에 미국에서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는 15,000명에서 40,000명 정도가 존재했다.

  그런데 게이트 사태 이후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환자의 수가 급증해 연합에 존재하는 환자들만 해도 백만 명까지 불어났다.

  '다들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 하겠지.'

  조금이라도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알 거다. 비윤리적인 생각이지만 그 환자들은 엄청난 돈이 될 거라는 걸.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이 평생 깨어날지도 모를 상태로 누워 있으면 돈을 싸들고 올 거다.

  게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들 중에는 부자나 이름이 알려진 사람도 많으니.

  "따라 못 해. 지금 지구에서는 나만 할 수 있을 거다."

  카렌에게는 쉽지만 마력을 주입하는 세심한 컨트롤이 필요했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A급 던전에 들어가서 그걸 익힐 사람이 있을까. 그것도 잘 나오지도 않는 맨드레이크를 상대로?

  "엘리니아로 가자. 답은 나왔네."

  옆에서 얌전히 듣고 있던 채린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스케줄은?"

  "다 취소해. 우리가 지금껏 굳이 힘들게 무소속으로 뛴 이유가 있잖아."

  길드에 속해 있으면 보통 장기계약이나 전속계약을 하니 원할 때 빠져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소속된 곳이 없다면 언제든지 동생을 위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지금이 그 때야. 우리가 준비했던 그 때."

  앞이 보이질 않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이 보이는데 그깟 일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위약금..."

  "알 게 뭐야. 돈 달란 대로 줘버려. 불만 있으면 내 얼굴 보러 직접 오라 그래."

  마치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채린에게 카렌이 지금껏 보지 못했던, 외부에 알려진 절단의 마녀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역시 우리 언니야."

  정현이 엄지를 치켜세우고는 전화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이제 거실에는 채린과 카렌만 남았다.

  "나도 전화 좀 돌려야 할 것 같은데, 여기 근처에 호텔 잡아줄까? 우리 집에 방이 많지 않아서..."

  "아냐. 우리는 돌아가지. 그리고 먼저 엘리니아로 가 있을게. 관광 좀 하고 싶어서."

  "꾸잉, 가자. 관광!"

  관광? 그래, 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저 남자라면 그럴 수 있지.

  "그래? 알았어. 그럼 내가 거기 있는 호텔 예약해줄게."

  "아냐, 내가 알아서..."

  "이거라도 하게 해주라, 응? 내가 너무 고마워서 그래."

  "꾸잉, 주인은 어차피 겸사겸사 정력...앜!"

  헛소리하는 고양이를 안아 뱃살을 주물럭대면서 카렌은 현관문을 열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줘."

  "알았어! 우리는 여기서 잠시 일 좀 처리하고 준비해서 엘리니아로 갈게. 조심히 가!"

  채린의 마중을 받으며 카렌과 삼색은 집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채린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야! 길드장! 잠깐 얘기 좀 하자."

  방금까지 카렌과 대화하던 강아지는 사라지고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

  *

  *

  "뭐..뭐? 이채린 헌터? 정신이 나갔소?"

  "됐고. 얘기나 좀 하자."

  갑자기 걸려온 채린의 전화에 무사시 길드장, 사토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 여자가 미쳤나?

  '동생이 일어난 거야?'

  사토가 잠깐 자신의 말소리를 음소거하고 옆에 있는 비서한테 물었다.

  '아닙니다. 병원에 찾아간 녀석의 말에 따르면 상태는 똑같습니다.'

  '근데 이 여자가 왜 이래?'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아까 전화 온 녀석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자신이 남산 꼭대기에 있고 호랑이만 한 고양이가 있다고 했는데, 연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개소리야. 그 새끼는 일을 어떻게 한 거야? 당장 묻어버려.'

  젠장, 이채린이 능력이 없는 일반인한테는 관대하다는 걸 노려서 보내긴 했는데, 문제는 너무 심약해서 정신이 나간 듯하다.

  "야, 씹냐?"

  "잘 들리오. 그런데 동생분은 좀 괜찮으신가?"

  사토는 보고를 받긴 했지만, 일부러 채린을 떠보기 시작했다.

  '혹시 뭔가를 숨기고 있을 수도 있어.'

  "그 문제야 네가 알바 아니고. 협상이나 좀 하자."

  "무슨 협상? 조건은 간단하오. 이채린 헌터가 우리 무사시 길드에 들어오고, 우리는 맨드레이크를 제공한다."

  "그래, 들어가 주지."

  "뭐?"

  꿈에도 바랐던 말이지만 정작 듣는 무사시 길드장은 혼란이 극에 달했다.

  '이 여자가 미쳤나?'

  갑자기 욕을 하다가 자신의 길드에 들어오겠다고?

  "대신 딱 한 번만 엘리니아 게이트에 들어가게 해줘. 그런데도 동생 치료 못 하면, 너네 길드 들어간다."

  "...잠깐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어디 보자...이 여자가 이렇게 배짱을 부리는 이유가 뭘까. 뭔가 방법이 있는 걸까?

  '분명 손해보는 건 아닌데...'

  엘리니아를 독점하고 있는 무사시 길드,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것밖에 없어서 산골짜기에서 성장이 멈춰 버렸다.

  만약 S급 헌터가 자신의 길드에 들어온다면?

  '흐흐흐, 그럼 우리도 드디어 올라갈 수 있어.'

  맨드레이크는 자신의 길드에서 철저하게 관리한다. 자신들이 모르는 뭔가가 나온다는 건 불가능하다.

  "좋소."

  "좋아. 그럼 곧 엘리니아로 가도록 하지."

  "기다리고 있겠소. 다음은 우리 무사시 길드 뱃지를 달고 있겠구려. 하하하."

  "지랄은 하지 말고."

  "크흠...말이 좀 심하..."

  [뚜, 뚜, 뚜]

  콰앙!

  채린의 욕에 이어 전화까지 끊어버리자 마침내 사토가 폭발하며 책상을 내리쳤다.

  "그 새끼! 아까 헛소리한 새끼 당장 고문실에 데려다 놔! 내가 직접 손 본다."

  "그런데...정말 이채린이 게이트에 들어가게 놔둘 겁니까?"

  비서가 분노한 길드장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협상했으니 막을 순 없지. 하지만 아무리 이채린이라도 엘리니아에 혼자는 못 들어갈 거 아니야."

  "그렇습니다."

  "거기다 사람 하나 심어. 딱 좋은 인재 하나 있잖아."

  "그 사람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요즘 들어 조금 불만이 많은 것 같던데요."

  "으하하, 어차피 가족이 맨드레이크가 필요한데, 우리 요구를 안 따르면 어쩔 거야? 그 녀석 가족도 우리가 보호하고 있는데 말이야."

  "알겠습니다."

  비서가 나가자 사장이 음흉하게 미소지으며 자신의 방에 숨겨져 있는 비밀금고를 열었다.

  끼이익, 한쪽 벽면이 통째로 움직이며 금고 문이 열렸다.

  "이것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

  그 희귀하다고 알려진 수십 개의 맨드레이크가 금고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으하하하, 옛날 한국놈들이 잠시 떠난 틈을 타서 이 곳을 점령한 보람이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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