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꾸잉, 고맙다, 주인. 영상이 아주 잘 찍혔다."
삼색이 흐뭇한 표정으로 슬라임처럼 자신의 몸을 쭈욱 늘리며 소파 위에서 말했다.
"그래, 적당히 먹고."
방금 잠깐 봤는데 삼색의 뱃살이 확실히 밑으로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꾸잉...노력하고 있다."
왕춘의 일 이후 카렌과 삼색은 다시 집에서 평소와 같은 생활로 돌아왔다.
[왜 사람 차별해? 평등하게 대해주라고.]
요즘 보고 있는 드라마는 2010년에 방영된 '시크릿정원' 25.1%의 최고시청률을 찍은 드라마다.
반짝이는 트레이닝복을 입은 재벌, 남자주인공이 액션 스턴트 배우인 여자주인공의 직장에 와서 진상을 부리고 있는 상황.
[후우...]
훈련을 감독하는 여주에게 남주가 윗몸일으키기를 도와달라는 다소 억지스러운 부탁을 하자, 여주는 한숨을 쉬며 할 수 없이 다가간다.
[똑바로 안 해?]
막상 다리를 잡아주니 고개만 깔짝이는 남주의 모습을 보며 여주가 한마디 했다.
[똑바로 하면 후회할 텐데]
남주인공이 그 말과 동시에 자신의 상체를 일으켜 여주인공의 바로 앞에 얼굴을 갖다 대었다.
"오오오오...봤냐. 주인?"
아삭, 둘은 카라멜 팝콘과 콜라를 먹으며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크으으으, 엄청 좋아하나 봐."
"...너 진짜 아저씨 같다."
뱃살 볼록 튀어나와서 소파에 저런 소리를 내며 앉아있으니 누가 저걸 보고 영물이라 그럴까.
하지만 삼색의 말대로 드라마의 분위기는 달콤한 노래와 함께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계속 올라오면서 서로의 얼굴은 가까워지고, 여주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남주와 민망한지 시선을 피하는 여주. 그리고 남주의 말.
[길라임씨는 몇 살 때부터 그렇게 예뻤나? 작년부터?]
"크아아아아"
"크으으으"
이번에는 삼색뿐만 아니라 카렌의 입에서도 감탄이 튀어나왔다.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나? 크으으으으, 명대사다, 명대사! 그렇지 않냐, 주인?"
"저건 인정."
그렇게 그 장면을 뒤로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사랑에 빠지고 훈훈하게 끝날 것 같던 그때.
"어..어?"
[콰아아앙]
여주인공이 일하다가 갑자기 차 사고를 당하고 만다. 그렇게 병원에 실려 가는 여주.
"저..저! 운전자 내가 죽일 거다!"
갑작스럽게 식물인간 상태가 되어버린 여주를 보고 삼색은 흥분했다.
"꾸잉! 다...다음화!"
"삼색, 빨리 돌려라."
[띠링]
그 때 초인종 소리가 방문자를 알렸다.
"꾸잉? 아..안 돼!"
"어허! 뭐가 안 돼야. 드라마는 나중에도 볼 수 있어."
"꾸이잉..."
"착하지."
카렌은 다음화로 넘기려는 삼색의 몸을 껴안아 가두고는 방문자를 확인했다.
"....쟤 또 왔어?"
.
.
.
[카렌! 나 왔어.]
강부장이야 요양 중이었고 올 사람은...역시나 이채린이었다.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채린이 해맑은 미소로 현관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카렌! 카렌!]
"알았어, 기다려. 과자 먹느라 손가락에 기름기 때문에..."
[괜찮아! 나 이거 비밀번호 알아!]
[삑, 삑 , 삑]?
"응? 쟤가 저걸 어떻게 알았지?"
?
현관문을 여는 방식은 두 가지다. 지문인식과 비밀번호 입력 방식.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채린이 거침없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난 지문인식 말고는 쓰지도 않는데?
채린이 들어와서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삼색에게 내밀었다.
"삼색아, 이거 수제 간식인데 먹어볼래? 이거 선착순으로 줄 서서만 살 수 있다?"
"꾸잉!"
삼색이 카렌의 품에서 유연하게 빠져나가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애교를 채린에게 보여주자, 카렌은 그제서야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찾았다. 범인."
"꾸이이잉"
카렌이 삼색의 볼을 두 손으로 잡고 쭈욱 늘렸다. 쫀득한 마시멜로처럼 늘어나는 걸 보니, 진짜 원래 고양이었다가 영물로 진화한 게 아닐까.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난 알려달라고 안 했다?"
"알아. 요놈이 간식가져다 주니까 쪼르르 말했겠지."
이놈의 요물고양이. 저번에 궁금해서 한 번 물어보니 기억이 날 때부터 영물이었다고 했었다. 그 전의 기억은 안개가 뿌옇게 낀 것처럼 기억이 안 난다고 했었나?
"왜 또 왔어?"
"치...내가 꼭 일 있어야만 오냐?"
채린이 볼을 부풀리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얘기는 다 들어주면서, 괜히 그래'
자신이 어떤 얘기를 해도 귀찮아하면서도 잠자코 들어준다.
'연상의 느낌인가? 그런데 가끔 보면 오빠를 넘어선 것 같아.'
"뭘 그렇게 들고 왔어?"
카렌이 채린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이거 먹자!"
터텅
비닐봉지를 바닥에 내려놓자 단번에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술이다. ?대체 얼마나 사온 거야?
"갑자기 웬 술이야. 운전은 어떻게 하고, 집에는 어떻게 가려고?"
"여기 방 많던데? 아무 데서나 자고 가면 되지!"
"안 돼. 어딜 외박을..."
"아! 진짜 가끔 얘기하다 보면 조선시대 사람 같아. 한 번만, 응?"
"무슨 일인데?"
평소에도 찾아올 때도 채린은 카페에서 음료만 시키지 술은 카렌만 마셨었다. 물론 가끔 술이 땡기는 날이 있겠지만 저건 너무 많았다.
"이 기사 좀 봐."
이채린이 자신의 워치에서 홀로그램으로 한 기사를 띄웠다. 1면에 올라온 기사인데 제목이 참 여러모로 대단했다.
[ (단독) 충격! ?왕춘 박사, 무소속 헌터에서 빌런까지! 무소속 헌터들 이대로 괜찮은가?!]
"...술 먹자."
카렌은 채린을 말릴 수가 없었다. 역시 아무리 박사의 은신처가 산속에 있었다지만, 하루 종일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데 완벽하게 숨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역시! 내가 이래서 널 좋아해."
기사가 말하는 무소속 헌터들의 대표가 눈앞에 있는 채린이다. 욕도 대표적으로 먹었겠지.
채린은 연합에서 유일하게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S급 독립 헌터인데,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말한 적이 없었다.
"난 오늘은 안 먹으니까, 잔은 하나만 가져와."
저 녀석이 올 때마다 술을 마셨더니 이제는 살짝 속이 느글거린다.
채린이 자신의 집처럼 능숙하게 부엌으로 가서 잔을 가져와 술을 따르더니, 먹이를 기다린 배고픈 새끼 새처럼 그냥 목에 들이 부어버렸다.
"....?"
"꾸잉?"
"크으으!"
말릴 새도 없이 계속 술을 따르고 마시고, 카렌이 안주도 꺼내 왔지만 채린은 손도 대지 않았다.
"?나쁜 새끼들! 내가 그렇게! 어? 비선호 게이트도 청소해주고! 연합 호출도 꼬박꼬박 나가니까 우습지?"
"힘들었겠네."
"같이 고생하는데! 신문에서는 길드 소속 헌터들만 맨날 잘했다고 해주고!"
"그런 놈들이야 맨날 그렇지."
"아니, 내가 칭찬받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가만히 놔뒀으면 좋겠다니까?"
"그래, 그래."
"많이 바라는 게 아니라 이딴 기사나 안 냈으면 소원이 없겠어."
"그게 당연하지."
사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크으으, 오랜만에 마시니 좋다."
채린이 말하는 도중에도 하마처럼 마셔대니 빈 술병이 벌써 몇개가 굴러다닌다.
'저거 전부 기본적으로 30도 넘는 술들 아니냐?'
'무섭다. 꾸잉'
카렌과 삼색이 눈을 마주치며 무언의 대화를 주고 받는 동안에도 채린의 잔은 빠르게 비었다가 차기를 반복했다.
"그러니까아~ 나를 절단의 마녀라고 하니까아~ 다들 미친년으로 본다고!"
원래 주량이 센지, 아니면 S급 헌터라서 센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버티긴 했다. 하지만 결국 술이 이겨서 이제는 채린의 피부색이 분홍색으로 변해버렸다.?
"이제 취했으니 그만..."
"그리고 너!"
"응?"
"너도 문제야, 너도!"
눈이 반쯤 풀린 채린이 고개를 꾸벅이다가 갑자기 카렌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씩씩거렸다.
"그...니까! 너두 그래! 어뜨케 아직까지 안 줘? 이..내가! 주눈데? 이 이채리니?"
지금껏 얘기를 못 했던 채린의 서운함이 술의 힘을 빌려 폭발해버렸다.
"뭘 안 줘?"
하지만 카렌의 말을 못 들은 듯 채린은 고개를 아래로 푸욱 떨궜다.
"...주인, 나는 이제 무섭다."
"왜, 귀여운데? 강아지 같지 않아?"
"주인, 취향 독특하다. 꾸잉."
삼색이 신기한 눈빛으로 카렌을 바라봤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저쪽 세계에서도 친구로 지냈던 사람들 중에 분야별로 뛰어난 사람들을 많이 봤지만, 눈 앞의 채린은 좀 다른 의미로 특이했다.
'그래도 꽤 큰 힘을 가졌는데도 저런 성격이란 말이야.
"
게다가 저쪽 세계랑 달리 지구의 힘 있는 각성자들은 좀 특이해서, 순식간에 강력한 힘을 갖게 된 이들이 많았다.
경험상 아무리 원래 착했던 사람이어도 힘을 가지면 좋은 의미로 변하긴 힘들었다.
'저런 순수함을 간직하기 쉽지 않지.'
물론 절단의 마녀라고 채린을 부르는 세간의 인식은 좀 다른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너...자꾸...그렇게해에에"
원래도 술 때문에 분홍색이었던 채린의 얼굴이 이제는 적발인 자신의 머리 색과 똑같아졌다.
'방금은 술도 안 마셨는데 왜 더 붉어졌지?'
이유를 찾고 있는 동안 채린이 뭐가 그리 분한지 카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 나빠!!"
"...이젠 나도 무서운데?"
귀여운 강아지가 갑자기 무서운 도베르만으로 변한 느낌?
진심이었다. 어떤 위협도 없었지만, 카렌의 본능이 몇십 년 만에 땡땡땡, 종을 치며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응? 뭘 일부러 그래?"
정말 몰라서 물었지만 채린은 주먹을 쥐며 분한 표정을 지었다.
"바람둥이!"
"???"
"...주인, 난 잠깐 나간다. 아까 카페에서 도와달랬어."
"야, 무슨 고양이가 카페를 도와. 야! 삼색!"
카렌이 다급하게 삼색이를 불렀지만 삼색은 어느새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고, 그가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자, 금방이라도 눈에서 불을 뿜을 것 같은 채린과 눈이 마주쳤다.
"술 깨는 음료라도..."
카렌은 본능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냉장고 쪽으로 도망가려 했지만, 뒤에서 들리는 채린의 음성에 얌전히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카렌, 잠깐 이리 와서 앉아 봐요."
"갑자기 웬 존댓말...."
"제가 매력이 없나요?"
"아니, 충분히 매력적이지. 능력도 있고 외모도 예쁘고."
이 말은 진심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도 채린 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거다. 수많은 사람들을 봐 온 내게도 손꼽히는 사람이다.
"근데 왜 번호 안 줘요. 훌쩍."
얘가 여기 오기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났는데... 그랬었나? 하도 많이 찾아와서 몰랐었다.
채린이 울먹거리자 카렌은 당황해서 재빨리 다가가, 스마트 워치를 채린의 손목에 갖다 대었다.
?
[띠링, 번호가 전송되었습니다]
"헤헤...이제야 받았네."
경쾌한 알림음이 들려오자 그제서야 채린이 자신의 워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사나운 맹견이 사라지고 귀여운 시골 강아지가 다시 꼬리를 살랑이는 것 같다.
"이름은 바람둥이."
[확인되었습니다. 바람둥이]
하지만 여전히 마음 속에는 앙금이 남았는지 소소한 복수를 하는 채린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는 카렌이 피식 웃었다. 조금 귀찮지만, 참 귀여운, 개 같은 사람이다.
'이건 욕인가?'
"이 미소는 반칙이야."
채린이 번호를 주느라 어느새 코 앞에 가까이 온 카렌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손을 뻗었다.
살포시 두 볼을 감싼 손에서 술 때문인지 열기가 느껴졌다. 시간이 멈춘 듯 두 쌍의 눈동자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채린의 입술이 열렸다.
"...뜨거워?'
"아니, 따뜻하다."
"아! 미안해, 까칠까칠할 텐데."
채린은 황급히 손을 떼었다. 항상 근접전을 요하는 능력 때문에 자신의 손은 항상 상처투성이에 굳은살 투성이었다.
평소에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지금은 숨기고 싶었다.
"아냐, 괜찮아. 멋있기만 하네."
하지만 뒤로 숨기려는 채린의 손을 카렌이 잡아 다시 앞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너 진짜 바람둥이지."
"아니라니까? 엄청 오래전에...아니다."
"그래도 우리 많이 친해졌지? 너 말투랑 행동 말이야. 처음에는 진짜 무뚝뚝한 아저씨 같았어. 지금도 좀 그러긴 하지만..."
"그랬나?"
"나야 잘 모르겠다. 맨날 같이 붙어있는 삼색의 말투를 닮아가나?"
"흐암"
아까부터 고개를 꾸벅거리며 불안하던 채린이 결국 하품을 하며 몸이 반쯤 기울어졌다.
자연스럽게 채린의 몸을 받아든 카렌은 자신의 허벅지를 채린의 머리에게 내주며 뒤에 있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잠깐만 누울 거거든? 이상한 짓 하면 죽어, 바람둥이."
"하...걱정 마."
S급 헌터에게 그런 미친 짓을 할 놈이 있나 싶었지만, 카렌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필요한 건 아직도 없어?"
카렌은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채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처음 만났었던 날의 약속을 언급했다. 뭐라도 들어줘야 이 녀석이 조금 덜 오지 않을까.
"필요한 거라..."
채린이 뭔가를 떠올리며 거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밤하늘을 보는 듯 아련하게 보던 채린의 눈에 살짝 물기가 고이며, 뭔가 말할 듯 살짝 입을 벌렸지만 끝내 열지 못했다.
'굳이 불편하게 만들 건 없어.'
채린이 생각하기에 카렌이라는 남자는 오빠 같은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해결방법이 없는 불행한 일은 분위기만 망친다고 생각했다. ?
"아니, 없어."
카렌은 채린이 망설이는 모습에서 뭔가 있구나 라고 눈치챘지만 굳이 캐묻진 않았다.
"그래, 언제든 말해."
그 말을 끝으로 둘의 입은 더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대화가 필요 없는 편안한 정적이 한동안 이어졌다.
[띠리링]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침묵은 채린의 워치에서 울린 소리에 깨어졌다.
"어?"
[아신병원]
?
워치에 뜬 발신지에 채린의 얼굴이 급변하며 몸을 일으켰다. 술기운 때문에 살짝 휘청거렸지만 카렌이 어깨를 잡아 주었다.
"여보세요? 혹시 재형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병원에서의 급작스런 전화는 누구든지 심장을 뛰게 만든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화속의 내용에 채린의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이재형 환자가 눈을 떴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