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140)

  본성

  "다 불태워 버려야겠어."

  기분 나쁜 곳에, 더러운 놈이 살았던 곳이다. 나는 모든 걸 태워버리기로 결정했다.

  음침한 분위기부터 괴상한 것들이 담긴 실험관들까지... 단 한 구석도 마음에 드는 곳이 없다.

  '어쩜 이렇게 주인을 닮았지.'

  너무 쉽게 죽였나... 내가 영혼을 다룰 수 있었으면, 놈의 피해자들과 같은 방에 수백 년을 넣어 줬을텐데 말이다.

  조선제약 사장을 불렀으니 곧 올 거다. 그동안 삼색이 카메라를 가지고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주인, 뭔가 있다!"

  그런데 저 구석진 방에서 삼색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뭐야?"

  삼색의 목소리를 따라가 보니 왕춘의 침실인 듯 침대 하나와 온통 어지럽혀진 방이 눈에 들어왔다.

  "청소도 안 하고 사나."

  더러운 속옷들과 옷들이 방에 이렇게 빈틈없이 방에 굴러다니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여기, 여기!"

  삼색이 왕춘의 침대 밑까지 흘러내린 이불을 위로 걷자 네모난 금고가 드러났다.

  콩, 콩

  앞발로 삼색이 쳐보니 문이 두껍진 않다. 나는 마침 들고 있던 철퇴로 문을 따기(?) 시작했다.

  "꾸잉, 강제로 문 열면 막 안에 있는 게 불타거나 그러진 않을까? 영화에서 보면 그러던데."

  "그러든가 말든가."

  돈이야 관심도 없고, 그냥 이 미친놈이 보관하는 게 뭔지 궁금했을 뿐이다.

  쾅, 쾅

  여러 번 잠금장치 쪽을 내리쳐 통째로 부숴버리기로 했다.

  놈도 그냥 보안을 위해 금고를 쓴 건 아닌 듯 강제로 열어도 별 문제가 없었다. 뭔가를 그냥 보관하는 용도에 가까워 보인다.

  '하긴, 여길 누가 몰래 들어 와서 훔쳐 가.'

  놈이 날 무시하고, 멍청하게 제발로 날 모셔오지 않았더라면 절대 못 찾았을 거다.

  '비밀통로도 있었고.'

  멍청하기 뿐만 아니라 오만하기까지 했다. 역시나 내가 헌터들을 끌고 올까 봐 놈의 바로 뒤에 산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비밀통로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뒤져버렸으니...뭐가 들어있는지나 볼까."

  끼이이익

  금고가 나름 오래 버티긴 했어도 끝내 철퇴 앞에서 수줍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뭐야, 종이들?"

  "꾸잉, 재미없다."

  뭐, 금덩이나 돈이라도 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서류만 잔뜩 들어 있었다.

  "어디 보자...음? 이건...죽이기 전에 물어볼 걸 그랬어."

  잠깐 읽어보긴 했는데...뭐 이상한 수식 같은 게 잔뜩 적혀 있다. 하나도 모르겠다.

  "일단 가지고 있도록 하고..."

  나는 금고 안에 있던 서류들을 목걸이 아공간에 모두 처박고 나자 조선제약 사장이 은신처에 들어왔는지 밖이 소란스럽다.

  "세상에.."

  사장이 왕춘의 연구실을 보자 경악하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다..."

  평소라면 감탄을 하든, 구경을 하든 시간을 줬겠지만, 이번에는 사장을 기다릴 기분이 아니다.

  "모두 불태운다."

  "음? 하지만 놈의 연구 중에는 괜찮은 것도 있을 수 있지 않겠나?"

  사장이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용납할 수 없는 실험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탈을 벗었기에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누가 무생물 대상으로밖에 못 쓴다던 순간이동 기술을 키메라들의 몸에 마석을 박아넣어 활용하겠나.

  '이 생체 데이터들을 제약 쪽으로 개발하거나, 다른 회사로 팔기라도 한다면?'

  자연스럽게 사장의 머릿속에서 굵직한 사업과 막대한 이익들이 무수히 떠올랐다. 이건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대박이다.

  "아니, 이런 연구는 애초에 싹을 잘라 버려야 해."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더라도, 고기가 조금이라도 썩으면 통째로 버려야 한다. 어설프게 도려냈다가는 또 금방 곰팡이가 피어난다.

  공적을 토벌하러 간 마법사들, 본인들이 정작 공적을 처리하고 나온 결과물들에 매료된 경우를 종종 봐온 내게 타협은 없었다.

  "너무 아깝지 않나. 인류의 발전을 위해..."

  "이딴 걸로 발전하느니 망해버리라지. 내 눈 앞에서 모두 불태워. 아니면 내가 직접하지."

  "하지만....알았네."

  다시 한번 설득해 보려던 사장은 내 굳은 표정을 보더니 이내 포기하곤 직원들에게 손짓했다.

  콸콸콸

  곳곳에 기름이 쏟아지고 나는 모두를 내보냈다. 그리고는 사장에게 건네받은 라이터를 던지고는 밖으로 빠져나왔다.

  참 빌어먹게도 기분 나쁜 곳이다.

  * * *

  "음료중에 쓴 거 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이름이 뭐였지?"

  카페의 점장 오영준은 갑자기 들어온 사장의 예상하지 못한 주문에 당황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갑자기 어디론가 갔다 오시더니 평소랑은 분위기가 좀 달랐다. 특유의 여유로움은 여전하지만 살짝 화가 나신 것처럼 보인다.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 중 어떤 걸 드시겠습니까?"

  "최대한 쓴걸로."

  "알겠습니다."

  영준이 자신이 직접 불에 로스팅한 원두를 꺼냈다. 로스팅 시간에 따라 커피의 맛이 극명하게 갈려, 혹시 카렌이 주문할까 봐 모든 단계의 원두를 미리 볶아 숙성시켜 놓았다.

  '이걸 실제로 만들 줄은 몰랐는데.'

  요즘은 거의 쓰지 않는 단계의 로스팅이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더더욱. 자신도 만들긴 했지만 실제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위잉?

  이탈리안 로스팅식으로 원두를 ?볶아 색이 가장 검은색에 가깝다. 원두를 기계에 넣자 곧 검은색 액체가 흘러나왔다.

  "커피 나왔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커피보다는 먹물의 색에 더 가까웠다.

  카렌은 조그마한 잔에 나온 커피로 살짝 입술을 축였다. 최상급 커피콩과 꽤 괜찮은 바리스타의 실력이 조화를 이뤘지만...

  "쓰네."

  처음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쓰다가, 뒷맛이 다시 돌아와 묵직하게 여운을 남긴다.

  "죄송합니다. 원하신다면 다시 아메리카노나 우유를 살짝 타서 카페라떼로..."

  "아냐, 죄송할 게 뭐 있어. 쓴맛을 느끼려고 마시는 거지."

  후르륵

  카렌은 작은 잔에 담긴 커피를 한 번에 들이마셨다.

  과연, 색깔만큼 쓰리다.

  '더러운 기억이 떠올라.'

  내가 벨리알에 있을 때. 균형을 때문에 생겨난 대적자 중에는 왕춘 같은 놈도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

  [네가 있기에 대적자도 있다]

  신이 한 빌어먹을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동시에 키메라들을 죽일 때의 감정 또한 떠올랐다.

  '왜 그랬지.'

  원래라면 그냥 손 하나 안 대고 더 빠르게 죽일 수 있었다. 놈들이 순간이동으로 내 방어막 안으로 들어와서?

  '말도 안 되는 핑계지.'

  그래봤자 신체를 강화하고 뒤로 물러나면서 다시 방어막을 생성하면 그만이다. 왜 굳이 철퇴를 들었을까.

  '화났었나.'

  왕춘에게 도발 당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분노. 남에게 향하는 분노가 아닌 나를 향한 감정이다.

  철퇴는 키메라가 아닌 스스로에게 휘둘렀고, 굳이 뒤집어 쓴 피는 내 짜증이다. 아니, 죄책감에 더 가깝나.

  "주인, 괜찮냐?"

  삼색이가 건너편에서 어울리지 않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저 녀석이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네.

  "난 놈들이 악당인 줄 알았다."

  키메라를 벨리알에서 처음 만든 미친 마법사놈, 나 때문에 생겨난 대적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마지막 마왕놈처럼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목숨을 걸만한 상대였지.

  [죽...여...]

  왕춘의 키메라들은 애교로 보일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키메라 수와 그 강함. 놈은 마을 단위의 병력으로 시작해서 점점 세력을 넓혀나가, 끝내 왕국을 모두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악당이었어."

  신을 만나 얘기하기 전. 대적자의 존재조차 모를 때.

  난 모두를 구할 생각도, 의욕도 없었다. 그 마법사놈이 왕국 하나를 멸망시켜도, 세력을 넓힐 때도,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놈은 결국 내가 다스리는 왕국을 침공했고 나는 그때서야 나섰다.

  "영웅 같은 고귀함은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지."

  하지만 최소한 나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았어야 했다.

  "꾸잉, 주인 멍청하다."

  "뭐?"

  "벨리알로 갑자기 간 것도 주인 잘못이 아니고, 강해진 것도 살기 위해서였다."

  오늘 삼색의 다양한 표정을 많이 본다. 아까는 걱정, 지금은 씩씩거리며 화를 내고 있었다.

  "대적자? 그게 지 멋대로 나타나는데, 주인이 어떻게 하냐. 우린 인간이다."

  아니, 넌 인간이 아닌데...하지만 지금 그 얘기를 꺼냈다간 삼색이 내 얼굴을 할퀴겠지.

  "인간은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칠뿐이다."

  "후우..."

  천장을 올려다 보며 가슴을 쭈욱 피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방금 마신 커피의 쓴맛이 숨에 섞여 밖으로 나온다.

  "그래, 난 신이 아니지."

  한때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또 다른 대적자가 나타나면서 그 오만함은 내 사랑하던 것들과 함께 산산히 부서졌다.

  "가자. 커피 잘 마셨어."

  나는 삼색의 머리를 거칠게 문지르며 안아 들었다. 예전보다 확실히 사이즈가 커져서 그런지 슬라임처럼 물렁하다.

  "꾸잉! 주인이 청승맞게 구는 이유는 내가 찍은 영상에서 확인해라."

  삼색이 내 품에 안겨 자신의 손목을 툭툭 두드리며, 영준에게 워치를 확인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 영상을 보냈어?"

  "바리스타도 주인 부하 아니냐?"

  "맞지. 잘했다."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F등급이었던 녀석들이 벌써 D급으로 올랐다. 물론 등급이 아직 낮아서 성장이 빠른 것도 있겠지만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속도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가냐?"

  "강부장 병문안 가야지. 아! 넌 고양이라 병원에 못 가지. 게다가 살쪄서 몰래 들어가지도..."

  "주인!"

  둘이 나가고 카페에 남은 영준과 친구는 삼색이 보내 준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제서야 카렌의 심정을 조금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더 강해져야 해."

  카렌에게 말할 타이밍을 놓치긴 했지만, D급을 달성한 뿌듯함에 잠시 마음을 놓고 있었다.

  '언젠간 옆에 설 수 있기를.'

  둘은 품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통을 꺼냈다. 카렌이 준 작은 알약들, 마력환.

  꿀꺽

  "가자."

  둘은 동시에 마력환을 삼키고는 운동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직 가시지 않은 더위가 둘을 반겼다.

  *

  *

  *

  "아이고, 카렌님!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누워있어. 몸도 안 좋은데."

  강부장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내가 억지로 어깨를 잡아 다시 눕혔다.

  "저는 정말 괜찮은데, 계속 입원시킵니다. 카렌님이 병원이랑 사장님한테 좀 말씀해 주십쇼."

  실제로 강부장이 다친 곳은 없었다. 다만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와 긴장 때문에 근육이 엄청 경직됐을 뿐이다.

  '그럴 만하지.'

  남들은 평생 뉴스에서나 볼 납치를 당해 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게다가 키메라들과 한 방을 쓰기까지 했으니.

  "강부장, 지금까지 수고했어."

  "네?"

  강부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내 말 뜻을 눈치채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카렌님과 계속 함께 갈 겁니다."

  "제조법은 걱정 마. 조선제약에 B급까지 50% 제조법을 주도록 하지."

  "필요 없습니다."

  "뭐?"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동안 낮은 등급의 포션과는 달리, B급 포션이면 조선제약은 헌터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그걸 가져온 강부장은 그야말로 회사의 일등공신이 될 수 있을 터.

  '이걸 거절해?'

  "그딴 것보다 카렌님과의 인연이 더 소중합니다."

  "무슨..."

  "솔직히 처음에는 마음으로는 고마움 반, 비즈니스 반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제 제 목숨을 구하러 오셨잖습니까."

  "나랑 같이 있으면 오늘 같은 날이 더 생길 수도 있어."

  "그럼 카렌님이 지켜주시면 되겠네요."

  강부장이 날 보며 싱긋 웃었다. 근육통이 좀 있는지 조금 억지스러운 웃음이었지만 내 눈에는 전혀 우스꽝스럽지 않다.

  "그리고 카렌님 잘못 아닙니다."

  "나 때문에 그 미친놈이 온 거야."

  "미친놈이라, 미쳐서 온 겁니다. 그럼 그 놈이 나쁜놈이죠. 카렌님은 절 구해준 착한놈...아니, 죄송합니다. 착한분이죠."

  "하하하"

  아까 마신 커피의 향이 모두 가셨는지 쓴맛이 웃음을 타고 오지 않았다. 이제 좀 괜찮아졌다.

  "그래도 제조법은 줄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카렌님, 저 이제 강부장 아닙니다."

  "응? 그럼 뭔데?"

  "방금 사장님이 와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절 이제부터 ?강이사라고 불러 주십쇼."

  "축하한다. 강이사."

  "그래도 이사건, 전무건, 사장이건. 만약 카렌님이 부르신다면 언제든지 달려 가겠습니다."

  그래, 세상은 이제 내가 지킬 필요가 없다. 원래 내 성격대로 조금 이기적으로, 주변만 보며 살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