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유서깊은 그 단어
"회장님,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뭐?"
굴지의 대기업, 대한그룹의 총수인 회장, 이강철의 미간이 예상치 못한 수하의 보고에 구겨졌다.
"예상을 못해? 너네가?"
놀라운 일이다. 수는 적었지만, 회장은 자신의 숨겨진 그림자들을 어떤 의미에서는 자식보다 믿고 있었다. 그런 친위대가 실수를 하다니?
"죄송합니다."
"아니야. 놀라워서 그래. 대체 무슨일인데 그런거야?"
일처리에 대한 분노보다는 궁금증이 먼저 앞선다. 오랫동안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은 녀석들이니, 뭔가 이유가 있을 거다.
"저번에 멀리서 지켜보라고 하신 연금술사, 카렌에 대한 일입니다."
"후...또 그 놈이야?"
회장은 아직도 그 놈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최근에 이렇게 대한이 무시당한 적이 있을까. 그것도 세력이 아니라 일개 개인에게 말이다.
"언론 녀석들, 입 좀 다물게 하느라 힘들었지."
어떻게 알고 냄새를 맡았는지 기자놈들이 코를 킁킁거리는 걸 온 힘을 동원해 간신히 막았다.
게다가 더욱 열받는 건, 과연 놈이 자신의 아들에게 쓴 액체의 정체가 전염병인지 아닌지, 확인되기 전까지는 건드릴 수조차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특별한 일이 생길 수가 있나? 일단 당분간 지켜보라고만 했잖나. 틈 생기면 몰래 찔러보고 말이야."
"예, 말씀하신 대로 찔러 봤지만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했길래?"
"왕춘 박사에게 자신보다 카렌이라는 놈이 뛰어나다고 몰래 정보를 흘렸습니다."
여러 단계를 거쳐 정보를 은근히 흘려 오만한 놈의 질투심을 자극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놈의 행동은 자신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버렸다.
'놈이 설마 헌튜브로 그런 짓을 할 줄이야.'
자신들이 건드릴 수 없는 몇 곳, 그 중 하나가 헌튜브다. 거길 이용한 순간부터 자신들의 손을 떠나 버렸다.
"두 또라이 놈들이 나란히 말썽이군, 젠장."
회장은 자신의 의자를 뒤로 깊게 기울이며 탄식했다. 하지만 무작정 그림자들을 문책할 순 없었다.
사실 좋게 말해서 왕춘'박사'지 그냥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치광이다.
"어쩔 수 없지. 그 놈을 예측할 수 있는 놈은 세상에 없어. 그래서 어떻게 진행됐어? 원래 의도는?"
"왕춘의 질투심을 자극해 둘을 경쟁시킬 생각이었지만... 왕춘이 조선제약을 습격했습니다."
애초에 이렇게 둘을 정면으로 붙일 생각이 없었다. 원래 목적은 간단했다.
과연 카렌이라는 자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혹 숨겨진 뭔가가 있는지, 둘을 경쟁시켜 떠볼 생각이었다.
"아니, 잠깐만...오히려 좋을 수도 있어."
생각해보니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회장의 눈이 번뜩였다.
"우리가 정보를 흘렸다는 증거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수십 단계를 거쳐서 절대 못 알아낼 겁니다."
"좋아. 언젠가는 왕춘 놈도 처리하긴 해야 됐어."
자신과 그림자들 말고는 아무도 모르지만 대한제약을 설립할 때 딱 한 번 왕춘놈과 거래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놈이 준 자료 덕분에 신약을 개발해서 치고 나갔지.'
아무리 대한이라도 낯선 제약시장에서 후발주자로 시작하긴 어려웠다. 그 때 놈이 들고온 게 획기적인 항염제였다.
그 항염제를 바탕으로 관절약, 천식 등 많은 분야로 뻗어 나가며 비로소 대한제약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건방진 놈들.'
한 놈은 주제도 모르고 거래를 빌미로 지속적으로 돈을 요구하고, 또 다른 놈은 감히 대한에게 겁도 없이 싸움을 걸어 왔다.
"둘 중 누가 싸우든, 한쪽이 죽어주면 고맙지. 두 놈 다 죽어주면 그보다 좋을 게 없어. 그냥 놔둬, 아무것도 하지마."
"알겠습니다."
"흐하하하, 일이 이렇게도 풀리는구만."
앓던 이가 빠진 느낌에 회장은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었다.
"이게 손 안 대고 코 푼다는 거군."
* * *
조선제약에서 준비한 비행기 안, 우리는 철저하게 정보를 숨긴 채 놈의 은신처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나이는 96세, 본명은 왕춘이 맞고, 옛날 중국 출신이네."
조선제약 사장이 놈에 대한 정보가 있는 보고서들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가장 놀란 부분은 놈의 나이였다.
96세라니, 나잇값도 못 하는 건 둘째치고, 많아 봐야 60에서 70세 정돈 줄 알았더니 생긴 건 진짜 동안이다.
"이상한 사상에 찌들어 있는 괴짜 과학자라고 알려져 있네. 본인의 목표는 '진나라를 되살리자'고 본인은 진시황제가 되는 게 꿈이라더군."
"...진짜 미친놈이네."
대격변 이후 국가 개념이 사라진 지가 언젠데 저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다니, 게다가 중국도 아니고 진나라? 통일된 지 얼마 안 돼서 망하지 않았나?
"워낙 헛소리를 해대고 미친짓을 많이 해서 중국 출신들도 싫어하는 모양일세. 덕분에 그 놈을 죽여도 그쪽이랑 충돌은 없을 거야."
"하! 누가 좋아하겠어?"
"헌터협회에서 설정한 빌런 등급은 A등급이지만, 정확한 정보가 없어 그쪽에서도 확실하지 않다는구만."
엄밀히 말하면 지금까지 왕춘이 직접 나서서 싸운 기록이 없었다.
보통 하수인들이 나타나거나, 이상한 실험체가 돌아다니고, 상식 밖의 일어나면, 보통 또 왕춘놈의 짓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대부분 맞았다.
[5분 뒤 목표 지점에 도착합니다]
비행기의 안내방송이 나오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 진짜 괜찮나? 지금이라도 지원을..."
"필요 없어. 인질들도 있는데 뭘 어쩌게, 사람들 입단속이나 잘 시켜."
사장의 걱정을 나는 단번에 일축시켰다. 애초에 선택지가 없는 일이다. 깔끔하게 나 혼자 가서 처리하는 게 낫다.
"그건 걱정말게,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놈이 그 이상한 빛과 함께 도망치면? 막을 대책은 있지?"
"그것도 걱정말게. 마력 간섭기를 자네가 내리자마자 근처에 투하할 거니까.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저번처럼 도망 못 치네."
간섭기로는 각성자의 직접적인 마력 통제는 아직 힘들지만 순간이동 같은 예민한 능력을 방해하기엔 충분했다.
가장 큰 문제는 갓 개발된 물품이라 수량이 매우 적고 비싸지만, 그 문제는 사장의 인맥과 웃돈을 주고 해결했다.
?
'기술은 참 좋은 놈인데.'
영상에서 괴한들이 빛과 함께 나타나는 모습을 본 모두가 경악했다.
택배처럼 물체를 전송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저렇게 이동시키는 기술이 현재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산 밑에 설치했다가 자네가 진입하는 동안 점점 더 좁혀가겠네. 대신 간섭기 범위 내부에서는 순간이동이 가능할 거야."
"좋아. 그 정도면 충분해. 잘했어."
"우리 직원이 납치당했는데,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
처음 볼 때의 인자한 모습은 어디가고 사장의 목소리가 분노로 살짝 떨리는 게 느껴진다. 하긴 이 양반도 나 못지않게 열 받았을 거다.
'나도 황당했는데, 사장은 더 하겠지.'
나야 당사자이지만 조선제약 입장에서는 갑자기 웬 미친놈이 주먹을 날리고 사라졌으니 황당할 거다.
[졸부지만 용기가 있구나. 어서 오거라]
삼색이 쪽지로 내가 처음 만들었던 F급 포션의 거래내역을 인증하자, 놈은 자신이 있는 위치를 쪽지로 보냈다.
[삼군산]
과연 지금껏 아무도 놈을 못 찾을만 했다. 놈의 은신처는 출신답게 옛날 중국 쪽이었으니까.
대격변으로 옛날 중국 쪽의 땅이 줄어들긴 했어도 여전히 넓고, 산 수십 개가 모여있는 장소에 숨었으니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끝나면 신호할 테니, 데려갈 준비나 하고 있어. 혼자 갔다 온다."
놈의 성향은 모르겠지만 여럿이 가면 놈이 예상치 못하게 도주할 수도 있었다. 그럼 좀 많이 귀찮아진다.
"꾸잉, 나도 가고 싶다."
"네가? 그러든가."
어차피 뭐가 나오든 상관없다. 혼자 오라고 했지만 설마 한마리 더 데리고 간다고 겁먹진 않겠지.
[목표지점 도착. 개방]
안내음과 함께 군용 수송기를 개조한 비행기의 후측면에 있는 개폐구가 열렸다.
"저기 이거.."
직원 중 한 명이 내게 낙하산을 건넸지만 고개를 저어 거절하고는 삼색을 어깨에 얹었다.
"잡고 있어."
그리고는 축구공 모양으로 실드를 원형으로 만들어 내 주위를 감싸고는 망설임 없이 뛰어 내렸다.
"와! 주인! 날고 있어."
막대한 마력이 들어가는 무식한 행동이지만, 어차피 온갖 진귀한 약초들을 먹어치워 몸 안에 쌓인 마력이 산더미니 상관없다.
우리는 여유롭게 하강해서 놈의 은신처가 있는 산 밑에 착지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간섭기 설치를 슬슬 하겠지.'
굳이 산 밑부터 천천히 올라가는 이유다.
"후아, 공기 좋은 곳에서 사는데 왜 하는 짓은 그 모양일까."
나무가 많아서 좋네. 주변에 작은 숲이라도 만들어 볼까.
"주인, 탈래?"
삼색이 자신의 몸을 성체 호랑이 수준으로 키웠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커진 모습을 참 오랜만에 본다.
"너, 영물 맞았네. 요물 고양이가 아니었어."
"주인!"
"그래, 타자."
삼색이 내가 타기 좋게 엎드리자 나는 살짝 뛰어 등에 올랐다.
"오, 진짜 좋은데? 말보다 훨씬 편해."
벨리알에서는 아무리 좋은 안장과 말을 타도 엉덩이가 아팠는데, 무슨 마시멜로에 앉은 느낌이다. 게다가 털도 부드러워서 천연 쿠션이 따로 없다.
"꾸잉, 주인이라 태워 주는 거다! 처음 태워 보는 거라구."
"그래, 그래. 영광이다."
삼색의 표정을 보니 전혀 힘들어하는 것 같지도 않고, 주변의 시선만 아니면 평소에도 집 주변에서 타고 다닐 텐데... 좀 아깝다.
"근데...너 좀 살찐 거 아니냐?"
평소에는 작아서 몰랐지만 처음 구덩이에서 본 삼색의 모습과 비교해서 좀 불어난 느낌이다.
"...요즘 많이 먹긴 했다."
삼색도 잠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더니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맛있는 게 너무 많다.'
자신이 직접 먹을 걸 시키다 보니 절제가 안 된다. 츄르를 물처럼 먹고 심지어 요즘에는 강아지 사료도 맛있어서 주체를 못 하겠다.
'고양이 사료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너, 그러다 솜뭉치처럼 굴러다닌다."
"꾸잉! 운동할 거다. 그런데 주인 나 뭐 하나만 해도 되나?"
"뭔데?"
역시 이렇게 살찔 정도로 하루 종일 빈둥대던 이 녀석이 갑자기 따라온다고 한 이유가 있었다.
"나 촬영하고 싶다!"
"안 돼. 너 그 인터넷 방송 10만 명이나 뭐 한다며."
"팔로워는 보는 숫자가 아니다."
"그래도 안 돼."
"방송이 아니라 촬영이다! 누구한테 보여주는 게 아니다."
"응?"
"요즘 취미생활로 사진이랑 영상을 찍고 있다."
호오? 하긴 이 녀석이 요즘 방송을 시작으로 그런 쪽에 관심이 많긴 했다.
"찍어서 뭐하게?"
"요즘 편집을 연습해서 원본이 필요한데, 이 일이 딱 맞다."
"그래, 뭐 그 정도야."
누구한테 보여주지만 않으면 괜찮다. 내가 알았다고 하자 삼색이 재빨리 워치를 누른다. 카메라가 삼색의 머리 위에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주인 이거 봐라, 새로 산 방송용 워치다! 화질도 일반형보다 좋고, 촬영시간도 길다."
"그래, 그래."
삼색과 수다를 떨다가 어느새 산 중턱쯤 올라오자 슬슬 놈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등산도 여기까지다.
"이제 놈 얼굴 좀 보러 가자. 삼색, 저번에 이럴 때 쓰는 말이 뭐라 그랬지?"
이리 오는 도중에 삼색이 한국에서 역사가 깊은 단어라고 알려 준 단어가 있다.
"현피."
"그래, 현피 뜨러가자."
"꾸잉, 요즘 사람들이 쓰는 최신 단어도 있다."
"뭔데?"
"참교육시키러 간다."
그래, 뭐가 됐든 빨리 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