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140)

  이상한 나라의 박사

  [소리 못 질러? 손 치우란 얘기도 못 해?]

  우리는 손에 쥔 음료도 마실 생각을 못 하고 드라마에 집중하고 있었다. 베를린의 연인, 최고 시청률 51.5%를 찍은 역대급 드라마다.

  여주인공이 파티에서 사람들에게 무시 당하자 남주인공이 손을 끌어 당기며 파티장에서 나왔다.

  [마음 같아선 소리지르고 싶었죠! 근데 그 사람 당신 친구잖아요...]

  여주인공의 눈이 그렁그렁 해지며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그 모습을 보며 남자주인공은 되려 더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나는 당신 생각해서 참은 거라구요]

  [참아도 내가 참아!]

  "꾸잉, 연기력 미쳤다."

  우리는 모두 감탄했다. 비록 오래된 드라마라 헤어스타일이나 복장 등이 좀 촌스러운 감이 있지만, 배우들의 연기력이 모든 걸 씹어 먹고 있었다.

  [저 남자가 내 사람이다! 저 남자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하냐고!]

  "크으으으"

  박력 넘치는 남자 주인공의 외침에 우리는 동시에 소파를 가볍게 손과 앞발로 쳤다. 저게 드라마지.

  [이 꼴을 하고서 어떻게 그래요! 저런 사람들 틈에서 내가 어떻게 그래요]

  울음섞인 여주인공의 말에 남자 주인공은 말문이 막혔다. 평생 상대방의 자리에 서 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내 자존심 세우자고 당신 망신 줄 순 없잖아요]

  "맞지. 그럴 수 있지."

  "꾸잉? 주인이 그걸 어떻게 아냐."

  "내가 처음부터 이런 줄 아냐? 나도 밑바닥부터 시작했어."

  심부름꾼, 약초 판매, 포션 판매, 그러다가 능력이 쌓이면서 점점 신분이 올라갔지.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 경우에는 남녀가 뒤바뀌긴 했어. 공주였지."

  "꾸잉? 그건 좀 신기하다."

  드라마의 치정 싸움은 왕궁 안에서는 애교로 보일 정도다. 진짜 숨겨진 독과 칼이 매일 날아다녔으니까.

  "오?"

  그 때 울먹이는 여주를 향해 가만히 있던 남주가 뚜벅뚜벅 걸어가 양손으로 볼을 잡았다. 그리고는...

  "꾸오오오"

  삼색이가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저게 술 취한 아저씨야 영물이야.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키스를 하고 둘은 사르르 눈을 감았다. 달콤한 키스와 볼을 타고 흐르는 짭짤한 눈물이 동시에 화면에 잡히면서 OST가 흘러 나왔다.

  [넌 알고 있니, 난 말야, 너의 하얀 웃음이~ ]

  그렇게 둘의 키스 장면을 끝으로 드라마가 한 편 끝나고 나고 우리는 술 마신 아저씨 같이 목 긁는 소리를 내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크으으으, 좋다."

  "역시 역사에 남은 드라마는 달라."

  "근데 주인 뭐 하나 물어봐도 되냐?"

  "뭔데?"

  "이채린이라는 여자 인간이랑 방금 본 주인공들처럼 언제 키스할 거야?"

  나는 이어진 삼색의 질문에 먹던 딸기라떼를 뿜을 뻔했지만 간신히 직전에 입을 다물어 지켜냈다.

  "무슨 소리야? 걔가 나랑 왜?"

  "꾸잉, 인간들은 자주 만나면 사귀는 거 아니냐?"

  "그건 드라마고. 너는 그...무슨 인터넷 방송한다는 놈이 그것도 몰라?"

  "그래도 그 이채린이 너무 자주 오는 거 아닌가? 며칠에 한 번씩 오는데?"

  "그래? 그렇게 많이 왔어?"

  그러고 보니 채린이 올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술을 사온다. 문득 구석에 작은 산처럼 쌓여 있는 술병을 보니 많긴 많았다.

  "듣기로는 하는 일이 많아 굉장히 바쁘다고 했다. 심지어는 밤늦게 일 끝나고 꼬박꼬박 오는데, 뭔가 이상하지 않냐."

  "그럴 리가 없어. 이채린처럼 S급 헌터쯤 되면 그냥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오는 거지."

  만약 뭔가가 이상했다면 내가 알아차렸을 거다. 와서 오늘 일이 힘들었다는 둥, 여동생이 열받게 한다는 얘기밖에 안 한다.

  '그냥 어디다 말하면서 풀 곳이 필요한 거지.'

  나야 저쪽 차원인 벨리알에서 있던 얘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구에서는 거의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 거의 들어주기만 해서 그런 느낌은 못 받았다.

  "그런 분위기는 없어. 너도 맨날 옆에 있어서 보면 알잖아?"

  "꾸잉, 그런가? 하긴 드라마처럼 극적인 그런 분위기는 없긴 했다."

  삼색도 영물이고, 인간의 연애를 해본 적이 없으니 주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근데 느낌으로는 요즘 채린이라는 인간이 좀 기분이 안 좋고 화난 것 같기도 했는데... 역시 기분 탓인가 보다.

  '역시 주인은 똑똑해.'

  "여동생이지, 여동생."

  "그래? 주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띠링]

  "응?"

  삼색의 워치에서 알람이 울리고 알림창을 누르자 1위에서 ?10위까지의 차트 순위가 쭉 떠올랐다.

  "주인! 실시간 헌튜브 순위 중에 재밌는 게 올라왔다."

  알람이 울렸다는 얘기는 세계 최대의 동영상 플랫폼, 헌튜브 차트 실시간 10위안에 새로운 실시간 영상이 진입했다는 의미였다.

  "그건 또 뭐야, 넌 진짜 별걸 다 하냐."

  "꾸잉, 인터넷 방송도 트렌드를 따라가야 한다."

  전세계적인 규모의 플랫폼이라 수많은 사람들이 경쟁하지만 과연 이 스트리밍은 제목부터 남달랐다.

  [진노한 본좌는 같잖은 연금술사를 찾는다]

  "무슨 연금술사 어쩌구가 올라왔는데?"

  "그래?"

  연금술사라고? 그러고 보니 지구에 와서 도통 연금술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다지 인기가 없단 얘긴데, 저런 제목이라니?

  내가 흥미를 보이자 삼색이 워치를 TV에 연결해서 영상을 틀었다.

  [본좌는 세계 최고의 과학자 왕춘이라고 한다]

  "오, 도발적인데. 말투를 보니 옛날 중국 출신인가?"

  외눈 안경을 쓰고 흰 가운을 입은 노인이 나오면서 하는 말이 처음부터 흥미를 끌었다. 저렇게 자신감 넘치는 놈은 또 오랜만이네.

  "꾸잉, 과연 10위 안에 들어갈 영상이다. 저런 걸 배워야 한다. 저런 걸 상급 어그로라고 한다."

  "...가끔 널 보면 이렇게 적응을 잘하는데, 영물이 왜 거의 사라졌는지 잘 모르겠다."

  "꾸잉, 주인도 노력해라. 내가 운으로 오랜 세월 눈치 보면서 살아온 게 아니다. 꾸잉"

  이 녀석은 이걸 또 칭찬으로 생각하네.

  [최근 불경한 소식이 내 귀를 더럽혔다. 이에 본좌는 통탄을 금치 못하겠도다]

  "저 노인, 좀 많이 특이하네."

  "꾸잉, 요즘에는 저런 걸 컨셉이라 그런다."

  ?

  [어디서 운 좋게 알량한 지식을 가진 놈을 찾고 있다]

  "그 헌튜브란 것도 참 특이하네. 진짜 저런 놈이 나와서 말하는 게 인기야?"

  내가 진짜 오래 떠나 있긴 했는지 요즘 사람들 감성을 잘 이해를 못 하겠다. 그래도 시대가 바뀌니 적응해야겠지.

  "아무 영상이나 올려도 못 건드리니 저런 게 자꾸 올라와 신선하다. 경매장이랑 똑같다."

  대체 운영자들 정체가 뭘까, 전세계에서 기를 쓰고 찾았지만 아무도 꼬리조차 잡지 못했다.

  [본좌를 능멸한 놈은 D, F급 50% 포션을 만든 새끼...아니 놈이다. 크흠]

  그래, 삼색의 말대로 뭔가 어설픈 게, 진짜가 아니라 컨셉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저 놈이 얘기하는 이야기들이 뭔가 익숙한데?

  ?

  "주인 얘기를 하고 있는데?"

  삼색이 또 친절하게 해준 확인 사살까지 해준다.

  ?

  [세간에서는 짐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한테 밀린다고 헛소리를 하는구나. 이에 자웅을 겨룰 것을 요청한다. 내 계정으로 쪽지를 남기거라]

  "어떡할 거냐, 주인?"

  "무시해. 귀찮게 저런 걸 왜 받아주냐. 좀 시간 지나면 돌대가리라 잊어 먹겠..."

  [그리고 감히 천한 것의 포션을 판매하고 있는 조선제약에 징벌을 내리겠노라]

  "....."

  웬 미친 소리에 갑자기 짜증이 팍 밀려오면서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하는 놈이야, 저거?"

  "여기, 이거 봐봐. 주인."

  삼색이 화면 옆에 실시간 댓글을 옆에 띄웠다.

  [우리 미치광이 왕춘 박사님, 이름값 하신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꿀잼 ]

  [ 헌터는 뭐하냐? 저런 빌런 안잡고? ]

  [ 헌터는 게이트 막으러 다니기 바쁜데 어떻게 막음 ]

  [ ㅈㄹ 지들 돈 벌러 다니는 거지 ]

  [ ㅇㅇ 맞음. 걔들이 시민들 생각이나 함? 연합이고 헌터협회고 다 길드의 개들임]

  [ 어떻게 밤낮으로 노력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소리를 하냐?]

  [ 응~헌터등장 ]

  [ 응~ 내 위 방구석 백수~]

  역시나 영상도 제정신이 아니다 보니, 길을 벗어나 우주로 가고 있는 정신 나간 실시간 댓글창이다.

  "보니까 왕춘이라는 빌런이다, 꾸잉."

  순식간에 올라가는 댓글들 속에서도 삼색이 익숙하게 정보만 쏙쏙 골라내서 알려줬다.

  "빌런이라..."

  빌런이라고 해도 거창하진 않고 간단하다. 연합의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 즉 그냥 범죄자다.

  정말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빌런으로 불리는 이들도 있었고, 저 미친놈처럼 빌런 그 자체인 놈들도 있다.

  [띠리리링]

  "또 뭐야?"

  이번에는 내 워치로 전화가 왔다. 발신인을 보니 강부장이다. 오늘 무슨 워크샵인가 뭔가 한다 그랬는데?

  "카렌님! 혹시 헌튜브에 올라온 영상 보셨습니까?"

  과연, 바깥에 있는데도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오다니, 이 영상에 대해 관심이 뜨겁긴 한가 보다.

  "지금 봤다."

  "카렌님은 조금도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저희 협력 길드도 있고, 용병도 고용하면 충분히 막습니다."

  그래, 이렇게 강부장이 얘기하는데 굳이 저런 저급한 놈이랑 싸워줄 필요는 없지. 놈이 뭐라고 떠들던 그냥 집에서 드라마나...

  [들어보니 연금술사라는 하층민이라고 들었다. 어디서 이런 출신도 근본 없는 저급한 놈이 나타났단 말인가]

  놈은 스스로의 연설에 취했는지 몸을 들썩이면서 두 손을 휘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본인은 멋있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그냥 수영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 물에서 허우적대는 것 같이 보인다.

  [문제는 근본이다. 하찮은 조공국 뿌리의 민족 출신답게 과연 천하기 그지없도다]

  "저희는 걱정 없습니다. 카렌님."

  [통재로다. 더러운 씨를 잘못 뿌린 조상의 잘못이겠지. 어디서 훔쳐 온 제조법으로 득세하는 졸부의 마음은 참 가여우나, 짐도 체면이 있다]

  그런데 이 놈이 말하는 게 뭔가 좀 심상치 않다. 점점 말의 수위가 올라가며 삼색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

  "카렌님? 듣고 계십니까?"

  [짐이 자비를 베풀어 애송이는 살려줄 것이다. 다만 짐이 그 더러운 씨가 퍼지지 못하게 막아 세상에 득이 되게 할 것이다. 얌전히 잘리거라]

  놈이 손으로 가위 모양을 만들면서 자르는 듯한 시늉을 한다. 내시로 만든다는 얘긴가?

  으드득

  "주..주인?"

  너무 오랜만에 이런 도발을 받아서 그런가? 이가 절로 갈린다.

  "저 새끼가 유일하게 잘하는 게 하나 있네."

  "...주인? 괜찮냐?"

  "사람 빡치게 하는 실력은 확실하네."

  저딴 말을 저런 놈한테 듣고 안 빡치면 그게 식물이지 사람이냐.

  "주인. 심호흡, 심호흡. 숨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후우...후우..."

  삼색이가 시킨 대로 들숨 날숨을 크게 내쉬다 보니 빠르게 진정 되었다. 그래, 저런 저급한 도발에 걸려들 수는 없지.

  "시도는 좋았다."

  내 안정된 모습을 보고 삼색도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부장. 알아서 하라고 사장한테 전..."

  [콰아아앙]

  "뭐야?"

  그런데 갑자기 전화 너머로 폭음과 함께 강부장의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전화가 끊겨 버렸다.

  "강부장?"

  [혹시 오지 않을까 봐 당장 짐이 도와주지. 안 오면 여기 괘씸한 종자들을 모두 죽이겠다. 혼자 안 와도 죽인다]

  화면이 갑자기 전환되더니 인적이 드문 외곽 지역에 위치한 건물을 한 채 비췄다.

  [드림 비전 센터]

  조선제약이 현재 워크샵을 진행하고 있는 건물.

  [꺄아아아악]

  [살려주세요!]

  갑자기 빛과 함께 온몸을 가린 괴한들이 나타나자 조선제약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놈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협박과 폭력으로 사람들을 한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강부장?"

  "꾸잉?"

  빠르게 화면이 지나쳤지만 우리는 화면 속에 잠깐 스쳐 지나간 얼굴을 분명히 봤다. 방금까지 전화하던 강부장이었다.

  내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감히 내 주변인을 건드려?'

  [띠링]

  워치가 울린다. 이번엔 조선제약 사장이다.

  "자네, 영상 보고 있지? 걱정 말게. 우리가 알아서 하겠네."

  "됐어."

  "뭐가 말인가?"

  "내가 저 놈한테 연락해서 위치 알아올 테니까. 도망만 못 가게 준비해."

  "...알았네. 준비하지."

  "삼색아, 쪽진지 뭔지 날려라."

  참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아니, 말 그대로 차원이 바뀌었나. 이런 신박한 상황도 겪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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