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하루
"아 씨, 짜증나!"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적발의 머리를 사정없이 헝클이며 S급 헌터 이채린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얼마나 세게 만졌는지 머리카락이 후두둑 바닥에 떨어졌지만, 정작 장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파 위를 뒹굴었다.
"왜 그래? 미쳤어?"
방금 샤워를 하고 가운을 걸치고 나온 이정현이 그 모습을 보며 질색하며 말했다.
평소에야 비서 직함을 달고 사무적으로 채린에게 존댓말로 대화하지만, 같이 사는 집 안에서는 그냥 평범한 여동생이다.
"야, 정현아. 그 사람 기억나?"
"누구?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말하면서도 계속 망둥어처럼 날뛰는 자신의 언니를 보며 정현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S급 헌터가 하루에 만나는 사람의 수는 단순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부터 조직의 간부, 장까지 적게는 수십 명, 많은 날은 백 명을 족히 넘어간다.
"그...있잖아. 몇 달 전에 N/A급 사태."
"싱겁게 끝난 그거? 거기서 뭐 있었어? 료쿠랑 창천? S급들이야 원래 다 아는 사람들이잖아."
정연은 기억을 뒤져 봤지만 특별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언니를 저렇게 짐승처럼 굴러다니게 할 사람은 없었는데?
"그 귀환자 있잖아. 은발 머리."
"아! 그 잘생긴 사람! 근데 뭐 특별한 게 있었나? 잠깐...그 때, 언니가 그 사람 굳이 집에 데려다 주지 않았어? 설마..."
정연이 짓궂은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뭐... 웬만한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본 자신의 눈에도 잘생기긴 했다. 그런데 S급 헌터인 우리 이채린을 단번에 이렇게 만들 정도였나?
"아.. 아냐!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데려다만 주고 왔다고."
'뭐야, 진짜야?'
이제는 언니가 온몸을 뒤틀며 반응하자 정연의 눈이 반짝였다. 하긴 사람이 끌리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을 때도 있으니까.
"흐음..."
"아! 진짜라니까?"
이제는 얼굴까지 빨개진 자신의 언니를 보며 정연이 평소에 보여주지 않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가서 앉으며 말했다.
"난 찬성이야 언니, 드디어 언니에게도 봄이 왔구나."
"진짜 아니라니까?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그래."
"그래, 그래.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근데 정말 갑자기 생각났어? 평소에는 조금도 신경 안 쓰이고?"
"..."
사실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뭐...그렇게 많이 생각나는 것도 아니고 문득문득 얼굴이 생각나는 정도였다.
비록 잠깐 봤지만, 왠지 기억에 남는 남자였다.
사람들이 절단의 마녀라고 거리를 두는 자신을 편견 없이 편하게 대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머리 위를 쓰다듬던 왠지 투박하면서도 따듯한 손길...
"그런 거 아냐!"
"맞네. 에구...천하의 이채린이 이렇게 귀여운 걸 사람들도 알아야 하는데."
이제는 얼굴까지 빨개진 자신의 언니를 보며 정연이 귀엽게 바라보았다. 어쩐지 요즘 좀 이상하긴 했다. 가끔 멍때릴 때도 있었고.
"하지만 우린 재형이도 있고..."
"병원에 있는 내 동생 재형이도 언니가 잘 되길 바랄 거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워치번호는 알지?"
"내 번호는 줬는데, 그 사람 번호를 몰라."
"뭐? 아니, 번호를 거절하면 거절했지, 어떻게 번호를 받았는데 그쪽에서 안 줄 수가 있어?"
"귀환자니까 잘 몰랐을 거야."
"오호. 벌써부터 동생보다 그 남자 편을 들어? 좀 섭섭한데?"
"아...아냐! 그냥..."
"푸흡, 장난이야."
"너어!"
원래부터 놀리는 맛이 있는 언니였지만 오늘 따라 타격감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실제로 언니를 응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항상 일만 하고 다니니, 아직까지 그 능력을 가지고도 남자친구가 없지.
"저번에 보니까 D급이던데 괜찮겠어?'
"그게 뭐 어때서? 아니...좋아하는 게 아니라니까?"
"하긴 언니가 그딴 걸 신경 쓸 리가 없지. 사람만 괜찮으면 먹여 살리면 되니까."
"아니..그런 게..."
언니가 뭐라고 하든 정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한 번 만나봐. 사귀라는 게 아니라 언니도 언니의 감정을 잘 모르잖아. 만나서 몇 번 얘기라도 해보라는 거지."
"...부담스럽지 않을까?"
여기서 정현은 언니가 말하는 부담스럽다는 말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알아차렸다. 첫 번째는 갑작스러운 연락. 두 번째는 S급 헌터가 D급에게 하는 행동이 괜찮냐는 의미였다.
"부담스럽기는 무슨. 언니가 가면 오히려 고맙다고 하겠지. 그리고 애초에 그 정도로 부담스러워할 남자면 못 만나."
"그런가?"
"말 나온 김에 오늘 가보자. 데려다줬으니까, 주소 알지?"
마침 오랜만에 쉬는 날에 시간대도 아침이었다. 딱 준비하고 가면 맞을 거다.
"오늘?"
"그럼! 우리가 쉬는 날이 얼마나 된다고. 언니, 신경 쓰이면 일단 부딪혀보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조금 마음의 준비를..."
"언니!"
"...알았어."
"빨리 들어와 준비해야 되니까."
너무 갑작스러운 동생의 말에 채린이 미루려고 했지만 동생이 집이 떠나가라 소리치자 못 이기는 척하고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자신은 평소에 화장에 관심이 별로 없어서 기본적인 화장품밖에 없다 보니 동생의 손에 얌전히 얼굴을 맡겼다.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 홍조 살짝 있는 청초한 스타일이긴 한데, 언니는 그 화장 따라하다 망해. 언니만의 장점을 살리자."
챱챱챱
"일단 스킨케어 하고 베이스 바르고, 피부는 원래 좋아서 모공이랑 뾰루지 가릴 프라이머는 거의 필요 없겠다."
그렇게 거의 1시간을 정현의 손길을 받은 채린의 얼굴은 처음과 다르게 몰라보도록 변해 있었다.
"너, 화장 진짜 잘하는구나?"
평소에도 동생의 실력은 봤지만 막상 자신의 얼굴을 보니 말 그대로 피부로 와닿았다. 지금 거울을 보면서도 자신의 얼굴이 아닌 것 같다.
자신의 붉은색 머리와 햇빛에 살짝 탄 구릿빛 피부에 어울리는 묘하게 시크하고 건강미가 풍기는 완벽한 화장이었다.
"옷은... 어디 보자, 첫 만남이니 드레스 쪽은 좀 과하고, 여름이니 상큼하게 청반바지에 흰 블라우스로 가자. 살짝 스포티 하면서도 여성적이게."
"좀 어색해."
"언니! 대체 누가 요즘 블라우스를 빼! 당장 안으로 넣고. 다 됐다. 잘 갔다와! 올 때 맛있는 거 알지?"
순식간에 옷도 갈아입힌 정현은 혹시라도 언니가 마음을 돌릴까 봐 재빨리 문밖으로 떠밀며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잠시 문 앞에서 서성이던 채린의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그래, 언니가 행복해야지... 그걸 재형이도 바랄 거야."
시종일관 장난기가 가득했던 정현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하며 문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 * *
"이게 대체 뭐야..?"
자신의 차를 타고 두 번째로 카렌의 집에 와 본 채린은 네비게이션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폐허가 가득한 을씨년한 분위기에 마치 귀신의 집처럼 달랑 있던 그 집은 어디 가고 깔끔한 집과 심지어는 옆에 신축 건물들도 있었다.
'저거...카페인가? 이런 곳에?'
유동인구가 하나도 없는데 카페가 있었다. 그것도 꽤 큰 카페가 말이다.
신기하긴 했지만 어차피 목적은 그게 아니었으니 일단 내려서 대문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누구..? 주인! 예쁜 여자가 왔다."
"응?"
삐이익
안에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자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곧바로 대문이 개방되었다.
채린은 들어가면서도 혼란스러웠다. 예쁜 여자...는 알겠지만 주인은 무슨, 중세도 아니고 무슨 소린지 도무지 모르겠다.
"어서 와. 무슨 일이야?"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은발의 남자가 여전한 여유로운 분위기로 채린을 반겼다.
남자를 보자마자 긴장했던 채린의 마음이 풀어지며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냥 보고 싶어서 왔... 헙"
채린이 다급하게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지만 난다 긴다 하는 S급 헌터도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 오랜만이야."
하지만 채린이 뭘 하던 남자는 흔들림 없이 담담하다. 헌터가 된 이후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시선, 그런 편안함이 채린은 신선했다.
"꾸잉, 주인 친구는 처음 본다. 어서 와라."
"...고양이가 말을 하네?"
채린이 반사적으로 경계하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몬스터와 마물 중에는 인간의 정신을 현혹하는 종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아, 걔는 영물이야."
"...영물? 몇 번 보긴 봤어. 그런데 감지기도 안 걸리네? 특이한 케이스인가?"
채린이 경계를 풀며 말했다. 그런 건 없고 그냥 손을 써서 속인 것뿐이다. 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말할 눈치 없는 인간과 영물은 이 자리에 없었다.
"아! 이거 집들이 선물이야."
채린이 들고 온 커다란 쇼핑백을 내려 놓으며 안에 있는 물건을 하나, 둘씩 꺼내 놓았다.
"이게 뭐라고 했더라? 다른 세계에서 넘어 온 과일이랑, 식물로 만든 술?"
원래는 휴지나, 세제 등이 보편적인 선물이지만 선물을 고를 때 문득 카렌이 귀환자라는 사실이 채린의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아무래도 자신이 있던 세계의 술이 그립지 않을까?'
카렌이 왔던 세계가 어딘진 몰라서 그냥 비싼 가격대 순으로 뽑아서 사왔다.
"오! 이건 마계 쪽에서 자라는 과일로 담갔어. 이건 엘븐 쪽이야."
비싼 가격을 지불했지만 당사자가 술을 보며 감탄을 터트리는 모습을 보자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돈이야 동생이 관리해서 별로 신경도 안 쓰이고 말이다.
"이왕 사온 김에 마셔봐야지. 너도 마실 거냐?"
"아냐, 나는 차 끌고 왔어."
"그래? 그럼 뭐라도 마실래?"
"나는 딸기라떼. 아까 저기 카페 있던데, 내가 가서 사올게."
"전화해서 미리 시켜 놓으면 돼"
삼색이 자신의 워치로 카페에 미리 주문을 하자 곧 식탁 위에 있던 동그란 물체가 진동하며 음료가 다 됐다고 알려주었다.
'저거, 카페에 있는 진동벨아냐? 저게 왜 여깄어? 영물이 원래 기계도 다루나?'
"삼색 출동!"
채린이 진동벨과 삼색을 번갈아 보며 혼란스러운 와중에 삼색이 열려 있던 창문으로 순식간에 뛰쳐나갔다.
그리고 곧 딸기라떼가 담긴 트레이를 입에 물고선 채린의 앞에 살포시 내려 놓았다.
"꾸잉, 먹어라."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채린이 ??당황해 굳어 있자 삼색이 앞발로 살포시 밀며 다시 말했다. 그제서야 채린이 컵을 들어올렸다.
"고..고마워. 삼색이라 그랬지?"
"별거 아니다."
삼색이 으쓱이며 트레이에서 메이플라떼가 담긴 자신의 음료도 꺼냈다. 그러고는 소파로 올라가 빨대를 입에 물고는 앞발로 잡고 마시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저런 걸 마셔도 되나? 아니 영물이라 그랬지.'
채린이 그 모습을 멍하니 보며 딸기라떼를 한 모금 마시자 자신도 모르게 눈이 동그레지며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맛있어!"
"크으"
나도 맞장구치듯 술을 입에 털어 넣으면서 인상을 찌푸리며 술잔을 비웠다.
그냥 그렇게 여러 이야기들과 함께 우리의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하루가 자연스레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