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140)

  중년은 아름답다

  "딸기라떼 두 잔, 메이플라떼 한 잔 나왔습니다."

  "고마워."

  "꾸잉"

  온갖 종류의 라떼를 다 마셔 봤지만 나는 처음 마셔 본 딸기라떼가 제일 입에 맞았다. 딸기라떼 한잔은 목걸이 아공간 속에 집어 넣고 하나는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빨대로 한 모금 빨아들이자 딸기의 달고 상큼한 맛이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더 맛있어졌는데?"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 너무 달지도 않고 딸기의 풍미가 더 깊어져서 처음 먹어 본 꽤 잘나가는 카페보다 맛있었다.

  "오늘 아침에 직접 공수해 온 생딸기로 만들었습니다. 역시 재료가 좋으니 맛도 좋은가 봅니다."

  오영준이 겸손하게 말했다. 합격통지를 받았지만 오영준은 자리에서 안주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을 올라올 곳 없던 깊은 구덩이에서 꺼내준 은인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더 맛있는 음료를 대접하는 것뿐.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오히려 아쉬웠다.

  "마음에 들어. 불편하거나 힘든 건 없고?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꾸잉, 주인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응? 무슨 소리야?"

  "그런 식으로 말하면 당연히 못 말한다. 내가 듣기로 인간들은 월급 주는 사장에게 대놓고 힘든 걸 못 말한다고 들었다."

  "그래? 그럼 어떻게 하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은 마음의 편지 같은 걸 쓴다고 들었다."

  ...그거 군대에서 쓰던 건데? 30년 동안 정말 많은 게 바뀌었구나.

  "진짜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둘의 대화를 듣던 영준이 카운터에서 나와 우리 앞으로 와서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진짠 거 같은데...아 이런 건 진짜 모르겠네.'

  차라리 악의를 가진 적을 구별하는 게 편했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런 게 제일 힘들다.

  '후... 대체 그때는 어떻게 했지.'

  하긴 그 때는 이런 자잘한 건 다 밑에 얘들이 했었지.

  하지만 복잡한 사장의 마음과는 달리 영준은 진심이었다.

  '여기서 불평하면 진짜 미친놈이지.'

  손님이라곤 한 사람과, 한 영물(?)밖에 없고 이런 월급과 복지면 진짜 최고의 직업이다.

  "진짜 없어?"

  "아! 있습니다."

  "꾸잉, 그렇지! 어서 말해봐라, 인간!"

  삼색이 녀석 영준의 말에 묘하게 신나 보이는데?

  '이 녀셕 지금까지 장난쳤구나.'

  그제서야 알아차린 나는 삼색을 끌어당겨 볼을 부드럽게 당겼다.

  "꾸에에, 잘못했다."

  "너 영물이 아니라 요물 아니냐? 막 구미호 같은?"

  "걔는 진짜 미친년, 아니 미친 요물이다!"

  삼색의 꾸겨진 표정을 보고 영준이 터지려던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

  "일이 너무 쉽습니다. 이렇게 일을 하는데 월급이 이렇게 많아도 되는지...뭔가 도둑질하는 느낌입니다."

  영준의 말에 옆에 있던 친구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의했다. 음료 만드는 시간 말고는 너무 할 일이 없어서 하루에도 청소를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꾸잉, 재미없다."

  "이 녀석이!"

  나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삼색의 볼을 다시 끌어당겼다.

  "꾸어어"

  그러고 보니 삼색을 혼내주면서 주위를 둘러봐도 정말 가게 내부에 먼지 하나 없다. 심지어는 카페를 처음 오픈할 때 청소업체를 불러서 치웠던 때보다 더 깔끔하다.

  "...깨끗하긴 하네."

  어쩜 이리 먼지 한 톨 없지. 둘의 말에 신뢰가 생겼다.

  "저희가 너무 죄송해서... 혹시 따로 시킬 일이 생기시면 뭐든 하겠습니다."

  ??

  "꾸잉, 업무 말고 다른 걸 시키면 악덕사장이랬다. 요즘 그렇게 하면 큰일난다."

  내 손에서 벗어나 반대편 의자로 도망친 삼색이 음료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그것도 장난 아니냐? 고양이 요물의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꾸잉, 이건 진짜 맞다! 물어볼 수도 있다."

  삼색이 발끈하며 말했다. 이번엔 진짜인가?

  "그걸 어디다 물어봐?"

  "시청자들!"

  "뭐?"

  삼색이 워치를 몇 번 두드리자 가상의 카메라가 홀로그램으로 앞에 떠올랐다. 삼색의 모습만 오롯이 비추는 카메라에 빨간 불이 켜졌다.

  "꾸잉, 회사에서 업무 말고 이상한 거 시키는 인간?"

  삼색이 묻자 허공에 무슨 네모난 창들이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수십 개가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와! 방송!]

  [갑자기 무슨 소리임?]

  [원래 여기 개방장, 아니 냥방장 이런 컨셉이잖아]

  [그런 거? 당연히 시키지!]

  [아침, 점심, 저녁 지들 커피 타오라고 시킴. 내 메모에 그놈들 마시는 커피 종류 별로 다 적혀 있음]

  [상사랑 집이 가까워서 강제 택시기사 되는 중이다]

  [ㅅㅂ 난 그것도 그런데 주말에 수정사항 메일로 업무지시 오면 진짜 스팸함에 쳐 넣고 불지르고 싶다]

  [회사 가기 싫다...]

  [입사 한달 차인데 자퇴...아니 퇴사하고 싶음]

  "...꾸잉, 큰일 안 나네? 방송은 여기까지."

  자신의 예상과 다른 답변에 혼란스러운 삼색이 빠르게 방송 종료를 선언했다.

  [...이거 물어볼라고 방송 킨 거임?]

  [벌써 끈다고? 미친놈인가?]

  [놈이라니 냥이지]

  [이 방 맨날 이런식임, 근데 매력있음]

  [삼색님 박력봐]

  채팅창에서 뭐라고 아우성치든 삼색은 쿨하게 방송을 꺼버리자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삼색을 바라봤다.

  "...그건 뭐냐."

  "꾸잉, 취미 삼아 최근에 방송하고 있다."

  어쩐지 몇달 동안 방 안에서 자주 혼자 중얼거리더니 저런 걸 하는 거였구나.

  "그런 것도 있어? 그런데 너,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고양인데 대체 그걸 어떻게 하는 건데?"

  "주인! 인간만 방송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요즘 그런 사람을 꼰대라고 그런다."

  ...내가 이상한가? 보통, 인간끼리 모여서 방송을 하지 않나? 내가 알던 방송은 커다란 카메라들이 연예인들을 찍으면 TV에 나오는 건데.

  "요즘에는 가상캐릭터들이 나와서 막 고양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인터넷 방송한다구, 꾸잉"

  "넌 가상이 아니라 진짜...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인터넷 방송인지 뭔지는 잘 되고?"

  "10만 팔로워 찍었다. 꾸잉"

  "...정말 세상이 많이 바뀌긴 했어."

  저런 요물도 인기가 있고.

  "그냥 귀엽다고 보던데? 너무 실감 나게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좋아해준다."

  '그거야 진짜 살아있으니까 그렇겠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털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 살아있는 캐릭터는 아직 까지 못 만들겠지.

  "그래, 너 알아서 해라. 그건 그렇고 일을 시키긴 한다는데... "

  "정말 괜찮습니다."

  "그냥 편하게 지내는 게 좋지 않겠어?"

  그냥 으레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저 둘이 좀 한가하게 일한다고 해서 내가 손해 볼 건 하나도 없으니까.

  "저희가 정말 심심해서 그렇습니다."

  어찌 보면 사장이 듣기에는 기분이 나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도 둘이 심심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일이 있어야 일을 하지.

  "그래도 도움이 되는 걸 해야지. 운동은 어때?"

  "...운동이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둘이 당황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일을 하면서 운동? 여기 근처에 헬스장같은 것도 없는데?

  "별 거 아냐. 카페 근처를 달리기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누가 듣기에는 어처구니없는 말이지만 둘의 눈앞에 남자에 대한 신뢰는 이미 극에 달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다 이유가 있으시겠지.'

  의심 없이 칼같이 나오는 대답을 듣자 내가 둘을 보는 시선이 좀 달라졌다.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다. 항상 내 곁에 있던 그 녀석들도 저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었는데.

  '음...이러면 얘기가 좀 달라지는데.'

  최소 이 녀석들이 나에게 주는 신뢰만큼은 그대로 돌려줘야 한다.

  "헌터일에 아직도 미련이 좀 남아 있지 않아?"

  "...없다 그러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저희는 지금이 더 좋습니다."

  밑바닥을 겪고도 아직 가슴속에 간직한 꿈은 잔불이 되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곧 꺼질 거다.

  [여보, 요즘 너무 행복해요]

  아내의 밝아진 안색을 시작으로.

  [아빠, 그럼 저 연합대가도 되죠?]

  무식한 자신과 달리 다행히도 아내를 닮아 똑똑한 아들, 원래는 장학금을 목표로 기준을 낮췄는데 학자금 지원 덕분에 원래 원하던 대학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고생해준 가족들의 웃음이 이제는 더 중요했다.

  "음...내가 뭐 하나 만들어줄 테니 먹고 뛰던가."

  "카렌님이 주시면 뭐든 먹겠습니다."

  "마력정, 등급을 끌어올려 줄 거다. 그깟 느려터진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헌터들의 승급 원리는 간단하다.

  게이트의 대기 중에 묻어 있는 마력을 자연스럽게 흡수하거나 몬스터를 죽일 때 풍겨 나오는 미세한 마력을 간접적으로 흡수한다.

  "그런데 재능이 없어도 상관없습니까? 아시다시피 저희는 F등급이라..."

  문제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흡수율이 달라서 누구는 하루 만에도, 또 어떤 이는 이 둘처럼 몇 년, 혹은 평생을 게이트에 들어가도 못 올라간다.

  "상관없다. 대신 몸으로 직접 흡수하는 원리라 문제가 있어. 일정 등급 이상까지는 독기를 땀으로 배출해야 돼."

  "할 수 있습니다."

  오영준의 목소리가 기대감으로 떨려왔다. 나름 열심히 노력했지만 재능의 차이로 포기했던, 막혔던 길이 자신을 향해 열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 무엇도 소홀하지 않아도 돼.'

  자신의 꿈과 가정을 동시에 챙길 수 있다는 건, 어찌 보면 사회에서 가장 소중한 특권이 아닐까.

  "대신 중간에 멈추면 죽을 수도 있는데? 잘 생각해."

  "괜찮습니다. 열심히 해서 언젠간 꼭 보답하겠습니다."

  높은 헌터 등급을 향하는 꿈은 똑같지만 이제 목적은 살짝 변했다. 자신을 구원해준 눈앞의 남자를 위해 강해지고 싶다.

  "아니, 꼭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저희가 하고 싶습니다. 이제부터 카렌님을 향해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맞습니다. 저희도 은혜는 아는 놈들입니다."

  둘의 결의에 찬 눈빛을 보자 나는 말려봤자 소용없다고 느꼈다. 이런 상황도 참 오랜만이다.

  "알았다.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뛰면서 준비해도 되겠습니까? 물론 바리스타 일이 먼저라는 걸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가봐. 비밀로 하는 거 알지?"

  "물론입니다. 저희가 죽어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죽을 정도 되면 말해도 돼."

  둘은 내 허락이 떨어지자 곧장 바깥으로 나가더니 웃통을 벗고는 바깥을 뛰기 시작했다.

  찌는 더위에 땀으로 온몸이 젖어도 둘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꾸잉. 그거 팔 거냐, 주인?"

  "내가 미쳤냐. 저 둘이야 어디 가서 말할 사람들은 아니니까."

  50% 포션이 그 정도인데 저게 풀리면 각성자 사회, 아니 온 세계가 뒤집힐 거다.

  "맞다, 절대 팔지 마라."

  삼색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둘은 지금 생활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이제 가자."

  이번에는 또 무슨 드라마를 볼까. 지구에서 떠나 있던 30년의 간극이 가장 좋은 점.

  '드라마가 엄청 많다. 그것도 명작들이.'

  옛날에는 하루 먹고 살기 바빠서 볼 엄두도 안 났지만 지금 보니 참 재밌다.

  '중장년 어르신들이 이래서 드라마를 좋아했나?'

  열심히 카페를 달리는 둘을 뒤로하고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에취!"

  "주인! 재채기하는 걸 보니 누구한테 욕먹나 보다!"

  "...너 그냥 사람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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