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140)

  노란 민들레

  "영준님! 딸기라떼는 우유도 좋지만 생크림을 살짝 섞으면 더 맛있어요. 또 그 분이 단 걸 좋아하시니까 커피에 소금 살짝 넣어 보세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나이 43살, 갑자기 카페에서 일을 배우고 있는 오영준은 사장이 알려준 팁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재빨리 워치를 조작해 메모했다.

  [딸기라떼 (생크림 추가)] [커피(소금)]

  생전 처음 해 본 일에 ?처음엔 분위기부터 시작해서 용어 하나까지 너무 서툴렀지만 지금은 슬슬 적응되어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영준은 옆에서 같이 일을 배우고 있는 친구를 보며 살짝 자신의 뺨을 꼬집었다. 얼얼한 통증이 느껴지는 분명한 현실이다.

  한 달 전, 자신이 남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일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그다음 바로 강부장이라는 사람이 일하며 커피를 배울 곳을 소개해 주었고 지금까지 왔다.

  "뭐해? 알려주신 거 적었지?"

  "당연하지. 조금 있다가 공유해 줄게."

  F급 헌터라도 얼마 전까지 현역이었고, 몸은 일반인보다 나름 좋아서 일이 힘들진 않았다.

  하지만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머리가 안 좋았는지, 기억력이 별로여서 메모는 필수였다. 그래도 다행히 친구 녀석이랑 같이 배우다 보니 외롭진 않다.

  "어제 봤어? 통장에 찍힌 거."

  친구가 누가 들으면 뺏길세라 영준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연히 봤지."

  사실 카페 일을 배우면서도 반쯤은 자신에게 이런 행운이 찾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심지어 친구 녀석도 처음에는 이렇게 말했었다.

  "야이, 귀가 종이보다 얇은 놈아. 갑자기 카페를 하라고 했다고? 그것도 나랑 같이?"

  저번에 팔랑귀인 영준이 사 온 포션 덕분에 살아남긴 했지만, 이놈이 들고 온 제안은 누가 봐도 너무 터무니없었다.

  하지만 계약서를 보여주고 자신들도 자주 쓰는 제품을 만드는 기업, 조선제약에서 공증해주자 그제서야 믿고 영준을 따라왔다.

  "후우...첫 월급날이야."

  그리고 어제가 되자 반쯤 남아있던 의심은 완벽하게 종식되었다. 이렇게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8월 23일 통장 입금내역 : 4,000,000원]

  통장에 꽂힌 400만 원을 보고 자신에게 온 이 행운이 진짜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족에게도 알려주지 못했던 취직이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는 퇴근길에 날아갈 듯한 발걸음으로 평소에 봐둔 가게로 향했다.

  "저기 저 지갑 주세요."

  "네 고객님."

  아내가 좋아하는 노란 민들레가 수 놓아져 있는 작은 수제 파우치였다. 저번에 같이 지나갈 때 아내가 잠깐 멈춰서 눈길을 떼지 못했었던 기억이 난다.

  "에이...저런 걸 왜 사. 내 취향 아니야."

  말은 그렇게 했어도 같이 살아온 지 몇십 년인데 표정 속에 감추어진 아쉬움을 영준이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그때야 아들 대학 학자금 준비 때문에 차마 사준다고 말을 못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선물하실 건가요?"

  "네, 아내에게 줄 겁니다."

  가슴이 벅차 묻지도 직원이 묻지도 않은 말이 술술 나왔다. 영준이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에 살짝 민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직원은 되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내분은 다정한 남편을 만나 정말 좋으시겠어요. 아! 혹시 이 제품에 새겨진 노란 민들레의 꽃말을 아시나요?"

  "꽃말이요? 어떤 뜻이죠?

  "행복이란 뜻을 가지고 있대요. 아내분도 정말 행복하실 거예요."

  직원의 말에 영준이 잠깐 말문이 막혀 고개를 숙였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죠. 이제 행복해야죠."

  선물과 함께 취직 사실을 아내에게 알리고는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암묵적으로 지금껏 말은 안 했지만 쌓였던 고생과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정말 열심히 해야 돼.'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운은 언제라도 바람처럼 다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기회는 왔고 이제는 최선을 다할 일만 남았다.

  "점장님. 오늘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오늘도요?"

  "괜찮습니다."

  영준이 점장을 간절하게 바라보자 점장이 못 말리겠다는 듯 품에서 카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전자키를 꺼내 영준에게 건넸다.

  "저희야 마감도 해주시고 좋긴 한데...벌써 며칠 째십니까. 몸도 생각하셔야지요."

  점장의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었다. 카페의 영업시간이 끝나고 영준이 음료 만드는 연습도 할겸 카페를 야간에도 열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나이가 좀 차니 새로운 걸 배우기가 어려워서요. 몸으로라도 익혀야죠."

  "휴...대단하시네요."

  어차피 믿음직한 지인이 보증을 서주고 재료도 대주고 사례금도 줘서 교육을 했지만 지켜보면 볼수록 대단했다. 자신도 그 열정에 감동해서 알고 있는 노하우들을 가르쳐 줄 정도니까.

  "그럼 수고하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아무리 그래도...너무 무리하시는 게 아닐까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들어가 보세요."

  퇴근 시간이 찾아왔지만 카페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영준과 친구는 카페에 계속 남아 지금껏 배운 제조법들을 외우고 기계들을 만져보며 연습했다.

  "이거는 이렇게 했었고... 아, 또 까먹었네. 이거 뭐였지?"

  "그것도 어제 메모했던 거잖아. 여기 있네. 어서오세요!"

  이제는 사장도 둘을 인정해서 간간이 손님들이 오면 음료를 만들어 팔았다. 그렇게 두 중년의 뜨거운 밤이 흘러갔다.

  * * *

  그로부터 한 달이 더 지나고 마침내 운명의 그 날이 찾아왔다. 오영준과 친구는 앞으로 자신이 근무할 경기도 구리시로 향하는 중이었다.

  "근데 구리시는 적색지역 아냐? 거기 아무것도 없다고 들었는데?"

  운전대를 잡은 친구가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가며 말했다.

  "다 계획이 있으시겠지."

  "하긴 그 분이 어떤 분인데."

  두 번째 월급을 받은 둘에게 카렌이라는 사람은 뭐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게다가 강부장으로부터 살짝 귀띔해준 바로는 자신들의 꿈이었던 대단한 각성자라고 하니, 그야말로 완벽한 고용주였다.

  [덜컹, 덜컹]

  게이트 때문에 구리시로 가는 도로는 엉망이었다. 곳곳에 보수되다 만 울퉁불퉁한 도로 때문에 차가 놀이기구를 타듯 출렁거려도, 둘의 카렌을 향한 믿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오오오"

  "역시..."

  과연 둘의 믿음은 보답받았다. 구리시의 대부분은 폐허였지만 단 한 곳, 자신들이 근무할 지역 근처로 가자 매끈한 포장도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네비게이션도 필요 없었다. 그냥 멀쩡한 곳만 따라가면 되니까.

  끼이익

  차가 멈추고 내리 곳에서 둘은 한동안 멍하니 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본 망해버린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참 아름다운 신축 건물이었다.

  "여기...맞지?"

  분명 카페라면 --카페라든가, 아니면 다른 이름이라도 건물에 붙어 있을 텐데 아무것도 없었다. 주소지를 확인해 보니 여기가 확실한데?

  "왔어?"

  둘이 강부장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둘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안녕하십니까! 실제로는 처음 뵙겠습니다!"

  친구는 갑자기 자신들을 부른 사람이 누군지 몰랐지만 이미 홀로그램으로 한번 본 영준은 은발을 보자마자 남자를 한눈에 알아봤다. 친구도 눈치껏 재빨리 영준을 따라 인사를 했다.

  누가 보기에는 중년 남성 둘이 젊은이에게 깍듯이 대하는 묘한 광경이었지만 둘은 이미 눈앞의 남자가 자신들 보다 나이가 많은 귀환자라고 강부장에게 들은 후였다.

  "꾸잉"

  "고양이?"

  고개를 숙인 둘의 눈에 발치에 있는 고양이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고양이는 신기한 소리를 내며 자신들에게 인사하듯 앞발을 들었다.

  '특이한 고양이네. 마치 사람이 손을 흔드는 것 같아.'

  "계속 볼 사이니까, 말해도 돼."

  "알았다. 주인."

  "으허?"

  둘은 갑자기 고양이가 말을 하자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몬스터? 근데 저렇게 고양이 같은 몬스터도 있나?

  "얘는 영물이야. 해치진 않을 테니까, 안심하고."

  "아..알겠습니다. 카렌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꾸잉, 인간들 반갑다."

  둘은 여전히 고양이가 자연스럽게 말을 하는 모습에 혼란스러웠지만, 카렌에 대한 믿음으로 제정신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물론 삼색의 외모가 굉장히 귀엽다는 사실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악수? 인간들은 처음 만나면 이렇게 하더라."

  삼색이 조그마한 앞발을 내밀자 둘은 차례로 쭈그려 앉아 삼색과 손을 잡았다.

  '부드럽네.'

  도톰도톰하고 말랑한 젤리들의 감촉이 둘의 손바닥에 닿자 처음 자신들의 사장을 만나 긴장했던 둘의 얼굴이 좀 펴졌다.

  "그럼 이제 들어가 봐야지? 가서 천천히 딸기라떼 한 개, 아니 두 개만 만들어줘."

  무심코 내 것만 주문하려다 옆에서 나를 앞발로 통통 찌르는 삼색의 발길질에 재빨리 주문을 변경했다.

  나는 둘을 향해 어서 들어가 보라고 손짓했다. 나야 이미 내부 구경은 이미 했고, 첫 주문이니 사장인 내가 없어야 부담 없이 할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영준이 재빨리 카페로 친구를 끌고 갔다. 이미 자신들의 지문으로 설정을 마친 보안문을 열고 들어가자 둘의 입에선 감탄성이 나왔다.

  "우와...이게 대체..."

  바닥은 코팅된 나무로 만든 원목들이 깔려 있고 벽에는 넝쿨과 아름다운 꽃을 자랑하는 식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식물의 이름은 라플레아, 마력을 먹고 깨끗한 공기와 은은한 기분 좋은 향기를 내뿜는 게이트에서 넘어온 식물이었다. 천장에 박혀 있는 마력석은 식물에게 마력도 제공하면서 조명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와...이런 거 나 처음 봐."

  물론 음료를 만드는 모든 기계도 커피머신부터 냉장고, 제빙기까지 모두 최신기종이었다.

  "빨리 만들 준비하자."

  뭔가 홀린 듯 내부를 둘러보던 영준이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재빨리 음료를 만들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을 밖에서 보고 있던 나는 지켜보다가 거의 다 만들 때쯤 카페로 들어갔다.

  "딸기라떼 두 개 나왔습니다."

  ?

  들어오자마자 오영준이 만든 음료들에 빨대를 꽂아 내밀었다.

  [후르릅]

  둘은 눈앞의 남자의 한마디에 자신의 행운이 끝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힐끗힐끗 내 눈치를 살폈다. 둘의 시선을 느끼며 한 모금 마신 나는 둘을 보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맛있네."

  "꾸잉"

  옆에서 같이 마신 삼색도 동의했다. 그럼 다 됐지 뭐.

  "합격. 앞으로 잘 부탁해. 카페 이름은 알아서 정하고."

  "흐윽... 감사합니다."

  나는 기쁨에 찬 눈물을 흘리는 두 중년을 뒤로한 채 딸기라떼를 손에 들고 카페를 나섰다,

  "호의에는 호의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