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이 아니야
"당장 총력을 기울여 놈을 죽여야지! 아니면 모두 우리 대한그룹을 얕보기 시작할걸?"
대한길드의 사장이자 차남이 식탁을 쾅하고 내리치며 분노로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듬직한 체구에 어울리게 목소리가 크다.
"흥! 말은 바로 하지? 오빠의 길.드.가 얕보이는 거겠지. 실수해 놓고 되려 큰소리야."
"너...말 다 했냐? 그러는 너네 회사 실적도 마이너스라던데?"
살벌한 말싸움이 오가는 이 곳에 모인 인물들은 그야말로 대한그룹,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는 오빠 머리는 장식이야? 그 영상을 보긴 봤어? 눈은 멀쩡하지?"
대한보험의 사장인 대한그룹의 삼녀가 자신의 오빠를 쏘아붙이며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리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찼을까.
?
"당연히 봤지. 물론 놈의 무력이 뛰어난 건 나도 인정한다."
그룹의 무력단체인 대한길드를 맡을 수 있던 이유 중에 본인이 A급 각성자인 것도 한몫했으니 말이다.
'오싹했지.'
비록 영상이었지만 자신과 동일한 등급인 A급을 순식간에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등이 축축해졌었다.? 카렌이라는 자의 강함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 잘 알 거다.
"그래도 우리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S급인 창천이랑, 무리한다면 다른 쪽에서도 S급을 끌고 올 수 있을 거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오빠! 제발 생각을 해,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 자가 가진 약병, 그게 문제였지."
방 안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예정보다 빨리 대한그룹의 가족회의가 열린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아무리 카렌이라는 남자가 대단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대한은 대한이었다.
"둘은 잠깐 조용히 있고, 전문가도 여기 있으니 한 번 얘기해봐요. 알아냈나요?"
이번에는 대한소재의 사장직을 맡고 있는 장녀가 식탁의 제일 끝자리를 보며 물었다. 지목을 받은 대한제약의 부사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하자, 실수하면 그냥 간다.'
피는 영원하리, 대한그룹의 숨겨진 가훈처럼 이 자리의 모두는 강력한 혈연으로 묶여 있다. 모두 회장이 뿌린 씨앗이 발아해서 생긴 괴물들.
평소에는 대한제약의 부사장이라는 직함은 참 달콤했지만 이 자리를 탈출할 수만 있다면 당장 집어던질 수 있을 것 같다.
"사장님의 상태를 분석해 본 결과 뭔가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상한 점?"
"전염병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좋았어! 그럼 이제 놈을 박살 낼 수 있는 거지?"
"그럼 뭔가요?"
옆에서 ?남동생이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든 말든 ?장녀는 흔들림 없는 고요한 눈빛으로 부사장을 바라보았다.
'젠장, 대한소재 사장인 장녀가 회장의 자녀들 중에서 제일 무섭다더니만...'
목소리와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장녀의 눈빛을 마주하니 뱀을 마주친 개구리처럼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든다.
"독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으하하, 그럼 우리 이제 족쳐도 되지? 아버지!"
식탁의 가장 상석에 앉은 회장을 향해 차남이 흥분해 소리쳤지만 머리가 하얗게 샌 회장은 자신 앞의 음식은 전혀 손대지 않은 채 석상처럼 눈을 감고만 있었다.
"부사장님, 확률은 어떻게 되죠?"
"자세한 확률은 저희 기술로도 알아낼 수 없었지만... ?독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알았어요. 나가보세요."
부사장이 고개를 90도로 인사하며 쫓기듯 문을 열고 나갔다. 분명 시원한 방 안이었지만 얼마나 땀을 많이 흘렸는지 솜에 물을 먹인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그냥 허세라니까? 놈도 우리 대한이 무서워서 전염병이라고 허세를 부린 거야!"
"만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전염병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모두 조용히 해라. 막내가 누워 있는데 아무도 걱정하는 녀석도 없고 말이야. 쯧쯧"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회장이 마침내 침묵을 깨면서 혀를 끌끌 찼다. 머리는 하얗게 새고 젊은 날과 비교해 몸의 근육도 빠졌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저 왜소한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과 저력을.
"에잉, 싸우기나 하고 말이야."
대한제약의 사장이었던 막내는 점점 몸이 붕괴되어 초저온캡슐을 동원해 냉동상태로 들어갔다.
치료법을 찾을 때까지 죽은 거나 다름없고 심지어는 치료해도 온전히 깨어난다는 보장도 없었다.
"아버지, 막내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파악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니까?"
다시 자식들끼리 의견이 오고 갈 동안 보고만 있던 회장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놔둬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장녀와 삼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동의했지만 유일하게 차남이 반발하며 소리를 높였다. 놈에게 자신의 길드원이 죽었는데 이렇게 넘어간다니?
"...다 컸다 이거냐? 어딜 내 앞에서 소리를 높여?"
회장이 차남을 바라보며 낮게 으르렁거리자 회장의 그림자가 출렁이며 차남을 응시한다.
'젠장, 대체 저건 뭐지.'
아무리 자신이 A급 각성자라도 저 그림자랑 마주할 때는 마치 섬뜩한 심연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차남의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우리 대한이 아니라 아직 '내' 대한이다. 길드장 자리 뺏기고 싶으냐?"
아무것도 모를 처음에는 대한길드를 자신이 통제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무엇을 하든 아버지에게 보고가 올라간다. 그 때 느꼈다.
자신은 꼭두각시처럼 실에 묶여 움직이는 허울 좋은 바지사장이다.
"아..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얻는 이득에 비해 위험 가능성이 너무 크다. 나중을 기약한다."
"알겠습니다."
"대한 그룹이 얕보일 수도 있으니 놈에 대한 정보도 모두 숨겨."
가족이 반송장 상태나 다름 없이 당했지만 회장은 냉철했다. 역사가 말해준다. 아무리 강대한 나라나 기업이 작은 틈으로도 무너질 수 있다는 걸 회장은 잘 알았다.
"모두 손 떼라. 내가 직접 지켜볼 테니 일단 전염병인지나 파악하도록 해."
* * *
"당연히 아니지."
"꾸잉, 전염병이 아니야? 진짜? 영상에서는 엄청 실감나던데?"
밖이 시끄럽든 말든 나는 한가하게 푹신한 소파에 누워 삼색과 같이 드라마나 보고 있었다.
"내가 미쳤어? 그거 나중에 퍼지고 변이라도 생기면 나도 감당 못 해. 그 정도는 돼야 진짜 미친놈처럼 보고 귀찮게 안 달려들지.
"
"그래도 주인이라면 진짜 할 줄 알았다."
"내가 죽어도 전염병은 안 써!"
삼색은 지금껏 항상 여유있던 주인의 표정이 굳자 당황해서 물었다.
"꾸잉, 저쪽 세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전염병 하나 때문에 왕국이 멸망했지. 이 얘긴 됐어, 드라마나 보자."
잊고 있던, 아니 있으려고 노력하는 기억들이 무심코 떠올랐다.
[....님 살려주세요. 너무 아파요]
[?제발...저희를 구원해주세요]
"후우..."
나는 기억을 몰아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크게 숨을 몰아 내쉬며 애써 드라마에 집중했다. 백색거탑, 2007년도 방영한 의사들이 나오는 의학 드라마다.
[삐-----]
성공적으로 끝난 듯 보였던 수술에서 맥박이 갑자기 멈추자 의사들이 재빨리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200줄! 슛!]
하지만 여전히 맥박이 다시 뛰지 않고 다시 조금 더 세게 시도한다.
[350줄! 슛!]
절망스러운 환자의 상태, 그 때 외과의사인 주인공이 하얀 수술 장갑을 낀 채 환자에게 다가와 외쳤다.
[메스!]
드라마 특유의 긴박한 OST와 함께 단호하게 수술도구를 잡은 주인공은 바쁘게 손을 놀리더니 이내 모두가 원하던 소리가 수술실에 들려온다.
[삑-삑-삑]
"꾸잉!!"
?
심장이 다시 뛰는 명장면, 삼색은 펄쩍 뛰며 좋아했지만 나는 보면서 가슴이 살짝 답답했다.
'내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살릴 수 있었을까.'
오랜 세월이 지나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기억은 그저 잠시 깊은 곳에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띵동]
"응?"
드라마가 한 편이 모두 끝났을 때 갑자기 들리는 초인종 소리에 삼색과 내 시선이 동시에 현관 쪽으로 향했다.
이 집에 와서 처음 들어본다. 택배도 문 앞에 두고 가고 잡상인조차 여기 올 리가 없을 텐데?
"카렌님! 저 강부장입니다!"
자동으로 출입문을 비춰주는 카메라가 활성화되며 문과 연동된 내 워치에 방문자의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강부장이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렸을 때 제가 살던 시골처럼 한적해서 참 좋습니다."
삼색이는 눈치 빠르게 위층으로 올라가고 강부장이 끙끙대며 커다란 박스를 갖고 들어왔다.
"으차차, 이거 정말 별거 아니지만 빈손으로 오기엔 좀 그래서 가져왔습니다."
박스가 열리며 시원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며 내용물이 드러났다.
"최고의 선물이야, 강부장."
박스의 정체는 이동식 미니 냉장고였다. 안에는 서울의 유명한 카페들을 찾아 직접 사온 음료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강부장은 기뻐하며 보이지 않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오길 잘했어.'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 돈이야 어차피 많으시고 비싼 선물은 성향을 잘 몰라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제일 안전하게 준비했는데 정답이다.
"같이 앉아서 먹자고. 그런데 무슨 일이야? 저번에 제조법은 다 알려줬을 텐데?"
"에이, 제가 뭐 바라고 온 건 아닙니다. 그냥 날씨가 갈수록 더워지는데 시원한 음료라도 드리러 왔습니다."
"하하하. 그래, 잘 왔어."
물론 강부장의 목적 중에는 잘 보이려는 목적이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내 눈에는 열심히 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귀엽기도 했다.
"안 그래도 회사에서도 난리가 났습니다. 마나포션 30%도 시장에 나온지 얼마 안 됐는데 무려 50%가 나왔으니까요."
비록 F급이긴 하지만 기념비적인 수치다.
"연구원들이 신나서 카렌님이 알려주신 제조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60%, 70%도 만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그거 공장에서는 50%가 한계야."
안타깝지만 51% 이상부터는 사람이 직접 손으로 세밀하게 마력을 넣어가며 제조해야 한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했다지만 공장 가서 만드는 걸 보니 딱 봐도 안 된다.
"그럼 50%도 감지덕지 해야죠, 그것도 모두 카렌님 덕분인데요. 역시 아직 사람이 최곱니다. 하하하"
강부장이 사회생활을 오래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성격인지 말을 참 기특하게 하면서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다.
"저기...카렌님 혹시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강부장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까지 낮춰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 뭔데?"
"카렌님은 최고의 연금술사가 맞으시죠?"
"그렇지."
애초에 지구에서는 거의 사라졌던 연금술이란 학문이 게이트가 생기고, 다시 연구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무슨 중요한 일이길래 이렇게 강부장이 심각하지?'
"그럼...혹시 탈모약도 만드십니까?"
강부장이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자 내 시선이 무심코 강부장의 머리로 향했다.
음...그러고 보니 강부장의 정수리가 살짝 비고 이마가 좀 넓어 보이긴 한다.
"있어. 완치도 가능해."
"오! 혹시..."
"근데 부작용이 좀 심해."
"기존에 있던 탈모약도 낮은 확률로 간혹 발기부전이 나타나긴 합니다만, 완치에 비하면 그 정도야..."
"아예 안 돼."
"예?"
"기능이 안 된다고."
"헙! 기...기능 고장?"
강부장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며 본능적으로 손으로 어딘가를 가렸다.
"그...그래도 수요가 있지 않을까요?"
"못 팔아. 다른 부작용도 있어. 실명, 심장마비 등...심지어는 먹고 왕이 갑자기 죽어서 내전이 일어난 나라도 있을 정도니까."
"...그렇군요."
세계 최고의 연금술사도 탈모는 못 고치다니...?강부장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짝 시무룩해졌지만, 이내 다시 활기찬 분위기로 돌아오며 말했다.
"아! 맞다, 그 후기를 남기신 분 찾았습니다. F급 헌터 오영준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