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실패했다고?"
"알지 못하는 변수가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정보팀장의 말에 대한제약 사장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인 거 알지? 그 변수를 없애려고 내가 월급 주는 것도?"
"죄송합니다. 용병대장의 입을 막기 전에 알아낸 정보로는 절대 D급 각성자가 아닙니다. 애초에 대장이 C급이니 실패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후우...한달 뒤에 회장님 돌아오시는 거 알지? 그때까지 해결해야 해. 저번에 보낸 놈이 C급 하위니 놈은 C급 상위라고 봐야 하나?"
"아무리 C급 상위라도 C급과 D급 다수를 그렇게 빨리 처치할 수 없습니다. B급으로 가정해야 합니다. ?흐릿하지만 영상에는 놈의 정보와는 다르게 다수에 특화된 능력도 가지고 있는 각성자입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구 시간으로 20년 동안 다른 세계에 있던 카렌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한 종류의 카메라가 있었다.
대한민국 거의 전 차량에 달려 있는 블랙박스였다. 주변의 건물은 모두 파괴되었지만 몇몇 버려진 차량 속에서 우연히도 학살 장면을 찍고 있었다.
"그럼 우리 회사에서 처리할 수 없는 등급이군. B급을 안전하게 처리하려면 A급이 필요한데, 그 정도면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용병도 무리고."
"그렇습니다."
?
제약회사의 이름을 걸고 있는 탓에 형식상 연합법에 의해 C급 이상은 고용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B급 이상의 용병은 버림패로 사용할 수가 없었고 단기간에 비밀을 엄수해줄 용병을 찾기도 힘들었다.
사장은 책상을 손가락을 톡톡 치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곧 회장님이 돌아오고 가족회의가 열리는데 말이지...'
가족회의, 따뜻하고 다정한 단어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후계자 자리를 회장이라는 단 한명의 심판이 결정하는 단판경기. 사장의 머리속에서 수많은 계산이 오고가고 마침내 입이 열렸다.
"대한길드 불러."
"하지만..."
"알아. 형님이랑 나눠 먹어야 하는 거. 하지만 나눠 먹더라도 이렇게 하는 게 나아. 그쪽이야 무력단체고 이번 일이 포션 관련 일이니 우리 쪽이 주체야."
"알겠습니다. 그쪽이랑 협의해 보겠습니다."
비록 형제 자매끼리 후계자를 두고 으르렁거리지만 대한의 가족끼리 아무리 싸워도 선을 지키게 만드는 가훈이 있었다. 비서가 나가고 사장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피는 영원하리."
* * *
[200,000,000]
"당분간 돈 걱정은 없겠어."
나는 흐뭇하게 가상계좌에 떠있는 2억이란 숫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2억원이라... 원래 가지고 있던 부에 비하면 개미 발가락만도 못 하지만 뭐 어떤가, 옛날처럼 거창하게 살 것도 아닌데.
"일단 이건 넣어 놓고."
혹시 몰라 힐링포션을 만들어서 아공간에 대충 집어 넣었다. 다칠 때마다 한 병만 있으면 나라의 공작위를 살 수 있다는 엘릭서를 쓸 수는 없으니 비상시를 대비해서다.
"삼색, 산책 나갈래?"
"꾸잉, 그 시끄러운 거 타면 안 나간다."
삼색이가 말하는 시끄러운 뭔가는 얼마 전에 산 자동차였다. 원래 우리가 벌어들인 돈은 F급 마력포션 1000병을 50만원에 팔았으니 5억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본 광고 영상에 나는 망설임 없이 3억을 질러 버렸다.
[차 타고 가는데 갑자기 몬스터가 도로 위로 떨어지면? 갑자기 지친 일상에서 산속으로 뛰어 들고 싶다면? 여러분을 위한 후회 없는 선택! 마력험비 1세대!]
굵고 우렁찬 목소리가 함께하는 영상에서는 마력험비가 특유의 마초적인 각진 디자인을 자랑한 채 등장했다. 카메라가 험비를 360도로 쭈욱 훑고는 곧바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우리의 역사는 개척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길도! 어떤 시련도!]
험비가 비포장 도로와 울퉁불퉁한 돌들이 가득한 계곡을 커다란 바퀴를 이용해서 탄력적으로 주파했다. ?
[대 게이트 시대의 무서운 몬스터마저도!]
도로 위에 덩그러니 있는 몬스터를 ?우렁찬 마력석 엔진을 장착한 험비가 치자 몬스터가 저 멀리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버렸다.
[막을 수 없는 최강의 내구성!]
과연 광고대로 험비의 앞 부분은 조금 찌그러졌을 뿐 큰 파손은 없었다.
[지금 구매하세요! 1세대 마력 험비!]
"저건 사야 돼."
내 안에 있는 뭔가가 꿈틀거렸다. 이세계에서 나를 제일 짜증나게 만들었던 하나가 말과 마차를 타는 일이었다. 아무리 익숙해진다 한들 지구의 경차랑 비교해 봐도 느리고 불편했다.
그렇다고 순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하자니 애매하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많았으니 자동차는 이세계에 있을 때부터 내 로망 중 하나였다.
하지만 삼색은 예민한 감각 때문에 시끄러운 자동차에 타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고양이가 청소기를 싫어하는 이유와 같지 않을까?
"그럼 오늘은 그냥 주변이나 좀 걷자."
얼마 전 어디서 온 지 모를 강도(?)를 만난 후 2주일 동안 면허도 따고 주행연습도 한 덕에 이제는 능숙하게 차를 몰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매일 몰고 다니니 하루쯤은 쉬어 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갈 준비 됐다, 꾸잉."
삼색은 자기가 알아서 목줄을 장착하고는 염력으로 목줄의 손잡이를 내 손에 쥐어줬다. 그리고는 문까지 열고는 현관 앞에 얌전히 앞발을 나란히 한 채 나를 기다렸다.
"...근데 생각해보니 꼭 같이 나가야 될 필요가 있냐? 너 혼자 나가도 되잖아."
자기 혼자 알아서 다 하는 삼색을 보며 문득 든 생각에 내가 물었다. 심지어 가끔 보면 나보다 똑똑한데?
"영상 보면 야생동물이 아니면 산책은 같이 하는 거라고 배웠다."
"그래? 그런데 목줄은 필요 없잖아. 어차피 이 근처에 사람도 없어."
"꾸잉! 목줄을 안 하면 매너가 없는 행동이다! 맹견들은 입마개도 한다고 주인."
'...목줄은 개가 하지 않나? 이 녀석 영물 아니었어? 그리고 생긴 건 누가 봐도 그냥 고양인데.'
"에라 모르겠다. 그래. 네가 좋다는데 그렇게 하자."
현관을 열고 우리는 집 근처를 산책하기 시작했다. 처음 올 때랑 변하지 않는 폐허들이 마치 디스토피아를 연상시켰지만 우리는 그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태연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부르르릉
"이웃이 새로 왔나?"
여러 대의 차소리가 멀리서 부터 들려오자 카렌과 삼색의 귀가 쫑긋거렸다. 택배를 보내거나 받을 때 빼고는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이곳에서 저런 여러 대의 차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이윽고 내부가 보이지 않게 짙게 선팅된 차들이 앞에 서더니 곧 미니 버스 2대가 뒤이어 도착했다.
"하암, 마음씨 좋은 이웃은 아닌가 보네."
곧 벌어질 일을 예상하자 나도 모르게 살짝 하품이 나왔다.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 이웃끼리 로맨스물도 많던데 차에서 섬뜩한 무기들을 들고 우르르 내리는 흉악한 인상들을 보니 로맨스는 무슨, 당장 19금 관람불가 느와르물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정일님 되시는지요?"
차에서 우르르 내린 사람들은 나를 둥글게 포위했다. 위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자 곧 안경을 끼고 깔끔한 수트를 입은 남자가 다가와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살벌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지적인 이미지의 남자였다.
"카렌이라 불러. 그 이름은 영 어색해서."
대뜸 듣는 반말에 남자의 이마에 살짝 힘줄이 돋았지만 남자는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
"그러시군요. 카렌님, 저는 대한제약에서 영입팀을 맡고 있는 영업팀장입니다. 경매장에 올린 F급 50%포션의 개발자 맞으신지요."
'오호, 대한제약이었어? 좀 큰데?
"
휘이익
?
나는 생각보다 거물이 걸렸다는 생각에 휘파람을 불었다. 바깥 출입이 거의 없는 나도 들어볼 정도의 초거대기업.
자신의 소속을 증명이라도 하듯 전의 용병들이랑은 다르게 주변에서 느껴지는 놈들은 최고 A, 최하가 C등급 각성자였다. 게다가 자신의 소속을 말했다는 의미는 그만큼 자신 있고 여기서 끝을 보겠단 의미.
"맞아."
"대한으로 오시죠. 저희는 카렌님의 능력과 기술을 높이 삽니다. 지금껏 본 적 없던 대우를 약속드리죠."
"호오...그거 끌리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영업팀장은 미소를 지으며 조건이 담긴 계약서를 내밀었다. 속으로 상대가 절대 이 제안을 무시할 수 없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이런 달콤한 제안을 거절할 순 없지. 누가 뭐래도 우리는 대한이야. 어디서 이런 제안을 받아 봤겠어?'
심지어 거부해도 상관없었다. 굳이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간다면 같이 걸어줄 친절한 사람들도 데려왔으니까.
"나한테 이렇게까지?"
계약서를 훑어본 난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웬만하면 혹할 조건이긴 했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다양한 혜택이 적혀 있었으니까.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또..."
"그런데 이게 좀 거슬리네."
내가 계약서의 한 지점을 손으로 가르키자 영업팀장의 얼굴이 살짝 꿈틀댔다.
[개발한 모든 지적재산은 영구적으로 대한으로 소유됨. 부득이한 경우 계약자의 안전을 대한에서 보호할 의무가 있음]
"당연히 카렌님이 신제품을 개발하실 때마다 막대한 보너스를 제공할 겁니다. 또 요즘 게이트 때문에 얼마나 위험합니까, 저희 회사에 귀중한 인재인 카렌님을 당연히 저희 대한에서 보호해야죠."
말을 번드르르하게 했지만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는 계약서였다.
보너스에 대한 금액도 명시되지 않았고 보너스가 얼마든 실제 가치의 만분의 일도 되지 않을 거다. 보호가 될 지 구금이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너 같은 새끼들은 어디나 변함이 없어."
질 낮은 연극과 3류보다 못한 배우를 보던 내 짜증이 마침내 폭발해 버렸다.
"네?"
"조직의 톱니바퀴에 불과하지만 사실 그것조차 아니거든.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그 미소, 정말 어쭙잖아. 웬만한 사람한테는 역효과다. 할려면 확실하게 하든가."
내 기습적인 폭언에 영업팀장의 표정 관리가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후회하실 텐데요."
마침내 본색을 드러낸 영업팀장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렇지! 그런 말까지 똑같아. 이것도 지겨워. 너무 많이 봤어."
난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이런 어설픈 놈 말고 제대로 된 놈이라면 싸우는 재미라도 있을 텐데.
차라리 옛날 제국의 비밀 정보부 녀석들이 그리웠다. 정말 참신하고 독한 녀석들이었는데 말이야.
"잡아."
영업부장이 뒤로 물러나며 신호를 보내자 모두 무기를 뽑아들고 내게 뛰어들었다.
그래도 뭔가 배운 게 있는지 내가 능력을 쓰지 못하게 단숨에 제압할 생각으로 전방위에서 달려 들었다.
"내가 아직 B급은 상대 안 해봐서 조금 시험해 볼게. 일단 C급 이하는 모두 치우고."
나는 반투명한 막을 수십 개 만들고는 앞을 마치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형시켰다.
그리고는 이제는 거의 코 앞까지 다가온 놈들에게 일제히 날려 보냈다.
"크아아악"
"씨발, 내 팔! 내 팔!"
곳곳에서 고통과 상실감으로 인한 비명이 들려왔다. 운 나쁘게도 목이나 몸통이 잘려나간 놈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C등급 이하가 자신의 팔이나 다리를 잡고 울부짖었다.
"역시 B랑 A등급은 버티네."
막느라 튕겨나가긴 했지만 B급 이상 각성자들 중에 희생자는 없었다. 애초에 따로 뭉쳐 있는 B급 이상 놈들은 어깨에 대한의 상징이 용이 그려져 있는 통일된 복장을 입고 있었다.
'일단 던져봤군.'
C급 이하 녀석들은 내 전력도 확인하고 힘을 빼놓을 생각으로 데려왔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너무 빨리 처리하자 놈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보랑 다르다. 방심하지마. 수비수 앞으로."
자신의 몸만 한 방패를 든 자들이 진을 형성해 전방에서 벽을 세웠다. 그 뒤에는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자들이 자리했다.
"전진."
A급의 지휘 아래 천천히 벽이 다가온다.
"투사."
리더의 한 마디에 각종 원소 공격과 활, 쇠뇌 심지어는 마력이 가득 담긴 돌멩이까지 순식간에 단 한 인간을 향해 날아왔다.
콰콰콰쾅
엄청난 폭발음이 발생하고 흙먼지들이 시야를 가리자 모든 각성자들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한 곳을 바라보았다.
"해치웠나?
"이 정도면 죽었겠지?"
"죽었지. A급 몬스터도 이 정도면 갔다."
하지만 각성자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불행히도 목표는 A급 몬스터, 심지어는 S급 따위도 아니었다.
흙먼지가 걷히고 나자 모두가 절망에 빠졌다. 상대는 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단 한 발자국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바로 앞에는 공격을 막아낸 반투명한 막이 실금하나 가지 않은 채 고고하게 떠 있었다.
"확실히 어설픈 마법보다 낫네. 하나만 파서 그런가?"
범용성은 떨어지지만 하나의 기술만 가지고 있는 덕분에 그 분야에서는 확실히 마력랑에 비해 위력이 괜찮았다. 저기 거북이처럼 방패를 들고 있는 녀석들도 버티는 것 하나는 잘했다.
"좋아. 파악 다 했고. 실험은 끝났어."
물론 잘했다고 이 상황을 벗어날 만큼의 강함은 아니었다. 나는 아까와 똑같이 날카로운 반투명한 막들을 날카롭게 벼려 각성자들을 겨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수십개가 아닌 수백 개의 칼날이었다. 그것도 내 마력이 듬뿍 첨가된 칼날들.
"...씨발. 어떤 병신 새끼가 B급이래? 이래서 현장 안 뛰는 놈들은..."
누군가 남긴 유언을 끝으로 모두의 신체가 개성적으로 분리되며 상황이 정리되었다.
A급? 그래도 등급값은 좀 하는지 자신의 앞으로 날아온 칼날을 좀 쳐내거나 피하더니 다른 놈들을 처리하고 온 칼날 수백 개에 갈려 끝내 크고 작은 큐브로 변해 비참하게 죽었다.
"괴...괴물!"
무각성자라 전투능력이 없어 뒤로 빠져있던 유일한 생존자인 영업팀장이 다리가 풀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덜덜 떨고 있었다.
"내가 한 말 못 들었냐? 저번에 여기 온 놈한테 전하라 했는데."
물론 용병대장을 죽이기 전에 심문하면서 듣긴 했었다. 하지만 누가 그딴 말을 신경 쓰나? 자신들은 대한이다.
"살려주세요. 다신 오지 않겠습니다."
"딱! 한 번만 봐준다. 또 오면 다 죽이기 귀찮으니까, 오지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업팀장이 머리를 땅에 박으며 연신 감사 인사를 했지만 이어진 말에 엎드린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게 내가 저번에 한 말이야."
"네..네?"
?
"약속을 지킬 시간이다. 대한제약 어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