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140)

  지구

  "크아악, 저거 막아!"

  C부터 열리기 시작한 게이트는 B, A, 마침내 S까지 마치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열렸다. 곳곳에서 피가 튀고 비명이 오고 갔지만, 생각보다 헌터들은 잘 막아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로 온 헌터들은 N/A등급을 막기 위해 온 베테랑들이니 충분히 버틸 만했다.

  ?

  '지금까지는 괜찮은데 저기서 대체 뭐가 나올지...'

  자신의 주먹으로 거침없이 몬스터들을 죽이면서도 이채린은 N/A등급 게이트를 흘끔거렸다. 게이트까진 이미 만들어졌고 당장 열리면서 N/A급 몬스터가 언제든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발 내부형이어라.'

  게이트는 보통 두 종류로 나뉜다. 지금 나와 있는 몬스터들처럼 게이트가 열리고 쏟아져 나오는 외부형, 또 하나는 다른 세계의 일부분과 연결된 내부형.

  내부형의 경우에도 안에 있는 몬스터를 줄여두지 않으면 끔찍한 재앙이 벌어지므로 들어가서 토벌해야 한다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그때는 충분한 준비를 갖출 수 있으니까.

  "다른 S급 놈들은 대체 언제 와!"

  이채린은 얼굴에 튄 피가 눈 쪽으로 흘러내리자 대충 쓰윽 닦고 고개를 막 목욕을 마친 강아지처럼 피를 털면서 자신의 비서인, 정현에게 소리쳤다.

  정현은 자신의 특기인 염력으로 이채린을 보조하고 있었는데, 과연 S급 헌터의 비서가 되려면 최소 B급 이상인 만큼 월등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시 연락..."

  "왔어, 왔어, 그 급한 성격은 여전하네 절단의 마녀. 그러니까 친구가 별로 없지."

  "오랜만이네."

  정현이 연락해보겠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두 남자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긴 검은색 머리에 특유의 깐죽대는 표정, 기다란 창을 들고 있는 칭천. 손에 이글거리는 화염을 들고 있는 료쿠였다.

  "S급들이 지원 왔다!"

  "와아아아"

  아시아에서는 유명한 S급들답게 둘을 알아본 누군가 반가움에 외치자 헌터들이 싸우면서 소리를 질렀다.

  물론 앞에 있는 몬스터들에게 눈을 떼지는 않았다. 다들 최소 몇 년씩 몬스터들과 마물들을 상대해 본 헌터들답게 어설픈 실수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 새끼들이, 내가 계속 있었는데."

  지금까지 열심히 싸웠는데 두 헌터가 영웅처럼 등장하며 환호를 받자 이채린은 살짝 배가 아팠다. 아니, 지금까지 구해주고 싸워준 건 자신인데, 이제서야 한가롭게 달려온 이 놈들이 뭐가 예쁘다고.

  "하하, 네가 평소에 인상이 더러우니까 그렇지."

  "넌...끝나고 한 판 뜨자."

  이채린이 칭천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지금까지 이 놈과 여러번 싸웠지만 모두 무승부였다. 소중한 자원인 S급인 데다 서로 적당히 하긴 했지만 지금 기분 같으면 전력으로 저놈부터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물겠다? 크크."

  짝

  "자, 다들 거기까지 하고, 일 해야지."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료쿠가 박수를 치며 뗀 손바닥 위로 커다란 화염을 생성해내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몬스터가 계속 나오고 있는 게이트 앞 부분으로 냅다 집어 던졌다.

  콰쾅

  역시나 커다란 크기답게 위력도 대단했다. 나오고 있던 몬스터들이 일시에 증발하듯 사라지며 앞에서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던 헌터들이 조금이나마 숨을 돌릴 시간이 생겼다.

  "좋아, 그런데 저건 아직도 안 나왔어? 내부형인가? 만약 나온다면 어떤 크기일지 상상도 안 되네."

  칭천이 창으로 앞에 있던 몬스터 3마리를 꼬치처럼 꿰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떤 놈이 나오든 무조건 지금까지 게이트에서 나온 최대 등급의 몬스터를 가볍게 씹어먹을 거다.

  "지금까지 안 나온거면 내부형이지 않을까."

  이채린의 말에 모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실, 여기 있는 모두의 바람이기도 했다.

  S급 3명이 모여있긴 했지만, 이들도 N/A등급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했다. 내부형이면 다른 S급들이 더 와서 같이 들어가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만약에 나와도 상대할 수 있게 이놈들부터 정리하자고"

  맞는 말이었다. 3명은 일제히 각자 맡은 곳으로 산개해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감각이 예리한 S급 헌터들조차 자신들이 걱정하던 무언가가 이미 게이트 밖으로 나와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사람들은 N/A등급이 개방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열린 지 오래였다.?

  '뭐야, 이 난장판은.'

  사실 은발의 남자가 N/A에서 나온 지는 꽤 되었다? 심지어는 그냥 몬스터 사이에 섞여 있었다. 누가 봐도 몬스터들이 공격하지 않는 남자를 이상하게 생각할 만했지만, 모두가 각자 정신이 없어서 알아챈 헌터들이 없었다. 심지어는 옆을 지나다니는 몬스터들도 도무지 이 남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꾸륵, , 꾸륵"

  몬스터들은 신기하게도 은발의 남자에게 가까이 가는 순간, 온몸에서 느껴지는 본능적인 불안함에 피해갔다. 하지만 3명의 헌터들이 가세하면서 서서히 몬스터들이 밀리자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은발의 남자를 발견하곤 소리를 질렀다.

  "뭐야! 이봐! 너 거기 위험해!"

  시끄러운 전장 속에서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이채린이었다. 헌터들이 위험한 곳마다 지원을 가고 있었던 이채린은 순식간에 남자의 주위에 있던 몬스터들을 처리했다.

  '호오, 내가 알던 방식이 아닌데, 진짜 지군가?'

  이채린의 주먹에 닿은 몬스터들은 날카로운 칼로 벤 듯이 쩌억 갈라지며 여러 갈래로 잘려나갔다. 과연 '절단의 마녀'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능력이었다.

  "너, 처음 보는 얼굴인데? 멍청하게 뭐 하고 있어?"

  "아하하하! 한국으로 왔나? 잘됐군, 귀찮게 말을 배울 필요는 없겠어."

  남자가 다급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자 채린은 웬 미친놈인가 싶었다. 물론 모든 헌터들을 기억하진 못 하지만 그래도 기억력이 나쁘지 않아 특이한 헌터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저런 은발의 헌터? 채린은 도무지 눈앞의 남자를 본 기억이 없었다. 저런 튀는 은색의 머리카락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고.

  "설마...민간인이야? 힘이 느껴지진 않는데..."

  말하면서도 뭔가 이상함을 느낀 이채린의 표정이 종이처럼 구겨졌다. 자신도 방금 도착한 이 곳에서 몬스터들에게 둘러 쌓인 민간인이 아직까지 생존했다고? 하지만 눈앞에서 느껴지는 힘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F등급도 미세하게는 느껴지는데?

  "크아앙"

  "위험해!"

  하지만 이채린의 복잡한 머릿속은 갑자기 몬스터가 달려들자 멈췄다. 사실, 몬스터는 남자가 아니라 더 만만한 이채린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이채린은 남자가 굉장히 위험하다고 착각했다.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내 뒤로 와!"

  손으로 남자를 끌어당기고는 이채린이 남자를 뒤에 세우고는 몬스터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이건 또 신선하네, 보호받는 기분이라니."

  160년을 조금 넘게 살아오면서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신선한 감각이다. 자신이 누군가, 내로라하는 황제들조차 자신 앞에서는 어린아이였다. 힘 뿐만 아니라, 실제로 어렸을 때부터 봐온 말 그대로의 손자 같은 녀석들. 황제들은 자신의 아버지들에게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자신의 심기를 절대 거스르지 말라고 말이다.

  "이봐! 어떻게 여기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조금만 참아! 혹시 이름이 뭐야?"

  남자가 꼼짝 않고 있자 이채린은 남자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말을 걸었다. 지금까지는 그나마 좋게 맛이(?) 가서 괜찮았지만, 갑자기 자신의 상황을 알아차리고 뛰쳐나가면 곤란해질 수 있었다.

  "내 이름은 카렌이다."

  "응? 그래도 갑자기 기절하진 않아서 좋아! 그렇게만 맛이 가줘! 걱정 마, 끝나고 정신병원에 데려다 줄게. 거기 의사들이랑 시설 끝내줘! 곧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내 이름은 이채린이구."

  "..."

  정신병원이라니... 자신이 이세계에 있는 동안 그 의미가 바뀌지 않았다면 좋은 의미는 아닐 텐데, 뭐,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저 붉은 머리의 여자가 하는 말에는 악의가 아닌 순수한 호의만 담겨있었다.

  '괜찮은 사람이야. 저 정도의 강함을 가지고 저렇게 행동하기 쉽지 않은데, 음?'

  마치 오랜만에 찾아온 자신에게 지구가 선물이라도 주는 듯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진 카렌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저건 좀 위험하다. 저 녀석이 어떻게 여기 있지? 설마 내가 건너오면서 내가 있던 세계의 몬스터와 마물들도 넘어온 건가?'

  검은색의 흐물거리는 마물과 모든 헌터들, 심지어 S급 헌터인 이채린조차 신경이 다른 곳에 쏠려 감지하지 못한 S급 게이트에서 나온 무언가.

  "쉐도우"

  기척과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데 특화된 몬스터, 쉐도우는 이채린의 뒤쪽으로 스물스물 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몸은 약하지만 은신 능력에다가 기척을 지울 수 있는 일류 암살자 뺨치는 굉장히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저 녀석의 이빨에 묻어있는 맹독에 닿으면 순식간에 온몸이 녹아내린다.

  "이채린! 뒤!"

  "나? 뒤? 우와아아악. 이건 뭐야?"

  카렌의 말에 채린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검은색의 뭔가를 가까스로 발견하곤 기겁을 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주먹에 닿자 풍선이 터지듯 죽어버린 쉐도우를 보며 이채린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카렌이라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이 놈이 자신을 덮첬을 거다. 이빨에 묻은 녹색의 섬뜩한 독을 보니 아무리 면역력이 강한 자신이라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다.

  '일반인이 아니었나? 우연인가? 하긴 우연이겠지.'

  자신의 뒤에는 그 기분 나쁜 몬스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침 도끼를 들고 달려들던 다른 몬스터도 있었으니 그 몬스터를 조심하라고 한 말이겠지.

  "어쨌든 고마워! 카렌."

  "그래, 예의도 바르네, 옆에도 조심하고."

  "예의라니,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 보이... 옆? 우아아악"

  이번에도 과연 아까 뒤에서 달려들던 녀석이랑 똑같은 녀석이 옆에서 달려들고 있었다. 단숨에 처리한 채린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우연이야?"

  "응? 뭐가 우연이란 말이야?"

  '그래, 어쩌다 그랬겠지.'

  채린이 잡생각을 떨쳐내고는 다시 몬스터들에게 집중하자 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에 있단다."

  세 번째쯤 되니 이제는 조금 익숙해져 음침한 감각이 자신에게 경고해 이제는 자신도 몬스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남자의 말이 자신의 감각보다 더 빨랐다.

  퍽

  보지도 않고 주먹을 휘둘러 터뜨려 버린 이채린이 몸을 훽 돌려 카렌을 향했다.

  "너, 대체 뭐야?"

  "...글쎄"

  사실 카렌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정말 몰랐다. 자신은 여기서 뭘까? 전의 세계에서 이룩한 업적? 황제의 스승? 최고이자 최강, 최악의 연금술사? 무슨 소용인가. 자신은 방금 왔는데. 이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은 이름밖에 없었다.

  "잘 모르겠네."

  카렌이 태평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이채린은 저 카렌이라는 남자가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라고 느꼈다. 일반인이 저렇게 느긋한 표정과 목소리를 낼 수 있나? 자신도 긴장하는 이 몬스터 무리 속에서? 처음에야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어? 저거 봐! 게이트가 닫혔어!"

  "뭐?"

  이윽고 일어난 상황은 복잡한 이채린의 머릿속을 더욱더 헝클어버렸다. 거대한 빌딩 크기의 N/A등급의 게이트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게...대체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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