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40)

  게이트

  "떠나십니까."

  제국의 황제, 적어도 이 땅 위에서는 중년의 남자의 머리 위에 얹힌 황금의 왕관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은발의 젊은 청년은 싱긋 웃으며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야지. 난 애초에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놈이야."

  나이를 떠나서 황제에게 저렇게 무례한 짓을 해도, 주변을 철통같이 지키는 근위병들조차 당연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극비지만 그들도 알았다. 이 청년은 대륙에서 유일하게 황제와 대등하게 설 수 있는 사람, 황제의 스승이자 대륙 최고의 연금술사. 카렌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적대자가 계속 귀찮게 할 거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좀 약한 놈이었어."

  이세계로 떠나온 지 160년, 차라리 자신이 나약했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너무 강해도 문제였다.

  "빌어먹을 균형."

  지구에서 벨리알로 불리는 이곳으로 와 고생만 하다 좀 편하게 살려니 자꾸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놈들이 나타났다.

  처음에야 우연인 줄 알았지. 그런데 일정 주기로 계속 나타나니 뭔가 이상해 신전에 찾아가 물었다. 솔직히 말이 곱게 나가진 않았다. 누가 와서 쉬는데 자꾸 귀찮게 하면 현자도 짜증나지 않겠냐.

  [일 안 하십니까?]

  ....지금 생각해 봐도 좀 많이 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평화를 선호하는 신이라 그런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

  [속한 자가 아닌 이질적인 존재가 벨리알에 있는 한 계속해서 나타날 거란다.]

  [...평생? 쉬지도 못하고?]

  그 말을 들은 난 결심했다. 제자이자 친구 아들인 황제 찬스 좀 쓰자. 설득은 어렵지 않았다.

  힘과 권위는 그렇다 치고 자꾸 골칫덩어리인 놈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데 오히려 좋아하더라.

  "다 됐다. 빨리 꺼져, 늙지도 않는 대륙의 골칫덩어리야."

  오랜 친구인 궁정 대마법사가 참 기분 좋게 마지막 인사를 해준다. 그럼 대응해줘야지.

  "무슨 100년 동안 꽃집의 에일린 일로 삐져..."

  "아악! 당장 꺼져! 미친놈아!"

  "으하하하, 그럼 간다!"

  역시나 경기를 일으키는 대마법사를 뒤로하고, 나는 대륙의 온 마법사가 심혈을 쏟아 만든 거대한 마법의 문으로 발을 집어 넣었다.

  이렇게 크기가 거대한 이유는 간단했다. 통과자의 존재가 클수록 문도 커진다.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어디든 이동시켜주는 일회용 문, 듣기로는 이것도 대륙의 모든 희귀한 자원을 쏟아 만들었다 했나.

  이런 사치스러운 마법을 쓰는 사람도 내가 최초이자 최후일 거다. 지구로 가면 좀 쉬어야지.?

  * * *

  [우우우우우우웅, 이이이이잉]

  곳곳에 설치되어 있던 스피커에서 낮은 음역대로 시작한 경고음이 곧바로 고음으로 바뀌며 사방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또야?"

  "지겹다, 지겨워."

  사이렌은 다급했지만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닌 듯 사람들의 표정에는 두려움과 당황보다는 짜증과 지겨움이 밀려들었다.

  [경고, 경고, 대한에서 알려드립니다. 게이트 출몰 경고. 게이트 출몰 경고]

  ?

  "이번에는 몇 등급이려나, 기껏해야 E? 아니면 F?"

  "내기할래?"

  "좋아. 이번에는 내가 이긴다. 난 E등급 게이트 출몰에 건다."

  "그럼 난 D나 F."

  "뭐? 치사하게 두개나 걸어?"

  "어차피 E가 제일 많이 나오는데 두 개 정도는 돼야 맞지. 그럼 내가 E 할까?"

  "음...아니, 그럼 그렇게 하자."

  친구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이내 내기를 받아들였다. 하긴, 동아시아 연합에서 자세한 확률은 발표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보기에도 E등급 게이트의 출몰이 가장 잦았다. 최소 60% 이상?

  "일단 대피소로 가자고."

  "E급이면 대피소로 갈 필요가 있어? 나 곧 있으면 회사 들어가야 돼. 점심시간 끝난다고."

  남자의 목에 걸린 사원증과 한 손에 든 커피가 말해주듯 각종 기업과 회사가 잔뜩 위치한 이 거리에는 자신들과 같은 회사원들로 북적거렸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왼쪽 손목을 '툭툭' 두드리자 피부 위에 시간이 떠올랐다.

  12시 52분, 1시까지는 들어가야 한다. 물론 몇 분 정도 늦었다고 큰일이야 나겠냐만 요즘 부서의 김과장이 아내와 싸우고는 괜히 시비를 걸고 다녀서 괜히 트집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냥 회사 쪽으로 가자고."

  모든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직장과 집의 가장 가까운 대피소를 숙지하고 게이트 경보가 울리면 즉시 대피소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이 넓은 지역에서 과연 자신들 앞으로 게이트가 생성될까?

  심지어 그렇다 쳐도 D, F급 정도야 상주 헌터가 처리한다.

  일단 경고음이 울리고 급수가 발표되기까지 10분, 짧은 시간이지만 남자에게는 회사로 돌아가느냐 마느냐의 기로였다.

  "하긴 뭔 일 있겠어."

  많으면 하루에 한 번. 아무리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울려대는 경고음은 처음에나 무서웠지, 이내 일상으로 스며들어 시민들에게 안전 불감증을 가져왔다.

  [게이트 급수발표. 이번에 출몰한 게이트의 급수는...]

  "드디어 나오네."

  어느새 10분이 지나고 이제 신호등 건너편에 회사가 보였다.

  "제발 D급 나와라."

  "D는 무슨! 무조건 E일 걸? 이번에도 커피는 니가 사는 거야."

  남자가 이번에도 내기를 이겨 커피를 얻어먹을 생각에 친구를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스피커에서 나온 발표에 거리의 모든 사람들의 움직임과 말이 멈추며 순간 정적이 흘렀다.

  [N/A]

  "엔에이? 대체 무슨소리야?"

  [측정 불가. 측정 불가. 현 기술로 측정 불가. 연합수준경보. 연합수준경보. 전 시민은 대피하라. 전 시민은 대피하라, 우우우우웅]

  "꺄아아아악!"

  "비켜! 막지 마!"

  시민들의 가슴속에 새겨져 있던 안일함은 다급함으로 변했고 모두가 대피소로 뛰기 시작했다. 도로를 달리던 차들은 갑자기 사람들이 뛰어들자 처음에는 경적을 울렸지만, 차도를 뛰어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도무지 움직일 수 없어 곧 차를 버리고 뛰기 시작했다.

  "아하하하...이게 대체."

  "우리도 빨리 가자!"

  갑자기 눈 앞에 펼쳐진 아수라장에 자신이 떨어뜨린 커피가 신발 위로 떨어져 양말을 차갑게 적시고 있는지도 모른 채 남자는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경보에 이내 정신을 차리고 친구랑 같이 뛰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연합법에 따라 고지한다. 인근의 헌터는 용산구, 용산구에 집합하라]

  곧 용산구에 가지각색을 갖춘 헌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일상이 된 게이트 출몰로 헌터들을 위한 2차선 도로가 따로 만들어진 덕분이다. 시민들이 도망칠 때 그들은 마치 연어처럼 거슬러와 집합했다.

  "씨발, 대체 뭐야?"

  "아...오늘 휴일인데, 거지 같은 게이트 진짜."

  검 도, 몽둥이, 철퇴, 심지어는 알루미늄 방망이 등 각자 자신의 무기를 들고 온 자들은 거친 말을 쏟아 내었다.

  "N/A 등급? 그딴 등급은 보지도 못했어. 게이트 등급은 S급까지 있는 거 아냐?"

  한 헌터가 투덜거리자 옆에 있던 다른 헌터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는 S급은 물론이고 A급조차도 여기 있는 헌터 중에서도 못 본 자들도 많았다. 그런데 N/A등급 이라니?

  "자 주목!"

  "이런 씨...어떤 새끼가."

  그때 귀에 쩌렁쩌렁 박히는 목소리에 모든 헌터가 인상을 찌푸리며 외친 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놈이 아닌, 년을 보자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알고 있겠지? 모르면 헌터 새끼가 아닐 테고."

  짧은 적발에 예쁘장한 얼굴, 하지만 코를 가로로 가르지른 흉터 덕분에 누가 봐도 평범해 보이진 않았다.

  움직이기 편한 신축성 좋은 옷 위로 선명하게 근육들이 올라와 있었다. 크진 않지만 헌터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저 적당한 근육 속에 마력과 노력으로 압축되어 있는 힘을.

  "절단의 마녀."

  "그래, 연합소속 절단의 마녀다. 새끼들아. 하아...마녀라고 처음 부른 놈, 찾으면 진짜 찢어 버릴 거야."

  절단의 마녀가 이를 갈았다. 절단까지는 뭐...자신의 능력도 있으니 그렇다 치는데 대체 마녀는 뭘까. 처음에는 그렇게 부른 녀석을 패줬지만, 이제는 반쯤 무시했다.

  아드득, 아드득

  모든 헌터들이 섬뜩한 소리에 고개가 움츠러 들었다. 저 찢어버린다는 말이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아니, 심지어는 능력을 안 쓰고도 저 여자는 손으로 찢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게이트 출몰 직전 긴급상황 옆에 있던 수트를 입은 비서가 말하자 이내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이채린님, 준비하셔야 합니다. 곧 연합의 료쿠와 칭천이 도착합니다. 대기조 외의 S급 헌터들에게도 긴급소집령을 내렸으니 곧 올 겁니다."

  "알았어. 일본과 중국은 그 둘이 오고, 몽골은?"

  "아무래도 거리가 좀 있다 보니 늦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

  파지직

  "어? 벌써?"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마치 유리가 깨진 것처럼 균열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치 주위를 전염시키듯 균열은 점점 커져갔다. 게이트가 열리기 직전 증상이었다. 하지만 보통 10시간 정도 걸리는데?

  "젠장. 다들 무기 들어! N/A등급에 관해서 설명하겠다."

  이채린이 선두에서서 자신의 무기를 꺼내들며 게이트 쪽을 겨눴다. 헌터들을 등진 상태였지만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뚜렷하게 헌터들의 귀에 파고 들었다.

  "뭐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건이 하나 있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고?"

  헌터들이 중얼거렸다. 모두 각자의 기억을 되짚었지만,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아무리 헤집어도 N/A등급에 관련된 사건은 없는데?

  "대격변."

  "아!"

  헌터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맞다. 전세계의 누구나 알고 있는 사건, 대격변. 알 수 없는 이유로 전 세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었다. 동북아시아, 즉 한국, 중국, 일본, 몽골의 땅이 가깝게 붙어 버렸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 있던 바다가 사라졌고, 몽골과 중국도 원래 국경선이 맞닿아 있었지만 중간의 땅이 사라지면서 서로의 수도가 가깝게 붙어 버렸다.

  우연찮게도 대부분의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들이 게이트 대비 회의로 한 곳에 모였고 그들은 모두 죽어버렸다.

  그 결과 동북아시아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국경선에 대한 의미는 사라졌으며, 국가의 체계도 사라지며 길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길드들이 만든 게이트에 맞서 협력하는 집단이 연합이었다.

  "온다. 준비해!"

  말하는 사이에 균열은 종이 한장 크기에서 순식간에 퍼져 가더니 이내 고층 빌딩만큼 커져 버렸다.

  "젠장, 이렇게 커다란 균열은 처음 보네."

  게이트의 균열은 게이트가 열리기 전 등급에 비례해서 크기가 커진다. 과연 N/A등급 답게 지금껏 전례가 없는 엄청난 크기였다.

  우우우우웅

  [경고, 경고]

  "씨발, 또 뭐야?"

  이미 저것만으로 등이 땀으로 온통 축축해졌는데 무슨 또 경고음이란 말인가.

  [다수의 게이트 감지, C급, B급, A급, S급]

  쩌저저저적 경고음이 끝나기 무섭게 N/A등급 균열의 옆에 수많은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미친, 우린 다 뒤졌다."

  "엄마..."

  비록 욕이 난무하는 거친 헌터들의 세상이지만 금기인 말이 있었다. 죽음을 입에 담는 것. 하지만 그 금기를 누군가가 어겼음에도 누구도 제재하지 않았다. 모두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으니까.

  "정현아."

  "네, 이채린님."

  "군대 오지 말라 그래. 헌터들은 빨리 오라 그러고."

  "...알겠습니다."

  이채린의 말을 듣고는 정현이라고 불린 비서는 잠시 옆에 있는 뒷골목으로 사라졌다. 어차피 자신들이 못 막으면 군대도 못 막는다. 개죽음 당하지 말고 시민이나 대피시키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들은...

  "야! 새끼들아!"

  절단의 마녀, 이채린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치자 모든 헌터가 그녀를 바라봤다.

  "우린 뒤진다. 그래, 확실히 뒤질 거다."

  헌터들은 혼란스러웠다. 대체 이 다급한 상황에서 저 미친 여자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너 등급 뭐냐"

  이채린이 자신의 칼로 가르키자 한 헌터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B..입니다."

  "오~높은데, 너는?"

  "D입니다."

  "나는 S다."

  대체 무슨 소린지 헌터들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이채린을 바라보았다.

  "나도 뒤진다. S급인 나도 죽으니까 같이 죽자 이 말이다. 목숨이 아깝냐? S급보다 아까워? 너네가 나보다 비싸냐?"

  "하하하, 아니지."

  "S급에 비하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지, 저 양반은 다이아몬드고."

  전 세계에 1000명도 안 되는 S급 헌터의 몸값 부르는 게 값이다. 물론 여기는 A급들도 있었지만 A급과 S급은 하늘과 땅 차이,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내가 앞에 선다! 이 비싼 S급이 앞에 있단 말이다. 알겠냐?"

  "네!"

  "어차피 한번 죽지 뭐, S급이랑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안 그래?"

  "그거 좋지!"

  다 죽어가던 헌터들의 얼굴에 조그마한 여유와 비장함이 맴돌았다. 그리고 가장 낮은 급수인 C급 균열부터 마침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준비해!"

  파지지직

  스파크가 튀던 소리가 사그라들고 마침내 c급 균열의 확장이 멈췄다. 그리고 하나의 형태를 만들었는데 이걸로 왜 '게이트'가 그 이름으로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균열의 확장이 끝나면 정말 말 그대로 '문'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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