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인간 따위가 어딜 들어 오느냐!"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지만, 특이하게도 중간중간 쇠를 긁는 소리가 들어간 탓에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인간이 낼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과연... 흉측한 외모에 이마에 우뚝 솟은 두 개의 뿔을 가진 악마였다.
"하아...귀 간지럽게 또 시작이네."
단순히 말뿐인 위협은 아니다.
악마의 숨결 하나하나에는 치명적인 독이 들어있고, 그들이 분노를 실어 내뱉는 목소리는 공포 그 자체다.
심약한 인간이 들으면 단숨에 피를 뿜으며 죽을 만한 힘이 들어있으니.
하지만 정작 눈앞에 있는 인간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귀를 후볐다.
"아니? 어떻게 인간이?"
허리까지 오는 은색 장발에 적당한 키, 눈코입이 딱 알맞게 들어간 얼굴은 누가 봐도 미남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인간들의 기준, 악마들에게는 하찮은 인간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 그 인간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래도 마왕성까지 찾아온 인간답게 단번에 죽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위축될 거라 예상했던 악마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저렇게 동네 뒷산을 올라온 듯 편안하지?'
악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열 100위부터 1위까지의 악마들이 자신의 뒤에, 그리고 그들을 관리하는 대악마들이 마왕성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단순한 허세다.'
악마는 다시 자신감을 얻었다. 무엇보다 뒤의 우뚝 선 그곳, 마왕성에서 '그 분'이 지켜 보고 있다. 같은 악마가 들어도 소름끼치는 그 '마왕'이 말이다.
악마는 순간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고 눈앞의 인간에게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꿇어라. 인간! 그렇다면 자비를 베풀..."
"귀 간지럽다 그랬지."
인간은 여전히 귀찮다는 표정과 함께 그저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간신히 눈치챌 정도로 아주 살짝, 하지만 악마에게는 치명적인 손짓이었다.
풀썩?
악마의 머리는 입을 헤 벌린 채로 자신이 죽었다는 것도 모른 채.,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땅이 마치 늪처럼 질척거리는 마계의 흙은 악마의 머리를 부드럽게 받아주었다.
"뭐야?"
인간이 악마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뭘까, 무섭고 징그러운 외모?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이질감? 아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강함'
태생부터 우월한 육체 능력, 극소수의 인간을 제외하고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만 가질 수 있는 마법.
그것들을 악마들은 숨만 쉬어도 쓸 수 있었다. 악마들의 눈에는 당연히 인간들이 벌레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두 종족의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어버렸다.
"크아아"
"죽여!"
모든 생물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나 힘을 앞에 두고는 보통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도망가거나. 배척하고 싸우거나. 물론 가진 힘에 자신이 있었던 악마들에게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선택지였다.
악마들이 잘 훈련된 군마들처럼 발을 구르며 일제히 박차고 나가자 마치 몇만의 군세가 달려드는 듯 세상이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끝이 아니었다.
마법 쪽에 특화된 악마들은 허공으로 떠올라 각자 자신이 자신 있는 마법들을 인간에게 쏘아내었다.
불과 얼음, 돌덩이, 바람으로 이루어진 거친 마법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땅에서는 당장이라도 압사시킬 듯 거대한 근육을 자랑하는 악마들이 단 한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악마들이 당장이라도 인간을 산산조각낼 것 같은 그때, 인간이 손을 휘적하고 내저었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사아악
평생 쇠를 만진 장인이 만든 역작을 잘 손질하고 날을 세워 일류의 검사가 베면 이런 소리가 날까.
무형의 칼날이 남자의 지휘에 따라 아름다운 선율처럼 악마들에게 날아들었다.
악마들의 허리, 목, 다리에 선명한 금이 생기더니 무너지기 시작했다. 절단면에서 나온 악마 특유의 검은색의 피가 마치 사방에서 폭포처럼 뿜어져 나온다.
"끅"
그저 가장 뒤에 있었던 악마가 목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단말마를 남겼을 뿐 악마들은 비명 소리 조차 내지 못하고 모두 쓰러졌다.
"인간이 이렇게 강하다고?"
악마들과는 다르게 등 뒤에 날개를 단 거대한 뿔을 가진 대악마들이 놀란 표정으로 인간의 앞에 섰다.
인간의 손에 죽은 악마들 모두가 덤벼도 자신들 7대 악마가 있으면 모조리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쉽고 빠르게? 그건 불가능하다.'
대악마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자신들끼리 보며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며 고개를 끄덕이며 일제히 자신들의 장기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합공한다."
긴말은 필요 없다. 비겁하게 같이 공격한다고? 악마에게 오히려 칭찬이다. 눈앞의 인간이 쓴 공격 마법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방어가 먼저다.
마법에 특화된 대악마들은 마력으로 방패를 만들어 온몸을 감쌌고 세웠고, 육체에 자신 있는 자들은 마력으로 자신의 몸을 강화했다.
'어째서 아무것도 하지 않지?'
분명 자신들의 행동을 보고 있음에도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까랑 똑같이 그저 귀찮다는 표정. 그리고는 오른손을 주먹 쥔 채로 들어 올렸다.
저 손이 앞서 실행한 참사를 본 대악마들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자신들을 다를 것이다. 자신들은 대악마다. 하지만 인간의 손이 못을 내리치는 망치처럼 내려오자 대악마들의 자신감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쾅!
"쿨럭"
"크어어"
그래도 앞서 죽은 악마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래도 한 방에 죽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남자가 권태로운 표정을 지으며 벌레를 때려잡듯 주먹을 계속 내리치자 악마들은 그대로 땅속으로 처박히면서 몸의 형체를 잃어갔다.
그래도 마법을 쓰는 대악마들은 방패가 박살나면 한방에 죽었지만 육체파들은 더욱 끔찍하게 죽었다.
팔을 들어 올리면 팔부터 으깨지고,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발악을 해보았지만 서서히 몸이 찌그러지며 죽는다. 차라리 몸이 약했으면 고통 없이 갔으리라.
"인간...그 눈빛..."
죽기 전 마지막 육체파 대악마는 자신이 인간의 눈빛을 잘못 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인간의 눈에 담긴 감정은 귀찮음이 아니었다. 지겨움이다.
'대체 뭐가 지겹다는...
"
해소되지 않는 궁금증을 가지고 마지막 남은 대악마가 대지로 돌아가고 마침내 인간은 마왕의 앞에 섰다.
"대체 너의 정체와 그 마법은 뭐지?"
그래도 마왕일까, 굳게 닫혀있던 인간의 입이 열렸다.
"네가 다섯 번째다."
"뭐?"
알 수 없는 말에 마왕의 고개가 살짝 갸웃거렸다. 대체 뭐가 다섯 번째라는 걸까? 평소라면 인간과 대화 따윌 나눌 리가 없겠지만 이 인간은 특이했다.
앞서 죽은 악마들과 대악마? 어차피 악마들이 인간을 보듯 자신에게는 벌레와 똑같았다. 벌레가 죽는다고 슬퍼하진 않는다.
"역시 초기화됐군, 빌어먹을 균형. 그래도 마왕이니 말해주마. 너도 불쌍한 희생자일 뿐이니까."
"첫 번째로 나는 연금술사다."
"연금술사?"
마왕의 눈이 불신으로 커졌다. 자신도 인간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다. 아니, 정보가 필요한 단어도 아니었다 연금술사에 대한 인식은 마계까지 알려질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냥 보통 약초나 간단한 치료마법을 가진 녀석들, 그것도 일부일 뿐 대부분이 사기꾼들이었다.
"거짓말 하지마라 인간, 그런 공격 마법을 연금술사가 가질 순 없다."
역시나 인간은 거짓말이 일상인 종족이었다. 저렇게 얄팍한 거짓말이라니. 차라리 자신들의 종족인 악마가 나았다. 최소한 계약은 성실히 이행하니까. 물론 불공정하긴 해도 말이다.
"난 거짓말은 하지 않아."
"허! 뻔뻔한 얼굴만큼 자신감이 대단하구나, 인간."
"두 번째 질문에 대답해주지, 이건 공격 마법이 아니라 초급방어마법인 실드(Shield) 마법이다. 난 이것밖에 못 써."
"거짓..."
마왕의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하는 말은 인간이 내민 손바닥에 멈췄다.
마왕이 평생 당해본 적 없는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여기까지 온 인간이니 한 번 참았다.
"듣기만 해라. 너가 그래도 피해자니까 특별히 알려주는 거다. 넌 나 때문에 생겨난 다섯 번째 마왕이고, 곧 죽어. 그리고 난 이 지긋지긋한 균형이 짓누르는 세계를 벗어나서 다른 세계로 튈 거다. 내가 왔던 세계지"
남자가 기억을 떠올리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에 시체들이 널린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이제 죽어."
남자는 말을 마치고는 후련하다는 표정과 함께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내뱉은 말을 실행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