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섬광이 번쩍인 직후 기억이 없었다.
“내가 스스로 일을 벌인 거라고?”
[칫, 이런 식으로 놈들이 이길 줄이야.]
알포네는 혀를 내두르며 태훈을 미련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난 계획을 막으려고…….”
[1급신들이 몇억겁의 시간을 공들여 만든 것을 너 따위가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가소롭군.]
“그럼 저 빛은 뭐야?”
[세상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이지. 놈들이 원하는 것은 완전무결한 존재에 의해 완전무결한 세상을 만드는 것. 모든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이다.]
알포네는 다 틀렸다는 식의 말투로 혀를 찼다.
그사이 구체로 흘러드는 빛은 점점 늘어만 갔다.
“저 빛들은 뭐야?”
[영혼. 모든 차원에 있는 영혼들이 몰려오는 거야.]
“죽은 건가?”
[죽음이라는 과정은 없었을 거다. 그저 강제로 송환당하는 것이니.]
“날 원망하려나…….”
[죽음인지 살아 있는지조차 구분 못 할걸?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거다.]
“나랑 너는 왜 정신이 멀쩡한 건데?”
[너는 나 때문에 정신이 유지되는 거지. 하지만 나도 곧 갉아 먹히고 너나 나나 의식을 잃을 거다.]
그 말대로 태훈은 순간순간 정신을 잃을 뻔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잠에도 간신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돌파구를 찾으려 했지만 주위는 그야말로 무의 공간.
“뭔가 방법이 없을까?”
[없어. 네가 문에 손을 대는 순간 놈들의 계획대로 절대 존재가 만들어진 거야. 그게 바로 저거고.]
알포네는 빛의 구체가 절대 존재라고 했다.
“저게 절대존재…….”
[어떤 의미로는 진짜 신이지. 우리같은 가짜랑은 다른 진짜 신.]
“가짜라니?”
알포네는 편안한 자세로 누우면서 구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들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야. 오히려 인간들의 믿음을 먹고사는 불완전한 존재지.]
알포네는 신이라 자칭하는 것들은 전부 인간의 믿음을 양식으로 한다고 했다.
신을 믿는 자들이 많으면 신의 힘은 강대해지고 영원히 살지만 믿음이 약해지면 그만큼 힘도 약해진다고 했다.
심한 경우엔 신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우리 생이지. 우린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완전무결한 세상을 원했던 것이다. 완벽한 신은 그 소원을 이뤄줄 존재고.]
“그럼 그런 세상만 만들면 되잖아. 왜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거냐.”
[완벽한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이 기존의 세상들이야. 무에선 아무것도 만들지 못해. 재료들이 있어야 하지.]
“결국 너희들이 말하는 완벽한 세상이라는 게 너희들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세계라는 거냐?”
[……맞아. 하지만 그런 세상은 재미가 없어. 나와 마데우스는 그런 세상이 싫어서 반기를 들었던 거다.]
“그럼 이제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1급신 정도 놈들뿐이야. 인간들 영혼은 흔적도 남지 않을걸.]
“너는?”
[난 강등당한 존재다. 버티기야 하겠지만 언젠간 사라지겠지.]
알포네는 포기한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태훈은 그냥 포기할 순 없었다.
힘을 모으려 했지만 얼마 못 가 금세 지치고 말았다.
그가 애쓰는 모습을 보며 알포네는 코웃음을 쳤다.
[포기해. 그냥 편안히 마지막을 즐겨.]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알포네의 말투와 표정에 울컥한 태훈은 고민에 잠겼다.
“소원은 누가 빌 수 있는 거지? 자격 같은 게 있어?”
[없을걸.]
“그럼 나도 빌 수 있는 거 아닌가?”
[이미 놈들이 소원을 빌었잖아. 그게 진행 중이고.]
“취소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게 가능하겠……. 흠, 아닌가?]
알포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원을 빌 수 있는 자격 제한은 없었다.
다만 구체가 만들어지는 것을 가장 가까이서 먼저 알아채고 소원을 비는 가장 빠른 자가 임자.
모든 과정을 계획하고 지켜보던 1급신들이 그 순번을 채간 것이다.
거기다 소원이 발동되는 순간 1급신 혹은 그와 비슷한 존재의 의식만이 남으니 다른 자들은 소원을 빌 수 없는 것.
[가능하기도 할 것 같은데…….]
“그럼 우리도 소원을 빌면 되잖아.”
[하지만 방법이 없어. 내가 알기로 소원을 빌려면 절대존재와 접촉을 해야 한다. 그 존재가 지금 저 구체고 저것에 닿는 순간 네 의식은 가루가 될걸?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해보겠어. 그러니 도와줘.”
[…….]
알포네는 태훈을 빤히 쳐다보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표정이었다.
알포네는 무엇을 원하냐고 물었다.
“내가 접촉할 테니 내 의식이 날아가지 않게 해줘.”
[내가 어째서 널 도와줘야 하는 거지?]
“이대로 세상이 멸망하고 놈들이 원하는 세상이 와도 괜찮겠어? 마데우스도 소멸할 텐데.”
[분명 놈들의 뜻대로 되는 건 배가 아프지. 하지만 기껏 남은 시간을 그런 데 쓰고 싶지도 않아.]
“그럼 이대로 가만히 앉아만 있을 거야?”
알포네는 태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떤 게 더 수지타산이 맞는지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이대로 망하는 걸 지켜보는 것보단 기회를 노려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 녀석이 성공하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오니까 상관없지. 위험하면 발을 빼면 될 테니.’
위험부담은 태훈이 진다고 생각한 알포네는 협조하기로 했다.
둘은 구체를 향해 마법으로 나아갔다.
반딧불처럼 떠다니는 빛들을 지나 구체 근처로 다가갈수록 현기증이 심해졌다.
근처까지 다다른 알포네는 태훈의 한쪽 손을 잡았다.
[접촉해라, 다시 말하지만 삼켜질 것 같으면 난 빠질 거다.]
태훈은 알포네의 손을 잡고 다른 한손을 구체에 대었다.
파앗-
어두컴컴했던 무의 공간이 사라지고 흰 공간이 나타났다.
떠다니던 공간이 사라지고 두 발을 지면에 디딜 수 있는 중력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 가운데 한 사람이 있었다.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 수 없을 중성적인 외모.
무표정으로 바닥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태훈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당신이 절대 존재, 신인가?”
“신, 성배, 절대자…… 날 지칭하는 것은 셀 수 없다.”
그렇게 말한 인물은 책에서 눈을 떼고 태훈을 올려다보았다.
“의식이 있는 채로 여기까지 오다니. 그대도 나를 만든 자들 중 하나인가?”
“내가 당신을 직접 만들진 않았어. 하지만 내가 당신을 발현시킨건 맞지.”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거지? 소원을 빌러 온 것인가?”
“맞아, 지금 당장 하는 일을 멈춰줘.”
“다른 자들과 소원과 상충되는군. 이럴 경우 하나만 들어줄 수 있다.”
“그럼 내 걸 들어줘. 난 지금의 세상이 더 필요해.”
“내가 결정할 권한은 없다. 너희들이 정해라.”
그러면서 절대자는 태훈의 뒤를 가리켰다.
태훈이 뒤를 돌아보니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그가 1급신들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대가 먼저 태훈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다,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군.”
남자의 진심 어린 반가움에 태훈은 당황했지만 냉정하게 물었다.
“네가 이미르가 말한 1급신인가?”
“1급신 중 하나인 미카엘이다. 반갑다, 우리가 만든 존재여.”
“너희가 만들어?”
“넌 알포네를 봉인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공적인 영혼. 유일하게 우리가 만든 영혼이다.”
“다른 영혼들은 너희가 만든 게 아니야?”
“아니다, 알포네나 이미르에게 들어서 알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영혼을 만드는 것은 하지 못해. 반대로 소멸시키는 것도 권한 밖의 일이지.”
미카엘이란 남자는 태훈에게 애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넌 내가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든 존재다. 이렇게 마지막으로 보게 돼서 다행이군.”
“지금 당장 소원을 멈춰.”
“거절한다. 대신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제안?”
“1급신의 자리는 두 자리가 비어 있다. 너를 그중 하나로 앉히고 싶다.”
“나를?”
“넌 우리가 만들어낸 유일한 영혼. 우리의 지고에 대한 결정체니 옆에 두고 싶다.”
생각도 못한 제의.
태훈은 잠시 말문을 잊었지만 단칼에 거절했다.
“성의는 필요 없어. 난 너희들보다는 내 지인들과 살아남겠어.”
“이 일은 다른 영혼들에게도 나쁜 일이 아니다. 덧없는 반복되는 윤회도 필요 없고 편안한 안식만 느끼면 돼.”
“그래서는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없어.”
“느낄 필요가 있나? 고통을 받으면서?”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몇 번의 대화를 주고받은 태훈은 나아질 기미가 없자 자세를 잡았다.
“싸우자는 건가? 1급신인 나와?”
“말로는 해결이 안 될 것 같아서. 시간이 없거든.”
“재미있군. 내 창조물과 싸우게 되다니 그것도 감회가 새로워.”
먼저 덤벼든 것은 태훈이었다.
공간이 바뀐 후부터 마나나 오리진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는지 맨주먹을 피하면서 맨주먹을 날렸다.
퍼억-
퍽-
둘은 몇 번의 주먹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타격을 주었다.
미카엘은 흥미롭다는 듯 얻어맞아 저릿한 팔뚝을 만지며 말했다.
“흠, 이게 고통이란건가.”
“여태껏 고통도 모르고 살아왔나? 그렇다면 이 싸움은 내가 이겼다.”
태훈은 전력을 다해 덤벼들었다.
미카엘도 전력을 다해 공격을 해왔다.
말 그대로 피가 낭자한 혈투가 시작됐다.
먼저 휘청인 것은 미카엘이었다.
“이상하군, 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거지?”
“데미지 누적이라는 거다. 아까 턱 밑에 하나 들어간 게 제대로 들어갔거든.”
“넌 왜 멀쩡한 거지?”
“정신력이라는 거다. 온갖 역경을 거쳐왔는데 이 정도 아픔쯤이야.”
“어불성설이다. 신인 내가 인간이 견디는 고통을 못 견뎌낼 리 없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미카엘의 몸은 자꾸만 기울어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태훈의 발꿈치가 미카엘의 관자놀이에 들어가면서 그의 몸이 바닥에 늘어졌다.
“말도 안 되는…… 인간에게 진다고?”
“맨날 위에서 신선놀음하던 너희가 몸을 써본 적이나 있겠어? 항상 마법이나 신력에 의지했겠지.”
태훈은 등을 돌려 절대존재에게로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미카엘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우리의 비원을 망치게 둘 순 없다.”
그 순간 발목을 잡은 미카엘의 손에서 빛이 났다.
공간은 소멸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1급신들의 피난처.
미카엘은 태훈을 공간 밖으로 데려가려 했다.
그 순간 미카엘의 시야가 바뀌었다.
공간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태훈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어깨를 낚아채고 있는 알포네가 보였다.
[알포네???]
[여어, 반갑다. 마지막에 대어를 낚을 줄이야.]
알포네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태훈을 통해 내부의 상황을 보던 그는 결정적일 때 태훈을 밀어내고 자신이 대신 소원을 낚아챌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이 나타나자 계획을 바꾸어 태훈을 돕기로 마음의 결정을 한 것.
[미련한. 끝까지 숭고한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허울 좋은 말로 포장하지 마. 결국 잇속을 위해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려는 주제에.]
[정말이지 미련하구나. 겨우 이 정도로 우리의 비원이…….]
[어디 한번 해보시지.]
?
공간 밖에서 알포네와 미카엘이 싸우고 있을 때 태훈은 절대자와 독대하고 있었다.
“원래의 세계를 돌려줘.”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라면.”
절대존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덮었다.
그러곤 그것을 태훈에게 건네주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이 시간 순으로 적혀 있다. 원하는 순간의 책장을 펼쳐라.”
“그거면 되는 거야?”
“그거면 된다.”
태훈은 머뭇거리며 책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책을 훑어보더니 한쪽을 골라 다시 절대자에게 건네주었다.
“소원은 한 가지만 빌 수 있나?”
“상반되는 소원만 아니라면 복수도 가능하다.”
“포인트…… 에 관련된 모든 것을 없애줘.”
그러자 책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책에서 시작된 빛은 태훈과 절대자를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절대자의 말을 마지막으로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태훈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283이 서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말이 없으셔서.”
“우리……. 구면인가요?”
“네? 그럴 리가요?”
태훈이 선택한 것은 포장마차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저승에 갔을 때였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린 뒤에 283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시스템이 어떻게 되나요?”
“살아생전 착한 일과 나쁜 일에 대한 점수가 매겨지죠. 거기서 0점을 기준으로 마이너스면 점수대로 지옥을. 플러스가 된 점수가 있다면 다시 한번 환생이 가능합니다.”
“누적 점수 같은 게 있나요? 다음 생에 쓸 수 있는 점수 같은 거…….”
“그런 건 없습니다. 그러면 살고 싶으신 세계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포인트 개념이 없어진 것을 안 태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국으로 가는 문이 있어야 할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태훈은 한 세계를 골랐다.
매드니안으로 태어났던 그 세계였다.
“신분은 랜덤입니다. 부디 좋은 환경을 만나시길.”
그렇게 태어난 태훈의 신분은 가난한 기사의 아들.
그는 기사의 길을 걷다가 16세가 되던 해에 집을 나서기로 작정했다.
그러자 소꿉친구가 그런 그를 나무랐다.
“기사가 싫다고 집을 나간다니. 난 무조건 기사로 성공할 거야.”
“난 만날 사람이 있어. 유리아, 넌 남쪽으로 가도록 해. 카나리스가 좋겠다.”
“카나리스? 거긴 왜? 난 제국 기사가 될 거라고.”
“카나리스에 가면 알이라는 수호 기사가 있을 거야. 그를 만나면 너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네가 카니르스이 수호 기사를 어찌 알아?”
“그럼 난 간다.”
태훈은 그대로 한 귀족 저택가에 다다랐다.
문을 두드리자 한 기사가 나타나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태훈은 저택의 한 창문을 바라보며 힘차게 말했다.
“이 집 영애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