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그는 오늘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열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문득 자신의 카드를 꺼냈다.
‘이제 조금만 더 모으면 된다.’
목표 금액의 9할을 모은 그는 웃음을 지었다.
최근 한 명으로부터 후한 인센티브를 받으면서 그의 목표가 한층 가까워진 것.
“어이, 얼마나 모았어?”
“곧이야. 평균으로 번다 치면 한 이백 년 정도?”
“부럽네, 난 아직 한참 남았는데.”
“다음번 삶은 아주 호화롭게 살 거야.”
“아, 나는 어디 VIP 배당 안 되려나.”
“그건 순전히 운이지 뭐.”
다른 자들은 그를 몹시 부러워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와서는 손목을 낚아채자 당황해했다.
“오랜만이네요.”
“네? 누구세요?”
“아, 얼굴이 바뀌어서 기억 못 하시려나.”
“절 아세요?”
“당신, 283 맞죠?”
자신의 번호를 알고 있기에 그는 당황했다.
행색을 보아하니 저승에서 일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순간 그는 자신에게서 기억 보존 앰플을 사 갔던 몇몇 사람들을 기억해냈다.
“호, 혹시 앰플을…….”
“네, 맞습니다.”
“이, 이런. 이쪽으로 오세요.”
다른 자들 앞에서 불법을 버젓이 떠들 순 없었기에 283은 그를 한적한 곳으로 데려갔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283은 그를 나무랐다.
“누구신지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만 그렇게 떠들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상황이 급박해서 미안합니다. 도움을 좀 받고 싶어서요.”
283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자신과 거래를 텄던 자들은 대부분 많은 포인트를 가지고 저승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 두둑이 인센티브를 받는다면 자신의 계획이 더 당겨질 수 있었다.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혹시 카드를 보여주시겠습니까?”
“미안하지만 카드는 없습니다.”
“네? 그게 무슨……. 접수처에서 받지 못했습니까?”
태훈은 그제야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설명을 듣는 283의 표정은 점점 회색빛이 되어갔다.
“그…….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사망해서 오신 게 아니라 신들이 다니는 비공식루트…….”
“이쪽이 제가 있던 세계의 전직 관리자입니다.”
“반갑다. 뭐 전직이지만…….”
283은 태훈과 이미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승에서 오랜 세월 일했지만 살아 있는 자가 저승으로 온 경우는 처음이었다.
283이 말문을 잇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자 태훈이 그를 달랬다.
“당황스러운 건 알지만 지금 시간이 급합니다. 우리를 저 문 안쪽으로 데려다줄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저 문을 통과하는 건 죽은 자들뿐이에요!”
283은 주위를 신경 쓰며 신경질 적으로 대답했다.
불법 경로로 저승으로 잠입한 산 자와 대화하는 게 어떤 처벌일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부탁한다는 것 아닙니까. 대신 공짜는 아닙니다.”
태훈은 자신이 가진 포인트를 모두 주겠다고 대답했다.
“죽은 사람도 아니면서 어떻게 포인트를 준다는 겁니까? 그리고 아무리 포인트를 준다한들 그런 짓을 저질렀다간 바로…….”
“바로 소멸이겠지.”
이미르는 283의 어깨에 팔을 올려 어깨동무를 하며 속삭였다.
“상황을 보아하니 네 녀석이 불법으로 저 녀석을 봐준 것 같은데.”
“그……. 그럴 리가요.”
283은 시치미를 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이미르는 더욱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네 녀석을 꼰지를 수 있어. 증거는 지금 내 옆에 있으니까.”
테훈을 가리키며 증거라 하자 283의 등에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워……. 원하는 게 뭡니까?”
“별거 없어. 우리를 저 안으로 들어가게만 해주면 돼.”
“하, 하지만 그건…….”
“잘 생각해. 이대로 끌려갈지 우릴 도와주고 저 녀석이 가진 포인트를 받을지. 전직이긴 하지만 신으로서 장담하지. 저 녀석이 가진 포인트는 어마어마하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여기 오기 전에 수천만 명의 목숨을 살렸거든.”
“수……. 수천만 명?”
283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물론 여자의 말이 거짓일 수 있었지만 그녀의 기세나 표정은 그런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그런 녀석이 포인트를 다 주겠다잖아. 이대로 소멸을 할지. 아니면 수백, 수천 번 환생할 수 있는 포인트를 벌지. 나라면 현명하게 행동하겠어.”
“…….”
283은 혼란스러워했다.
갑작스럽게 평생 겪어보지 못한 상황들이 연달아 일어나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태훈을 향해 말했다.
“그 약속 꼭 지키십시오.”
태훈이 283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믿어줘서 다행입니다.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저길 어떻게 들어갈 건데?”
이미르가 묻자 283은 게이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전용 문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지키는 자가 없어?”
“있죠. 그러니 변장을 해야 합니다.”
283은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혼자서 게이트 쪽으로 사라졌다.
“우리 꼰지르는 거 아니야?”
“그렇진 않을 거예요. 제가 걸리면 저 사람도 그냥 넘어가지 못해요. 그리고 저기……. 무슨 일인지 물으시면 대답하기가 조금…….”
태훈은 자신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났다고는 말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동안의 일을 통틀어 이미르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묻지는 않으마. 넌 정상적인 경로의 존재가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너랑 나는 원하는 것만 이루면 되는 거야. 난 내 원래 위치로 복직하고 넌 네가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닌가.”
“그렇죠.”
“그럼 됐다.”
둘은 아무 말 없이 283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잠시 후 나타난 283의 손에는 검은 옷이 들려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디자인의 옷이었다.
갈아입으라는 말에 옷을 갈아입으니 영락없이 그와 같은 소속처럼 보였다.
“조심히 따라오십쇼. 누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마시구요.”
“신원 확인 같은 건 안합니까?”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세요.”
태훈과 이미르는 그의 뒤를 따라 게이트 쪽으로 걸어갔다.
망자들이 드나드는 게이트를 지나 한적한 곳으로 가니 암벽이 나타났고 그 암벽에는 두터운 철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팔이 여럿 달린 무서운 인상의 남성이 서 있었다.
“수고하십니다.”
283이 그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이며 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이에 태훈과 이미르도 거구의 남성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으나 말을 하진 않았다.
거구의 남성은 283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여어, 오늘 벌써 퇴근인가?”
“아, 네. 오늘 제 차례는 끝나서요.”
“그래, 수고했다.”
283이 남성을 지나치고 태훈과 이미르도 무사히 남성을 지나치는 듯했다.
그러나 남성이 그들을 불러 세웠다.
“뒤에 그 녀석들은 누구지? 못 보던 녀석들인데.”
“아, 신입입니다.”
“신입? 새로 사람을 뽑는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아하, 수문장님께는 아직 말이 안 갔나 보군요. 제 후임들입니다.”
“흠, 그래? 그럼 출입증이라도 보여주게.”
남성이 태훈과 이미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보여줄 출입증이 있을 리 없었다.
283이 잽싸게 그들 사이로 끼어들며 말했다.
“아하, 지금 출입증 가지러 가는 길이거든요. 인사과에서 직접 가지러 오라고 해서.”
“뭐야? 이 녀석들이 일을 무슨 그따위로 하는 거지? 내가 한마디 해야겠군.”
“아니오, 그러지 말아주세요. 저희가 밉보여요.”
283은 쩔쩔 매며 남성을 말렸다.
실제로 인사과에 쩔쩔 매는 건지 거구의 남성은 그런 그를 향해 안 됐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쯧, 알았다.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해야겠구만.”
그렇게 거구의 남성은 핀잔을 주면서도 굳게 닫힌 문의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어주었다.
“감사합니다. 고생하세요.”
“어, 수고해라.”
무사히 안으로 들어온 283과 태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무사히 들어왔군요.”
“이제 됐죠? 포인트는 정상적으로 사망하신 뒤에 주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다음에 꼭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여긴 왜 온 겁니까?”
283은 태훈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이미르가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며 가로막았다.
“알면 다쳐. 모르는 게 약일걸?”
“아,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아, 그리고 혹여 잡히더라도 저는 모르는 사람입니까?”
그렇게 신신당부를 한 283은 잽싸게 자리를 떴다.
게이트를 지나오니 이미르도 익숙한 광경이었고 태훈도 한번 보았던 광경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상아색의 거대한 문이 보였다.
“저깄네요.”
“미리 정하고 가. 어떻게 부술 참이냐.”
“전력으로 치받아야죠. 그런데 신들이 우리가 여깄는 걸 모를까요?”
“살아 있는 채로 왔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할걸. 그리고 망자들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볼 순 없으니 아마 눈치는 못챌 거다.”
태훈은 드래곤하트가 담긴 아티펙트를 만지작거렸다.
거기다 저승이라 그런지 정령계만큼이나 농후한 마나가 느껴졌다.
‘체력도 충분하고 해볼 만해. 전력으로 딱 한순간에 해치운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을 때 이미르가 말했다.
“실수 없게 해라. 기회는 단 한 번이야. 소란이 일면 놈들도 눈치챌 거야.”
“알겠습니다.”
태훈은 조용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다른 망자나 일하는 사람들도 그가 평범한 직원이라 생각한 듯 아무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태훈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지척까지 다가가자 그는 순간적으로 모든 힘을 내뿜기 시작했다.
화악-
기류가 급변하며 그를 중심으로 공기가 빨려들어 갔다.
그리고 일순간 다시 내뿜자 그를 중심으로 회오리가 일었다.
지잉-
그의 오른손에 삼색 기운이 서렸다.
붉은 기운과 푸른 기운, 그리고 하얀색 기운이 그의 오른손과 팔, 어깨를 감쌌다.
“깨져 버려!”
외마디 외침과 함께 그의 주먹이 상아색 문을 강타했다.
콰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굉음이 사방으로 퍼졌다.
문은 깨어지지 않았다.
그의 주먹이 닿은 자리가 움푹 패이긴 했지만 문은 건재했다.
그 순간 주위의 시선이 모두 태훈에게 쏠렸다.
‘낭패다. 이 정도로 단단할 줄이야.’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렸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마음이 급해졌다.
“이렇게 된 거…….”
태훈은 주위의 신경을 쓰지 않고 힘을 쓰기 시작했다.
아티펙트의 마나를 모두 끌어올려 유일하게 아는 9클래스 주문을 왼손에 담았다.
“갓 스피어!”
새하얀 창이 그의 오른손에 생성되었다.
나라 하나쯤은 괴멸 시킬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창.
그 순간 태훈의 다리가 휘청였다.
그의 몸에 있는 마나가 한순간에 고갈되며 현기증이 왔다.
하지만 그는 굳건하게 버티며 오른손을 내질렀다.
새하얀 창이 문에 닿는 순간 거대한 섬광이 번쩍였다.
?
[정신 차려!]
귓가를 때리는 외침에 태훈은 눈을 떴다.
눈앞에는 금발의 소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느낀 이유는 소년의 뒤로 태양처럼 빛나는 것이 떠 있기 때문이었다.
“넌……. 알포네…….”
[정신이 드나? 그러면 이 상황을 설명해 봐.]
“설명……. 무슨 설명?”
[저거.]
알포네는 빛나고 있는 구체를 향해 가리키며 말했다.
[내 봉인은 깨졌고 저게 내 힘과 존재를 갉아 먹어치우고 있어. 저게 대체 뭐야?]
“몰라, 조금만 더 자게 내버려 둬.”
[정신 안차려?! 잠들면 죽는 거야!]
알포네의 외침에도 태훈은 무거운 눈꺼풀을 지탱하기 힘들었다.
몽롱한 느낌이 전신을 휘감고 있었고 세상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마치 잔잔한 호수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이런 데서 자고 있지?’
태훈은 간신히 눈을 치켜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빛나는 구체가 떠 있고 그 구체를 향해 수많은 작은 빛들이 소용돌이처럼 흐르고 있었다.
“저게 뭐지?”
[내가 묻고 싶다. 1급신 놈들도 날 지우진 못했는데 저 구체가 날 집어삼키고 있다고. 대체 뭘 하고 있던 거야?]
“난……. 문을……. 아!”
그 순간 잠이 확 깨며 정신을 차린 태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어두컴컴한 공간에 부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심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알포네를 확인했다.
“뭐지? 난 분명 저승문을 부수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야? 이해가 되게 설명을 해봐.]
태훈은 천국으로 가는 문을 부수려던 찰나였다고 설명했다.
[죽어서 저승을 간 거냐?]
“아냐, 난 살아 있었어. 그리고 분명 전력을 다해 문을 때렸는데?”
[멍청하긴, 살아 있는 것이 저승에 들어왔는데 그놈들이 모를 것 같나? 그놈들이 널 내버려둔 이유는 네가 그 문에 손을 댈 것을 알았기 때문이겠지.]
“뭐야, 그럼…….”
[넌 스스로 종말의 방아쇠를 당긴 거다.]
태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