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엘프들은 태훈의 방문에 고심하는 듯했다.
태훈과 이미르가 엘프가 자리 잡은 숲의 경계에 도착한 지 한 시간이 흘렀다.
그곳에서 쉽사리 순찰을 도는 엘프들과 만났다.
태훈은 이미르를 전 신이라고 소개하려다가 이내 몸종이라고 소개했다.
“이 몸이 몸종이라고?”
“지금은 신이 아니잖아요. 저들도 신탁을 알 텐데 신이라고 해봐야 설명하는 데 오래 걸리기만 할 것 같은데요. 뭐 쉽게 믿어주지도 않겠지만.”
“여왕한테는 한번 빙의를 해봤어. 그 녀석은 날 알 거다.”
“어쨌든 설명할 시간 없잖아요. 그냥 몸종으로 해요.”
순찰을 돌던 엘프들은 둘에게 기다리라고 하고는 한 명이 남고 한 명이 알리러 갔다.
하지만 세 시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기별이 오지 않았다.
태훈은 자신들을 지키고 있는 엘프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자리 잡은 곳이 이곳에서 먼가?”
“한 시간 거립니다. 전력으로 갔다면 반 시간이면 충분하죠.”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그건 저도 모릅니다.”
엘프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본래 인간과는 말도 걸지 않는 엘프들이지만 태훈은 조금 예외였다.
자신들에게 살 곳을 내어준 인물이었기에 아주 냉대를 하진 않았다.
“너무 오래 걸리는군요.”
“저들도 신탁을 들었을 테니까. 이게 바로 신과 척을 지게 되면 받는 대우다.”
“쳇.”
“더군다나 엘프들은 이곳에서 모든 종족에게 천대받는 것들이야. 신에게마저 척을 지게 되면 정말 발붙일 곳이 없는 거지.”
“그럼 우릴 거절한다는 의미인가요?”
“기다려 보면 알겠지.”
시간이 흐를수록 태훈의 불안감은 높아져 갔다.
만약 엘프들이 그를 적대한다면 엘프들과 싸우거나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잠시 후, 기다리다 지친 태훈이 직접 찾아가려고 일어서는 찰나 소식을 알리겠다고 떠났던 엘프가 돌아왔다.
“여왕님이 뵙자고 하십니다. 다만 모든 무장은 지금 해제하겠습니다.”
태훈은 군말 없이 모든 장비를 내주었다.
다만 루세프가 힘을 담아주었던 아티펙트만큼은 품에 간직해 두었다.
깊은 숲으로 들어갈수록 울창한 숲이 펼쳐졌다.
‘겨울에 봤을 땐 척박한 숲이었는데. 봄이라고 이렇게 달라지나.’
한 시간쯤 걷자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집들은 나무 위에 있었다.
아름드리나무 위에는 나무와 풀로 만든 집들이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특이한 나무가 있었다.
살아 있는 나무였지만 자라난 형태가 기이했다.
보통의 나무와는 달리 여러 개의 기둥이 한데 모인 형태로 안쪽에 공간이 생긴 형태였다.
“특이한 나무네요.”
“제대로 짚었군. 저게 세계수다.”
“저것이 세계수……?”
태훈은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볼품없는 크기와 모양에 실망했다.
“진짜가 아니야. 세계수의 가지를 가져와 심은 거지. 아마 저게 엘프들의 궁전일 거다.”
“확실히 다른 나무와 달라 보이긴 하네요.”
안쪽으로 들어가자 상당히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몇 가지 집기와 함께 엘프 여왕이 있었다.
구면인 얼굴이었다.
“어서 오시오, 인간의 군주여.”
“오랜만이오, 여왕.”
“말투는 여전히 건방지군요. 그대는 지금 만인의 적일 텐데 어찌 그리 태평한 말투인지.”
“엘프들에게는 빚이 있지.”
“확실히 빚은 있지만 신의 뜻을 거역할 정도로 큰 빚은 아니라 생각이 드는군요. 그리고 그건 정당한 거래였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우릴 내쫓을 텐가?”
“일단 말은 들어보자 하여 들이라 했습니다. 신탁 때문에 경황이 없을진대 오늘은 무슨 일로?”
“여왕만이 알고 있는 세계수의 위치를 알고 싶어서.”
“세계수의 위치?”
여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먼 옛날 불사의 몸을 원하는 몇몇 인간이 세계수의 위치를 알고 싶어 하긴 했는데……. 당신도 불사의 몸을 얻고 싶다면 그건 헛된…….”
“불사엔 관심 없어. 아직까진.”
“그렇다면 왜 세계수의 위치를 묻는 거죠?”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작게는 내가 살기 위해서. 크게는 이 세계를 위해서야.”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요. 그대는 신과 등을 진 자. 종족의 운명을 걸 정도로 당신을 도와줄 은혜는 아닙니다.”
“흠, 엘프의 신뢰는 이 정도인가.”
“예전엔 신이 당신을 간택했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어쩌다 그 지경이 됐는지는 몰라도 이젠 돌아가 주십시오.”
완강한 여왕의 자세에 태훈은 이미르를 쳐다보았다.
자신은 할 만큼 했으니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미르는 시큰둥했다.
“힘으로라도 해보지그래.”
“그러고 싶긴 한데 왠지 죽어도 입을 안 열 것 같아서요. 일단 대화로 풀 수 있으면 대화로 해보자고요.”
“호? 이제 성인이 다 된 건가?”
“아직 싸울 일이 많은데 벌써부터 힘 낭비하기 싫어서요. 아니면 예전만큼의 권위가 없어서 힘드시려나?”
태훈의 비아냥 섞인 설득에 이미르는 앞으로 나섰다.
“엘프 여왕, 세계수의 위치를 말해라. 그리하면 추후 너희 종족에게 쓸 만한 축복을 내려주지.”
여왕 입장에선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네 주인에 대한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다 못해 건방지구나.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인간들에게 천시를 받는다지만 한낱 몸종에게 이런 대우를 받을 몸이 아니다.”
여왕은 말은 점잖게 말하지만 대노하고 있었다.
이에 태훈은 이미르의 소개를 해주었다.
여왕은 처음에는 황당해하면서도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협정 때 빙의를 한 것.
이미르가 신으로 있을 때 있었던 엘프의 역사를 줄줄이 꿰자 마지못해 믿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신이 바뀌었다는 말입니까?”
“뭐 그렇지.”
“그렇다면 내 대답은 같습니다. 오히려 당신들을 거절할 합당한 이유가 되겠네요.”
“내가 신으로 되돌아가면 그땐 후회하지 않을 텐가?”
“지금 당신들은 현재의 신에게 쫓기는 몸. 어느 쪽을 택하든 리스크가 있다면 나는 지금의 평화를 선택하겠습니다.”
여왕은 모험보다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듯했다.
“합리적 선택이라. 뭐 네 입장은 충분히 이해해. 여기 말고도 세계수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많거든.”
이미르의 허세였다.
물론 어떻게든 조력자와 연락을 취한다면 세계수의 위치를 알 수 있겠지만 위험부담이 따른다.
“그때 가서 울며불며 질질 짜도 난 가차 없어. 네 종족을 그냥 대륙에서 지워주마. 아니, 그것보단 지능을 떨어뜨려 길거리 몬스터 정도로 타락시켜 주지.”
“허…… 허세군요. 차라리 지금 당신들을 죽이고 우리 종족에게 축복을 내려달라고 하면…….”
“하하, 어디 한번 해봐. 여기 이 녀석은 신탁을 받고 신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 그건 변함이 없지. 네 녀석도 하늘의 섬광을 보았겠지?”
엘프 여왕은 침을 삼켰다.
허공에서 일어난 대폭발.
그것으로 전 대륙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왕이 태훈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걸 크로이츠, 당신이 했다는 건가?”
“아, 조금 진땀은 뺐지만.”
여왕은 숨을 죽이고 이미르와 태훈의 눈치를 살살 보았다.
그러자 이미르가 쐐기를 박았다.
“적어도 이곳을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어. 뭐 시험해 봐도 좋다.”
이미르가 태훈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하자 여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같은 자세로 생각에 빠져든 여왕은 잠시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당신들을 도우면 지금의 신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내가 장담하지. 그 녀석은 지금 지상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여왕이 물었고 태훈도 그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라 귀를 기울였다.
이미르의 말로는 정령계를 물질화 시켜 소멸됐기에 정령계를 원상 복구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라 했다.
“정령계가 없는 게 타격이 큽니까?”
“당장 계절이 마비된다. 그리고 자연 현상이 엉망이 되지.”
“그런데 정령계를 물질화시켜서 충돌시킨 겁니까?”
“충돌시키자는 건 네 이야기였어. 애당초 원래대로 돌려놓을 작정이었다.”
태훈은 이미르를 데리고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그럼 지금 중간계가 엉망이란 소립니까?”
“그런 셈이지.”
“그럼 그때 말렸어야죠.”
“말렸다면? 그럼 지금쯤 세상은 존재하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그땐 내가 신이었기에 정령섬이 없어지면 바로 복구할 생각이었어. 그럴 새도 없이 인간으로 쫓겨났지만.”
“그……. 그렇군요.”
“아무튼 지금 신은 뒷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다. 상급신의 명령도 명령이지만 자기가 맡은 차원의 관리가 우선이니까.”
납득한 태훈은 다시 여왕에게로 다가갔다.
“어떻게, 생각은 정리됐나?”
“좋습니다. 다만 세계수의 위치만 알려 드릴 겁니다. 그 외엔…….”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아.”
“……따라오십시오.”
여왕은 둘은 데리고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다른 자그마한 집으로 데려갔는데 한두 사람이 살기 딱 좋은 아담한 사이즈의 통나무집이었다.
“여긴 창고인가?”
“내 거처입니다.”
“거처? 조금 전의 그곳이 궁 아닌가?”
“거긴 집무를 보는 곳. 여기가 숙식을 해결하는 곳입니다.”
“그렇군. 아담하니 좋네.”
여왕은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펼쳤다.
오래된 냄새가 풀풀 나는 책을 열자 접혀진 종이가 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펼치자 지도가 나왔다.
“이게 세계수가 있는 곳이 그려진 지도인가?”
“그렇습니다.”
“세계수라면 엘프들에겐 중요한 것 아닌가? 보관이 너무 어설픈데?”
“애당초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는 인물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태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도를 집어 들었다.
“가져가도 되나?”
“지도는 다시 만들면 그만입니다. 다른 곳에 유출할 일은 없어 보이니 가져가십시오.”
“고맙군. 이걸로 빚은 없어.”
태훈이 먼저 집을 나섰다.
이미르도 뒤따르면서 여왕에게 말했다.
“고생했다. 쉬어.”
“저기, 나중에 꼭 부탁을…….”
“걱정 마라, 잊어먹지 않는다.”
둘은 다시 말에 올라 마을을 벗어났다.
엘프들이 사는 영역을 벗어나 숲의 경계에 다다랐을 때 둘은 말에서 내려 지도를 확인했다.
하지만 지도는 태훈이 알고 있는 지도와는 모양이 달랐다.
“이거 지도 맞습니까? 대륙 지형이 제가 아는 것과는 많이 다른데요.”
“세계수가 언제부터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 세상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존재했다. 당연히 지형이 바뀌었지.”
“아, 그렇군요. 그럼 이 표식은 지금의 어딥니까? 제가 보기엔 제노비아의 동쪽쯤으로 보이는데.”
“아마 맞을 거다. 자세한 건 이 근처까지 가봐야겠군.”
“지형 이름이라도 써 있었다면 좋았겠는데요.”
지도에 문자라곤 일절 없었다.
아마도 지도가 타인에게 들어가는 상황을 고려했는지 오로지 그림뿐이었다.
둘은 최소한으로 쉬며 말을 달렸다.
그리고 인간들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순간 가지고 왔던 물건들로 변장을 했다.
겉보기엔 영락없는 떠돌이 모험가였다.
“돈이 좀 있으니 물건을 사서 행상인으로 변장을 하죠. 모험가보단 행상인이 더 이동하기 편합니다.”
태훈은 세레니스 제국의 외딴 마을에 들러 수레를 샀다.
타고 있던 말로 수레를 끌게 하고 갑옷과 검, 방패 등을 구입했다.
그렇게 꾸며놓으니 영락없는 행상인이었다.
“난 좀 자마. 인간의 몸이니 금방 체력이 떨어지는군.”
태훈이 알겠다고 하기도 전에 이미르는 짐칸에서 곯아떨어졌다.
세레니스 제국의 영역에서 벗어날 땐 검문이 있었다.
태훈이 식자재를 살 겸 잠깐 들른 잡화점에선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세레니스 제국에도 태훈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는 것.
그리고 다른 모든 국가에서도 비슷한 처분이 내려졌다는 것이었다.
특히 얀 제국에서는 따로 척살대까지 꾸렸다는 정보도 있었다.
‘그 노망난 늙은이가 애간장이 타나 보군.’
태훈은 더욱 조심하기로 하고는 세레니스의 국경을 벗어나 제노비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