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각국에 서신을 보내고 3일 뒤.
이른 아침부터 요새에 전령이 찾아왔다.
세레니스의 5황녀가 보낸 전령을 맞이한 알은 크게 당황해하며 태훈을 급히 찾았다.
“뭐?”
“총국에서 왕자님을 새로운 위협이라고 지명했답니다. 현재 세레니스에선 정벌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답니다.”
그 말에 태훈은 알이 들고 있는 서신을 빼앗아 읽어 내려갔다.
세레니스에는 군수물자를 요청해 놓은 상태였는데 군수물자 대신 엉뚱한 답신이 와 있었다.
서신을 읽은 태훈의 미간이 좁혀졌다.
“신탁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이미르는 여기에…….”
“놀랄 것 없다. 신이 공석일 수는 없으니 다른 놈을 내 자리에 앉힌 거지.”
옆에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이미르가 탄식이 섞인 말로 설명했다.
“그럼 새로운 신이 저를 적으로 지목했단 말입니까? 무슨 죄목으로…….”
“신들은 하위 생명체들을 직접 적으로 죽일 수 없어. 고통과 시련 등을 줄 수 있지. 그러니 간접적으로 널 죽이려는 거다. 네가 마지막 퍼즐이라며?”
그 말에 태훈도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이 자식들이…….”
“세레니스 쪽은 5황녀님이 시간을 끌고 있다고는 하나 다른 국가들이 언제 군대를 움직일지 모릅니다.”
“바로 움직이는 나라는 없을 거야. 사태 파악을 하고 있겠지.”
“그렇지만 금방 움직일 거다. 네 말과 신탁.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무게감이 있을 것 같나?”
이미르의 말이 맞았다.
불과 한 시간도 안 되어 전령 하나가 더 도착했다.
얀 제국의 투자를 얻어내기로 하여 보내놨던 공관들이 돌아온 것.
그들은 얀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군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 작자가…….’
알이 돌아온 공관에게 묻자 그는 3일 이내에 출발할 것 같다고 했다.
“병력은?”
“족히 5만은 되어 보였습니다.”
“5만…….”
요새의 병력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숫자였다.
얀 제국이 제일 먼저 움직인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신탁의 내용 중에 태훈을 처형한 자에게는 신이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고 되어 있었던 것.
그만큼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면서까지 마지막 퍼즐을 끼워 맞추려는 1급신들의 의지였다.
“새로운 신이 누굽니까? 당장 만나서 사정을 말해야겠습니다.”
“사정? 뭐라고 설명한 건데?”
“있는 그대로요. 1급신들이 뭘 꾸미는지.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까지요.”
“1급신들의 말은 절대적이야. 이곳의 신 따위는 말단 중의 말단. 너라면 일반 기사가 사령관의 말을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미르가 말끝을 흐렸다.
알과 태훈의 시선이 이미르에게 향했을 때.
“비단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닐걸.”
뚜벅뚜벅-
발소리와 나타난 것은 루세프였다.
저주가 풀려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들은 그야말로 지상 최강의 생명체.
그들은 폴리모프라는 고대 드래곤의 주술로 원하는 생명체의 모습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드래고니안 시절이었던 루세프의 모습이었다.
“루세프…….”
루세프는 대답대신 짧은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소식은 들었나?”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찾아온 겁니다.”
“너희에게도 신탁이 내려왔나?”
루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이츠라는 인간을 찾아 말살하라는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이에 조금 전까지 부족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족장인 너의 선택은?”
“저희는 오랜 시간 신의 저주로 음지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순 없습니다.”
사실상 신탁을 따르겠다는 말에 태훈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루세프의 선택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받은 은혜를 저버리는 것도 드래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짓. 우리는 이제 이곳을 떠납니다. 앞으로 일주일. 일주일간 당신을 찾지 않겠습니다.”
루세프는 일족을 데리고 크로이츠 영지를 떠날 것을 약속했다.
일주일간 찾지 않겠다는 말은 그만큼의 시간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루세프 나름의 배려였다.
“이런 식으로밖에 대답을 드릴 수 없어 정말 유감입니다.”
“아니야, 모든 건 빌어먹을 신 때문이지. 그동안 고마웠어.”
루세프가 떠나려 하자 이미르가 루세프를 불러 세웠다.
루세프도 이미르가 이미 신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르는 아티팩트를 내밀며 말했다.
“여기다 네 녀석의 마나 하트를 일부 넣어줘.”
마나 하트는 드래곤의 마나를 생산해 내는 기관이었다.
쉽게 말해 혈액을 만들어내는 심장이 있다면 마나를 만들어내는 심장 같은 개념이었다.
“당신에게는 우리의 저주를 풀어준 빚이 있죠.”
루세프는 기꺼이 자신의 마나 하트 일부를 아티팩트에 나누어 담아 주었다.
“그럼.”
루세프가 떠나자 태훈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앞으로 도망 다녀야 할 처지인데 필요할 거야.”
아티팩트를 받아 들자 엄청난 마나의 양이 느껴졌다.
“마르지 않는 마나 생성기 같은 거지. 그것만 있으면 네 마나가 고갈될 염려는 없을 거다.”
“고맙습니다.”
이미르는 그에게 도망칠 것을 바라고 있었다.
‘이젠 도망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런데 어디로 간단 말인가.’
태훈이 절망하고 있을 때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레이첼이 앉아서 한숨을 내쉬는 태훈을 발견했다.
레이첼이 그를 달래주는 사이 이미르가 그를 유심히 보다가 말을 꺼냈다.
“이렇게 된 거 도박 한번 해볼 텐가?”
“도박이라뇨?”
“신 놈들이나 마데우스 놈이나 공통점이 있잖나. 그 천국의 문을 부숴 버리는 거지.”
“그게 가당키나 합니까? 그러려면 저승으로 가야 하는데 죽으란 말입니까?”
“죽긴 왜 죽나. 살아서 가면 되지.”
이미르는 신들만이 알 수 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각 차원에는 세계수의 열매라는 것이 있지.”
“그건 압니다. 엘프들이 가진…….”
“그것과는 달라. 저승에는 세계수라는 게 있어.”
“아, 그건 압니다.”
“그것의 열매가 각 차원의 열매로 존재해. 쉽게 말하자면 차원의 핵 같은 거지.”
이미르는 저승에 세계수의 뿌리와 기둥이있고 그 줄기에서 자란 열매가 각 차원의 핵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그 핵과 연결되어 있는 줄기를 따라가면 저승으로 가는 문이 있다고 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지금은 바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옛날에는 우리 같은 차원을 담당하는 신들은 그 문을 통해 저승으로 갈 수 있었어.”
“그럼 그게 어딨습니까?”
“문제는 그거야. 어디 있는지 나는 몰라.”
“그게 말이 됩니까? 신들이 지나다니는 문이라면서요.”
“말했지. 지금은 바로 갈 수 있다고. 그 문은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둔 거야. 내가 신이 되었을 무렵 때 그 문은 이용하지 않았어.”
“그럼 아무 의미 없잖습니까.”
“알고 있는 인물이 있을 수 있지.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이미르는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그 방향은 엘프가 땅을 부여받은 곳이었다.
“엘프들이 알고 있다고요?”
“엘프들이 가진 것과 왜 이름이 같겠어? 그 엘프들의 나무가 차원의 핵 근처에서 자라기 때문이야.”
“엘프들의 세계수 나무는 지도자만이 안다고 했는데.”
“그럼 엘프 여왕을 만나러 가면 되겠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길에 뭔가 길이 보이자 태훈의 안색이 돌아왔다.
남은 문제는 식구들의 문제였다.
크로이츠라는 이름이 적나라하게 내걸린 이상 영지를 비롯해 레이첼과 그 밖의 사람들이 모두 위험했다.
“이곳이 문제군. 당장 얀 제국 군대가 쳐들어오면…….”
“이곳은 본래 세레니스의 영토였습니다. 반환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알의 말대로라면 이곳에 딸린 사람들은 세레니스 제국 소속이 되기 때문에 안전은 확보가 되었다.
오그리아에서 탈주한 2천여 명의 기마대와 그 밖의 인원을 합하면 3천의 인원.
그 인원으로 얀 제국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더욱이 다른 국가들도 등을 돌리는 것은 시간문제.
“적들이 노리는 것은 나 하나니 그것도 좋겠지. 레이첼은…….”
어떻게 해도 가장 걱정인 것은 레이첼이었다.
자신을 잡으려고 레이첼을 인질로 삼을 수 있었다.
이미 그런 전례도 한 번 있었기에 쉽사리 그녀의 거처를 결정하기 힘들었다.
“왕자님, 그럼 친가에 부탁을 해보시는 건…….”
“카나리스…….”
“로텐바르 님이나 아넬리아 님이라면…….”
카나리스에 의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비밀리에 진행해야 했지만 로텐바르가 마음이 걸렸다.
‘그 인간은 분명 이득이 큰 쪽에 따라 움직일 것이 분명한데.’
그렇지만 마땅히 레이첼을 부탁할 만한 곳이 없었다.
5황녀도 있었지만 그쪽은 얀 제국이 움직였다는 것을 알면 지지 않으려고 움직일 것이 뻔했다.
5황녀의 입지가 크다고는 하나 나라가 큰 만큼 정치적 입지들이 다양했다.
“일단 공국으로 가자.”
“히스렐다 공국 말씀입니까?”
“거긴 일단 자유국가니까. 아는 사람도 있고. 몸을 숨기기엔 나쁘지 않아.”
자신이 다른 곳에 맡겨진다는 말에 레이첼은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고 했지만 태훈은 그녀를 타일렀다.
“이제 얼마 후면 아이도 태어나니까 나랑 같이 돌아다니기는 힘들어. 나중에 꼭 찾아갈 테니까 기다려 줘.”
“알았어요…….”
레이첼도 자신이 반대해 봤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풀이 죽었다.
태훈은 그녀와 함께 파케 영애와 유리아를 딸려 보내기로 했다.
“세레니스에 전갈을 보내. 공왕직과 영토를 반납하겠다고. 소속 병사들이나 인력들도 모두 받아달라고 해. 나쁜 조건은 아닐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출발할 거지?”
“레이첼이 출발하면 바로 갈 겁니다.”
“좋다, 나도 간다.”
태훈은 이미르가 나서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분명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태훈이 직접 서신을 작성하여 전해주며 말했다.
“생각이 바뀌었어. 알, 네가 직접 가라.”
“서신은 다른 사람을 통해 보내도…….”
“아니, 이 서신을 전한 다음 넌 상황을 봐서 카나리스로 가. 가서 로텐바르 형님을 만나.”
“목적은요?”
“피난처가 둘이어서 나쁠 것은 없지. 가서 로텐바르 형님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레이첼을 받아줄 수 있는지 물어봐 줘.”
“하지만…….”
“이런 부탁은 너한테밖에 할 수 없어. 내 가족의 안전이 달린 문제야.”
“……알겠습니다.”
알이 서신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을 보자 태훈은 이미르와 함께 떠날 채비를 했다.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고 영지를 벗어나려 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앞을 막았다.
처음엔 움찔했지만 그들에게 적의가 없음을 알고 경계를 풀었다.
집사장을 맡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태훈에게 다가와 엎드리며 말했다.
“갈 곳 없는 저희를 받아주셨던 분을 이렇게 보내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택에서 일하는 자들도 소문을 듣고는 몰려온 것이다.
태훈은 그들에게 괜찮다며 그들을 달랬다.
오그리아의 탈영병들도 태훈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도 신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엔 그들도 맞서 싸우자는 자들도 있었다.
오갈 데 없는 자신들을 잡아주고 거처를 마련해 준 자를 버릴 순 없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은 오그리아의 병사들이었고 장막이 없어진 지금 고향의 가족들의 소식이 궁금한 자들이 더 많았다.
“가시는 여정이 무탈하시길 바랍니다.”
“당신과 싸울 수 있었던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시대의 흐름을 개인이 어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신탁에 맞선다는 것은 인간의 몸으론 받아내기 힘들죠. 이해합니다.”
집사장은 태훈에게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엘프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이 지도를 보고 가십시오. 사냥꾼들이 만든 지도이니 지름길로 빨리 갈 수 있을 겁니다.”
“배려 고맙소.”
태훈은 이미르와 함께 요새를 나섰다.
이에 오그리아 기마대의 대장이 말 두필을 끌고 왔다.
“가장 빠른 놈들로 준비했습니다. 이삼일 달려도 끄떡없을 겁니다.”
태훈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말에 올랐다.
둘이 요새를 빠져 나왔을 때는 오후.
계절은 초여름에 접어들 때였기에 따사로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