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딸칵-
스위치를 누르자 들어오는 전등.
17평짜리 원룸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느낌에 조심스레 침대 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태훈은 얼굴을 감싸며 세수하듯 문질렀다.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는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보았다.
알포네에게 육체를 내어준 후 그는 알포네 대신 봉인의 공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외부와의 연락 수단은 없었고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알포네는 자신의 능력으로 외부에서 벌어지는 얼마간의 일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훈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고 눈을 뜨니 후배인 남영이와 선술집에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정말 꿈인가?’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긴 꿈이었다.
그리고 정말 술자리에서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고 하면 후배가 있는 팀에서 만드는 신약을 알고 있는 것조차 의문이었다.
후배는 말한 적이 없었다.
태훈은 마나나 오리진을 사용해 보려 했지만 그런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 거지.’
머릿속이 뒤엉켜 있던 그는 핸드폰을 보았다.
날짜와 시간.
영락없이 후배로부터 신약 정보를 듣기 전이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그는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후배를 찾았다.
“어제 잠은 좀 잤어요?”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 잘 들어.”
태훈은 확신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난 과거 때 후배가 죽기 직전 자신에게 남겼던 자료들을 읊어주었다.
신약의 부작용과 윗선의 부정 내용을 말해 주었다.
후배는 그럴 리 없다며 처음엔 완강히 부정했지만 계속되는 태훈의 설득에 마지못해 알아보겠다며 실험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퇴근을 하던 태훈을 납치하듯 전날의 선술집으로 데려갔다.
“선배, 그 정보 누구한테서 들었어요?”
후배의 표정을 보아 그는 자신이 꿈을 꾼 것이 아님을 확신했다.
다만 후배의 혼란을 막기 위해 자신이 이세계를 갔다가 타임리프했다는 그런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윗선에 아는 사람이 있어. 그래서 찾아보니까 어때?”
“선배 말대로였어요. 이거 이대로 나가면 우리 팀만이 아니라 우리 회사 전체가 휘청일 거예요.”
“우선 신약 출시까지는 좀 더 있어야 되니까 증거를 모아. 그랬다가 확실한 증거가 모이면 터뜨려.”
“지금 저보고 내부고발 하라는 거예요?”
“안 그럼 너 살인자 취급받을걸?”
“그렇지만…….”
“네가 하기 힘들면 내가 할게. 자료만 모아줘. 터뜨리는 건 내가 할 테니까.”
후배를 타일러 돌려보낸 태훈은 집에 오자마자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겪었던 메드니안의 삶은 가짜가 아니야. 내가 봉인되어 있던 사이에 알포네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
그는 인터넷에서 자신과 비슷한 경험자가 있는지 찾아보려 했다.
그중에는 분명 돌아갈 만한 단서가 있을 게 분명했다.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기에 태훈은 밤새 인터넷을 뒤졌다.
외국어 사이트가 나오면 번역기를 돌려가며 정보를 모집했다.
새벽에 동이 터올 때쯤 그는 반포기 상태였다.
원하는 자료는커녕 이상한 소설이나 만화의 줄거리나 링크만 나올 뿐이었다.
밖으로 나가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곤 멍하니 빗소리를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런 게 인터넷에 있을 리 없는데.’
반면 자신이 하는 행동이 맞는지도 의문이 들었다.
애당초 과거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조차 흔치 않은 기회였다.
다만 자신은 과거로 돌아오길 바랐던 것이 아니었다.
메드니안, 크로이츠로서의 삶에 미련이 남았다.
발로 비벼 불을 끈 태훈은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누웠다.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태훈은 착잡한 마음을 뒤로 하고 잠을 청했다.
?
태훈이 일어났을 때는 밤이었다.
원래라면 휴일 중 하루를 자버렸다는 아쉬움에 짜증을 냈겠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마치 지금이 꿈꾸는 것 같네.’
태훈은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아직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지구로 돌아온 뒤 뭔가를 먹은 기억이 없었다.
냉장고에는 술안주뿐이었기에 태훈은 밖으로 나갔다.
밖은 아직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무념무상으로 정처 없이 걷던 그는 집 근처 해장국집에 들어가 간단히 배를 채웠다.
비가 어느 정도 그치자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걷기 시작했다.
‘어딜 가지. 이렇게 할 게 없었던가.’
모든 게 귀찮은 느낌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이세계에서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결국엔 왜 이 시간대로 다시 되돌아왔을까 하는 의문이 남았다.
빠아앙-
뒤쪽에서 들리는 경적 소리에 흠칫 놀란 그는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어느 샌가 인도가 아닌 차도로 걷고 있었다.
‘그만 돌아갈까…….’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려던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풍경이었기에 큰 도로를 찾기 위해 걸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젖은 노면 때문에 그의 질척거리는 발소리만 들렸다.
?
월요일이 되자 그는 회사로 향했다.
사실 회사에 가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만 전생에서 모든 걸 뒤집어쓰고 죽은 후배가 마음에 걸렸던 것.
출근하여 멍하니 앉아 있던 그에게 같은 부서의 동료가 다가왔다.
“태훈 씨, 뭐 해요?”
“아, 그냥 좀…….”
분명 자신보다 2년 늦게 들어온 남자 후배였다.
“역시 월요병은 힘들죠?”
“아, 네 뭐…….”
태훈은 그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전생에서 그는 내부고발 직후 자신을 음해하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태훈에게 커피 한잔을 하러가자 권유했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미워할 순 없나.’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태훈은 그를 따라나섰다.
후배와는 부서가 달랐고 딱히 시간을 내지 않는 이상 보러 가기도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2년 후배인 남자는 친절하게도 직접 자판기에서 커피까지 뽑아주었다.
“주말엔 뭐 하셨어요?”
“그냥 좀…….”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었어요?”
태훈은 담배를 만지작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만약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가는 방법을 모르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대답에 태훈은 피식 웃었다.
“그러게요. 내가 무슨 실없는 소릴…….”
“주말에 좋은 데로 여행 다녀오셨나 보네요? 아, 그래서 표정이 그러셨구나.”
“네?”
“주말에 좋은 데 놀러갔다 월요일에 회사 출근하니 그런 표정 짓는 거 아니에요? 마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는 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인데요.”
태훈은 멍하니 있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게요. 내가 왜 여기 있나 생각이 드네요.”
“그럴 땐 그냥 휴가 몰아서 내고 푹 쉬어요. 우리 회사 근속기간 5년 넘어가면 월급 50프로로 한 달 유급 휴가도 있잖아요.”
그냥 때려치우고 돌아갈 방법을 찾아보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100억 포인트가 아무 의미 없어져 현실에 적응하던 때가 생각났다.
‘그냥 꿈으로 치부하고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건가?’
그러기엔 너무 괴로웠다.
다른 세상에서 살아오며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떠오른 건 레이첼의 웃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가야 해.’
부릅-
순간 눈썹과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옆에 있던 남자는 깜짝 놀라며 외쳤다.
“괘…….괜찮아요? 뜨…….뜨거울텐데.”
보아하니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이 구겨지며 커피가 흘러넘쳤다.
하지만 뜨겁다는 느낌은 없었다.
“씻으면 돼요. 아, 그리고 커피 잘 마셨어요.”
태훈은 그길로 후배가 있는 부서로 찾아갔다.
그를 발견한 후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그를 데리고 복도 모서리로 데려갔다.
“선배, 무슨 일이에요?”
“어떻게 증거는 좀 찾아봤어?”
“팀장이 꽁꽁 숨겨놓긴 했지만 하나씩 찾고 있어요. 왜요?”
“나 당분간 회사 안 나와.”
“엉? 왜요? 그거 때문에?”
후배는 깜짝 놀랐다.
회사가 풍비박산 날 수 있는 큰 스캔들을 알려주더니 갑자기 그만둔다는 뉘앙스를 풍기니 놀란 것.
“누가 협박해요?”
“아니야, 개인적인 거야. 그거랑은 관계없어.”
“아니, 그럼 안 되죠. 나한테 다 맡겨놓고 도망가는 거예요?”
“도망가는 거 아니야. 아무튼 개인 사정 때문에 잠깐 비우는 거야.”
“아니,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내가 한 가지 충고하자면 증거 수집하는 거 하루하루 일기식으로 영상으로 촬영해.”
태훈은 후배에게 기록을 남기라고 했다.
혹 자신이 없는 사이 전생과 같이 모든 걸 뒤집어쓰고 의문의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섭게 왜 그러신대.”
“내부고발자들이 다 잘 사는 거 아니잖아. 내 말 명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라.”
태훈은 후배에게 신신당부하곤 바로 팀장을 찾아갔다.
그길로 한 달짜리 유급 휴가를 신청했다.
물론 팀장은 미리 언질도 없이 장기 휴가를 내는 그에게 잔소리를 쏟아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태훈은 아무 감정 없이 말했다.
“그럼 그냥 그만두겠습니다.”
“어허, 태훈 씨 갑자기 왜 그래?”
강하게 나오는 태훈을 보고 팀장은 움찔했는지 부드러워졌다.
달래도 보고 화도 내보았으나 요지부동인 태훈을 보고 팀장은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후, 알았어. 뭐 급한 사정이 있는 것 같으니까 이번만 신경 써볼게.”
태훈은 대답 없이 목례만 하고 바로 사무실을 벗어났다.
“아, 태훈 씨, 정수기 물통 좀 갈아줘요. 커피 타려는데 물이 없네.”
2년 선배인 노처녀 주임이 그를 보고 불러 세웠으나 태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직접 해요. 손이 없습니까?”
“네, 알……. 뭐…… 뭐요?”
노처녀 선배는 멍한 표정으로 태훈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회사를 나온 그는 자신이 포장마차를 했던 장소로 향했다.
미끄러진 트럭이 자신을 덮쳤던 그 장소.
물론 지금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포장마차를 하고 있었고 지금은 여름이었다.
‘뭔가 단서가 있다면 여기겠지.’
태훈은 사고가 났던 지점을 이 잡듯 뒤졌다.
트럭이 미끄러졌던 장소부터 자신이 서 있던 위치까지 꼼꼼히 살폈다.
전생의 삶으로 되돌아온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해가 질 때까지 별 다른 소득이 없었던 그는 근처의 벤치에 주저앉았다.
장사를 하던 시절 자주 앉아 쉬던 벤치였다.
“젠장, 이렇게 되면 죽는 수밖에 없는 건가.”
저승에 가면 뭔가 알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정말 모든 것이 꿈이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정말 꿈을 꾼 것이고 그 속에 예지몽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저승이 있는지는 불확실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답답한 마음에 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러다 문득 정면을 바라보곤 쥐어뜯던 손을 멈추었다.
밤이 되어 퇴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정면에는 커다란 대로가 뻗어져 있었다.
그 대로를 밝히는 조명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향해 걸어갔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걸었고 사람들과 부딪혀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가 장사를 했던 곳은 광화문이었고 그의 눈앞에는 석상이 서 있었다.
후두둑-
비는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석상 앞에 있던 태훈의 입이 움직였다.
“여기서 다시 볼 줄은 몰랐네요.”
물론 석상이었기에 답은 없었다.
“과거를 바꾸고 싶다는 분 대신 제가 과거로 와버렸네요. 본의는 아니지만 미안합니다.”
올려다보는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보였다.
“역시 당신은 그 자리에서 지켜보는 게 가장 어울려요.”
태훈은 그의 발치에 앉았다.
비가 쏟아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되레 석상 때문에 조금 덜 맞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