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정령섬에서는 정령들의 전력화가 거의 끝나가기 시작했다.
하급과 중급 정령들이 융합하여 인간형의 모습을 유지했다.
상급 정령들은 본래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새로운 불의 정령왕과 불의 정령들은 정령들이 착용할 무구들을 만들기 위해 밤새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인간들의 전력들이 지상에 모이고 있습니다.”
물의 정령왕은 구슬로 지상의 상황을 이미르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신탁을 들은 신관과 마법사들이 크로이츠 공국과 엘프들의 영토를 지나 장벽 앞으로 모이고 있었다.
태훈과 레이첼은 드래곤들의 호위를 받으며 탑에서 일의 진행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왠지 그냥 있기가 미안해요.”
“가만히 있으라니 어쩔 수 없지. 그러는 게 도와주는 거야.”
“뭔가 도울 만한 게 없을까요?”
레이첼은 그냥 있기가 미안했던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거기에 평범한 인간 생활을 하던 그녀는 주변 환경에 적응되지 않는 듯했다.
드래곤들이 날아다니고 정령왕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거기에 심심치 않게 이미르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으니 한없이 작아지는 듯했다.
마치 대단한 신분을 가진 시부모댁에 와 있는 평범한 며느리 같은 기분이었다.
태훈도 그걸 눈치채고 최대한 그녀의 주위에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태훈은 이미르에게 다가가 말했다.
“조용히 처리한다고는 하지만 위에서 이 사실을 모르진 않을 텐데요. 이 정도로 난리가 나면 모를 수가 없을 텐데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인이 녀석들 눈을 가리고 있으니까.”
“1급신을 속이는 게 가능합니까?”
“놈들은 직접 일에 관여하지 않아. 보고를 받는 형식이고 그걸 보고하는 자가 내 편이니까.”
“나중에 뒷감당은요?”
“결과만 좋으면 돼.”
“……진짜 저는 가만히 있습니다?”
“네가 나설 정도가 되면 일은 틀어진 거야.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이미르는 자신만만하기보다는 각오를 다진 모습이었다.
그때 드래곤 하나가 날아왔다.
“인간들 중 일부가 이곳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뭐?”
정령섬은 하늘에 떠 있었다.
인간이 정렴섬에 오려면 날아와야 했지만 그 정도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자는 몇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기구가 보이자 태훈이 그것에 대해 설명했다.
“호오, 재밌는 걸 만들어 뒀군.”
기구는 정렴섬에 내려앉았고 거기서 내리는 인물을 본 태훈은 의아해했다.
‘헤이링이 왜…….’
헤이링이 몇 명의 기사와 함께 기구에서 내리고 있었다.
물론 드래곤 하나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인간이여, 어째서 이곳에 발을 들여다 놓았나.”
“신을 뵈러 왔습니다.”
“누군가를 초대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당장 이곳을 떠나라.”
붉은 드래곤이 내뿜는 오라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일반인이라면 이미 기절하고도 남을 기백이었지만 헤이링 황자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테라스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태훈은 헤이링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저기 있는 크로이츠 공왕과는 일면식이 있는 친근한 관계입니다.”
“크로이츠는 신께서 허락하신 인간이다. 인간이여,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당장 이곳을 떠나라.”
드래곤이 위협하자 그를 호위하던 인간들이 검을 꺼내들었다.
그것을 본 드래곤이 코웃음을 쳤다.
“감히 나와 대적하려 하는가. 가소롭구나.”
그 모습은 이미르도 보고 있었다.
재밌다는 듯한 표정을 확인한 태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헤이링이 위험을 무릅쓰고 왜 저리 나오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는 인간이냐?”
“얼마 전에 얀 제국의 차기 황제가 된 인물입니다. 일적으로 몇 번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 평범한 인간은 아니구나.”
“그는 평범한 인간입니다.”
“정녕 그리 생각하는 건가?”
그러자 태훈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헤이링을 떠올렸다.
분위기가 바뀐 오라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뭔가 다른 인간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뭔가 다른 점이 있습니까?”
“영혼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하군. 닳고 닳은 느낌이야. 그 주위 놈들도 그렇고.”
“네?”
“저자를 불러 보도록. 인간이 어찌 저런 영혼을 가졌는지 궁금하군.”
이미르의 명령을 전달받은 드래곤은 뭔가 내켜하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길을 열어주었다.
탑으로 올라온 헤이링은 태훈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리곤 이미르를 향해 한쪽 무릎을 굽혔다.
“위대한 존재를 뵙습니다.”
“인간이여, 어째서 나를 찾아왔는가.”
“다름이 아니오라 사소한 청을 드리고자 이렇게 무례함을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그 사소한 청이란 것이 닳고 닳아빠진 네 녀석들의 영혼과 관계가 있나.”
그 말에 헤이링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과연 한눈에 파악하시다니. 황송하지만 그렇습니다.”
“어디 말해보거라.”
“부디 미천한 저희의 영혼에게 시간을 좀 더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그냥 불멸의 삶을 달라 하지 않고?”
“어찌 그런 무리한 부탁을 드리오리까. 모든 것에는 동등한 대가가 따르는 법. 저희에겐 무한한 삶과 바꿀 수 있는 대가가 없습니다.”
“호오, 그럼 네 녀석들의 영혼을 보완하는 데에는 걸맞는 대가가 있으렷다?”
“그렇습니다.”
헤이링은 뭔가를 꺼내 이미르의 앞에 내려놓았다.
파란 액체가 담겨 있는 앰플.
태훈은 그것과 같은 것을 홀든에게서 넘겨받은 전력이 있었다.
‘왜 저걸 헤이링이 가지고 있지. 전 황제가 남겨둔 것인가?’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태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헤이링은 전 황제의 목적을 알고 있었고 지금 본인도 그 목적을 바라고 있었다.
‘헤이링도 저주에서 벗어나고 싶은 건가.’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대화로 자신의 추측은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미르는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인간이 어찌 그런 물건을 갖고 있는 거지?”
“백여 년 전 아주 우연한 기회로 고서를 발견했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물질화하여 그것을 이용한 힘을 이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때 태훈은 정찰을 나갔다 사망한 마법사를 떠올렸다.
“그래서?”
“저는 그 힘을 이용해 불멸을 살려 했으나 타인의 힘은 제 것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힘을 이용하여 제 영혼을 타인의 육체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흠, 재미있군. 네 녀석들의 영혼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건 여러 번 옮겨 다닌 모양이구나.”
그 말에 태훈은 깜짝 놀랐다.
동시에 가지고 있던 의문도 해결되었다.
100년에 가깝게 살아오며 불멸을 연구하던 자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맞았다.
더불어 전 황제들이 가지고 있던 저주는 거짓이었다는 것도.
‘이번에 영혼을 옮긴 육체는 헤이링인가? 그럼 그의 영혼은 어떻게 된 거지?’
태훈이 마른침을 삼키는 사이 헤이링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습니다. 저도 제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부디 저희들의 영혼을 보살피시어 시간을 좀 더 주신다면 이 힘의 원천이 담긴 비서를 바치겠습니다.”
“호오, 재밌는 제안이군. 왜 내가 거기에 관심을 가질 거라 생각하는 거지? 당장 너희들을 소멸해도 상관이 없는데.”
“신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저희는 대책이 없습니다. 다만 저희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 비서는 대륙 전역으로 퍼질 겁니다. 그러한 혼란 사태는 피하고 싶으실 것 같습니다.”
황제는 신을 상대로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르의 표정은 삽시간에 썩어 들어갔고 공기가 달라졌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고 태훈이 이미르에게 다가갔다.
“어쩌실 건가요?”
“저놈들을 당장 죽여 버리기야 할 수 있지만 그런 방법이 온 세상에 나돌아 다니면 수습하기가 힘들어져. 당장 인간들의 가치관이 흔들릴 거다. 영원히는 아니지만 생명 연장의 꿈이니까.”
“손쓸 방법이 없습니까?”
“방법은 있지만 시간이 걸려. 지금 당장은 거기에 신경 쓸 틈이 없어. 저놈은 그걸 아는 것 같군.”
이미르는 못마땅한 눈치였다.
마치 잔가시가 목에 걸렸는데 그걸로 병원까지 가기는 애매한 듯한 느낌이었다.
이미르가 손을 들자 헤이링 일행들의 몸에서 자그마한 빛이 났다.
“네놈들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냉큼 꺼져.”
“감사합니다.”
헤이링은 품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내려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태훈을 향해 한번 웃어 보이고는 등을 돌렸다.
‘이 싸움이 끝나면 저자와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겠군.’
영혼을 옮겨 다니며 긴 세월을 살아온 자.
분명 용서받지 못할 일이고 허락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싸움이 이쪽의 승리로 끝나면 분명 이미르도 그를 손볼 것이 분명했다.
헤이링이 사라지고 난 후 태훈이 물었다.
“저자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까?”
“신이라고 해도 함부로 누굴 죽이거나 살리는 일은 금기야. 반발력도 크고 성가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 싸움이 끝나면 시간이 걸려서라도 저놈은 죗값을 치룰 것이다.”
이미르는 비서를 집어 들었다.
“그게 있으면 영혼을 옮겨 다닐 수 있는 겁니까? 아티팩트인가요?”
“아니, 그냥 고서다. 누가 적었는지 대충 짐작은 가는군.”
“그 말은 이 책의 내용을 아는 황제는 얼마든지 옮겨 다닐 수 있다는 거군요.”
“영혼을 옮겨 다닐 때마다 부작용은 있어. 저놈이 얼마나 옮겨 다닌지는 모르지만 저놈의 영혼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했다. 당분간은 쉽게 옮기지 못하겠지. 지금은 저놈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야.”
화르륵-
이미르의 손에 있던 비서가 불에 타 사라졌다.
태훈은 푸른 액체가 담긴 병에 대해 물었다.
“인간의 영혼은 마나로 이루어져 있어. 고유한 성질의 마나라 타인이 흡수는 하지 못해.”
“마데우스가 저것과 같은 것을 장벽 안에서 대량으로 갖고 있겠군요.”
“그렇겠지. 미티어를 사용하고 남은 양이있다면 이쪽과의 싸움에서 이용하려 할 거야.”
“힘든 싸움이 되겠네요.”
“내가 아무런 준비도 안 했겠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이틀 뒤.
정령섬에는 수천의 정령병이 열을 맞춰 서 있었다.
정령섬 주위에는 드래곤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지상에서는 신관과 성기사, 마법사들이 대기 중에 있었다.
“전진.”
이미르의 명령과 함께 정령섬이 돔을 향해 움직였다.
섬의 앞부분이 장벽과 부딪히자 엄청난 진동과 함께 섬의 속도가 늦춰졌다.
동시에 접점에서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전류가 솟구쳤다.
이미르가 눈짓하자 태훈이 나섰다.
그녀는 미리 태훈에게 단 한 번 나서달라 부탁을 했었다.
정령왕들과 함께 검기를 쏘아내자 장벽에 자그마한 공간이 생겨났다.
섬의 앞부분이 그곳을 비집고 들어가자 검은 벽들이 산산이 부서지며 섬이 앞부분이 완전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정령왕들은 전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거대한 돌골렘의 모습을 한 땅의 정령왕이 섬의 앞부분을 향해 뛰기 시작하자 정령병들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섬의 앞부분에서 땅의 정령왕이 주먹을 내려치자 땅이 부서지며 돔 안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떨어져 내린 부스러기들은 곧 다리의 형상을 만들었다.
“돌격!”
정령병사들이 새까맣게 다리를 타고 돔 안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에 맞서 상대는 키메라들로 맞섰다.
상황을 전달받던 바람의 정령왕이 보고했다.
“앞쪽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우리 목표는 마데우스다. 놈을 찾아라.”
이미르는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녀도 직접 신안을 이용해 마데우스를 찾는 듯했다.
드래곤들이 갈라진 장벽 사이로 들어가기 시작하자 싸움의 판세는 금세 기울었다.
드래곤이 내뿜는 브레스 한방에 키메라들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러자 상대 쪽에서도 언데드 군단이 나오기 시작했다.
데스나이트 같은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기도 했다.
거기에 데스나이트의 수장이 데리고 있던 머리 셋 달린 키메라도 여럿 보였다.
“지상의 병력도 움직이라 해라.”
이미르의 명령을 바람의 정령이 다른 정령을 시켜 전달했다.
그러자 지상에서 여럿의 기구가 떠올랐다.
기구는 깨어진 장벽을 통해 안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데우스는 보이나?”
“특이한 존재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데우스보단 미티어부터 봉쇄해야 하지 않습니까?”
“미티어가 발동되면 내가 나설 것이다. 그런 마법이 발현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막을 시간은 충분해.”
이미르의 냉철한 말에 태훈은 쥐 죽은 듯이 신안을 통해 전투를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