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태훈은 중앙에 있는 탑에서 정령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르가 그를 정령계에서 대기하라고 했지만 사실상 감금이었다.
태훈은 돌아가겠다 했지만 이미르는 알포네의 위치를 안 이상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속으로 알포네에 대해 괜히 말했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여기 있는 게 네 가족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야. 일전의 경험도 있으니 이해하리라 믿는다.”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인사를 할 기회라도 주었으면 했는데요.”
“마침 오는군.”
하늘 저편으로 거대한 새가 나타났다.
온몸이 붉은 깃털로 뒤덮인 피닉스가 테라스 앞으로 날아오고 있었고 등에는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여보.”
“레이첼?”
테라스 앞에 멈춰선 피닉스는 레이첼을 내려주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이미르가 말했다.
“여기가 안전하다 하지 않았나. 전례도 있으니 이곳에서 지내도록.”
“정령계에서 인간이 오래 있을 수 있는 겁니까?”
“음. 그건 아직 이야기해 주지 않았나.”
이미르는 정령계를 개조하는 중이라고 했다.
정령계의 규모는 지상으로 따지자면 카나리스 왕국의 7할 정도 되는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더 이상 지상에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아. 그리고 장벽을 넘으려면 막대한 힘이 필요하지.”
“그래서요?”
“이 정령계를 모선으로 해서 놈과 맞붙는다.”
이미르가 손짓하자 정령왕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태훈이 있는 탑 정상으로 이동한 정령왕들이 탑에 힘을 흘려넣기 시작했다.
그 힘은 곧 하늘로 뻗어져 나가 보랏빛 하늘을 수놓았다.
그러자 보랏빛 하늘이 사라지고 푸른 하늘과 구름이 나타났다.
“여보, 저기…….”
레이첼이 먼 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정령계가 끝나는 절벽이 있었고 그 아래로 커다란 도시가 보였다.
익숙한 실루엣의 건물.
세레니스 제국의 황궁이었다.
“정령계 전체를 물질화한 겁니까?”
“맞아.”
“정령계를 제물로 쓸 작정입니까?”
“정령은 마나가 있다면 얼마든지 복구가 가능해. 하지만 중간계는 피해를 입기 시작하면 생명체의 복구가 힘들어.”
이미르는 자신감에 찬 표정을 지었다.
“위쪽에서 힘을 제한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디까지나 이건 내가 시킨 일이 아니야. 정령왕들의 결단이지.”
지상에선 난리가 났다.
마른 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땅덩어리.
세레니스의 수도는 물론 남쪽 끝에 있는 카나리스에서도 육안으로 거대한 땅덩어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각국의 수뇌부는 난리가 났다.
이미르는 각국의 중앙 신전에 환영을 보냈다.
자신이 신이라는 것과 최후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나타났다는 사실을 공표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신탁도 아닌 신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경우는 없었다.
이미르의 모습에 감동을 하는 이가 있는 반면 그 반대인 이들도 있었다.
신탁으로 인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전쟁이란 단어가 나오자 걱정이 앞선 것이다.
이미르는 마법사와 신관의 징병을 명령했다.
총국에서는 경사가 났다는 분위기였다.
서둘러 각 지부의 신관들과 성기사들을 소집하는 명령서가 퍼져 나갔다.
반면 상아탑은 어수선한 분위기.
신이라는 존재보다는 마나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집단이었다.
하지만 신의 명령에 거역할 배짱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끌려오다 시피한 레이첼은 그저 태훈의 옆에 메달려 있을 뿐이었다.
“또 전쟁인가요?”
“아아, 마지막 전쟁일 거야. 최후의 전쟁이지.”
태훈은 레이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정령섬은 크로이츠 영지로 향했다.
크로이츠 영지의 상공에 도착하자 저 멀리 검은 돔이 보였다.
“언제 공격하실 작정이죠?”
“준비가 되는 대로.”
“저도 준비합니까?”
“아니, 그대는 여기서 한 발도 움직이지 말도록. 그대를 지킬 군대도 준비할 것이다.”
이미르가 손을 들어 올리자 탑 앞에 빛이 생겨났다.
빛이 사라지고 나타난 것은 드래고니안들.
한가운데에는 잠들어 있는 수장이 있었다.
이미르가 손가락을 튕기자 섬에 있던 마나의 기운들이 바람으로 형상화 되어 누워 있는 수장의 몸으로 빨려들어 갔다.
“너희의 속박을 풀어주마.”
잠들어 있던 수장은 눈을 떴고 다른 드래고니안 들의 몸에서는 빛이났다.
“오오, 저주가 풀려간다.”
“힘이…….”
저주가 풀린 드레고니안들의 몸은 마나 고갈이 찾아왔지만 정령계였던 만큼 엄청난 양의 마나가 텅 비어 있던 그들의 몸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내 수장을 필두로 하여 모든 드래고니안들의 몸에 변화가 생겨났다.
인간형의 몸에서 수백, 수천 배나 되는 거대한 도마뱀의 형상으로 커진 것.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자들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허공에는 거대한 땅 덩어리가 떠있고 그 위로는 수백, 수천의 드래곤이 날아다니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번에 풀어준 저주는 일시적인 것이다. 선조들의 불명예를 너희가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마. 목표를 이룬다면 본래의 영광을 영원히 되찾을 것이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드래곤들은 이미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자신들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달라진 모습에 만족해하는 듯했다.
이미르가 그들에게 태훈과 레이첼을 지키라 명령하자 몇몇 드래곤들이 태훈의 곁에서 맴돌았다.
?
얀 제국도 때아닌 소란으로 시끄러웠다.
곧 신의 환영이 성명을 발표하자 소란은 사그라들었다.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땅 덩어리를 본 헤이링 황자는 곰곰이 생각했다.
‘저기에 신이 있다는 건가.’
환영이 한 말을 되짚어보던 헤이링은 곧 사람을 불러모았다.
“네? 신은 알현하러 가시겠다고요?”
“그렇네. 그러니 총국에서 신관 한 명을 붙여주게.”
“그……. 그건 곤란합니다.”
총국은 아연실색했다.
자신들은 전투를 대비해 준비를 끝마치고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신의 명령을 하달받는 입장이라는 본분을 갖고 있었는데 직접 찾아간다는 발상은 꿈에도 하지 못했던 것.
“뭐가 곤란하다는 건가?”
“신께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그분이 계신 곳으로 찾아간다는 것은 불경한 짓입니다. 신님께 하시고자 하는 말이 있으시다면 저희가 기도를 드려보겠습니다.”
“어허,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한둘이겠나. 수십, 수백만의 기도를 들을 텐데 그중에서 내 기도에만 반응하라는 법이 있나.”
신관은 난색을 표하며 거절했다.
이에 헤이링은 신관을 돌려보내고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헤이링 황자는 소수의 인원을 데리고 크로이츠 공국으로 가기로 했다.
그곳에는 장벽을 감시하기 위해 연합군의 보급기지가 있었고 기구가 배치되어 있었다.
반면 헤이링 황자가 출타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 무리가 움직였다.
“정말 하실 작정입니까?”
“어수선한 지금이 기회다.”
“하지만 저희 병력만으로는…….”
1황자를 따르는 무리는 적은 병력을 못 미더워했다.
저주가 있은 직후부터 항상 계승 1순위가 황위를 이은 것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반란이 있었지만 항상 반란 세력의 참패였다.
전 황제의 친위 기사단이 항상 황위 내정자를 굳건히 지켰기 때문.
“지금 아버님의 근위 대장이 실종 상태라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합니다만…….”
“헤이링이 소수만을 데리고 간다는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어. 어차피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간 우린 끝장이야. 그 녀석이 황제가 되면 우릴 살려둘 것 같나?”
“그렇긴 하지만…….”
“다른 녀석들한테도 전해. 살아남고 싶다면 따르라고.”
1황자의 꼬임에 몇몇 황자들이 의견을 모았다.
그들도 막내인 헤이링이 황제가 되면 자신들을 곱게 놔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다만 거사가 성공했을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정계와 민심의 반발을 생각하여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고 거짓 정보를 흘릴 생각으로 최소한의 병력만을 준비했다.
반란 병력 절반은 헤이링 황자가 지나갈 길목에서 대기.
나머지 절반은 황궁을 나서는 헤이링 황자의 뒤를 밟았다.
헤이링의 무리가 숲으로 들어서자 먼저 대기하던 무리가 앞길을 막았다.
앞뒤로 포위되자 1황자는 마차를 향해 말했다.
“너에게 원한은 없다. 원망하려거든 너를 지목한 아버님을 원망해라.”
헤이링의 마차를 호위하는 것은 단 10명뿐이었다.
수십 명의 기사들이 마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맨 앞에 있던 기사 하나가 등에 지고 있던 짐을 풀었다.
풀어헤친 짐에서 나온 것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검.
기사들은 그 검이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 순간 달려들은 기사들의 몸이 두 동강이 났다.
흩뿌려지는 피에 당혹해 하는 기사들 역시 금세 바닥을 뒹굴었다.
“뭐……. 뭣…….”
“에잇, 한 번에 달려들어라! 애송이한테 뭘 당황하는 거냐!”
도륙하는 기사는 아직 앳된 기사였다.
헤이링이 차기 황제로 지목된 다음 날 헤이링이 데려온 자였다.
황자들이 데려온 기사들은 전원 수호 기사들이었다.
합을 맞추며 상대를 압박했지만 젊은 기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사들을 베어 넘겼다.
“이 검술은…….”
그들은 젊은 기사가 사용하는 검술을 보며 이내 그것이 전 근위 대장의 검술과 같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이미 기사의 절반이 도륙당한 뒤였다.
“네놈, 근위 대장과는 무슨 관계냐.”
달려들기를 멈추고 한 기사가 물었다.
“알아차리는 게 느리군. 덕분에 이쪽은 손쉬웠지만.”
“이놈, 내 말에 대답을 해라! 근위 대장의 자식인가?”
“난 결혼한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내 검술을 가르쳐 준 적도 없다.”
“뭐라?”
이상한 대답에 머뭇거리는 사이 기사의 머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기사들은 상대가 자신들의 실력을 웃돈다고 확신했다.
1황자는 그런 기사들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숫자는 자신들 쪽이 유리했거늘 그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내 후발대가 뒤쪽에 도착하자 헤이링 쪽에서도 몇 명이 후방을 향해 달려들었다.
헤이링이 탄 마차를 중간에 두고 앞뒤로 격전이 벌어졌다.
싸움은 10분을 넘기지 못했다.
단 3명만을 남겨두고 모든 기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헤이링의 기사들은 자잘한 상처만을 남기고 모두 살아남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덜컥-
그때 마차의 문이 열리며 헤이링이 나타났다.
주위의 참극을 보고도 헤이링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흠, 이번에도 이런 일은 어쩔 수 없는가.”
“헤이링! 대체 이놈들은 뭐하는 놈들이냐!”
“100년 가까이 실력을 길러온 자들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나.”
“뭐야? 그런 궤변이 어딨느냐!”
“음, 내 아들 놈들이라 그 정도 말귀는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
황자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자신들이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눈치를 보아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1황자는 이 상황이 납득이 가지 않는 듯 열을 올리고 있었다.
“혀……. 형님. 저희가 불리합니다. 여기선 물러나야 할 듯싶습니다.”
“어디로 간단 말이냐! 저놈들을 여기서 없애지 못하면 미래는 없어.”
1황자는 포기할 의사가 없었다.
헤이링이 고개를 까딱이자 9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남아 있던 기사들이 죽고 황자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런 황자들을 일말의 망설임 없이 베어 넘긴 기사들은 마지막으로 1황자만 남겨두었다.
헤이링이 그에게 다가갔다.
“너를 선택하지 않은 건 네 잘못도 있다. 명석하기보단 권력에만 눈이 멀어 있었으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마치 네가 아버님이라도 되는 듯이…….”
“생각보다 머리는 굴러가는구나.”
1황자는 헤이링의 행동과 말투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이내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 설마?”
“이제 이해가 되었느냐.”
“그런 말도 안 되는……. 어떻게…….”
“나만이 아니지. 여기 있는 모두가 100년 가까이 나를 지켜왔다. 그런 실력자들을 이런 소수로 이기겠다고 데려오다니.”
“믿을 수 없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네가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아. 후……. 매번 몸을 바꾸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도 신물이 나는군.”
넋이 나간 1황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헤이링이 손짓하자 그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근위 대장. 전부 깨끗이 치워라.”
“네, 폐하.”
시체들은 벼랑 아래로 굴려 보낸 뒤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