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수도의 소란은 생각보다 금세 잦아들었다.
생각보다 얀 제국 황실에 전해져 오는 저주라는 것이 익숙한 듯 보였다.
태훈은 파케와 함께 얀드로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 있었다.
“그럼 선대의 황제도 갑작스럽게 왕위에 올랐다는 건가.”
“이 나라에서는 그게 익숙하죠.”
“언제부터 그런 저주가 생겨난 건가요?”
“100년 전쯤 될 겁니다. 전해져 오기로는 가장 처음 저주를 받게 된 황제가 신의 분노를 샀다고 그러더군요.”
그 시대 황제가 침실에 죽어 있었고 유서가 한 장 남아 있었다고 했다.
유서의 내용은 후계자를 지목하는 것과 자신이 신의 저주를 샀다는 내용만 남아 있었다고 했다.
“어떤 저주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럼 그때부터 원인 불명으로 현 황제가 갑자기 죽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황제들은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 놓죠.”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저주는 확실했다.
병이라고 하기엔 과학적 근거가 없었다.
갑작스런 의문사는 황제에게만 일어났고 다른 황족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
‘신전도 알 길이 없다고 포기한 저주라. 마데우스가 벌인 일이 아니라 정말 저주라면 그 녀석이 알려나.’
그 녀석이라 함은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인 신을 말하는 것이었다.
저주라는 것을 이겨내기 위해 불멸을 원했던 황제가 열매를 노렸다.
하지만 타이밍 좋게도 일이 크게 번지려는 순간 저주가 발동되어서 황제가 사망.
찜찜하지만 나쁜 일은 아니었다.
‘되레 헤이링 황자가 황제가 되면 좀 더 나은 결과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헤이링이 황제가 된다는 것은 의외였지만 태훈에게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되려 계승 순위에서 밀려 있던 헤이링 황자의 도움이 된다면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될 수 있었다.
‘줄은 잘 서고 봐야겠지.’
태훈은 헤이링 황자와의 대면을 요청했지만 만남은 미루어졌다.
이유는 일주일 기간의 애도 기간 이후 이뤄질 대관식을 위해 신변 보호에 들어갔다는 이유였다.
“하긴 10황자가 황제가 될 거란 생각은 되지 못했으니까요.”
“유언장 발표 때 1황자의 표정을 봤잖아.”
“그래도 저 같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황제 따위는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요.”
“뭐 권력의 맛을 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태훈은 대관식이 끝나고 얀 제국의 내정이 안정될 때까지 돌아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약속받은 차관과 투자로 기초는 시작할 수 있었다.
짐을 싸던 태훈은 문득 손을 멈추었다.
‘하지만 죽은 황제는 자신의 입으로 근 100년을 살았다고 하지 않았나? 거기다 근 100년 동안 황제는 3번이나 바뀌었는데.’
가장 큰 문제를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그는 손을 멈추었다.
근 100년 동안 살면서 불멸의 삶에 대해 연구를 하던 황제.
하지만 그사이 공식적으로 얀 제국의 황제는 3명이었고 전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 와중에 급작스러운 황제의 죽음.
‘음, 굉장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남의 나라에서 황제의 뒤를 캘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는 유언장 공개 때 본 헤이링 황자의 표정과 오라가 떨떠름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일단 돌아가자고 생각한 태훈은 우선 세레니스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랜만에 아내도 만나고 영지에 필요한 물자를 구입할 생각이었다.
* * *
세레니스의 수도로 입성한 태훈은 마중 나온 아내와 재회했다.
“잘 있었어?”
“보고 싶었죠. 몸은 아픈 데 없어요?”
둘의 꽁냥대는 모습을 보고 있던 황녀는 아니꼬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이, 그보다 먼저 해야 할 말이 있는 거 아냐?”
“고맙습니다. 저 대신 아내를 돌봐주어서.”
“흥, 말로만?”
“작지만 선물도 가져왔습니다.”
태훈은 마차로 한 짐이 되는 선물 보따리를 가리켰다.
하지만 황녀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말했다.
“듣자 하니 얀 제국과 혼담이 오갔다며?”
“아, 네. 하지만 없던 걸로 하기로 했습니다. 애초에 황제가 서거했으니까요.”
“안 그래도 오라버니가 그 일로 자네를 좀 보자는군.”
황녀는 태훈을 데리고 1황자에게 데려갔다.
1황자는 헤이링 황자에 대해 물었다.
어떤 인물인지 꼬치꼬치 캐물었고 태훈은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해주었다.
“흠, 그럼 당분간 국경 문제는 없겠군.”
“그렇습니다. 아직 어리고 학문에 관심이 많은 남잡니다.”
“그렇군. 도움이 충분히 되었네. 그리고 듣자 하니 새롭게 사업을 해볼 것이라던데.”
“네, 일단 기초 자금은 얀 제국을 통해 확보해 놓았고 시제품이 완성되면 또다시 투자단을 모집할 생각입니다.”
“어떤 물건들을 만들 생각이지?”
태훈은 증기기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아직 얀 제국 이외에는 생소한 개념이고 시설조차 없었기에 황자는 제대로 된 개념이 없는 듯했다.
“그러니 앞으로는 마나의 시대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실제로 마나석의 광물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지만 증기기관이 원료가 되는 악마의 피는 그 매장량이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범용성이 크다는 거죠.”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도 빠질 수 없지. 하지만 우리 측은 마땅한 시설도 없고 개념조차 없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쪽에 그와 비슷한 교육을 해주었으면 하네.”
“음, 그렇다면 얀 제국에 도움을 요청해 보시죠.”
물론 얀 제국이 넙죽 정보를 제공할 리 없었다.
오그리아가 무너진 지금 양대 세력은 얀과 세레니스인데 중요한 기술을 넘겨줄 리 없었다.
“그들이 과연 쉽게 넘겨줄까. 그럴 것 같지 않은데.”
“거기에 대해선 황자님의 능력이 필요하겠죠. 제가 자리는 주선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음, 좋아. 준비를 시켜보도록 하지. 때가 되면 자리를 마련해 주게. 그리고 여긴 얼마나 머물 건가?”
“필요한 물건을 구입한 뒤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필요한 게 있다면 동생을 통해 말하게.”
태훈은 아내가 머무는 황궁 내 숙소에 짐을 풀었다.
황녀의 배려로 황가 소유의 숲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어느새 따듯해진 날씨에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는 잔디 위에 누운 태훈의 머리를 레이첼이 받쳐주었다.
“전쟁은 어땠어요?”
“정신이 없었지. 그나마 빨리 끝나서 다행이야.”
“여기선 당신 소리밖에 안 들리던데요.”
“내 소리?”
“당신이 엄청난 실력자고 드래곤과 맞먹는 몬스터도 쓰러뜨렸다고 하던 걸요.”
“아, 키메라와 싸운 거 말인가.”
태훈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레이첼은 상당히 들떠 있었다.
직접 보진 않았지만 전쟁 기간 내내 모든 도시에는 그의 무용담이 퍼져 있었다.
일격에 언데드 무리를 쓸어내고 데스나이트 무리와 용과 맞먹는 듯한 몬스터와의 전투.
거기에 헤라와의 격전은 그가 이미 인간의 범주에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그걸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예요?”
“일단 크로이츠 영지를 운영해 나가는 데 중점을 둬야겠지. 아무것도 없는 땅이라. 당장 먹을 것부터 해결해야 해.”
“엘프들과 협력하는 건 어때요? 그쪽 땅에는 숲이 있잖아요.”
“엘프들도 뭔가를 원하겠지. 당분간은 아마 정신없을 거야. 오그리아도 완전히 해결된 문제가 아니니까.”
“당신이니까 잘될 거예요.”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는 아내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는 시선을 그녀의 배로 돌렸다.
“이제 얼마나 남았지?”
“아직 절반이나 남았어요.”
“얀과 혼약 이야기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어?”
“솔직히요?”
“응, 솔직하게.”
레이첼은 혼약 이야기에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했다.
“뭐야, 질투도 안 한 거야?”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요. 그리고 당신 취향을 아는데.”
“아니, 그래도 정략적으로 할 수도 있잖아.”
“뭐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인간 영웅이라 불리는 사람을 독점할 자신은 없었거든요.”
그 말을 하면서도 레이첼은 웃고 있었기에 태훈은 맥이 풀려 버렸다.
“아, 뭔가 힘이 빠져 버리네. 질투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난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이 아니에요.”
레이첼은 태훈의 머리를 가르마를 타고 놀며 웃었다.
잠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기사 한 명이 다가왔다.
“좋은 시간을 방해해 죄송합니다. 공왕님을 급히 찾는 전갈이 있습니다.”
“누가 무슨 일로?”
“오그리아의 감시 진영에서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급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태훈은 허리를 일으켰다.
그런 태훈에게 레이첼은 다녀오라고 손짓해 주었다.
태훈은 기사가 안내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거기엔 숨을 헐떡이는 마법사 한 명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신관들은 그런 마법사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태훈은 현장에 있던 기사에게 물었다.
“무슨 상황인가?”
“며칠 전에 기구를 통해 오그리아로 잠입했던 조사단 중 한 명입니다.”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고?”
태훈이 놀라 되물었다.
그리곤 누워 있는 마법사에게 다가가 신력을 쏟아부었다.
그리곤 다시 한번 놀랐다.
‘뭐……. 뭐야, 엄청난 독기!’
얼마나 강한 독기인지 그가 쏟아 붓는 신기는 모조리 독기에게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제야 마법사에게 달라붙어 있던 신관들이 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
텔레포트를 발동한 헨델의 몸은 순식간에 장벽 앞에 다다랐다.
그는 눈을 떴을 때 장벽 너머에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나가자마자 바로 보고해야 한다.’
그의 시야는 온통 회색빛이었다.
텔레포트의 전형적인 시야였다.
하지만 그는 장벽 속에 갇히고 말았다.
‘장벽이 마나를 흡수하고 있어?’
손에 들고 있던 마나통의 마나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장벽은 그의 몸을 놓고 끈질기게 잡아당겼다.
“크윽…….”
그는 얼마되지 않은 자신의 마나까지 모조리 쓰기 시작했다.
본래 마나가 바닥나면 마법사들은 정신을 잃었다.
사실 완전한 바닥이 아니라 극소량만 남게 되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신이 멀쩡한데도 마나가 바닥났다.
그리곤 이내 자신의 신체 일부가 소멸하는 것을 보았다.
‘마나가 다시 차고 있어. 이건 내가 본 현상과 같은데.’
자신의 몸을 분해하면서 마나를 짜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헬렌은 이를 악물었다.
여길 벗어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었다.
거기다 그리브의 희생도 덧없게 만드는 것이 되었다.
자신의 신체 일부들이 소멸하면서 마나가 충전됐고 그가 마침내 장벽을 벗어났을 때 그는 환호성을 질렀다.
“드……. 드디어!”
그는 기쁜 표정을 지었지만 환호할 팔이 없었다.
아군이 있는 진영이 멀리 보였지만 달려갈 다리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멸된 부위에서 출혈이 없었다는 것이다.
헨델은 짧은 팔과 몸을 이용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발견된 것은 기기 시작한 지 만 하루가 되던 날.
장벽 주위를 순찰하던 연합군 병력이 그를 발견했다.
만신창이가 된 그를 구조한 병사들은 신관에게 데려갔다.
전진기지에 파견되어 있던 하급 신관은 그가 자신의 신력을 순식간에 소멸시키자 당황하며 그를 수도로 옮긴 것.
태훈은 자신의 모든 신력을 써서야 독기를 제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독기에 의해 헨델의 몸 속은 넝마처럼 되어버린 뒤였다.
“이름이 뭔가.”
“헨델……. 입니다…….”
“장벽 안에 들어갔었나? 뭘 보았지?”
“마수…… 사람들이 재료로……. 거대한 미티어……. 마법진…….”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한 목소리였다.
태훈은 그가 말하는 것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이내 목소리는 끊겼고 태훈은 침울한 표정으로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이자의 신원은 확인했나?”
“헨델. 본국 소속의 마법사입니다.”
“작전 내용을 소상히 말해보게.”
기사는 기구를 통한 작전을 설명했다.
본래 기구는 한 시간 정찰 뒤 되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구가 장벽을 넘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장벽은 돔 형태를 이루면서 안쪽에서 갇히게 되었다는 것.
‘장벽이 돔을 이루었다라. 그럼 이 남자는 어떻게 넘어온 거지? 모습은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그는 헨델이 남긴 단어들을 떠올리며 그의 몸을 살폈다.
잘려 나간 팔과 다리는 날카로운 것에 의한 상처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은 상처의 단면에 그는 골똘히 생각했다.
’사람들을 재료로 모아서 뭔가를 꾸미는군. 미티어라면 내가 알고 있는 그런 류의 미티어인가? 하지만 그 녀석들은 문을 열려고 한 거지 세상의 파괴는 아니었지 않았나?‘머리가 복잡해 질 정도로 많은 가설들이 떠올랐지만 무엇 하나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는 헨델의 장례를 성대히 치러주라고 단단히 이르고는 수도에 있는 신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