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근위 대장은 다른 제국의 기사들과는 달리 풀메이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거기에 큼직한 투 핸드 소드까지 들고 있으니 게임 속 탱커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스피드는 태훈에게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무거운 장비를 갖고 있으면서도 태훈의 검은 갑옷을 스치지 못했다.
장비는 서양의 것이지만 검술은 얀 제국의 것이라 뱀처럼 검을 비켜나갔다.
‘헤이스트, 스트랭스.’
마법으로 근력을 상승시킨 그의 스피드는 상대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근위 대장도 태훈의 상태가 바뀐 것을 눈치챈 듯 잠시 거리를 벌렸다.
“버서커.”
“호오?”
상대가 성력을 사용하자 태훈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성기사가 아닌 존재가 붉은 마나를 사용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평범한 녀석은 아니구나.”
“…….”
“과묵한 자로군.”
싸움은 더 격렬해졌다.
홀의 기둥이 파괴되고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지만 그 누구 하나 홀로 들어오는 자가 없었다.
고위급 마법으로 소리와 진동을 차단한 것 같았다.
‘대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건가. 이 정도 소란에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다니.’
캉-
부서지는 기둥의 파편을 검끝으로 쳐내자 근위 대장 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산탄처럼 쏟아지는 조각들은 검기 한방에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조각들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7클래스 마법인 사일런스와 5클래스급 이상의 베리어가 쳐져 있군.’
웬만해선 파괴되지 않은 것이라 확신한 태훈은 삼색 기운을 모두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기사는 놀라는 표정 없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플레어, 썬더 볼트.”
“주여, 저에게 믿음을.”
마법을 제창하며 들어가자 근위 대장은 자신의 몸에 신력을 둘렀다.
그러곤 자신이 가진 검을 던졌다.
“엇?”
검은 곧장 마법을 향해 날아들었고 전격 마법은 검에 흡수되었다.
‘검을 피뢰침으로?’
4클래스 화구 마법은 그대로 기사의 몸에 정면으로 적중했다.
펑-
‘머리는 좀 썼지만……. 응?’
화구 안에서 뻗어져 나온 근위 대장의 얼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한 근위 대장은 태훈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순식간에 육탄전으로 바뀐 공격 패턴에 태훈은 당황했다.
상대가 근접전을 노리며 들어오자 검은 되레 불편하기만 했다.
‘이건 기사의 싸움법이 아냐.’
매섭게 내리꽂히는 주먹에는 오리진이 둘러져 있었다.
재빨리 거리를 벌리면서 마법을 사용하려 했지만 상대는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낭패다. 조용히 끝내려 했던 게 실수였어.’
타국의 황궁에서 근위 대장과 싸운다는 것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조용하고 빠르게 제압할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판단 미스였다.
태훈도 검을 버리고 손과 발로 맞섰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허공을 가격하거나 간단한 동작에 의해 막혔다.
‘이놈, 체술이…….’
무술에 문외한인 태훈이 봐도 상대는 고수였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고 급소를 향해 들어오는 주먹과 손날을 피하기가 괴로웠다.
점점 상처가 늘어가는 쪽은 태훈이었다.
“어지간히……. 해라!”
하지만 태훈은 알약을 복용한 후 신체적 능력이 올라 있었다.
거기에 트리블 적성으로 둘둘 걸친 태훈의 묵직한 한 방이면 충분했다.
자신의 가슴팍을 내어주자 엄청난 통증이 전두엽으로 전해졌다.
뒤로 몸이 휘청이는 찰나 그대로 상대의 복부에 돌려차기를 먹였다.
콰직-
기사대장의 풀메이트가 찌그러졌다.
태훈은 그대로 뒤로 두어 발자국 휘청거렸지만 근위 대장은 수십 미터를 날아 벽에 처박혔다.
쾅-
투명한 벽에 부딪힌 근위 대장은 무릎을 꿇었다.
“이 자식이……. 까불고 있어.”
급하게 신력으로 부러진 늑골을 치료하며 태훈은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갑옷만큼이나 몸 안의 내장도 엉망일 게 분명했다.
근위 대장은 조금 축 늘어져 있나 싶더니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곤 옆에 한 웅큼 피를 토하고 입가를 닦더니 부서진 풀메이트를 벗어 던졌다.
파열되거나 다친 내장을 치료하려면 상당한 실력이 필요로 했다.
근위 대장은 자신의 신력으로는 치료가 불가능 하다고 판단했는지 심호흡과 함께 태훈을 향해 자세를 고쳐 잡았다.
‘터프하군. 지금 서 있는 것조차 힘들 텐데.’
제대로 들어간 한 방이었다.
그래도 상대는 얼굴에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짧은 스텝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뱀처럼 급소를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을 보며 태훈은 존경을 마다하지 않았다.
부상으로 인해 무뎌지기는커녕 오히려 갑옷이 없어 가볍다는 듯 움직임은 경쾌했다.
태훈은 이번엔 얼굴 왼쪽을 내어주며 이번엔 상대의 가슴에 정권을 내리질렀다.
주먹 끝에서 늑골이 부서지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이건 치명타다.’
입안이 터진 상태를 치료하며 나자빠진 근위 대장을 보는 그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려 하는 근위 대장을 보며 그는 탄성을 질렀다.
‘조……. 좀비냐? 분명이 심장을 때렸는데?’
자신을 향해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는 상대.
태훈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냥 한 번에 끝내는 게 낫겠어. 죽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태훈은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근위 대장이 마나의 응집을 느끼고 급히 움직였다.
하지만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이라 그런지 움직이는 속도는 많이 떨어져 있었다.
손속을 봐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황궁을 날려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뒤처리가 많아지는 건 사양이야.’
주먹에 5클캐스급의 파이어볼을 준비한 태훈은 마법의 준비가 끝나자 상대에게 달라붙었다.
그의 손이 근위 대장의 가슴에 도달하는 순간 마법이 작렬했다.
‘제로 거리에서의 영격. 이거라면…….’
퍼엉!
화구가 폭발하며 근위 대장의 등 뒤로 화염이 뻗어져 나갔다.
그의 가슴에는 부러지고 그을린 늑골이 튀어나와 있었다.
“미안하게 됐어. 원망하려거든 네 주인을 탓해라.”
태훈은 그가 쓰러질 줄 알았다.
하지만 끝까지 두 발로 서 있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가슴이 날아갔는데 어떻게 서 있는 거냐고!’
뜨악하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일격을 먹일 생각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이내 마버을 거두었다.
그는 선 채로 죽어 있었다.
“대단한 집념이다. 실력도 그렇고 여간 내기가 아니었어.”
후다닥-
그때 누군가 도망치는 소리가 들었다.
도망치는 소리와 함께 홀을 감싸고 있던 마법이 사라졌다.
‘숨어 있던 마법사인가.’
태훈은 그를 쫒지 않았다.
지금은 이 장소를 벗어나야 할 때였다
‘자기가 만든 사태이니 일을 크게 만들진 않겠지.’
태훈은 즉시 자리를 벗어나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
잠시 후 수도에는 큰 소란이 일어난 듯 위병들이 도처에 깔리기 시작했다.
‘황궁에서의 전투가 알려진 건가.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낸 황제이기에 다음 행보가 궁금했다.
일단 자신의 가족과 영지가 걱정이 되었기에 태훈은 엘프들에게 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돌아가는 길에 내 영지에 들러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 해라. 너희 지도자에게도 상황을 전달해.”
“무슨 일입니까?”
“높은 확률로 얀과 전쟁을 할 수도 있어.”
“……그런가요.”
돈 벌러 왔다가 낭패를 당한 격인 엘프들은 그저 허탈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태훈은 아카데미로 향했다.
얀과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생각하면 파케 영애를 데리고 탈출할 생각이었다.
파케를 만난 태훈은 그녀에게 짐을 싸라고 일렀다.
“무슨 일이죠?”
“상황이 좀 복잡해. 엘프 보석을 노리는 게 황제였어.”
“……네? 잠깐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럼 지금 황제랑 싸우셨다는 말인가요?”
“그 부하랑 싸웠지. 아무튼 일이 틀어질 것 같으면 탈출해야 하니 짐은 싸…….”
“아니, 잠시만요. 지금 소식 못 들으셨어요?”
“무슨 소식?”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요.”
“엉?”
태훈은 깜짝 놀라 파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파케가 이런 일로 농담을 할 턱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멘붕이 왔다.
‘조금 전까지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황제가 죽어? 설마?’
태훈은 마데우스가 떠올랐다.
황제는 마데우스와는 같은 편이 아니었지만 이용하려는 관계였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죽인건가? 얀 황제를 죽여서 얻는 게 뭐지?’
태훈이 혼란스러워할 때 파케 영애가 있는 방에 병사가 들이닥쳤다.
둘은 긴장했고 태훈은 파케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혹여 자신을 황제 암살범으로 뒤집어씌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황상 황제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수석 연구원인 파케님을 황궁에서 찾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붕어하시었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황제 폐하의 유언장을 공개하는 데에는 제국 수도에 체류 중인 모든 귀족과 관리들이 참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나도 가야 하는 것인가?”
“공왕님께서는 참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아니, 나도 같이 가지.”
“그럼 따라오시죠.”
태훈은 자초지종을 알기 위해 따라나섰다.
싸움을 벌였던 메인 홀은 봉쇄되어 있었다.
그들이 이동한 곳은 역대 황제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무덤 같은 곳이었다.
거대한 건물 안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었고 거리에는 병사들이 흰 깃발을 걸고 다니며 바삐 움직였다.
‘소란은 이것 때문에 있었는가.’
태훈은 파케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안에는 상당히 많은 귀족들과 관리들이 준비하고 있었다.
태훈은 옆에 있는 귀족에게 다가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아무래도 선대의 저주인 것 같습니다.”
“선대의 저주?”
“음, 공왕은 모르겠군요. 얀 제국의 황실에는 저주가 있습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자는 어느 날 별안간 사망하죠.”
“그런 저주가 어딨습니까? 여기엔 신관도 많지 않습니까?”
“듣기로는 총국의 본관에서도 알지 못하는 저주라 포기했다고 합니다. 역대 황제들께서도 정정하시다 한순간에 돌아가셨습니다.”
뭔가 자기 편한 대로 진행되는 죽음 같아 보여 태훈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황제는 이걸 염려해서 영생에 미련을 보인 건가?’
하지만 뭔가가 어색했다.
황제의 죽음도 이상했고 자신이 처리한 기사대장에 대한 것은 일말의 언급도 없었으니 그러했다.
잠시 후 귀족 하나가 들어와 강단에 서자 다른 귀족들이 조용해졌다.
마치 이런 일이 익숙하기라도 한 듯 누구 하나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선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이에 미리 작성해 두셨던 유언장을 읽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상자를 가져오자 그 안에서 상소문 같은 사이즈의 두루마리가 나왔다.
유언장의 내용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황가에 전해져 오는 저주 때문에 미리 유언장을 써놓은 것이며 자신의 말에 따라줄 것을 당부하는 글귀였다.
사람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것은 다음 황위를 누가 가져가는 것인가였다.
수많은 황제의 직계 자손들 중에서 1황자의 표정은 침울했지만 눈빛만은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다음 황제의 자리에는 10황자인 헤이링 황자에게 물려주겠다.”
그 말에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하지만 그 발언에 수긍하는 무리도 적지 않았다.
“뭐……. 뭐라. 10황자?”
“미안하게 됐습니다. 형님.”
헤이링 황자는 1황자를 스쳐 지나가며 그렇게 말하고 단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순간 태훈은 보았다.
헤이링 황자의 오만한 표정과 달라진 오라를.
‘뭐지? 얼마 전까지 보았던 헤이링 황자하고는 오라가 다른데.’
알 수 없는 꺼림칙함에 태훈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왜 그러세요?”
“좋지 않은 기분이 들어.”
“죽은 황제하고 싸웠다면서요. 그럼 좋은 거 아니에요?”
“그럼 단순한 문제가 아닐 것 같아서 그렇지. 일단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게 준비는 해둬. 알겠지?”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