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홀든의 말을 듣고 있던 태훈은 고개를 떨구며 눈을 감았다.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건가?”
“그에게서 모든 걸 들었네. 그에게 협력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
“그게 아무것도 모르는 수백, 수천만의 목숨을 담보로 한다는 걸 모르는 건가.”
“정확해 말해서는 해방이지. 이곳의 사람들은 거짓된 시스템에서 해방되고 나는 내가 원하는 결말을 얻을 수 있을 걸세.”
태훈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천국과 관련되어 있었다.
또 다른 자신.
봉인되어 있는 자칭 마데우스의 친구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해준 것은 결론적으로 천국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저승에 있는 문 너머에 있다는 천국은 아직 설계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장소가 아니라 존재였다.
포인트를 모음으로써 지성으로서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
그런 존재들이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지기 위한 재료로 쓰이고 있던 것이다.
태훈이 있던 지구나 지금 이 세상 같은 하위 차원은 재료를 수급하기 위한 일종의 실험 장소.
그것을 태훈이나 홀든은 알고 있었다.
“그건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데. 마데우스란 놈이 1급신이 하려는 짓과 다를 게 뭐야.”
“결론만 보자면 그저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 정도로만 보이겠지. 하지만 우리를 실험용 가축마냥 다루는 놈들보단 낫지 않는가.”
“당신……. 어쩌다 이렇게 변한 거지? 내가 알던 충무공은 이런 인물이 아닌데.”
태훈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1급신이라는 놈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방 먹여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마데우스란 자가 선택한 도둑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에 대가를 바라고 협력하는 위대한 영웅을 보니 착잡했다.
“과거로 돌아가면 우리 민족의 미래를 바꿀 수 있네. 자네가 사는 시대는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굴욕과 슬픔으로 얼룩진…….”
“마데우스의 계획에 내가 어떻게 이용될지는 알고 있는 건가?”
“자네 안에 봉인되어 있는 힘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네.”
태훈은 홀든에게 알포네에 대해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고난 홀든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럼 그 알포네라는 자가 가진 힘이 필요한가 보군.”
“내가 소멸할 수도 있어.”
“내가 부탁해 보겠네. 시간을 역행하는 것도 가능한데 자네의 존재 정도 유지는 가능하겠지.”
“당신이 과거로 돌아가면 미래도 바뀌니 내가 없을 텐데.”
“그럼 거절인가?”
“그렇다.”
“애석하군.”
태훈은 검을 고쳐쥐었다.
그에 맞춰 홀든도 무기를 빼어 들었다.
이전에 봤던 신기가 아니었다.
“신기도 없이 나와 싸우겠다는 건가?”
“신기는 압수해 갔네. 그리고 신기가 있든 없든 여기서 결판을 내야 하니 내 모든 걸 쏟아붓겠네.”
화악-
홀든의 오라가 오리진과 함께 급격하게 울렁였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상이하게 달라진 오리진.
‘하지만 나에 비해 턱없이 약해.’
먼저 움직인 것은 홀든이었다.
순식간에 태훈의 뒤로 돌아온 홀든이 검을 찔러 넣었다.
검은 허공을 찔렀고 태훈은 홀든의 뒤에 나타났다.
“날 데려가는 게 목적 아니었나. 거리낌 없이 검을 휘두르는군.”
“맞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네.”
홀든이 킥을 날리자 태훈은 거리를 벌렸다.
그대로 다시 도약해 들어가 홀든에게 검을 휘둘렀다.
캉-
검기가 둘러진 검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주르륵-
힘에서 밀린 홀든이 미끄러지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쾅-
그가 있던 자리에 태훈의 뒤꿈치가 작렬하며 흙이 튀었다.
“무슨 일입니까!?”
얀 제국의 가사 둘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난데없이 벌어지고 있는 싸움에 그들은 얼이 빠진 듯 보였다.
하지만 이내 검을 뽑아 들었다.
“여긴 저희에게!”
태훈이 말릴 틈도 없이 그들은 홀든에게 도약해 들어갔다.
둘은 호흡을 맞춰가며 접근했다.
‘음?’
태훈의 검술은 힘을 이용한 검술이었다.
무기 역시 그에 맞게 롱소드
롱소드 자체가 보통 2kg에 육박해 무거운 편이었고 일반 보병 같은 경우 검으로 베기보다는 짓이기는 편이 대부분이었다.
상대가 두터운 갑옷을 입은 경우가 많으니 베기가 힘들어서 그랬으니 보편화된 검술은 동작이 컸던 것.
그러나 얀 제국의 기사들은 부드럽게 움직이며 베는 형식의 검술을 구사했다.
물론 검기를 사용하는 일정 수준 이상의 기사들도 베는 동작을 쓰긴 했지만 그들의 검술은 하나하나가 유연했다.
둘이서 앞뒤로 포위하여 검을 휘두르자 홀든은 잠시 당황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내 접근해 온 기사 한 명의 멱살을 낚아채고는 땅에 처박아 버렸다.
“커윽!”
“이놈!”
동료가 피를 토하며 바닥에 나뒹굴자 검을 찔러 넣은 얀 제국의 기사는 복부에 홀든의 킥을 맞으며 날아갔다.
텅-
털썩-
나뒹굴며 정신을 잃는 얀 제국의 기사를 보며 태훈이 말했다.
“죽이지 않는 것인가.”
“더 이상 불필요한 희생은 원하지 않네.”
“이 세상의 종말을 바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군.”
둘은 다시 경합을 벌였다.
우위는 태훈이었다.
완력에서도 밀리고 오리진의 운용 면에서도 월등히 앞섰다.
홀든의 몸에 생채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싱겁군. 뭔가 감추어둔 것이라도 있나?’
행여 헤라가 어디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했지만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싸움이 길어지면 귀찮아진다. 여기서 끝내야…….’
태훈의 발이 홀든의 가슴팍에 꽂히자 각혈과 함께 먼지가 일었다.
땅에 스크래치가 나며 한참을 날아가 쓰러진 그를 향해 태훈이 다가갔다.
“안됐지만 당신은 여기까지요.”
“……그런가.”
“지금이라도 다시 이쪽으로 돌아올 생각은 없습니까?”
“한번 배신한 몸이네. 그만 끝내게.”
“당신은 할 일을 다 했습니다. 미래는 미래의 아이들에게 맡기…….”
우웅-
급격한 마나의 응축에 태훈은 아차 싶었다.
홀든은 푸른 마나를 다루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왼손 끝에 푸른 마나의 응축이 느껴진 것.
끝을 봤다고 생각하며 방심하던 찰나였기에 그는 당혹스러웠다.
응축된 마나는 이내 활 모양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마법을…….’
마법을 쓰지 못하던 홀든.
그것도 결계가 펼쳐져 있는 수도 안에서 마법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 * *
헨델과 그리브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거대한 거미 형상의 물체는 조금씩이지만 자신들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저게 뭐죠?”
“사람들이 봤다는 그게 아닐까 싶은데.”
“그럼 저게 사람들을…….”
헨델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저 자신들을 보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다는 말이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를 본 것 같은데요. 도망을…….”
하지만 이미 그리브는 그 자리에 없었다.
“뭐 하나, 어서 뛰어!”
“히익!”
둘은 어두컴컴한 숲을 뛰기 시작했다.
둘이 뛰자 거미 형상을 한 허공의 물체도 속도를 올렸다.
“나무로 가려져 있는데 어떻게 우릴 보는 거죠?”
“낸들 아나? 확실한 건 따라잡히면 죽은 목숨이라는 거지.”
턱-
그 순간 헨델의 발이 나무뿌리에 걸리면서 넘어졌다.
툭-
푸른 액체가 담긴 통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굴렀다.
“앗, 통이!”
“멍청이! 그냥 놔두고 이리 와!”
헨델은 이미 멀리 굴러가 버린 통과 그리브를 번갈아 보며 내적 갈등을 겪었다.
그러다 통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이미 거대한 물체가 근처에 다다랐다.
슥슥-
그리브가 몸을 숨기라는 손짓을 해 보이자 헨델은 근처 나무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브도 몸을 숙이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거미 형상의 몬스터는 이동을 멈추고 촉수 같은 것을 끄집어냈다.
그러곤 굴러간 통을 휘감아 회수하고는 왔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뭐야, 우리를 노린 게 아니었나?’
몬스터가 돌아가는 것을 본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번엔 몬스터 대신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몬스터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오그리아 병사들이 따라온 것.
둘은 다시 일어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주저앉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죄송합니다, 통을 떨어뜨려서…….”
“오히려 잘됐네. 보아하니 그 녀석은 그 통을 쫓아온 것 같은데 계속 갖고 있었으면 발각되었을 걸세.”
“하지만 그게 없으면 텔레포트를…….”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그나저나 그건 뭐였을까요? 몬스터인 것 같은데.”
“아마 마수일 걸세. 그런 몬스터는 들어본 적 없고 적과 아군을 구분할 정도면 몬스터가 아닌 마수지.”
“마수라니. 그런 건 책 속에서나 볼 수 있던 것 아닙니까? 대체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끼리 조금 더 알아보는 게 어떤가.”
그리브는 마법진에 대해 연구를 하면서 기회를 보아 다시 한번 통을 탈취하자고 말했다.
도망칠 준비는 끝내놓고 마법진을 연구한 뒤 마나통을 탈취하고 바로 텔레포트를 쓰자는 것.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그냥 어디 조용한 곳에 처박혀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잘 생각해 보게. 이놈들은 세계 종말을 각오하던 놈들이야. 그런 놈들이 사방을 막아놓고 뭔가를 꾸미고 있어. 단순히 마법 연구를 하려고 저만한 준비를 하는 게 아닐 걸세.”
“그건 그렇지만.”
“우린 마법사 아닌가. 마법 회로를 해독할 수 있는 지식이 있으니 최대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가야지. 그리고 직급상 내가 자네 상관이니 내 말을 따르게.”
“알겠습니다.”
둘은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언덕으로 향한 뒤 엎드려서 마법 회로를 외웠다.
그리고 다시 숲으로 와 자신들이 본 것을 바닥에 그려 넣었다.
돌무더기의 마법 회로.
그리고 공터에 새겨진 거대한 마법 회로.
두 사람이 나누어져 회로를 외워 와 그리니 금세 모습이 완성되어 갔다.
“이 부분은 외우지 못했습니다. 근처에 병사들이 있어서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나도 이 부분은 보지 못했어. 시야가 닿지 않더군. 일단 이걸로 유추만 해봐야지.”
마법 회로는 복잡하고 난해했다.
하루 종일 씨름했지만 마법 회로의 해독은 1할 정도.
그나마 사서로 일했던 경험 때문에 그만큼 해석할 수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문양이 너무 많습니다. 해독이 될 것 같지 않아요.”
“그래도 해보게. 어차피 우린 갈 데가 없어.”
“이러면 그냥 동굴 속에 있는 게 나았겠는데.”
헨델은 구시렁거리면서도 열심히 해독했다.
달빛을 불빛 삼아 해독하며 꼬박 날을 샜을 때 그들은 몇 개의 회로를 해석할 수 있었다.
그들이 파악한 건 최소 10개 이상의 마법 회로가 겹쳐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회로들은 전부 처음 보는 것들이라 제대로 해석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던 게 있었다.
“이건 텔레포트 아닌가요?”
“음, 좀 다르긴 하지만 술식은 텔레포트가 맞는 것 같네. 그런데 이건 역술식 같지 않은가?”
텔레포트란 시전자를 원하는 곳으로 이동시키는 마법.
그렇지만 회로는 그 반대로 무언가를 불러오는 마법이었다.
“뭐죠? 혹시 그 마수 같은 것을 대량으로 불러오는 소환술인 걸까요?”
“지옥의 군대라도 불러오는 건가. 그 정도 마나 양이면 산도 옮길 수……. 헉!”
“왜 그러십니까?”
“아니, 잠깐. 설마……?”
그리브의 안색이 흑빛으로 바뀌었다.
그러곤 확인하지 못했던 비어 있는 마법 회로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자네, 혹시 천문학 배웠는가?”
“천문학이요? 그건 왜…….”
“배웠는지만 말하게.”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마나의 농도에 대해서 배울 때 배우지 않습니까?”
“나 때는 그런 과정이 없었어. 혹시 이 빈자리에 다른 글자들과 같은 크기의 글자로 새겨 넣을 수 있는 별의 좌표가 있는가?”
“음, 글쎄요. 이 정도 크기라면…….”
헨델은 빈자리에 뭔가를 몇 번씩 그려가며 지우고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내 완성된 회로를 보여주자 그리브가 물었다.